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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회들의 반응(김흥수 - 목원대 교수)#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9 00:00 조회 5,927
                      한국현대사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회들의 반응*                                                                김 흥 수(목원대 교수) 1945년 이후의 한국현대사는 국토 및 민족의 분단과 그로 인한 전쟁, 4.19혁명과 5.16군사 쿠데타, 5.18 광주항쟁과 같은 정치적 격변으로 대변된다. 정치적 격변과 함께, 이 시기는 빈곤과 급격한 경제발전의 시기이기도 했으며 가치체계의 혼란이 가중되어 온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 우리 사회를 위기에 빠뜨린 가장 큰 사건은 6.25전쟁이었다. 분단을 더욱 강화·고정시킨 남북간의 전쟁은 3년 1개월간 지속되면서 쌍방에서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내고 한반도 전체를 거의 초토화시켰다. 전쟁 후 오늘날까지의 우리 사회의 골격은 정치와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까지도 전쟁이 가한 타격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기독교회들 역시, 특히 1950년대 이후의 교회들은 분단과 6.25전쟁으로 이같이 손상된 사회 속에서 존재해야 했고 교회의 위기도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교회들은 전쟁을 전후하여 남한 땅에서 1백여만 명의 사망자를 낸 각종 암살 및 양민학살 사건, 자유당 시절의 각종 부패와 부정선거, 1960년대 이후 30여년간 계속된 군사정권의 횡포와 인권 유린, 남북간의 적대와 대치 같은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면서 그것들에 반응했다. 함석헌은 1971년 교회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해방과 6.25라는 중대한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새로 나라를 세우는 데 높은 이념을 보여준 것이 없고 공산주의와 만나서 기독교의 믿음과 사랑을 발휘할 때인데 겁내고 미워하기만 했지 이긴 것이 없다.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도 민족적 회개의 운동도, 깊은 역사 파악의 노력도 보여준 것이 없었으며 전쟁이 지난 후도 새 건설의 설계도를 내는 것도 없다. 자유당 10년에 반항 하나 한 것 없기 때문에 4.19라는 역사적 운동에 아무 참여를 못했고, 5.16에 대해서도 정당한 책망하나 못했다. 한일회담 때는 첨에는 상당히 강한 투쟁을 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고, 명분 없는 월남전에 대해서는 사실상 찬성을 한 셈이니 이제 와서 무슨 소감이 있는가, 없는가? 이때껏 남의 나라 침략 속에 사는데 평화운동 하나 일으킨 것이 없지, 젊은이들이 그렇게 고민하는데 강제징병에 대한 양심적 거부 하나 지도해 준 것이 없지, 그리고 오직 하나 생긴 것이 있다면 교회재벌이다." 이같은 비판은 1945년 이후 1960년대 후반까지 국가 또는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반응도 문제지만, 6.25전쟁으로 대변되는 한국사회의 위기의 영향을 받아 교회에서는 이상한 모양의 신앙 양태와 신학적 해석이 널리 퍼졌으며 교회제도는 거듭해서 분열되었다.  이 글에서는 현재 한국기독교의 특징을 대변하고 있는 세 형태의 교회들(종말론적 신비주의자들, 성령운동 그룹, 주류교회들)의 신학과 질서가 6.25전쟁과 분단 같은 한국사회의 위기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또 그 위기에 반응해 왔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945년 이후의 우리나라 기독교회들은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생존동기에 사로잡혀서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적 모순을 고쳐나가는 데 나서지 못했다는 증거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신비주의자들의 반응 1950년대의 위기와 절망의 분위기 속에서 남한 교회에는 두 가지 두드러진 종교현상이 대두하였다. 전쟁의 발발과 그로 인한 비극의 원인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리면서 교회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계시록의(6: 3∼4) "붉은 말"을 탄 자나 적 그리스도와 동일시했고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부흥회가 급증했다. 