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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의 명동교회 (상동인물 정재면,박태환,황의돈,장지영,이동휘 자취)#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9 00:00 조회 6,630
만주는 대개 봉천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이북의 남만주(서간도), 두만강 이북의 동만주(북간도), 길림 신 경 하얼빈을 중심으로 한 북만주로 구분된다. 간도라면 흔히 두만강과 송화강 사이의 넓고 기름진 땅 북간도를 가리킨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원으로 옮겨간 이래 만주는 청조의 발상지라 하여 1880년까지 입경이 금지 되어 실제로 무인지대였다. 일찍이 조선 숙종38년(1712)에 조·청 양국은 '서위압록 동위토문'을 내용으 로 하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바 있다. 양국의 국경은 백두산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 로 정한다는 것이다. 토문강도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 북으로 흘러 송화강에 합류하는 강이므로 그 동쪽 북간도는 마땅히 우리 땅이었다. 이 무주옥토 북간주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몰래 두만강을 넘나들며 농사를 짓거나 일부 이주해 살았다. 특히 1880년에는 월강죄가 폐지되어 탐관오리들의 착취와 흉년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대거 이주했고 청국인들도 흘러들어 왔다(초기 간도의 인구·농경지 80% 이상이 조선인 차지). 북간도 선교는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서 착수했다. 1902년 성진주재 그리어슨이 홍순국과 함께 시베리아 동만지방 선교답사 여행을 한 뒤 안순영을 전도사로 파송해 1906년 양우정자, 광제암교회를 개척했 다(한국기독교의 역사). 그리어슨은 성진·함흥선교부 설치를 비롯, 함경도 선교의 주역으로 항일운동도 적극 지원했던 인물. 구한국군 고종황제 호위병 출신 민족주의자 이동휘의 입교도 그에게 받은 감화 때 문이었다. 한편 1907년 남감리회에서 파송한 이화춘이 민족주의자 박무림의 지원을 받아 와룡동교회를, 이응현이 모아산교회를 세웠고 장로교도 용정교회를 설립했다(선교지역 협정으로 1009년부터는 간도 전역을 캐나 다장로회가 관장하게 된다. 남감리회는 1920년 정재덕목사를 파송, 간도·시베리아선교를 재개한다). 한일합방을 전후해 한국인이 대거 간도로 이주해옴에 따라 간도교회는 크게 발전한다. 순회전도사 이동 휘를 중심으로 결성된 3국전도회가 1911년부터 3년간 열성적으로 활동한 결과, 36개 교회가 신설되었다. 간도교회 부흥의 원인도 되지만 그 특징은 한마디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꼽을 수 있다. 간도선교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해온 서굉일교수(한신대)는 "1910년대 북간도교회가 형성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교회가 민중들의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자주·자립의식과 민족운동가들의 자치의 식을 신앙공동체를 통해 구현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간도에는 천도교 대종교 유교등 제종교가 성행했지만 교회성장과 함께 기독교가 단연 두각을 나타 냈다. 교회는 한인 사회의 구심점이며 민족운동의 요람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간도의 여려 교회 중에서 도 특히 1909년 순전히 한국인의 노력으로 설립된 명동교회가 돋보인다. 북간도에 명동촌이 선 것은 1899년 2월18일. 두만강변 종성출신 남평문씨 문병규(문익환목사의 고조부)집안 40명, '맹자'를 1만번 읽 었다는 전주김씨 김약연('국민회'회장)가문 31명, 김약연의 스승인 남도천집안 7명, 그리고 회령출신 김 해김씨 김하규(문익환목사의 외조부)집안 63명이 집단 이주해 장재촌에 명동마을을 연 것이다(송우혜· '윤동주평전') 기독교성장세 단연 두각 회령에서 1백10리,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되는 용정과는 40리 거리였다. 이듬해에는 이미 만주 자동에 정착해 살던 파평 윤씨 윤재옥(시인 윤동주의 증조부)집안이 명동으로 옮겨왔다. 이들은 모두 고향에서 서당을 열고 있던 훈장들로 명동에서도 한전을 마련, 학교(초기에는 김약연이 세운 규암재, 후일 명동서 숙으로 개칭)를 세웠다. 그들의 이주동기는 '척박하고 비싼 조선 땅을 팔아 기름진 땅을 많이 사서 간도 를 우리 땅으로 만들고 여유 있는 생활 가운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이 다섯 가문이 명동교회의 중심이었다. 교회는 약관 22세의 신민회 회원 정재면(정대위목사 부친)이 신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명동서숙에 초빙되고부터. 그의 부임조건이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치고 예배 를 드릴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었다. 좋은 선생을 놓치기 싫어 이 조건을 수락한 결과 결국에는 명동마 을 전체가 기독교화하게 된다. 당시 간도 전역이 마찬가지였지만 복음전도와 민족교육은 늘 병행했다. 이듬해에는 박태환 황의돈 장지영이 교사로 부임했고 이들은 길동 전도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911년에 는 여학교도 세워 정재면의 동생 정신태와 이동휘의 딸 이의순, 한국 최초의 여기자 우봉운 등이 가르 쳤다. 한편 1908년에는 김약연 구춘선 김영학 강백규 등이 기독교 독립운동단체인 간민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1911년 백오인사건으로 망명해온 이동휘의 입간을 계기로 국민회로 확대되었다. 국민회는 3.1운동 1년전에 해외지사 39명의 서명으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고 1919년 3월13일 용정에서 북간도 최초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한때는 무장독립군을 조직해 조선은행 15만원 탈취사건, 용정 일본영사관 방화사 건 등 무력투쟁도 벌였다. 국민회 전성기에는 간도 교육기관의 90%이상, 교민들의 70%이상을 그 세력 권에 두었을 정도였다. 국민회를 통한 교인들의 민족운동은 3.1운동 이후에도 독립군 양성, 민족계몽운동을 통해 면면히 이어졌 다. 일제의 무력탄압 속에서도 간도교회는 줄기차게 성장, 1921년에는 간도노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1922년의 교세는 기도처를 포함한 교회 1백5곳, 교인 6천3백92명이었다.               전인철   1992년 7월15일             - 국민일보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