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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의 인물 정재면의 자취가 있는 곳 (용정의 명동마을)#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9 00:00 조회 7,015
정재면 목사는 일제하 북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기독교 민족독립운동가로 본명은 정병태, 호는 벽거, 일광, 우산이다. 1984년 2월 14일 평남 숙천에서 아버지 정학전, 어머니 김성약 사이에 태어나 18세인 1902년 상경하여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를 만나 그의 애국 사상, 민족의식,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고 1904년부터 상동교회안에 설립된 상동청년학원에서 기독교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한 근대 학문을 익혔다. ~ 중략 1908년 신민회의 파송으로 북간도 용정에 들어가 명동촌에 설립된 명동학교의 교무를 책임지고 당시 북간도 지역에 기독교 사상에 입각한 민족 운동을 고취시켰다. ~ 중략 (아래는 영남일보에 연재된 사설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    -    명동촌  -   연변을 여행하는 관광객이면 으레 연길에서 1박을 하고 백두산 등정길에 오르게 되는데, 그 길목에 조선족의 애환이 서린 용정(龍井)시가 있고 이 를 관통하는 해란강이 흐르며 그 옆 비암산의 일송정을 보게 된다. 많이 알려진 바이지만 '선구자' 노래말에 일송정과 해란강이 나오는데 바로 여 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기회에 한 가지 밝히자면 한국에서는 노래 제목이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원명은 '용정의 노래'라는 것이다. 가사 내용도 몇 군데 다른 점이 있다. 한국에서는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라고 부르지만, 원 작에는 "홀로 늙어 갔어도"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용정의 유래는 조선족 이 이 곳에 정착하면서 우물을 팠는데, 우물에 서기(瑞氣)가 어리더니 용 이 승천하므로 상서로운 일로 여기고 이 우물을 용정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용정은 조선족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지금은 연길(延吉)이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이지만, 조선족 이주 초기는 용정이 북간도의 중심이었다. 그러므로 일본 통감부 간도파출소도 용정에 두었고, 후일 영 사관도 용정에 설치하였다. 이 용정에서 삼합(북한의 회령과 두만강을 사 이에 두고 마주보는 도시)을 향해 자동차로 약 20분 거리에 자연마을인 명 동마을(明東村)이 자리잡고 있다. 만주 삼성(三省) 여러 곳에 조선족만 수 백호씩 집거하고 있는 마을이 많다. 심양 근교의 만융촌(滿融村)에는 조선 족만 1천여호가 집거하고, 연길 주변 또는 목단강 주변에도 수백호씩 집거 하고 있는 마을이 많다. 여기에 비하여 명동촌은 규모가 작고, 지금은 불 과 몇 가구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명동촌을 소개하려고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 유가 있다. 명동촌은 애국지사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학교와 교회를 세우 고 민족의식을 고취, 결집하며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도 록 한 역사적인 마을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내력을 알면 당시 북간도 조선인의 역사와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마을이란 본래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다. 지세와 물이 좋고 들이 넓으면 더할 나위 없이 마을이 생길 수 있는 좋은 조건이다. 한 집 두 집 자리를 잡다가 가구 수가 늘어나면 마을이 형성된다. 그러나 명동마을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고 인위적으로 한꺼번에 마을이 된 게 특징이다. 1899년 2 월18일 두만강변의 도시 회령, 종성 등에 거주하던 학자들 네 가문의 대소 가 22가구가 함께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다. 종성의 문명규를 위시한 남평문씨 가문 40명, 김약연 가문 31명, 남도천 가문 7명과 회령의 김하규 가문 63명이 합류하여 집단이주한 것이다. 윤동주(尹東柱)의 조부 윤하현 집안 18명은 그 다음해에 합류하였다.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한나절 열 심히 걸으면 명동마을에 닿게 되는데, 이 마을이 들어선 주변은 비산비야 로 논이나 밭이 일궈지지 않았다. 이곳은 동한(董閑)이라는 청국인 대지주 의 땅이었다. 이민단이 미리 돈을 모아 선발대를 보내 정착할 땅을 사놓은 후 들어간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들은 공동부담으로 학전(學田, 혹은 교육전)을 먼저 확보해 놓고 각자 돈을 낸 비율에 따라 땅을 분배했다. 물론 학전은 교육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 학자들은 집단이민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조선의 척박하고 비싼 땅을 팔아 기름진 땅을 많 이 사서 좀 잘살아보자. 둘째, 집단으로 이주하여 살아서 간도땅을 우리 땅으로 만들자. 