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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 목사
작성자 임광선 작성일 18-07-09 21:04 조회 184

한경직 목사

 

한경직 목사는 1902년 음력 1229일 평남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한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간리는 주민이 힘을 모아 교회를 세울 정도로 기독교적인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서당 대신 반작교회에서 운영하던 진광소학교를 다녔습니다. 오산학교로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곧아 조만식 선생님을 만나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숭실전문학교 시절 구미포 해변을 혼자 걷던 청년 한경직은 하나님이 강한 부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뜻대로 사는 백성이 돼야 복을 받는다.’ 하나님을 섬기라는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한경직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 엠포리아 대학과 프린스턴신학대학에서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받았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을 졸업한 한경직은 신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예일대 신힉박사과정에 진학하려 했지만 뜻밖에도 신체검사에서 폐결핵3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깊은 좌절 가운데 한경직은 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었고 2년 뒤 병이 완쾌한 다음에는 주위의 권고를 물리치고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신의주 제2교회 전도사로 부임하면서 그의 목회 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 300명이던 신도는 3000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추방당한 한경직 목사는 보린원이라는 보육원을 설립, 직접 밭을 일구며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서울로 내려온 한경직 목사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피난한 월남민들을 자연스럽게 돌보게 되었습니다. 구호양식을 얻어오고 거처를 마련하고 주일이면 같이 찬송하고 기도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영락교회의 전신인 베다니교회가 탄생되었고 이듬해 영락(永樂)으로 이름을 바꾼 교회는 월남민들의 안식처요 새로운 삶의 출발처가 되었습니다. 생명을 걸고 38선을 넘어온 이들은 영락교회에서 비로서 음식과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급기야 남북 간에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한경직 목사는 한경직 목사는 피란민과 군인들을 돌보는 일에 힘썼습니다. 곳곳에서 복음을 전한 한경직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 부산, 대구, 제주도 등 전국에 영락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복음전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과 함께 전쟁미망인과 고아들을 돌보는 선명회(, 월드비젼)을 조직하여 보육원, 모지원, 양로원을 세웠습니다. 또 중고등학교를 세워 dl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목회는 곧 한국 교회 목회의 모델이 되었고 그의 활동은 한국 교회의 활동 반경을 넓혀 주었습니다.

 

1973년 은퇴 뒤에도 한국 교회를 대표해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한국 교회의 일치를 위해 힘썼습니다. ‘엑스플로 74대회’,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 ‘한국 교회 10주년 기념대회수 많은 연합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즐겨 쓰는 말 중에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라는 말은 값진 보물과 같은 말입니다. 평범한 말이지만 이 말은 한경직 목사가 겪어온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원만한 결과를 가져다 준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초기에 한경직 목사가 미국에 간 일이 있습니다. 이때 미국에서는 반한단체에 대한 물의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사는 교포들 가운데는 한국에서 오는 저명인사들을 과히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 시위가 교회에서 설교 중에 일어났습니다. 이 일을 벌인 사람들 중에는 옛 친구인 어느 장로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이 소식을 들은 몇몇 목사들이 한경직 목사를 방문하여 위로의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경직 목사의 말은 너무도 뜻밖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를 위로하려 찾아간 목사들은 도리어 위로를 받고 돌아왔다 합니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라는 말은 상대방의 어떤 말도 수용하는 말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이 명언으로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들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90세가 되던 1992년 종교 분야의 노벨상이라는 템블턴상을 받았습니다. 1992618일 수상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한경직 목사는 뜻밖의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역사 앞에 죄인입니다. 일제시대 동료 가운데는 신사참배를 거절하다 죽어간 사람이 있는데 나는 신사참배를 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저의 허물과 과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란 사람을 지도자로 칭찬하고 상을 줄 때마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상을 많이 받으면 하늘의 상이 없을 텐데 걱정입니다. 마지못해 받지만 한경직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에 인정하는 의미의 상이라 받겠습니다.

