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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종로교회와 상동 교회와의 관계 #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9 00:00 조회 6,708
- 수원종로교회와 상동 교회와의 관계 (2대스웨러,7대이익모목사님, 삼일학원의 자취) -



   최초의 수원, 공주지방 전담선교사로 기록되는 이는 스웨어러(W.C.Swearer, 徐元補)선교사이다.



  스웨어러는 바로 그 해 내한한 초임선교사로 오자마자 수원과 공주사역에 투입되었다. 수원, 공주선교 전담으로 투입되기는 했지만 그는 수원과 공주 어느 곳에도 살지 않았다. 이 두 곳에는 아직 이렇다할 신앙공동체가 없어 선교사가 가서 주재할 만한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전담선교사로 파송되었으나 현지에 선교사가 주재하지 않음으로 그만큼 선교의 결실이 늦어졌다. 이는 이미 4-5년 전에 선교사가 주재함으로 선교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던 제물포와 평양, 원산의 경우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스웨어러는 이곳을 맡자마자 이곳에서 일하고 있던 한국인 사역자들과 동행하여 직접 선교여행에 나섰다. 이미 한국인 사역자들이 몇 년간 씨를 뿌려 놓았으므로 그는 거두기도 바빴다. 이 무렵에는 이미 외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시각이 현저하게 달라져 있어 선교하기가 훨씬 쉬웠다.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을 양대인(洋大人)이라 하여 아주 권력있는 이로 생각하였고 한국인 관리들도 선교사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1898년 연회보고서에는 이전에 감리사 일을 보면서 수원과 공주선교 책임을 감당하였던 스크랜턴의 보고와 불과 몇개월 사역하지 않은 스웨어러 선교사의 보고가 나온다. 스웨어러를 파송한 후에도 스크랜턴은 얼마간 서울이남 선교를 직접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우리는 두 도시(수원과 공주)에서 직접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남쪽으로 가는 길 양쪽에 위치한 13개 마을이 있는 한 지방(A District)에 315명의 학습인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미 13개 마을에 복음이 퍼져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지명을 거명하지 않아 어느 지역에 복음이 퍼져나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앞서 1896년에 언급한 수원 인근지역은 물론 13개 마을 안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나머지는 과연 어느 지역일까.



  이런 궁금증은 같은 해 스웨어러의 보고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그는 "충청도 안에 있는 많은 어둠 속에 있는 마을들 가운데서 작은 불빛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홍주 부근에 나는 사업(신앙공동체)를 조직하였다."6)고 보고하였다. 이 보고는 선교사의 보고 중 충청도에 관한 최초의 보고로 이제까지 수원부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서울이남선교가 충청도로 확산되었다는 공식적인 보고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홍주 부근은 앞서 말한 류제가 세운 덕산 지역의 신앙공동체로 보인다. 자생적인 신앙공동체로 시작한 홍주 부근의 신앙공동체는 선교사가 직접 방문하여 세례를 주고 교회를 조직함으로 공식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1898년에는 충청도의 중심지인 공주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어도 그곳까지 가는 길목인 수원 부근 그리고 충청도의 홍성 등지에 복음의 싹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3.수원선교의 시작과 최초 신앙공동체의 시련 - 수원읍교회의 창립



  이와 같이 미약하나마 충청도 지역에 선교거점이 생겨나기 시작함으로 이제까지 하나로 묶여 있던 수원, 공주 순회구역은 각각 수원 순회구역과 공주 순회구역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선교지도 조금 더 확대되어 1899년에는 전해의 13개 마을에서 15개 마을로 사업지가 늘어났다. 스웨어러가 남쪽지방 전담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한지 1년이 지난 후였다. 이 해의 획기적인 사업의 진척은 수원에서의 선교사업 착수이다. 1899년의 스웨어러 선교사의  수원구역에 관한 보고는 다음과 같았다.