이것은 19세기 미국에서의 남북전쟁이 기독교인들에게 사탄에 대한 믿음의 강도를 더해 주었고 부흥회 같은 신앙형태가 급증했다는 분석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부흥회가 대중적 관심을 끄는 과정에서 전쟁 중 방언·환상·영몽·신유 등의 신비 체험을 한 나운몽이 전도자로 등장했고 박태선도 부흥사로 등장했다. 부흥회를 통해 교회에서는 신비 체험에 대한 열망이 확산되어 갔다. 북한 사탄론은 한국교회 전체에서 주장되었으나 신비체험과 예수 재림에 대한 강렬한 기대는 신비주의자들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우리 사회에서 신비주의자들의 그룹은 1930년을 전후해서 형성되지만, 분단과 전쟁의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그들은 그전보다 더 정교한 메시지와 더 짜임새 있는 조직을 갖추고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전쟁 후의 절박한 현실의 위기 속에서 일부 신도들은 김백문의 이스라엘수도원, 문선명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박태선의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 등으로 대표되는 종말론적 신비주의 그룹에 몰려 들었다. 민경배의 표현대로, "6.25와 그 휴유증 때문에 시달리는 교회에 열광적이요 종말론적인 내면화의 경건이 여기 저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신비주의자들의 계보와 성격을 이해하려면 먼저 김백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백문(1917∼1990)은 1930년대 초.중반 무렵 세력을 형성한 이용도·백남주·황국주·김성도 등의 신비주의적 신앙을 이어받아 오다가 해방 후에는 그것을 문선명·박태선 등의 종교집단에 전승시킨 인물이다. 1920년대의 사회는 경제 및 정치적 희망이 사실상 소멸된 상황이었고 젊은이들의 사고는 점점 더 사회주의 쪽으로 편향되어 갔다. 이때 교회에서는 신앙의 내면화가 그 절정에 이르러 신비적 열희와 몰현세적 침잠 속에 빠져드는 현상이 교회의 한 그룹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신비주의자들은 주의 임박한 재림을 대망하거나 자신들을 메시아로 자처하면서 주로 원산과 평안도 지방에서 활동했으며, 김백문이 이들을 만난 것도 원산에서였다.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난 김백문은 1934년 평양신학교 졸업생 백남주가 세운 수도원 겸 사설신학교 원산신학산에서 백남주 목사를 처음 만난 후 그의 애제자가 되었고, 그 해 백남주가 한 여신도와의 동거로 원산의 신비주의 그룹에서 축출된 후 평안북도 철산의 '새주(主)' 김성도를 찾아갈 때에도 따라가게 된다. 새주파는 1935년 '성주교회'(聖主敎會)를 창립하는데 이 무렵 김백문은 신령파 집단의 분위기에 깊이 빠졌던 것 같다. 1940년대 초반 김백문은 거주지를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섭절리로 옮기는데, 1945년 해방 직후부터 이곳을 근거지로 해서 '야소교 이스라엘 수도원'을 세우며 서울 일원의 추종자들을 위해서는 상도동에 집회소를 마련했다. 수도원과 집회소를 통해 김백문은 서울과 경기 일원의 신령파 동지들을 끌어 모으는데, 수도원 창설 직후인 1945년 후반 20대 중반의 문선명이 찾아와 반년 가까이 김백문을 받들었다. 1946년 4월경 문선명은 김백문을 떠나는데, 그가 떠나기 직전 김백문은 30여 명이 참석한 한 집회에서 신비스런 체험을 한다. 집회를 "시작했을 때 찬송에서부터 그 앉은 자리는 진동하기 시작했고 둘러앉은 사람들과 그 주위는 연기에 가득찼다."  "대낮에 흰옷을 입으시고 내 눈 앞에 나타나신 주님을 뵈올 때는 내 왼 정신은 모든 맥박이 다 거두어진 것 같았던 거외다.……거기에서, '주의 현현이나이다' 하고 선포를 했던 겁니다. 그와 동시에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전부가 다 의식을 잃고 나가둥그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문선명은 김백문을 통해 1930년대 초.중반에 세력을 형성한 신비주의적 신앙을 전수받지만, 문선명이 신비주의 계열 목회자들의 설교를 듣고 그들의 감화를 받은 것은 1940년을 전후한 시기, 서울 흑석동의 경성상공실무학교에 다니면서 이용도 계열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다. 그는 명수대교회에서 예수교회의 간부들인 이호빈·박재봉 목사 등이 와서 설교하는 것을 들었으며 나름대로 "신앙의 오의(奧義)를 터득"했다고 한다. 김백문의 문하를 벗어난 문선명은 1946년 6월초 평양에 도착해 그곳에 남아 있던 신령파 신도들을 모아 교회를 개척했다. 