 

그의 고백은 오히려 진정한 반성을 외면하고 분열과 대립을 일삼던 한국 교회와 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를 은퇴하고 사택을 나왔을 때는 거처할 곳이 없을 정도로 그의 재산은 전무했습니다. 그는 제대로 된 목자라면 가난해야 한다는, 그래야 사욕 없이 복음에 전념할 수 있다는 평소의 지론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이와 같은 삶으로 인해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은 아내 김찬빈 사모였습니다. 평생 남편의 월급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빈 봉투뿐이었습니다. 아내 대신 월급을 받은 사람들은 보린원, 경로원, 보육원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교인들이 새로 해준 양복을 자신을 찾아온 교회 목사들에게 서슴없이 벗어 주고는 와이셔츠 바람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은 길거리의 거지에게 입었던 옷을 벗어주고 올 때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한 실업인이 찾아와 선교를 위해 쓰라고 돈 봉투를 놓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어렵게 전도하고 있는 목회자가 찾아와서 사정 이야기를 하자 한경직 목사는 받았던 봉투를 그대로 전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봉투 안에는 개척교회 목사로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거액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는 수많은 해외여행 선물로 받은 것 중에서 기본적인 약품 몇 개 외에는 어떤 외제품도 반입하지 않아 세관에서도 그의 수화물 조사를 항상 면제할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집회에서 강사로 수고하고도 사례금을 일체 받지 않았고, 막대한 돈으로 구제와 선교를 위해 지출하는 대형 교회 담임목사였지만 청빈함으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청빈은 없는 가운데서 가난하게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가운데도 있음을 포기하고 자족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참된 목사는 가난해야 한다. 이것은 생활을 제대로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목사는 돈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 안 되며, 검소한 생활은 목회자에게 가장 안전한 일이며, 참되게 사는 것과 돈과는 언제나 상대적이기에 조심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자신을 대접하려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어느 음식점이냐?’라고 물었으며 냉면이나 된장찌개 같은 조촐한 음식이 아닌 경우에는 절대로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청빈한 한경직 목사의 삶은 기독 실업인들 사이에 소리 없이 번지는 유상 안 남기기 운동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새 천 년의 첫 고난 주간이었던 2000419일 오후 1시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가 남긴 유품은 휠체어와 지팡이 서너 벌의 양복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 유산은 지금도 한국 교회의 큰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경직 목사가 크게 존경받는 이유는 영락교회라는 대형교회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존경받는 이유는 대형교회 목회자로서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방 한 칸에서 양복 한 벌로 지내는 목회자였기 때문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자기 이름으로 당 한 평, 집 한 채 사 본 적이 없고, 평생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 없는 무욕과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숭실대학교 한경직 목사 기념관에 물려 줄 유산은 없다, 믿음을 지켜라, 나라를 사랑하라.’라는 그의 유언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은퇴 후 어느 목회자 세미나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를 마친 후 질문 시간에 다양한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당대에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에게 후배 목회자들의 빌문은 끝이 없었습니다. 어느 목회자가 한경직 목사에게 성공한 비결을 물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한참 동안 말이 없이 아래만 내려보고 있더니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목회에 성공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성공한 목회자인지 저 시골에서 평생을 몇십 명 안 되는 성도를 돌보느라 애쓴 목회자가 성공한 목회자인지 하나님 앞에 가 보아야 알겠습니다.“

 

장내가 숙연해졌습니다. 그의 말은 가식이 아니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진심으로 자신을 성공한 목회자라고 자처하지 않았습니다. 이날 한경직 목사는 목회의 성공을 인간적인 잣대로 가늠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공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섣부른 판단을 경고하면서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 전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마음으 뜻을 나타내리시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린도전서 4: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칭찬받을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성공자입니다.

 

한경직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17년이 되었지만 그를 그리워 하는 사람은 늘어만 갑니다. 목회자들의 자질과 도덕성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그의 청빈하고 겸손했던 모습이 더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임광선 18/07/09
답변
목사가 목사답고
장로가 장로다운
상동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임광선 18/07/09
답변
자신의 야욕과 이권과 명예를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이비 성도들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임광선 18/07/09
답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세상.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임광선 18/07/09
답변
떠나야할 자들이 떠나야 됩니다.

대립과 갈등을 불러오고

이전투구의 싸움판을 만들고.......

이를 끝내려면

떠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