"스크랜턴 박사의 보고대로 공주에서는 아직 사업을 시작하고 있지 못합니다. 반면 우리는 적어도  수원에서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영향력있는 위치에 있는 교인들 몇 사람이 서울에서 이사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7)



위의 보고는 수원순회구역 전반에 관한 보고가 아니라 특별히 수원에 관한 보고이다. 이 보고는 수원선교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보고이다. 이 보고에 의하면 수원선교는 1899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스웨어러는 서울이남선교를 맡으면서 예전부터 선교부가 추진해 왔던 수원과 공주에 선교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이곳에 하루 빨리 서울이남선교를 지휘할 수 있는 선교기지(Mission Station)를 설치하는 것이 선교부의 주된 목표였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미감리회 선교부는 이미 4-5년 전에 서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가장 전망있는 도시에 선교부를 세우려 하였다. 이러한 선교부의 결정에 따라  각각 제물포와 평양, 원산에 선교부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유독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서울이남에는 선교부 설치가 늦어지고 있었다. 선교부에서 서울이남 선교의 거점으로 삼으려 한 수원에 한국인 사역자를 보내 선교의 거점을 마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정조 이후 조선의 국왕들은 이 도시를 수도 한양과 마찬가지로 나가의 통치 이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수원성의 수령들은 이방인의 종교가 수원에 전파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독 기독교 선교를 엄격히 다스리고 있었다. 이런 정황이었으나 선교부에서는 서울이남 선교의 교두보(橋頭堡)로 수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담당 선교사인 스웨어러는 이런 선교부의 바램을 부담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정황 속에서 1899년 보고에서 스웨어러는 수원에서 선교사업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위의 보고서에 의하면 서울에서 영향력 있는 교인 몇 사람(Several Christians in Influential positions)이 수원으로 이사와서 선교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선교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일부러 서울에서 이사해 온 것이다. 즉 위의 보고서에 나타나는 분위기는 선교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몇 사람을 수원으로 이주시킨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다시 말해 위의 보고서에서 스웨어러가 본격적인 수원선교를 위해 우선 선교전략상으로 영향력 있는 믿을만한 사람들을 보내어 수원선교의 정지작업(整地作業)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수원선교는 1899년부터 시작되었고 아울러 이 해를 수원종로교회가 창립된 해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서울에서 이사온 영향력 있는 교인 몇 사람에 의해 수원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이 보고는 계속해서 수원순회구역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99년 당시 수원감옥에는 한 무리의 교인들이 갇혀 있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은 수원 남쪽의 한 선교구역에 속한 이들로 부당한 관리가 무고죄로 잡아넣어 오랜 감금생활을 하고 있었다. 스웨어러가 이 사건에 관한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교인들이 아무 죄가 없고 다만 신앙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교인들은 감옥 안에서도 성경공부와 찬송과 기도를 하기 위해 계속 예배를 드렸다. 그 결과 감옥에 갇혀있는 1년 동안 많은 이들을 감화시켜 적지 않은 개종자가 생겼다. 그래서 원래는 4명이던 죄수가 이제는 15명이 되어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신실한 신앙이 아닐 수 없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은 수원남쪽의 감리교선교지로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스웨어러는 이들을 수원이남의 교인들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당시 수원이남 지역의 감리교 선교지는 오산의 장지내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으므로 감옥에 갇힌 이들은 이 부근의 신앙공동체의 형제들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어떻게 보면 1894년 평양의 기독교 박해사건과 비슷하였다. 5년전 평양의 관리들은 기독교 선교를 할 수 없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김창식과 오석형을 가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외무대신까지 나서 그 사건을 무마할 정도였다. 이 사건 이후 오히려 평양사람들이 당당하게 교회에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원의 관리들은 사역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들을 옥에 가두었으나 이들은 감옥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이 1899년에는 혹독한 시련을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지역의 신앙공동체가 선교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회를 기다리며 계획했던 수원선교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수원을 중심으로 한 수원순회구역이 든든한 선교기반을 마련한 해였다. 스웨어러가 순회하며 열심히 선교하고 한국인 사역자들 역시 힘써 복음을 전해, 해가 갈수록 복음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1899년부터 1900년 사이의 1년 동안 가장 눈에 띄게 성장한 지역은 이천과 광주(廣州)지역이었다. 이천 선교사업의 중심지인 덕둘에서부터 죽골과 죽산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광주지역에는 광주이외에도 4개의 신앙공동체가 부쩍부쩍 자라고 있었다. 서울이남지역의 감리교인들도 해마다 거의 두배 씩 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서울이남선교가 급진적인 진전을 본 데에는 여성사역자들의 헌신적인 전도도 큰 몫을 하였다. 여성사역자들은 미감리회 해외 여선교부(Woman's Foreign Mission Board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서 파송한 전도부인이었다. 1899년에는 서울이남 선교를 위해 3명의 전도부인을 파송하여 사역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에는  여선교사들이 복음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여성들을 택하여 전도에 필요한 성경 등을 가르쳐서 선교지에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관습으로 볼 때 이와 같이 전도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이들은 시부모와 남편봉양 그리고 자식부양의 굴레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과부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자 의사로 여성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커틀러(M.M.Cutler)8)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몇몇 지역을 방문하여 여성사역자를 격려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특별히 여선교사가 직접 선교지를 방문하여 여성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효율적인 선교방식이었다.





