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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상동교회와 해아 밀사사건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510
                                                               (이준 열사 묘소)                                          제 9장 상동교회와 해아 밀사사건 (상동111년사)    해아 밀사사건이란 우리 상동교회의 교인이며 전 목사와 친밀하게 지내면서 전 목사의 가장 가까운 민족독립운동 동지의 한 분이었던 이 준(李儁) 열사와 그의 동료인 이상설(李相卨)이 이위종(李瑋鐘)과 함께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가지고 화란 해아(海牙 Hague)의 만국평화회의(1907년)에 한국대표로 출석하여 ‘1905년에 일본과 체결된 보호조약은 한국황제의 뜻이 아니고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된 조약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파기되어야 한다’고 국제회의에 호소한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 일로 일본의 체면이 국제적으로 크게 손상되었고, 일본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물어 그를 폐위시키고 순종을 대신 즉위케 하였다. 또 이 사건으로 일본은 그 해(1907년) 7월 24일에 소위 7조약을 체결하여 실질적인 일본의 통감부의 통치를 합리화하고, 일본인을 한국정부의 관리로 등용하는 등의 합병 마무리 작업을 추진하였고, 또 8월 1일에는 한국정부의 군대까지 해산시켜 한국의 무력 반항 투쟁도 사전에 봉쇄하였다. 우리 민족사의 큰 사건인 밀사사건의 주인공 이 준 열사의 입교동기는 처음에는 좀 정치적이었다. 함경북도 북청(北靑) 태생인 이 준은 서울에서 민족운동을 하면서 독립협회 운동 때부터 전덕기와 가까이 지내면서 민족운동에 종사하게 되었고, 결국 전덕기의 영향으로 우리 교회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 교회에서 민족운동가들과 어울리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904년 말경에 그 당시 민족운동 단체인 공진회(共進會)회장으로 있었다. 이 공진회는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대항하여 싸우는 정치단체였는데 결국 이 준은 친일파의 모함으로 황주 철도(黃州 鐵島)라는 작은 외로운 섬으로 유배를 갔었다. 그는 여기서 갇혀 있는 동안 성서를 탐독하면서 깊은 신앙체험을 하게 되었고 철저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李善俊, ꡔ一醒 李儁烈士ꡕ, 世運文化社, 1973, pp.202~3. 이 후부터 이 준은 비록 전덕기가 자기보다 16세나 나이가 아래였으나 교회에서는 전덕기 목사를 믿음의 어른으로 모시고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그가 분주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주일예배를 거른 적이 없었다. 상게서, p.357. 이렇게 이 준 열사는 그가 해아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고 그 곳에서 순국 할 때까지 우리 교회의 열심 있는 교우였다. 따라서 1905년의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을사보호조약 반대투쟁 때에도 우리 교회 교인으로 주동적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석학 육당 최남선(崔南善)이 그의 학적 권위를 두고 말한 “진실로 상동교회 뒷방은 이 준 열사의 헤이그 밀사사건의 온상” ꡔ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ꡕ, p.244. 이라는 말은 역사적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이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었던 곳은 그들의 동지가 목회하고 있던 우리 상동교회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마음에 아무 부담 없이 우리 교회와 전덕기 목사의 주위에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었던 것이다. ꡔ一醒 李儁烈士ꡕ, p.357. 그러나 일본경찰과 친일파 정객들이 이런 민족운동가들의 집합장소를 모를 리가 없었고 또 가만히 둘 리도 없었다. 상동교회 지하실이나 목사관에 유수한 민족독립운동가들이 모였다는 정보가 입수되면 일본경찰은 곧 상동교회를 포위하여 그들을 체포하러 나서지만 번번이 허탕을 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들을 전 목사가 어디에다 숨겨 두었는지 일본경찰들이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경찰은 대신 전 목사를 끌고 가서는 무서운 고문을 가했고 전 목사가 몸이 쇠약해져야 그를 풀어 주곤 하였다는 것이다. 子婦의 증언. 이런 전 목사의 믿음직한 언행은 자연히 혁명운동가들의 두터운 신임의 기초가 되어 전 목사라면 어떤 중요한 비밀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처지였다. 따라서 극비를 요했던 밀사사건도 전덕기 목사는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밀사사건은 누가 어디서 어떻게 꾸며졌는지의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우리는 여기서 풀어보려고 시도해 본다. 이 거사 계획은 당시 ꡔ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ꡕ 주필로 있던 양기탁(梁起鐸)이 1907년 6월에 화란의 해아(Hague)에서 만국평화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이회영(李會榮)에게 알려줌으로써 시작되었다고 본다. 友堂 李會榮 略傳, ꡔ民族運動家 아내의 手記ꡕ, p.151. 이회영은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친형으로서 1910년 말에 한일합병 직후 만주로 망명가기 전에 우리 교회의 공옥학교에서 약 2년간 학감을 지냈던 분으로서 전 목사와 가장 가까운 동지의 한 사람이었다. 이회영은 이 소식을 듣고 이 평화회의야말로 다시없는 기회로서 이 기회에 우리 대표를 파견하여 을사보호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된 조약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전세계에 선언함으로써 한국의 자주독립을 되찾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비단 이회영 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자면 이런 계획을 고종 황제에게 상주하여 먼저 허락을 받아야만 했었다. 이 때 고종은 경운궁(慶雲宮, 지금의 德壽宮)에 갇혀 있는 형편이었고, 일본 헌병이 궁궐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포위하고 있던 때였다. 