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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의 인물 이필주 목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9 00:00 조회 5,550
이필주(李弼柱) 구한국 군대출신의 애국자 1. 생애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1인이며 일제시대 대표적 항일 민족운동가의 한사람이었던 이필주 목사는 1869년(고종 7년)11월 9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이윤영은 이조말기 퇴락한 선비의 한사람이었고 가세는 빈궁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필주가 장남으로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하남촌(현 장충동)으로 이주하였으며 그가 여덟살이 되던 해 한문 글방을 다니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5년만에 공부를 중당할 수 밖에 없었고 그 후로 부친이 경영하던 실 공장에 나가 일하기 시작했다. 18세 되던 해 그는 또다른 큰 시련을 겪게 된다. 그해 부친이 갑자기 사망하였고 그 자신도 흑사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어 부친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하였다. 건강을 회복했을 땐 부친이 사망한 후 가족(모친과 네 동생)의 생계라는 무거운 짐이 그에게 지워졌다. 고된 육체노동에다 가족 생계라는 정신적인 압박이 그를 심한 고뇌속에 몰아 놓기 시작했고 노동판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에서 탈출하기 위해 술을 찾기 시작했던 이필주는 행도이 점점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4년간 지내다 결국 싸움 잘하는 그는 군대에 들어갔다. 군대만이 그의 안식처였다. 1890년의 일이다. 2. 군대생활 당시 군대조직은 임오군란(1882년)이후 득세한 구식, 신식,혼합,형태의 친위군이란 것이었는데 그는 4년간 착실히 졸병 노릇을 하여 순조롭게 진급하였다. 그리고 1894년 전라도에서 일어난 동학란 진압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이 전투 후 한국의 군제는 일본식으로 개편되었고 교도중대란 특별군이 형성되어 일본군관의 특수훈련도 받게 되었다. 이필주는 이 교도중대에 차출되어 참교(현재의 분대장 정도)가 되었다. 2차 봉기인 공주 싸움에서 동학군은 완전 괴멸되었고 승리한 관군은 서울로 귀환하였다. 귀환한 후 교도중대는 해산되었고 대신 훈련대가 창설 되었는데 이필주는 이 훈련대에 소속되어 이후 4년간 또 다른 [골육상쟁]의 싸움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단발령(1895년),민비시해사건(1895년)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의병들과의 싸움이었다. 이같은 싸움의 현장을 몸으로 체험한 이필주에겐 [골육상쟁]이란 뼈저린 아픔을 안고 계속 되는 군대 생활에 자신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친러시아 세력이 득세하며 군제에도 변혁을 가져와 훈련대가 폐지되고 시위대가 창설되었는데 이필주는 이 시위대 부교까지 왈랐다. 그러나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 사이에 끼어자존의 길을 찾지 못한 채 외세의 세력 균형 변화에 따라 국체를 변화시킬 수 밖에 없었던 나약한 국가의 군인으로서 외부의 적이 아닌 같은 민족,같은 백성들과 10여년 전쟁을 하면서 점차 그의 마음은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그에게 일생을 변화시키는 중대한 계기가 찾아왔다. 3. 기독교에의 입교 이필주는 1890년 이후 10여년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젊었을 때 배운 술버릇이나 싸움버럿은 버리지 못했다. 그러던 그에게 1902년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김해 김씨인 인숙과 결혼)얻은 자식 남매가 한꺼번에 죽고 만 사건이 있었다. 골육상의 싸움을 통해 자기 직업에 대한 회의를 느껴오던 차에 자식들의 죽음으로 이난 아픔은 그를 겉잡을 수 없는 고뇌에 빠져들게 하였다. 술도 싸움도 그를 깊은 고뇌에서 구해내지 못했고 오히려 더 괴롭게 할 뿐이었다. 점점 그는 자식들의 죽음이 자신이 그동안 지은 죄의 값이란 생각이 들게 되었고 그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그에게 [예수교]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졌다. 그는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해 남대문 안의 상동교회를 찾았다. 거기에는 의사이며 목사인 선교사 스크랜톤(W.B. Scranton)과 청년 전도사 전덕기가 있었다. 그러나 처음 1년간은 아무런 느낌없이 취미삼아 교회에 다녔다. 그의 결정적인 기독교에의 회심은 1년 후에야 이루어졌다. 하루 밤에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내가 죽어서 시체를 입관하여 놓고 내가 시체를 향하여 경계하기를 "네가 죄로 인하여 이같이 죽었느니라"하고 비감한 말을 하다가 깬 일이 있었다. 그후부터는 나는 주색잡기를 온전히 끊어버리고 아직 담배만 끊지 않고 기도를 힘써하고 세례문답 공부와 개인 전도에 힘을 많이 썼다. 죄오 인한 자기 족음을 꿈으로 체허만 그는 비로소 기독교 신앙의 진수에 접근하기 시작하였고 기도와 성경공부와 개인 전도에 전념하였다. 1903년 4월 부활주일에 그는 스크랜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정식 상동교회 입교인이 되었다. 그는 변화된 삶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주색잡기와 싸움 잘하기로 이름났던 이필주가 방탕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를 전도하고 나서자 그의 주변에서는 큰 소란이 벌어졌다.특히 그의 집안에서의 반대는 격렬했다. 