제 2장. 수원읍교회의 조직



1.1900-1901년 사이의 수원 순회구역



  수원순회구역의 선교는 1900년과 1901년 사이에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제까지 오산 장지내  일대와 시흥 일대 그리고 광주와 여주 일대에 생겨난 작은 신앙공동체는 1900년대에 들어 급속도로 번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우선 미감리회 여선교부에서는 1900년 수원순회구역에서 가장 오래된 장지내교회에 여자매일학교를 설치하고 상동교회에서 일하고 있던 충실한 전도부인인 김사라를 이곳에 파송하였다. 이 학교를 위해서 스크랜턴 대부인이 학교 설립기금을 마련하여 학교 건물로 사용할 수 있는 한옥 한 채를 구하였다. 당시 학교는 쉽게 말해서 서당으로 생각하면 쉽다. 즉 학교건물이래 봐야 특별한 건물이 아니라 평범한 한옥이었다. 그렇지만 여성교육을 위해 아직 봉건적인 관습이 뿌리깊게 남아 있는 지방에 소녀매일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00년에서 이듬해까지 1년 동안 수원순회구역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전의 전기를 마련한 곳은 수원을 비롯하여 시흥 그리고 광주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기간동안 시흥지역의 감리교 선교는 무지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890년대 후반에는 1896년경 설립된 덕고개교회와 범고개 교회 등 지금의 안양시에 2-3개의 감리교 신앙공동체가 있었다. 이중에서 덕고개교회는 1896년 감독이 수원으로 선교시찰을 나섰을 때 하루 밤을 쉬어간 곳이고, 범고개 교회는 스크랜턴이 1897년 어머니를 모시고 내려가 8명에게 세례를 준 곳이다. 이 두 교회는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1900년 들어 시흥지역의 선교중심지는 무지내 교회로 바뀌었다. 무지내 교회는 현재 시흥시 무지동에 위치한 교회로 1901년 당시로는 대단한 예배당을 봉헌하였다. 이 교회는 1899년에는 입교인이 1명, 학습인이 41명으로 총 교인이 42명, 1900년에는 각각 5명과 41명으로 총 교인 46명, 그리고 1901년에는 입교인 16명, 학습인 92명으로 총 교인이 108명에 이르는 등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 교회가 크게 부흥한 이유는 배재학당을 다닌 열심있는 사역자인 김동현의 노력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결과 고향에 큰 교회를 봉헌할 수 있었다. 이 예배당은 1900년부터 시작하여 1901년 연회이전까지 건축되었으며 당시로는 큰 예배당이었다. 이와 같이 1900년대 초에는 무지내교회가 시흥과 안양 일대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 교회가 얼마나 주목을 받은 교회인가 하면 연회를 주재하러 미국에서 온 감독이 직접 내려가 봉헌식을 주재할 정도였다. 1901년 무지내 예배당 봉헌식에는 여선교사를 포함한 재한 감리교 선교사가 거의 참석하였다.9) 한편 무지내교회는 교회건축을 하면서 한국인 사역자의 사택과 매일학교 건물을 함께 지었다. 사택에는 선교사들이 쉬어갈 수 있는 방을 만들어 놓았다. 그 무렵 선교사들이 선교지 순행을 할 때 잠자리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는데 이런 어려움 때문에 이 교회를 건축할 때 선교사 숙소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또한 교회 옆에 여자매일학교 건물도 함께 지었는데 이 건물 역시 장지내교회와 마찬가지로 스크랜턴 대부인이 건축비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무지내 교회가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처럼 광주, 여주 지역에도 급속도로 감리교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900년 스웨어러는 이 지역 선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함으로서 이미 안정적인 교회가 여러 군데에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천사업의 중심지인 덕둘 교회는 학습인 4명으로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입교인 3명과 학습인 12명이 되었다. 덕둘 교회는 뜨거운 열심으로 예배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사랑방 한 채를 구입하여 그 앞을 놀라웁게 개조하여 한국식 예배당을 지었다. 이 예배당은 지금 거의 완공단계에 있다. 이 예배당을 짓기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는 100명이 넘는 이들이 크고 작은 헌금을 하였다. 여기서 동쪽으로 50리 가면 우리의 다음 번 중심지인 죽골이 나온다. 이곳에는 39명의 학습인이 있는데 이들을 주의 깊게 시험한 결과 12명이 세례 받을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40리를 더 가면 죽산교회가 나오는데, 이곳은 내가 작년에 두 가정을 핵심으로 하여 교회가 조직되었다고 언급했던 곳이다. 이 교회는 꾸준하고도 착실한 성장을 하여서 지금은 5명의 입교인과 28명의 학습인이 있다. 덕둘을 출발하여 서북으로 40리를 가면 다음 중심지인 광주가 나온다. 우리 사업의 큰 중심지인 이 교회에 학습인 39명을 가지고 있다. 4교회를 포함하고 있는 이 지역은 경기도 남동부의 중심지이다."10)  



