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실

> 상동소식 > 역사자료실
- '시일야방성대곡' 쓴 위암 장지연에 대한 재평가 -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9 00:00 조회 5,566
▲ 위암 장지연 선생.  구한말 국권이 일제에 강탈당하자 당시 민족적 분노를 표현한 명사설 '시일야 방성대곡'의 필자이자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신문에 실어 항일언론인의 사표로 일컬어지는 위암 장지연(1864~1921) 선생. 그러나 위암도 말년에 “동양평화를 위해 일본을 도와야 한다”는 등의 글을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수 차례에 걸쳐 기고하는 등 친일행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던지고 있다. 그간 위암의 친일행적은 학계에서는 이미 알려져 왔으나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경남도민일보>는 3월 1일자에서 "위암이 일제 식민지 아래 동양평화를 외쳤다"며 그의 친일행적을 보도했다. 위암의 친일은 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위암의 글은 1면에 실려 있다. 그는 일본을 ‘동양의 패왕’(1916년 9월 16일자 “만록-지리관계(5)”)이라 했으며, ‘아시아를 재패한 전술로 볼 때 아시아의 독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915년 4월 21일자 “만필소어(17)-신구학(기)”)고 했다. 또 위암은 테라우찌 총독이 해인사 8만 대장경을 세계의 보물이라 칭찬하고 박물관을 공개하도록 했을 때 그에 감격한 내용이 담긴 글(1915년 3월 25일자 “패창만필(4)”)도 썼고, 일본왕의 제삿날에 가계(계통)를 소개하는 글(1915년 4월 3일자 “만필소어(5)-신무천황제”)도 썼다. 강명관, 김도형, 이이화, 박노자 교수 등 이미 여러 차례 언급 언론인, 우국지사로 알려져  위암 장지연 선생은 누구인가  장지연(1864~1921) 선생은 언론인과 우국지사로 알려져 있다. 경북 상주 출생으로, 1894년 진사가 되고, 이듬해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각처에 발송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899년 <시사총보(時事叢報)> 주필, 1901년 <황성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11월 20일자)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을 썼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잡혀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선생은 일제의 압력이 심해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기도 했으며, <해조신문(海潮新聞)> 주필을 지냈으며, 이후 중국 상하이와 난징 등지를 거쳐 귀국했다. 1909년 경남 진주에 머물면서 ‘전국 지방지의 효시’로 알려진 <경남일보> 주필을 맡았는데, 이 때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해 <경남일보>는 폐간되기도 했다. 저서는 <유교연원> <동국유사> <대동시선> <농정전서> <일사유사> <위암문고> <대한최근사> <대동문수> <대동기년> <화원지> 등이 있다. 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현재 그의 묘소는 경남 마산시 현동에 있으며, ‘신문의 날’ 등에 언론인들이 참배를 하기도 한다. 사단법인 ‘위암 장지연 선생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있고, 매년 ‘위암 장지연상’ 등을 시상하기도 한다. / 윤성효 기자   [학계 연구동향] 위암의 친일행적을 밝혀낸 논문과 글은 여러 편 있다. 부산대 강명관 교수(장지연 시세계의 변모와 사상)와 연세대 김도형 교수(장지연의 변법론과 그 변화), 역사학자 이이화씨(<못다한 한국사 이야기>),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 박노자 부교수(<당신들의 대한민국>) 등은 이미 그의 친일행적을 관련저술에서 언급한 바 있다. 김도형 교수는 “위암의 자강논리는 식민지배 현실에서 일본 지도 아래의 문명화와 아시아의 자강자위로 왜곡됐다”며 “한때 같은 입장이었다가 민족사 연구를 통해 무장항쟁론으로 전환한 박은식이나 민중혁명을 지향한 신채호와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평가했다. 박노자 부교수는 “위암의 친일행적은 학계에서는 잘 알려진 일인데 위암을 선양하는 단체에서는 일부러 무시해 왔다”고 언급하고 “지역민들이 위암에 대해 느끼는 긍지는 당연하지만 빛과 그림자를 함께 인식해야 사상과 활동의 전모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따끔한(?) 지적까지 덧붙여 놓았다. 강명관 교수는 “(시와 관련해) 술로 세월을 보낸 시절이 합방 직후의 시 속에서 자주와 무기력 좌절감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좌절 속에서 식민지배를 긍정적으로 인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신문 기사 통해 “동양평화 위해 일본 중심으로 아시아주의 실현” 역설 [구체적 친일행적은?] 위암은 “동양 평화를 지키려면 아시아의 맹주인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주의를 실현해 독일 등 백인종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위암은 처음부터 그같은 주장을 편 것은 아니고 말년인 1915년경부터 기사를 통해 이런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친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위암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초청했으나 “기신보사”라는 글을 써서 처음에는 거절했다. 위암은 이 글에서 “아래위를 서로 통하게 하여 정책을 보좌하고 방법을 지시하여 새로운 변화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 귀보의 직임이고 의무”라 충고했다. 그러나 위암은 두 달 뒤부터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조선풍속의 변천”(1915년 1월 1일치)이란 글에서 위암은 조선총독부가 마련한 ‘물산공진회’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혁구쇄신(革舊刷新)하여 쓸모없는 것을 없애고 농공실업을 장려하여 진보한 성적을 모두 수집하여 진열한 것”이라 칭찬했다는 것. 또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1917년 6월 8일치)이란 제목의 글에서 위암은 순종의 일본 방문과 관련해 “내선 인민이 친목으로 사귀어 장애를 풀어 없애고 일체 간격이 없으니” “일선(日鮮)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했다는 것. “구주 전란의 기인(8)”(1915년 7월 3일치)이란 글도 있다. 여기서 위암은 “20세기는 민족연합주의가 진행되고 군국주의와 척토(拓土)주의가 늘어난다”며, “아시아 민족은 일본의 강역 한계를 뛰어넘어 같은 대륙 같은 민족으로 손을 맞잡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또 있다. “만필소어(72)”(1915년 7월 13일치)라는 제목의 글에서 위암은 “동양 대국은 오직 일본과 지나(중국) 두 나라일 뿐이고, 서로 손을 잡고 친선한 다음에 외부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문맥상으로 본다면 조선은 이미 안중에도 없고 일제의 식민지배를 긍정했을 뿐이라는 해석이 된다. 위암의 친일관련 자료와 논문을 분석, 이를 보도한 <경남도민일보> 김훤주 기자는 “위암의 이런 주장은 일제 강압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가 발전적인 것으로 해석되며, 그래서 더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2003/03/01 오후 3:08  ⓒ 2003 OhmyNews  
   


Warning: Unknown: open(../data/session/sess_9769a9b219089491b9102aad3067a272, O_RDWR) failed: No such file or directory (2) in Unknown on line 0

Warning: Unknown: Failed to write session data (files). Please verify that the current setting of session.save_path is correct (../data/session) in Unknown on line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