셋째,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 세울 인재를 기르자. 이렇듯 목적의식이 뚜렷했기에 우선 학전을 마련하고 교육에 진력하여 인재를 배양할 수 있었다. 실로 민족의 선각자요, 선구자로서의 모습이 극 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들의 둘째 목적인 간도땅을 우리 땅으로 만들자 는 것은 냉엄한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 고 할 수 있으나, 실제로 청국 내에 조선 땅을 만들어냈다. 북간도의 통치 체제가 청조에서 중화민국으로 그리고 다시 중공으로 바뀌어온 지난 100여 년 간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그 땅을 지켜왔다. 그리하여 그 결과는 '연변 조선족자치주'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명동마을에 관하여 특기할 사항은 명동학교이다. 조그마한 마을에 학교 가 선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상식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을 형성 전에 학전을 준비한 학자들의 선비정신으로 보아 규모와 형식은 어찌되었든 교육기관이 서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북간도 최초의 신학문 교육기관은 1906년 10월 이상설에 의해 세워진 서전서숙(瑞田書塾)이다. 이상설이 사재로 교원 봉급, 교재비, 학용품 등 모든 경비를 충당하였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1907년 이상설이 고종황제의 밀사로 네덜란드 헤이그에 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는 바람에 오래 가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이 무렵 명동촌에서도 신학문에 대한 열의가 강렬하게 일어나던 중 서전 서숙이 문을 닫게 되자, 그 이듬해인 1908년 4월27일 명동마을에 명동서숙 을 설립하고 나중에 현대적 감각을 살려 명동학교로 개명하였다. 일찍이 명동촌으로 집단이주, 개화에 눈뜬 학자 네 집안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에서 조그마한 섬나라 일본이 대국을 상대하여 연전연승하는 것을 보고 충 격을 받았다. 미개했던 일본의 그 가공할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들이 전과 다른 것은 서양문명을 받아들인 것밖에 없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그들은 지금까지 숭상해오던 한학을 구학(舊學)이란 카테고 리 속에 집어넣고, 신학문을 향해 가슴을 활짝 열었다. 학교 설립 초기에는 시설과 교사진이 빈약하여 애를 먹던 중 약관 22세 정재면(鄭載冕) 선생을 영입하여 제대로 학교 체제를 갖추었다. 정재면은 신민회의 젊은 회원으로서 이동휘.안창호의 권고에 의하여 이상설이 하던 교육사업을 재건하기 위하여 용정에 왔으나, 여러 가지 여건이 좋지 않아 고심하던 차 명동학교에서 영입해 갔다. 정재면은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 다. 학생들에게 정규과목의 하나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어 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학자들의 마을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요구조 건이었다. 며칠간 논의 끝에 좋은 선생을 모시기 위해서는 수락해야 한다 는 결론을 내렸다. 1909년 정재면이 부임하면서 학교 조직이 바뀌었다. 교장 김약연(金躍淵), 교감 정재면 체제로 편성하면서 국내외에서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 였다. 황의돈.장지영.주시경.김철 등 학식과 덕망 높은 분들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애국지사로서 기상이 대단한 분들이었다. 1910년에는 중학과정을 신설하고 사방 여러 곳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명동학교는 여자교 육을 위해 따로 여학교를 세우고 일반과목 외에 재봉, 음악, 가정교양 등 의 교과목을 배정했다. 이 역시 당시 유가의 풍습에 비추어볼 때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며, 선각자의 예지가 돋보이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명동 학교는 신학문 교육기관으로 면모를 갖추었고, 아울러 명동마을은 기독교 마저 받아들여 북간도 개척의 전진기지로 큰몫을 했다. 또한 명동학교 출 신들이 독립전선에 투신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역할을 하였다. 명동마을을 이야기할 때 특별히 두 사람이 떠오른다. 김약연과 윤동주이 다. 두 사람은 외숙질간으로서 김약연이 외삼촌이 된다. 김약연 없는 명동 촌을 상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는 북간도 조선족자치정부라고 일컫던 간민회(墾民會)의 창건자였다. 그는 본래 유가의 후예로서 한학자였다. 명 동마을과 명동학교와 간민회를 이끌면서 기독교에 귀의하여 늦게 평양장로 교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새 시대 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선각자적 일면이 있는가하면 한편으로는 항일독립운 동의 한 방편으로 기독교에 귀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튼 북간도 조선인사회에서 그의 위상은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만큼 우뚝하다. 지금 명 동마을에는 그의 기념비가 서 있고 명동촌 옆마을 양재촌에는 그의 묘소가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며 북간도 개척사를 일러주고 있다. 