  불과 1년 사이에 광주, 이천, 여주 쪽에는 선교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러 지역에 감리교 신앙공동체가 속속히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년 전부터 시작된 수원선교는 1901년 혹독한 핍박 후에 드디어 수원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1901년 수원순회구역은 본격적으로 선교의 문이 열린 수원을 비롯하여 무지내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시흥지역과 장지내교회를 중심으로 오산지역, 그리고 1년 사이에 비약적인 선교 결실을 이룬 이천, 여주 지역으로 선교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이와 같이 감리교선교지가 급속하게 늘어난 곳은 서울이남지역만이 아니었다. 평양과 제물포도 많은 선교의 결실이 있게 되었다. 이렇게 교인수가 많아지자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드디어 1902년 지방(District)를 조직하였다. 이때 생긴 최초의 지방은 3개로 북한국지방과 서한국지방 그리고 남한국지방이었다. 지방이 조직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선교의 영역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의 남한국지방은 서울과 서울이남지역 전부를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이 해의 파송기에 나타난 남한국지방(South Korea District)은 2개의 순회구역으로 하나는 서울 순회구역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원순회구역이었다. 감리사는 아펜젤러였다.   



2.감리교회의 수원 선교



  이제까지 우리는 감리교회가 한국에 들어올 때부터 지방선교에 나서게 되는 과정과 서울이남 선교의 시작부터 수원순회구역이 생기기까지, 그리고 수원순회구역의 확대과정과 수원종로교회의 창립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제까지는 말하자면 수원종로교회의 창립과 조직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설명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선교의 흐름을 알 때 비로서 우리는 이 책의 주제인 수원종로교회의 창립과 조직에 대해 보다 분명한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 앞에서 나는 1899년 수원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 신앙공동체의 형성 시점을 바로 수원종로교회의 창립으로 보아야 한다고 서술하였다. 왜냐하면 이 신앙공동체는 미감리교회의 선교 결과 수원에 생긴 최초의 개신교회의 모체로 이 신앙공동체가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어 수원종로교회가 되었다고 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원종로교회가 정식으로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때는 언제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는 1902년 연회록에서 찾을 수 있다. 1902년 연회록에 나타난 스웨어러의 보고는 전 해의 연회부터 그 해 연회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므로 다음의 사건은 1901년의 사건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 교회조직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수원종로교회는 미감리회가 오래 전부터 추진해오던 전략적인 선교거점이었다. 따라서 서울이남선교의 책임을 맡은 선교사는 수원선교에 대해서는 상세한 보고를 하고 있다. 긴 내용이지만 교회창립에 대해 빼놓을 수 없는 기록이므로 전문을 번역하였다.



