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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한국판 '뿌리(ROOTS)' 멕시코이민사에 나타난 상동청년회 이범수.박장현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9 00:00 조회 5,922
  한국판 '뿌리(ROOTS)' 멕시코이민  1900년을 전후해 우리 민족은 만주와 하와이 등지로 이주 러시를 이룬 시기가 있었다. 때로는 망명처로, 때로는 생활의 곤궁을 면하기 위해 신천지를 찾아 나선 선택이었다. 어떤 경우든 해외이주는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는 기도가 노골화 한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이 시기 미주지역으로 이주는 주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가는 노동이민이었다. 1902년 12월 22일에 121명이 출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수차례에 걸쳐 7천2백여명이 이주하였다. 물론 공식적이고 자발적인 이민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조직적인 계략에 의해 불법으로 팔려간 이른바 '노예이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별반 많을 것 같지는 않다. 바로 1905년 2월 28일에 출발하여 단 한차례로 끝난 멕시코이민이다. 멕시코이민은 일본인 이민회사인 '대륙식민합자회사'의 꾀임과 강제에 의해 모집된 1천33명이 이주한 노동이민이다. 이들은 주로 서울과 인천, 부산 등지에서 거주하는 구한국군인과 전직관리 그리고 소작농·부랑인 등 양반과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계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이민 중 인천출신이 225명이나 되었다. 1904년 당시 《仁川府史》에 따르면 인천 전체인구가 9039명인 점을 감안하면 전 인구의 2.5%가 이민선을 탔을 정도로 많은 수였다. 이들은 제물포항을 출발하여 75일의 긴 장거리 항해 끝에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24개 어저귀 농장으로 각기 팔려갔다. 어저귀 농장은 섭씨 45도가 오르내리는 불같은 무더위에 독사와 전갈 등 해충이 우굴거리는 곳으로 현지 노예들인 원주민도 기피하는 일터였다. 당시 이민들은 농장에서 원주민인 토인보다도 더 심한 대우를 받았다. 매일 할당된 어저귀잎 따는 일을 채우지 못하면 채찍을 맞으며 밤늦게 까지 일하는 건 예사였다. 항의라도 하면 가차없이 토굴에 갇혀 며칠씩 굶주리는 징벌이 가해졌다. 밤이면 토굴과 같은 움집에서 기거하며 겨우 죽이나 끓여서 연명하는 정도였다. 병이라도 들면 치료는 고사하고 배로 실어 바다 한가운데 수장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심지어 농장주 맘에 들지 않으면 물건을 사고 팔듯 돼지가격보다도 싼값에 거래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여자는 농장주의 성노리개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일부 이민들은 농장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시도하거나 자살을 하는 일이 속출했다. 탈출하다가 잡히는 날에는 발목이 잘리는 형벌이 가해 졌다. 다름 아닌 한국판 앨릭스 헤일리의 '뿌리(ROOTS)'인 셈이다. 이런 이민 참상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정부가 이민구제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여론이 들끓었지만 당시 조선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정부는 윤치호 외부협변을 이민실태조사차 멕시코 현지로 파견했지만 멕시코 수도인 멕시코시티에서 돌아오고 말았다. 멕시코 정부와 외교관계가 없었던 탓도 있지만 이미 외교권을 비롯하여 모든 실권을 장악한 일제가 이민구제사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나라는 있으되 백성을 돌볼 능력을 상실한 반신불수 처지가 된 게 당시 조선정부의 현실이었다. 이런 가운데 상동교회내의 비밀구국단체인 상동청년회와 미주지역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가 나서면서 이민구제사업은 활기를 띄었다. 상동청년회는 이범수·박장현과 국민회에서는 황사용과 방화중을 파견하여 이민실태를 조사하게 하고 구출할 방안을 마련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제사업마저 한일합방을 계기로 더 이상 손을 쓸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1910년을 기점으로 멕시코 이민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농장에서 해방된 일부 이민들과 탈출자를 중심으로 군인양성운동이 일어났다. 바로 1910년 11월 17일에 설립한'숭무학교'이다. 이는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와 미국 네브라스카주의 '한인소년병학교'그리고 하와이의 '국민군단사관학교'의 독립군 양성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 각 지역과 연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장차 있게 될 일제와의 독립전쟁에 대비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였다. 멕시코 이민사회가 '노예이민'이라는 어려운 환경을 겪으면서도 짧은 기간에 '숭무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으로 나선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민중에 광무군인 출신이 200명 이상이 포함된 탓도 있지만 '대한인국민회'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도 적지 않다. 국민회는 메리다지방회 설립을 시작으로 이민이 거주하는 지역에 속속 지방회를 설립하여 사회정착을 위한 재교육에 나섰다. 1917년에 '대한인국민회'총회장인 도산 안창호가 1여년동안을 멕시코에 머무르면서 한인사회의 통합을 주도해 갔다. 도산은 이들을 지도하여 각종 악습을 금지하는 운동을 주도하고 한인회관 건축, 국어학교 설립, 경찰소 조직, 실업회사 설립 등의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결국 일제와의 독립전쟁은 무산됐지만 '숭무학교'를 통해 양성된 군인들은 1913년에 일어난 멕시코 혁명과 과테말라 정복의 혁명군 일원으로 참전할 정도로 멕시코 사회의 주류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21년에 멕시코이민은 쿠바로 288명이 집단 이주하게 되는 데, 이들 중 일부는 50년대에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주도한 쿠바 혁명에 참가하여 혁명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멕시코나 쿠바 교포사회의 뿌리는 한말 멕시코 '노예이민'에 비롯된다. 특히 쿠바이민은 처음이자 마지막의 공식적인 이민이 된 셈이다. 이렇듯 이민1세가 이미 한사람도 남아있지 않은 교포사회는 정부의 무관심과 외면으로 뿌리의식마저 상실된 채 현지사회에 급속히 동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쿠바교민은 그 실체마저도 파악하지 못한 채 80여년을 단절한 상태로 버림받은 백성이 되고 말았다. 이제 2005년 2월이면 멕시코이민 100주년이 된다. 이를 계기로 멕시코 이민사의 재조명을 위해 의미있는 사업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올해로 이민 100주년을 맞은 하와이 이민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공식적이고 자발적이였던 하와이이민에 비해 멕시코이민은 일제에 의한 강제이민이었고 일제의 한반도 강점책의 일환으로 진행됐던 점을 감안하면 그 실체를 재조명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작업은 '노예이민'으로 온갖 수모와 역경을 감내하며 조국해방을 위해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던 자랑스런 민족사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천시가 최근 추진중인 이민사박물관 건립은 시의 적절한 사업으로 평가할 만한 일이다. 이민의 출발지이면서 많은 이민을 보낸 지역으로써 이민사에 대한 관심은 지역 정체성을 일깨우는 차원에서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조창용                                                                오마이뉴스   2003-04-14 14: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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