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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박종건 선교사님 선교사역에 관한 뉴스조이 기사입니다.
작성자 김민수 작성일 10-02-05 00:00 조회 3,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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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타밀 고아들의 아버지
제 2의 전덕기, 박종건 선교사







입력 : 2009년 02월 25일 (수) 14:27:07 [조회수 : 1737] 양국주















   
 
 

▲ 타밀 지역에는 부모가 반군으로 활약하다 사망해 갈 곳 없는 전쟁고아들이 많다.

 
 
정운범 선교사가 ""저녁에 좋은 분을 만날 겁니다""라며 종일 뜸을 들였다. 만나보니 뜸들일 만도 했다. 박종건 선교사였다. ""흔치않은 감리교 출신 선교사 중 하필 상동교회 출신이람? 아버지의 예정된 섭리가 아닐까?""


박종건 선교사는 상동교회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송두리째 뒤집었다. 인식의 대반전을 가져다 준 분이다. 아마 박 선교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상동교회에 대한 불편한 정죄감이나 시비하는 마음이 깊었을지도 모른다. 편견에 사로잡혔던 내게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역사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동시에 갖는 양면성이 있는 탓일까? 조선 교회 역사에 가장 존경스러운 전덕기 목사님 삶을 생각하면 어른이 돌아가신 후 상동교회 모습을 고려해야만 하는데 해방 전 상동교회는 다소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상동교회는 초기 숭례문 안쪽 빈촌에 자리해 서민들 아픔을 달랬다. 선교사 스크랜턴 집안의 하인으로 그들의 인격적 대접에 감복했던 전덕기가 훗날 목사가 되어 섬겼던 교회가 상동교회다. 가난한 자, 소외받는 자, 병든 자들이 교인 대다수고 그들을 긍휼과 치료, 죽은 후 장례까지 책임졌던 상동교회는 어쩌면 이 땅에 존재했던 민중 교회의 효시인 셈이다.


상동교회가 민중 교회가 되기까지는 무엇보다 상민이었던 전덕기 목사님의 활약이 있다. 안창호와 더불어 신민회를 조직하면서 민족대계를 위한 전덕기의 꿈에 매료되었던 우국청년 지사들이 상동교회로 몰려들었다. 서재필과 주시경 등이 지도를 청해왔고 헤이그 밀사로 떠나던 이준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기 전 전덕기 목사를 찾아 함께 기도를 나누었다.


그가 서른 아홉, 이른 나이에 죽자 남대문 시장이 문을 닫고 행려병자와 거지들이 그의 상여를 멨다. 어버이를 잃은 고단한 백성들의 눈물까지 거둔 그는 정녕 백성의 아비 노릇하다 하늘로 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대동아전쟁을 앞두고 윤치호와 신흥우를 중심한 친일 세력들이 상동교회에 황도문화관을 세웠다. 지하에 누운 전덕기가 벌떡 일어날 사건이었다. 황도문화관은 조선인들을 일본 정신으로 무장하고 황국신민으로 훈련해 내선 일체를 기하려던 제국주의 수련장이다. 예배당 안에 ""신면봉안전""을 세우고, 성도의 가정마다 ""가미다나""를 설치하여 개신교의 모든 교직자들로 황도문화관에서 ""미소기 하라이""(일본 신도의 세례)를 받도록 했다. 신사참배뿐 아니라 조선인 영혼을 팔아먹는 이단과 배교에 상동교회가 앞장섰던 셈이다. 상동교회가 민족과 교회 앞에 풀어야 할 어두운 빚이다.
















   
 
 

▲ 이 땅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스리랑카로 간 박종건 선교사.

 
 
상동교회 문제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 골롬보에서 박종건 선교사를 만났다. 영국이 스리랑카를 식민지로 다스리면서 왕실에 필요한 차를 공급하기 위해 일조량이 좋은 스리랑카 산악지역에 차밭을 조성하였다. 남부 인도 타밀족을 이주시켜 농부로 길렀으나 스리랑카가 독립한 이후 스리랑카 정부는 이 땅에 정착한 타밀족을 차별했다. 생존권에 대한 혈투를 벌리면서 인종적 분규로 확대됐다. 쓰나미 사태로 잠시 휴전하는 듯했지만 양측의 적대적 공세는 그칠 줄 몰랐다.


첸갈라디 길목에서 4마을 떨어진 동쪽 해안을 따라 가면 그림처럼 펼쳐진 항구마을 바티칼로아가 있다. 인구 50만 명의 소도시지만 타밀인들에게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한 고향이다. 최근 스리랑카 정부군이 제일 먼저 들이닥쳐 깡그리 짓밟은 곳이 타밀 반군 전몰 용사들의 무덤이다. 정부군은 다섯 곳으로 나뉜 반군전사들 묘지를 불도저를 동원해 파헤쳤고 망자의 한은 이렇듯 허무하게 짓밟혔다.


묘지마저 형체를 알 길 없는 터라 자식을 두 번 잃은 듯한 어머니들의 참담한 고통을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 스리랑카의 비극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다.