"나는 지난 연회의 선교관리의 계획에 따라 시간이 나자마자 수원에 어느 한 곳을 확보함으로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그 곳에 사령부(head quarters)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수년동안 우리 사업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지속적인 반 외세 감정이 있었습니다. 지난 여름 동안 여러 명의 중개인을 통해 거점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지만 결실이 없었습니다. 가을에 나는 어떤 한 군데의 부지를 구입하기 위해 김동현을 내려보냈습니다. 그는 우리의 사업을 하기에 매우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그 부지를 구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부지에는 높은 곳에 위치한 작은 집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을 돌아보고는 작은 집의 위치에 숙소(rest house)를 짓기로 하였습니다.  선교부지를 살펴보고 서울로 돌아온 후 나는 수원성의 관리가 그 부지를 매입했다는 이유로 김동현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김동현에게 문서를 되돌려주고 돈을 돌려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체포행위가 우리들을 그 장소에서 쫓아내려는 노력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동료들은 나에게 그 문서를 돌려주지 말고 김동현이 봉급을 받는 정식 조사로 미국공사나 나에게 사정 통고 없이 즉석에서 체포되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석방을 요구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내가 나서서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들고 알렌(H.N.Allen)공사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는 친절하게도 내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었습니다. 2주 동안 그를 석방하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10월 하순 죤스형제와 나는 알렌의 대리인으로 수원으로 내려가 수원유수와 면담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김동현이 구입한 부지가 화령전11)이라는 오래된 공공건물 근처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건물 안에는 현재 왕의 직계조상인 정조의 사당(Shrine)12)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이 왕자의 역사는 비극적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상당히 오랫동안 살아있었기 때문에 이 왕자는 자기가 왕위에 올라보지도 못할 것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치 압살롬같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서 그의 추종자와 함께 중국을 침공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미쳤다고 여기고 감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뒤주 안에 넣은 후 못을 박아 갇혀 죽였습니다. 이때 많은 귀족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한 권세를 잡은 이가 그에게 최고의 영예와 흠모를 드리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장엄하게 수원성 밖에 묻히고 서판(書板)이 세워졌습니다. 해마다 왕족들은 제사를 위해 수원으로 내려갑니다. 14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영혼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어서 그 곳이 매우 신성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왕은 이미 죽은 정조에게 영예를 주려고 한 노력이 성공을 거두어 이곳이 더욱 신성시되었습니다.       



  수원 유수는 부지를 구입한 목적이 기독교인의 예배당을 지으려는 것임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신성모독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이 부지는 김씨가 구입한 목적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래서 증서를 유수에게 되돌려준 후 김씨는 곧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수는 수원의 다른 어떠한 곳에 부지를 구입하더라도 전혀 방해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즉시 두세 군데의 부지가 소개되어 나는 이명숙을 내려보내어 그 중에 한 곳을 구입하였습니다. 그는 곧 북쪽에 대문이 있는 13칸 짜리 초가집을 구입하여 수리를 마친 후 12월에 그곳에 내려가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또 하나의 작은 집과 인접한 땅을 구입하고 여기에다가 오랫동안 계획해 오던 숙소를 지금 건축 중에 있습니다. 이 건물은 개량된 한옥으로 기와로 지붕을 덮었습니다. 이 집은 숙소와 예배당으로만 사용될 것입니다."13)



  위의 내용을 한번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1899년 이미 교인 몇 사람을 이사하게 하여 시작한 수원의 최초 신앙공동체는 1,2년 동안 이렇다할 성장이 없었다. 그래서 미선교부에서는 사역자를 정식으로 파송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선교의 진전이 없었던 이유는 수원성이 다른 지역과는 달리 외국세력에 대한 반감이 농후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수원성은 정조 20년인 1796년 정조가 억울하게 죽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도성이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선왕인 영조에 의해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부친의 묘를 화산으로 옮기고 가까운 곳에 수원성을 축성하였다. 이 성은 약 200년 전인 1796년 한양성에 방불할 정도의 규모로 축성되었다. 이어서 왕위에 오른 순조는 선왕인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화령전을 건립하였다. 이후 왕족들이 해마다 이곳에 제사를 지내러 내려왔으며 유수(留守)를 임명하여 화령전을 보존하면서 이 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 수원성은 국왕의 통치이념을 계승하는 국가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수원에 사는 양반들은 특별히 외세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외세에 의해 국가의 통치이념인 유교가 흔들린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아주 10여 년 전부터 수원선교를 시도하다가 2년 전에는 수원성으로 교인들을 이사하게 하여 본격적인 수원선교를 시작했음에도 아직 이렇다할 결실이 없었다.