그러나 그가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부적이며 신주단지며 우상 섬기던 것들을 끌어내어 한곳에 모아놓고 불을 지르고 두려움에 떠는 식구들에게 예수를 믿지 않으면 죽고야 말리라고 위협 반 권면 반 설득하자 식구들도 마지못해 그와 함께 믿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이어 동네 사람들에게도 정성스럽게 전도하니 몇달 안가 동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다음은 그의 현재 직업인 군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결단을 해야했다. 그는 성경을 보다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하신 말씀을 생각하고 생명으로 알던 군기와 군복을 헌신짝 같이 벗어 던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군대 월급으로 근근히 살아가던 그의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은 아무 대책없이 어느날 불쑥 집으로 들어 온 그를 보고 어이없어 하며 그를 있는 말, 없는 말로 공박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옮은 일을 하면 굶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이 있어서 오히려 기쁨으로 하나님이 마련해 주실 다음 일자리를 가다리게 되었다. 4. 상동교회와 민족운동 군대 직장을 버리고 나온 그에게 처음 몇 달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친구의 추수하는 논에 나가 품앗이 일을 하기 시작한 그는 육신은 말할 수 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나 오히려 마음과 영혼은 어느 때보다 맑고 가벼웠다. 육체적인 노동을 하면서 그는 노동의 순결함을 새삼 체험하게 되었고 예수의 나사렛 목수 시절을 회상하며 더 깊은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몇달이 지난 후 상동교회에서 그에게 새 일자리를 주었는데 그것은 상동교회 예배당 청소였다.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기꺼이 응한 그는 비로소 교회라는 새로운 일터로 그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는 매일 교회를 청소하며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그의 전 생활이었다. 이러는 사이 스크랜톤 목사와 전덕기 전도사는 그와 동지적 관계를 맺기에 이르게 되었고 이필주는 속장,권사가 되어 충성스럽게 일을 감당하였다. 이 무렵 만난 동지 중에는 후에 민족대표 33인중 1인이 되는 최성모도 끼어 있었다. 전덕기,이필주,최성모,이 세사람은 상동의 삼총사란 별명을 들을만큼 긴밀한 신앙적 동지들이 되었고 이 동지적 결합은 민족운동이라는 차원으로 승화되어 새로운 변화를 야기시켰다. 1904년 상동교회안에는 기독교 민족운동의 실체인 공옥학교와 청년학원이 설립되었다. 전덕기 전도사가 세운 청년학원은 국사, 한글교육,신앙교육을 겸한 민족주의 학교였다. 이 학교의 특징 중 하나는 체조 시간이었는데 이 체조시간은 다름아닌 군사훈련 시간이었다. 무실역행이라는기독교 민족주의 운동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난 교육이 체조라는 군사훈련을 통해 구현된 것이다. 이필주가 바로 이 군사훈련의 담당 교사였다. 이필주의 구령에 맞추어 학생들이 군복을 입고 시내를 행진하는 것은 당시 장안의 구경거리중 하나였다. 여기에서 배출된 많은 인물들이 후의 3.1운동과 독립투쟁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이필주는 청년학원 뿐 아니라 공옥학교,인천의 영화학교,황성기독교청년 등에도 초빙되어 체육,혹은 성경교사로 활약하였다. 4. 목회자의 길 성경공부와 매년 2차 실시되는 사경회에서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목회자로서의 수업을 받기 시작한 그는 1907년 미국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정식 전도사로 임명을 받았고 상동교회 지교회로 설립된 이촌동,북창동,연화봉의 세 교회를 맡차 봄으로 정식 목회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1907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들어가 정규 신학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2년 과정을 마쳤다. 1913년 가난한 교인들이 많은 왕십리교회에 파송되어 목회하였고 1915년 마침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 이필주는 손정도 목사의 후임으로 정동교회를 담임하면서 그의 생애 활동의 절정기에 이르게 된다. 이미 상동교회 시절부터 동지적 관계를 맺게된 이상재,최병헌,최성모,오화영.신흥식,박동완,손정도,현순 등과의 친교는 1919년의 3.1운동에로 그대로 연결되어 그는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당당히 참여하게 되었으며 체포되어 3년여 옥고를 치루었다. 감옥에 있으면서 그는 마지막 인생의 변화를 가져오는 또 다른 신앙적 체험을 하면서 이젠 머리만이 아닌 몸으로 온 생애를 바쳐 민족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려는 뜨거운 열정과 사랑에 사로잡혔다. 지휘하고 명령하고 다스리는 삯군이 아니라 섬기교,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참된 목자로의 변신이 이룩어진 것이다. 출옥 후 그는 연화봉,미아리 등교회에서 목회하였고 65세로 은퇴한 후에는 경기도 남양으로 내려가 농민들의 친구로 그들의 목자로 조용한 삶을 사다가 1942년 4월 21일 한창 신사참배와 태평양 전쟁으로 민족의 고통이 극심한 때 숨을 거두었다. 1962.3.1.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복장)을 추서함. (이덕주)                                    -  kcm 자료에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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