따라서 고종황제에게 접근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일본이 고종을 만나는 사람들을 일일이 체크하던 때였기에 이런 국가의 중대사를 직접 찾아가서 아뢸 수가 없었다. 이 때 이회영이 잘 아는 내시(內侍)가 있었다. 그는 안호영(安鎬瀅)이라고 하는 사람으로서 이회영과는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사이었다. 이회영의 계획은 그 내시를 통하여 고종에게 전달되었고 고종도 이 계획에 찬성하여 평화회의에 한국대표를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또 고종이 누구를 대표로 보내면 좋겠느냐고 묻자 이회영은 그의 친척이며 전 의정부의 참찬(參贊)인 이상설과 전 평리원(平理院) 검사인 이 준을 추천하였다. 이 때 이상설은 보호조약이 체결되면서 그 자리를 사임하고 1906년에 만주 용정(龍井)에 그의 동지들과 독립기지를 만들어서 그곳에 서전의숙(瑞甸義熟)이라는 학교를 세워 그 지방인의 교화와 그 자녀들의 교육에 힘쓰면서 독립투사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상게서, p.150~151. 이 준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독립협회운동 때부터 민족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전덕기와 가까운 사이였고, 1904년 경에 우리 교회에 입교하여 전덕기와 더불어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반대투쟁을 주동한 인물이었다. 그러면 고종 황제의 신임장은 어떻게 일본헌병의 눈을 피하여 황제의 손에서 이 준 열사의 손에 전달되었을까. 이 물음에 대하여 오늘날 대개 세 가지 대답이 있다. ① 이 신임장은 당시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 있던 헐버트(Homer Hulbert)의 손을 거쳐서 이회영에게 전달되고 다시 이것이 밀사인 이 준에게 전달된 것이라고 한다. 상게서, p.152. 헐버트는 1886년 7월에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와서 약 5년간 한국정부가 경영하는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귀국하였다. 그 후 1893년에는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와서 선교사업에 종사하면서 일본의 한국침략을 규탄하는 활동을 많이 하여 평소부터 고종황제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② 그러나 ꡔ一醒 李 儁 烈士ꡕ 전기에는 이 밀서가 시종(侍從) 이종호(李鐘浩)와 박상궁(尙宮)을 통하여 이 준에게 전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ꡔ一醒 李儁 烈士ꡕ, p.370. ③ 일설에는 이 신임장이 전덕기 목사의 이질녀(姨姪女)인 김 상궁이 지밀내인(至密內人)으로 있던 관계로 김 상궁이 비교적 대궐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고, 이 김 상궁에 의하여 상동교회 목사관에서 전 목사에게 전달되고 이것이 다시 이 준 열사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閔忠植 옹과의 面談, 1975년 7월 김수철, 박설봉 목사 合席. 전덕기 목사의 오랜 제자인 독립투사 민충식(閔忠植) 옹의 기억에 의하면 그가 어렸을 때(약 12세쯤 때) 상동교회 전 목사댁에 들어갔더니 어떤 평복을 한 부인이 치마 속에서 무슨 종이를 꺼내서 전 목사에게 전해 주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후에 물어보니 그 서류가 고종 황제의 신임장이었다는 것이다. 또 전 목사의 차남인 순경(順敬) 씨가 어렸을 때에 어떤 부인이 와서 아버지 전 목사와 마주앉아 이야기하면서 그녀의 치마 속에서 무슨 종이를 꺼내어 주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후에 아버지에게 그 분이 누구냐고 물으면 다만 “궁에서 나오신 분” 이라고만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子婦의 증언. 하여튼 고종의 신임장은 이 준에게 어떤 경로를 통했든지 전달되었고, 또 이 준은 국가의 사활문제가 걸려 있다고 본 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4월 20일에 서울을 떠났다. ꡔ韓國獨立運動之血史ꡕ 上, p.39. 여기서는 이 준과 이상설이 같이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준 열사전기에는 4월 22일로 되어 있다(p.396). 이 준이 이런 중요한 임무를 띠고 고종의 신임장을 가슴속 깊숙이 넣고 출발할 때 전 목사의 집에서 기도회를 보고 전 목사의 기도와 축복을 받고 장도에 오른 것이다. 민충식 옹의 증언. 특히 전 목사와 이 준 열사의 관계는 오랜 독립운동 동지이면서 목사와 교인 관계였고, 만일 이 일이 성공이 되지 않을 경우 이 준 열사의 결사적인 각오로 보아 어떤 일이 있을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이들의 마지막 이별이 된 것이다.   제2편 선교하며 애국하는 교회 이 준은 그 길로 러시아의 동부에 있는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거기서 이상설과 합류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당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다시 이들은 주 러시아 공사관의 서기관이었던 이위종(李瑋鐘)을 만나 세 사람이 일행이 되어 평화회담이 열리는 화란의 해아로 행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해아에 도착하여 맹렬한 활동을 한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으므로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다. 다만 여기서 해아 밀사사건이 우리 교회에서 극비리에 계획되었고 ꡔ一醒 李儁 烈士ꡕ, p.357.   또 이런 국가적 중대사가 성사되도록 전덕기 목사의 축복을 받고 떠났다는 사실에 우리들의 주위를 환기시킨다. 또 이 계획에 가담했던 모든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전 목사와 친밀하였던 민족운동 동지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 때 이 준 열사는 해아에서 순국하였고, 나머지 이상설, 이위종 두 열사는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일본경찰은 이들에게 궐석재판을 열어 사형선고를 내렸다)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1914년에 전덕기 목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상설은 하도 분통히 여겨 결국 전덕기 목사의 죽음의 소식이 그에게 큰 충격이 되어서 병을 얻었고, 3년 후인 1917년에 광복된 조국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객지에서 외롭게 죽었던 것이다. ꡔ개벽ꡕ 제62호, p.34. 이런 여러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선배들이 계속 주장해 온 ‘상동교회가 우리 민족운동의 요람지’였다고 하는 증언은 이런 사건들로서도 충분히 증명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