  수원선교가 이와 같이 어려웠으나 1900년에 들어서서 수원을 제외한 수원순회구역은 비약적인  진전이 있었다. 스웨어러는 이런 선교의 확산을 기뻐하면서 수원에 이들 지역의 선교를 총괄하는 선교부를 하루 빨리 설치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선교부란 우선 이곳에 상주하여 지역선교를 지휘할 선교사의 주택을 의미한다. 일단 선교사 주택이 들어서면 교회와 병원, 학교 등 선교기관이 주로 밀집되게 되어 복합선교기지(Mission Compound)로 발전하게 된다. 1900년에는 서울의 정동에 선교기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평양과 제물포 등지에 선교기지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스웨어러는 다른 지역의 선교기지를 구입할 때처럼 한국인 사역자를 내세워 부지를 구했다. 이런 방식은 선교사들이 즐겨쓰던 방식이었다. 수원에서도 이렇게 몇 사람을 내세워 땅을 사려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스웨어러는 김동현을 보내어 땅을 사도록 하였다. 김동현은 그 해 봄에 수원과 가까운 시흥의 무지내에 견고한 신앙공동체를 조직하고 미려한 예배당까지 건축한 믿음직한 일꾼이었다. 결국 그 해 가을에 수원성 높은 곳에 작은 집이 딸린 부지 한 군데를 매입할 수 있었다. 김동현이 무지내 사람이니까 수원에 일가 친척이나 친구들이 있었을 터이고 이런 사람들을 통해 어렵게 좋은 부지를 구했을 것이다. 김동현은 곧 스웨어러에게 이 부지 매입을 보고하였다. 스웨어러도 이를 기뻐하며 수원에 곧 내려와 보았다. 스웨어러는 높은 곳에 위치한 이 부지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서울의 선교부도 약간 언덕에 위치해 있었고 평양의 선교부는 아주 산 중턱인 남산에 자리잡고 있었다. 배재학당 자리는 당시 약간의 언덕에 위치해 있었고 스크랜턴 대부인이 이화학당을 시작한 곳도 약간 언덕 위에 있었다. 선교사들이 높은 곳을 선호했다는 것은 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 자리와 얼마전 목원대학교 자리를 보면 더욱 명확해 진다.



  스웨어러는 이 부지에 숙소(Rest House)를 짓기로 하였다. 숙소를 지으려는 목적은 수원순회구역의 중심지인 수원에 한국인 사역자를 주재시키기 위함이었다. 스웨어러는 수원에 한국인 사역자들을 주재시켜 수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순회구역을 수시로 순회하면서 선교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곧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문제는 김동현이 구입한 부지가 화령전 부근에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수원유수는 김동현이 외국인 선교사의 대리인으로 그 부지를 구입한 것을 알고는 곧 바로 김동현을 체포하였다. 수원유수는 선교사들이 부지를 구입한 목적이 예배당을 지으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수원성의 수령인 유수의 주요 직무의 하나는 바로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화령전을 잘 보존하는 것이었다. 수원유수의 입장에서 볼 때 국가적인 통치이념이자 유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숭상하기 위해 세운 화령전 옆에 이교(異敎)인 기독교의 성전을 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성모독이었다. 그는 김동현에게 땅문서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그가 지불했던 돈을 되돌려 받으라고 하였다. 이런 소식은 곧 스웨어러에게 알려졌다.



  선배 선교사들은 이런 비슷한 사건을 몇 차례 경험한 적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894년 감리교회의 개척선교사로 파송된 홀이 당했던 사건이었다. 이때도 평양감사는 선교사인 홀을 잡아 가두지 못하고 그의 조사인 김창식와 오석형등을 가두었다. 서울의 선교사들은 미국공사에게 연락하고 미국공사는 외무대신에게 항의를 하여 가까스로 김창식을 빼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그때보다 선교사를 포함한 외국인들의 힘이 막강하다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을 양대인(洋大人)이라 부르며 그들의 권세를 두려워했다. 1890년대 말 조선은 그야말로 열강들의 각축장이었고 한국인들은 조정을 뒤흔드는 외국인들의 막강한 권력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외국인들의 권세를 알고 있었으므로 주위의 동료들은 김동현이 선교부로부터 월급을 받는 스웨어러의 정식 조사(助師)이고 그를 체포하기 전에 미리 미국공사나 선교사에게 사전 통보하지 않은 점을 들어 그의 석방을 요구하라고 충고하였다. 즉 선교사가 고용한 한국인을 선교사나 미국공사의 동의없이 체포하였을 경우 외교적인 마찰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당시 사회분위기로 볼 때 외국인의 권위는 하늘 높은 줄 몰랐을 때이므로 수원유수가 선교사가 정식으로 고용한 한국인을 마음대로 체포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라고 볼 수 있었다.