다음으로 민족시인 윤동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사실 윤동주에 관해서 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17년 윤영석과 김약연의 누이동생인 김 용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가문은 다 명문으로서 명동마을 사람들의 존 경과 신뢰를 받았다. 윤동주는 큰 기와집 손자로 불리며 비교적 부유한 형편에서 자랐다. 그는 8세때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14세에 졸업하고, 중학과 정은 은진중학, 평양숭실중학, 광명중학교에 전.입학을 거듭하면서 수학했 다. 은진중학은 대성중학으로 합쳤다가 지금의 용정중학으로 맥이 이어지 고 있다. 그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여 24세에 졸업하고, 25세 때 일본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전입하였다. 26세에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어 후쿠 오카(福岡)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8.15 해방을 불과 4-5개월 앞두고 28세 나이로 옥사했다. 사인은 지금껏 불분명하다. 윤동주의 사망통지를 받고 윤영석은 일본에 가서 윤동주의 고종사촌 송몽규(한 감옥에서 같은 혐의로 복역 중이었다)를 면회했는데, 송몽규에게서 자신들이 이름모를 주사를 강 제로 맞고 있으며 윤동주가 주사 때문에 죽었다는 증언을 들었다. 이로 미 루어 인체실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윤동주는 학창시절 문예 지에 투고하여 탁월한 문인의 자질을 보였고, 방학 때면 명동에 돌아와 하 늘을 보고 별을 세면서 불후의 명시들을 남겼다. 그는 민족시인으로 연변 조선사회에서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의 시세계와 사인불명의 죽음은 오 늘날 우리 가슴에 감동과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는 서울 <주>원신(元信)의 이우혁 회장의 지원을 받아 연길에서 윤동주문학상을 제정하고 해마다 4월10일에 시상을 하고 있 다. 시상부문은 소설.시.산문.평론 등 4개 분야인데 각 부문마다 당선작과 신인작을 시상함으로 중국 조선족사회의 문학 활동에 큰 활력소가 되고 있 다. 명동마을은 이렇듯 북간도 전역을 통틀어 제일 역사적 의의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전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은 사실상 폐허로 변했다. 필자가 1990년대초 명동촌을 찾았을 때 명동학교는 흔적도 없었고 명동교회는 방앗간으로 변해 있었으며, 윤동주 생가도 자취가 없어진 채 담배밭으로 되어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필자는 이 마을을 복원하여 역사현장을 재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당면한 두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첫째는 중국 당국으로부터 마을 복원 허가를 받 는 문제이고, 둘째는 복원 자금을 조달하는 문제였다. 허가를 담당하는 용 정시 이준일 부시장을 만나 명동마을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고 복원 허가 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마침 이준일 부시장이 조선족이어서 쉽게 이해하였 다. 그러나 공산당 치하에 연변 조선족을 경계하는 상황에서 허가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 지금에 와서 폐허가 된 마을을 막대한 경비 를 들여 복원하려고 하느냐하는 의문을 가지며, 혹시 한국이 문화 침투를 하려는 의도가 아니냐하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필자는 명동마을을 복원하 면 관광명소가 되어 외화를 벌 수 있을 것이며, 반일투쟁의 요람이므로 중 국의 항일정신과 동질성이 있어 역사유물로 복원하는 것이 중국에도 하등 불리할 것이 없다고 역설하였다. 다행히 허가를 받았다. 단 교회에서 예배 를 보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 자금 문제로 고심하던 중 해외한민족연 구소 김성규 이사의 주선으로 한국전력의 지원을 받아 1차로 명동교회와 명동마을의 상징성을 갖는 윤동주 생가를 전통한옥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 다. 문헌과 이웃 옛 어른들을 통해 철저한 고증을 받았다. 그러나 여러 가 지 사정으로 인해 복원 낙성식을 하지 못해 못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지금 명동마을은 관광명소가 되었고, 교회와 윤동주 생가에는 그 보존관 리를 위한 성금함이 놓여 있어 이곳을 찾는 한국관광객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아직껏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어려운 자금사정으로 그 유서깊은 명동학교를 복원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명동촌의 역사와 의의를 이해하 는 독지가가 있어 명동학교를 복원하면 대단히 보람된 일이며 자손대대로 명예로울 것이다. 인간은 역사와 더불어 삶으로써 생의 참된 의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윤기<해외한민족연구소장>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usjang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