햇살 가득한 축복의 나라, 풍족한 자연과 친절한 스리랑카 사람.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혜의 자원이 펼쳐진 스리랑카를 시기해서일까? 스리랑카에는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있다. 이러한 바티칼로아에 박 선교사의 집이 있다. 모교회인 상동교회가 원래 한양 장안의 상놈들이 모여 살던 천민지역이었던데 반해 박 선교사가 사는 동네는 스리랑카 사람들마저 기피하는 타밀지역이다. 하물며 아무런 이득도 없는 반군 지역에 누가 들어 갈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굳이 왜 이런 지역을 자청했나요?""
""이 땅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찾다보니 이곳까지 흘러 들어온 셈이지요.""
""아니 전장 터 한 가운데에서 사역하면 두렵지 않으세요?""
""아닙니다. 오히려 콜롬보가 더 위험할 걸요? 실제 태풍의 눈이 더 고요한 것 아닌가요?""


지난 15년, 어쩌다 첫발을 내딘 이후 아무런 생각 없이 살다보니 이리도 모진 세월을 살았나 싶었단다. 사실 현재의 상동교회는 선교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인다. 과거 이 민족의 소망이었던 교회의 이런 변신도 차라리 기적일 것이다.


상동교회에서 매달 송금되는 100만 원 내외의 선교비가 서른 세 명의 고아를 기르고 있는 박 선교사의 유일한 젖줄이다. 그리고 서른 남짓 스리랑카 선교사들이 박봉의 선교비를 쪼개어 박 선교사를 돕고 있다. 동료들의 기도와 나눔이 큰 격려가 되었다. ""세상에 선교사들의 박봉을 뜯어먹고 사는 사역자도 있구나"" 싶었다.


찬드리카 대통령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현금 지원을 챙기고 총리는 지원물자를 챙겨 자신의 지지 기반에 풀었다. 그 많던 지원물자가 반군 지역인 바티칼로아로 들어올 턱이 없었다. 그 틈새를 비집고 용감한 한국 교회가 이 마을을 찾았다.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한국에 우호적이고, 박 선교사 사역에 원군이다.


수많은 외국 원조단체와 개발 NGO가 아직도 스리랑카 재난 지역에서 일하고 있다. 밀물처럼 밀려왔던 한국 교회는 썰물처럼 두어 달 만에 철수했다. 지속적인 활동 자금 부족도 문제지만 개발 사역에 대한 진지한 철학이 빈곤하다.
















   
 
 

▲ 수업 중인 타밀 지역 학생들.

 
 
이 지역에는 부모들이 타밀 반군으로 활약하다 사망하고 갈 곳 없는 전쟁고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을 덮쳤던 해일로 마을이 유실되면서 졸지에 갈 곳 없는 고아들이 늘어났다. 박 선교사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쓰나미를 통해서다. 수십만 명이 죽음으로 내몰렸던 당시 상황으로는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이름도 빛도 없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을 경험하면서 시작했던 박 선교사에게 오히려 시험이 닥쳐왔다. 오지마을에서 쥐죽은 듯 일하던 박 선교사의 사역이 알려지자 도움을 자청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지만 약속은 부도수표나 다름없었다. 인간적인 배신이 해일처럼 다가왔다. 바티칼로아 지역을 다녀가면서 약속했던 이들의 지원이 제대로 이행되었더라면 지금쯤 여러 곳에 학교와 교회를 짓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주님만을 의지하는 고된 훈련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바닥에서 시작하였지만 해일로 단비를 경험한 이후 다시 무일푼으로 돌아가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 시련인가를 철저히 깨달았다.


이곳 사람들은 박 선교사를 ""화더 바가야""라고 부른다. 고아 사역은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작했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지금은 자연스레 고등학생들까지 확대됐다.


타밀 사람들은 딸이 초경을 시작하면 맑은 물에 꽃잎을 띄우고 머리에 꽃물을 뿌리는 퓨버티(Puberty)라는 의식을 행한다. 전통 의상인 반짝이 옷을 입고 초경을 축복하다가도 어느새 단정한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천진한 아이들을 보면서 위로자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요즈음은 물가도 많이 오르고 경제 형편이 어렵다보니 딸 가진 부모 심정이라며 한 때는 먹일 것이 없어 쌀겨를 빻아서 먹일 때도 있었다고 한다.


남미 ""밀림속의 사역자""에게 도전받고, 20년 동안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일하던 직장을 걷어차고 오지마을을 찾아온 지 어언 15년이 되었다. 말라리아로 시작된 풍토병에 시달리고 고열과 바이러스 감염으로 치큰구니아를 앓고 나니 때로는 홀로 사는 인생이 외롭고 고독하다는 현실을 깨닫는다.


""과연 선교사로서의 내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할까?""
""차라리 결혼을 할까? 이런 곳으로 시집 올 여장부가 있을까?""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이기에 물음표 없이 달려온 바티칼로아 15년.


이제는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삶이 철저히 파괴된 오지에서 지척거리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진지한 반추가 박 선교사를 더욱 강인한 사역자로 만들어 가는지도 모른다.


희망이 없는 민족, 아비 잃은 고아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삶을 바치는 화더 바가야 뽀더러야


장장 열 시간 기차를 타기 위해 밀림을 나서는 박선교사 배낭에 친구들과 함께 나눌 공작과 까마귀, 말린 이구아나 고기 냄새가 가득하다. 콜롬보 한인 선교사들과 만날 설렘으로 가득 찬 바가야 선교사의 홍조 띈 얼굴이 모처럼 밝아보였다.


박종건 선교사 batticaloa@naver.com


양국주 / 열방을섬기는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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