  먼저 스웨어러가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원유수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또 다시 벽에 부딪히자 스웨어러는 당시 미국 공사로 있던 알렌(H.N.Allen)을 찾아갔다. 장로교 선교사였던 알렌은 1884년 의사의 신분으로 입국하여 한국의 대신인 민영익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제중원에서 일하다가 외교관으로 변신하여 주한미국공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원래 선교사였던 알렌은 선교사들의 어려움을 십분 이해했으며 이 문제를 매우 친절하게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였다. 위의 보고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평양의 선교박해의 경우처럼 외무대신과 같은 정부의 고위 관리를 만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였을 것이다. 2주 동안 이런 노력을 기울였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이들도 국왕이 신성시하는 곳에 예배당 건축을 허가하도록 압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알렌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들고 말았다.



  결국 미감리회의 죤스와 스웨어러가 미국공사 알렌의 대리인으로 수원유수와 면담을 갖고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죤스는 당시 미감리회 전체 선교를 책임지고 있던 총리사(Superintendent)였다. 죤스는 미감리회의 대표자격으로, 스웨어러는 이 지역 담당선교사로 이 문제에 대해 실제적인 책임이 있었다. 미국공사의 대리인 자격이란 미국공사가 직접 면담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상당히 외교적인 무게를 가진 만남이었다. 국왕이 열강들의 압력에 좌지우지하던 시대적 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수원유수는 미국공사를 대리한 이들을 정중히 맞이하였다. 처음에는 선교사들도 이 부지매입에 대한 허락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수원유수는 이 부지에 예배당을 건축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이를 정중히 거절하였다. 설명을 들은 죤스와 스웨어러는 조선인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신성모독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수원유수는 이 땅의 계약을 취소하면 김동현을 곧 석방할 것이며 수원의 다른 곳에는 얼마든지 부지구입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결국 선교사들은 수원유수의 요구대로 이 땅의 계약을 취소했다. 그러자 김동현이 곧 석방되었다. 그는 약 1-2개월간 감옥에 갇힌 것으로 추정된다.14) 겉으로 보면 수원유수의 일방적인 승리로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선교부는 이로써 수원유수의 보호아래 당당하게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보수적인 양반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수원유수가 이를 허락한 이상 드러내 놓고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스웨어러는 곧 수원의 다른 지역에 선교부지를 물색하도록 하였다.







  3.수원읍교회의 조직



   스웨어러는 오랜 옥고를 치룬 김동현 대신 이명숙을 파송하였다.15) 이명숙은 13간짜리 초가집을 북문 안에 구입하고 수리를 마친 후 가족을 데리고 그 해 12월 그곳에 내려가 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1901년 12월 수원에 한국인 사역자가 주재하면서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곧 인접한 땅과 작은 집을 구입하고 그 부지 위에 선교부에서 오랫동안 계획해오던 숙소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17일에 남자 3명과 여자 4명의 첫 열매가 등록하였다. 이들은 양반 출신으로 한문에 능한 이들이었다. 또 베크(S.A.Beck)선교사의 친절한 도움으로 15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남자매일학교를 시작하였다. 이 부분은 수원읍교회 창립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기사이므로 그대로 옮겨 적는다.







"Mr. Yi Myung Suk went to work immediately to build up a work, and on Feb.17th I enrolled the first fruits: three men and four women. By April 24th the number had increased to 19 persons. They come from the best class and are, so to speak, educated people knowing both languages. Also through the kindly aid of Beck we have opened a day school for boys with an enrollment of 15. The christians meet at the house occupied Brother Yi and it now becoming to small to comfort"16)



"이명숙이 일을 즉시 착수해서 나는 2월 17일에 남자 3명과 여자 4명을 첫 열매로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월 24일까지 그 수는 19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상류사회 출신입니다. 말하자면 2개 국어를 하는 교양인입니다. 또한 베크 형제의 친절한 도움으로 우리는 15명으로 남자매일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교인들은 지금까지 이씨가 사는 집에서 모이고 있는데 지금은 그들을 수용하기에 너무 작습니다."