신도들의 대부분이 "하늘의 음성을 듣고 환상 을 보고 몽시를 보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교회였다. 1951년 1월초 부산에 도착한 문선명은 자신을 추종하던 사람들을 규합해 1954년 5월 서울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즉 통일교를 설립했다. 1953년 11월 중순 동래에 피난가 있던 김백문도 상경하였다. 이같이 전쟁 중에 또는 그 직후에 신비주의자들이 기존 모임을 다시 시작하거나 조직을 재정비하자 다수의 사람들이 이 집단들에 몰려 들었다. 박태선과 나운몽이 자신들이 다니던 교회 밖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개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나운몽은 6.25전쟁 시기에 입신·방언·예언·환상·진동·신유 등의 신비 체험을 한 후 용문산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에 나섰다. 김백문이 종로 6가에서 다시 야소교 이스라엘 수도원 간판을 내걸고 집회를 재개했을 때 30여 명의 신도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 교세는 그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1950년대 통일교의 경우도 비슷했다. 통일교의 교세는 1952년 대구집회로부터 시작하여 전국을 누비며 심령부흥회의 불길을 일으키고 다니던 용문산기도원의 나운몽 세력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루며, 박태선 추종자들과의 대조는 더욱 현격하다. 전후의 폐허 속에서 방황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지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신학적 체계를 세우는데 열중하고 있던 김백문이나 문선명의 교회보다는 심령 부흥을 강조했던 나운몽이나 신유를 동반한 박태선의 집회에 훨씬 더 많이 몰려갔다. 전쟁 후 다시 또는 새로 등장한 신비주의자들의 종파 형성과 대중적 인기는 흔히 대재난으로 인한 사회의 불안과 그것에 대한 기성종교의 비효율적인 대처에 그 원인이 있다고 설명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부상, 납치, 가족의 이산, 집을 비롯한 각종 산업 시설의 파괴와 함께 1950년대 거의 해마다 계속된 가뭄과 홍수·태풍, 전염병의 만연, 그리고 엄청난 통화팽창은 극도의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 시기 교회와 신도는 전쟁 이전보다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고 이것은 불안 속에 사는 대중이 종교에서 기댈 곳을 찾아 나서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직과 전통 교리 속에 굳어져 버린 채 분열을 일삼던 교회는 대중의 열망이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고, 따라서 신도들 중에는 이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언적인 교리와 가시적인 희망을 전하거나 실현시켜 줄 카리스마적 인물이나 메시아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박태선의 부흥운동과 문선명의 통일교가 등장했다. 문선명과 박태선 같은 일부 신비주의자들은 불안이 없는 이상사회의 실현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들은 현실 부정적이면서도 내세의 천국이 여기,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 '지상천국'이나 '천년성'이 바로 그런 사회였다. 이처럼 그들이 전하는 희망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문선명은 피난 중인 부산에서 신앙의 동지를 규합하면서 "믿고 죽어 천당가자던 식의 개연적인 종래의 관념신앙" 대신 "먼저 인간의 책임분담인 지상천국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전도했으며, 몇해 후 간행된《원리강론》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이 성취되는 지상천국을 중심 메시지로 전했다. 전도관은 통일교보다 더 가시적인 희망을 전했다. 천년성을 기대하는 신도들을 모아 1957년부터 신앙촌을 형성하고 활발한 산업활동을 벌임으로써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회의 비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들은 기성교회 교인들과는 달리 전쟁 후 미국교회들에서 보내 준 구호 물자의 혜택을 덜 받았거나 받지 못했으므로 이같은 경제활동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통일교회는 초기 구성원들이 다수의 엘리트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들은 신비주의적 신앙에 더 심취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도관보다 종교적인 동기가 더 강했다. 그러나 통일교 역시 경제활동을 지상천국 건설의 기초 작업으로 여기고 1959년부터 경제활동에 뛰어들었다. 민중들의 절박한 요구에 재빨리 대응했다는 점에서 보면, 이 시기 통일교나 전도관의 사회적 기능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적 관심은 사회적 모순을 응시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으며 곧 교리 시비와 교회 창설자들의 구속 사건에 휘말려 그같은 관심을 가질 만한 여력도 상실하고 말았다. 이상사회의 실현에서 박태선이나 문선명은 인간의 책임과 분담을 강조하였다. 예컨대, 박태선은 설교에서 칼빈주의의 예정론이나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구원관을 자주 비난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천년왕국이나 천년성 같은 이상사회를 구현시켜 줄 메시아의 임박한 도래를 암시했다. 이 과정에서 1930년대 메시아 집단의 신앙을 전수받은 문선명은 예수를 영적 구원만을 성취한 자로 보면서 자신을 육적 구원을 성취할 재림주 또는 메시아로 암시했고, 전도관의 박태선은 자신을 주의 보혈을 받은 '동방의 의인' 또는 '감람나무'로 호칭하면서 감람나무가 나타나면 이 세상은 끝이라고 예언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관심사는 메시아의 도래였으나 자신들을 메시아로 자처함으로써 기성교회로부터 이단시되기 시작했다. 1992년 이후 통일교 신도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자신을 메시아로 암시해온 문선명을 공공연히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으며, 박태선은 사망하기 전 자신을 '천부'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는 1930년대 이후 교회 일각에서 전개되어 온 신인합일의 신비주의 운동과 자칭 메시아들이 1950년대 이후에는 다수의 추종자를 동반한 문선명과 박태선의 기독교계 이단 종파를 통해 재현되고 있음을 본다. 한국전쟁이 이들 종말론적 신비주의자들에게 미친 또 하나의 영향은 반공사상이었다. 나운몽이나 통일교는 거리에서 또는 광장에서 반공정신을 고취하면서 그들이 해석한 복음을 전했으며, 특히 통일교의 경우 경전으로 여기고 있는《원리강론》에서까지 반공사상을 신학화하였다.《원리강론》에 의하면, 인류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키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아담의 가족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가인의 아벨 살해는 개인·가족·사회·인종·국가 그리고 세계를 가인 타입과 아벨 타입의 인간들로 분리시켰다. 역사의 종말에 서도 이 세계는 "가인형의 공산세계와 아벨형의 민주세계"로 분립된다. 공산주의는 "사탄을 중심으로 한" 무신론적 비원리 세계의 사상으로서《원리강론》은 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항할 것을 역설한다. 냉전시대의 산물인 이러한 반공사상에 근거해서 1960년대 이후 통일교회는 박정희의 반공 독재정부를 공공연히 지지했으며, 심지어는 아시아,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에서 1980년대까지도 반공을 이유로 독재 정부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주기까지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공생공영의 지상천국을 실현시키려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통일교로 대표되는 전쟁 후의 종말론적 신비주의자들에게 그같은 주장이 바르게 실천되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황금시대의 대망은 있으나 반공신학에 짓눌려 윤리적 토대가 제대로 설정되지 못함으로써 이들은 한국사회에 위기를 유발시켜 온 각종 정치 경제적 모순을 합리적으로 바꾸거나 개혁하는 데 나설 수 없었다. 이처럼 윤리적 토대가 빈약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종교현상의 신비스런 체험에 깊이 몰두한 사람들에게 정의나 자유 같은 윤리적 덕목을 요구함은 무리지만, 사회윤리의 부재 문제는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서 한국현대사에 대한 기독교회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일은 곤혹스러운 작업이다.                                                                                                                 (옮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