  교인들은 이명숙17)의 집에서 모여 예배드리기 시작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예배를 드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명숙이 구입한 집은 초가집으로 이런 정도의 규모이면 큰 방이라도 열 명 정도 들어가면 꽉 찼다. 1902년 4월 24일까지 교인수가 19명에 이를 정도였으니 예배드리기에 매우 옹색하였다.



 



  이와 같이 1899년 수원 최초의 신앙공동체인 수원읍교회가 창립18)되고 나서 2년여 지난 1902년 2월 17일 정식으로 수원읍교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니까 1899년 처음 시작한 수원최초의 신앙공동체는 2년여 동안 선교의 결실이 없다가 1902년 정식으로 교회가 조직되었다. 교회의 조직은 성례를 베풀 수 있는 목사의 집례 아래 세례를 베풀고 정식으로 입교인을 받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수원종로교회에서 1900년을 창립년도로 지키어 오던 것이 1899년으로 정정되어야 한다. 수원종로교회에서 1900년을 창립년도로 지켜온 이유는 1937년 <감리회보>기사를 참고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기사는 여러 가지 점에서 오류가 발견되므로 이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러면 왜 이 기사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 살펴보자. 이 기사는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탐방으로 교회 역사부터 현재의 교회의 선교상황까지 자세히 나와 있다. 이 기사에서 교회창립에 관한 기사를 빼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89년 을축(乙丑)에 수원군 동탄면 장지천에서 이미 주의 복음을 들은 이들이 기쁜 소식을 환영하자는 결의가 있게 되자 1900년에 미감리선교사 서원보씨와 그 부인이 경성으로부터 수원에 도착하여 북문 안에 와가 10여간을 건축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관가의 제재(制裁)로 인하여 건축을 뜻대로 진행치 못하게 될 때에 고(故) 아펜젤러 목사가 와서 관가를 방문하고 "교회건축을 제재하려면 먼저 군주께서 계신 서울의 모든 교회와 기관을 파한 후 행하시오"하고 말하매 즉시 허가되어 건축하여 준공하니 이것이 처음 예배당과 주택이다."







  이 기사는 1937년에 기술된 기사로 교회 창립과는 거의 40여 년의 시차가 있다. 그러므로 앞에 소개한 연회록보다는 정확하지 못하다. 연회록에 나온 선교사 보고는 그 해 기술한 보고서로 이보다 더 정확한 자료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위의 창립에 관한 줄거리는 앞의 연회록과 많은 차이가 나고 있다. 연회록에는 거명되지 않은 아펜젤러가 교회건축을 방해하는 관리들을 향하여 국왕이 사는 서울의 모든 기관과 시설을 없애고 수원에도 예배당을 없애라고 말함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앞서 말했듯이 연회록 보다 신뢰할만한 자료가 아니다. 아마도 이 내용은 후대 교인들이 구전으로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창립 당시에는 선교사들이 모든 것을 주관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한국인 교인들이 창립내용을 거의 알지 못했으며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그 내용이 많이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지금 수원교회에서 지키고 있는 창립년도는 1937년의 감리회보를 근거로 한 듯 보이며, 이는 앞의 연회록과 비교할 때 상당한 오류가 발견되므로 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한편 앞에서 소개한 보고서를 통해 수원읍교회 최초의 예배당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앞의 보고서의 의하면 최초의 예배당은 바로 1901년 이명숙이 구입한 초가집이고, 그 곳에서 바로 삼일학교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초의 삼일학교 교사가 어디였는지를 살펴보면 바로 수원읍교회의 최초 예배당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이 부분에 관해 <삼일학원 팔십년사>를 저술한 김세한씨는 최초의 삼일학교 교사 뒷집에 살았다는 이규성(李奎成) 옹의 회고를 채취하여 그 위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가 열 일곱 살 때에 삼일학원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교회는 한 해 앞서 설립되었으며 때는 나뭇잎들이 퍼렇게 무성한 5월이었습니다. 그 때 나의 넷째 삼촌되는 이하영 씨가 한문선생이었죠. 삼촌은 한문을 많이 공부한 분으로 한문으로 된 신구약 성경을 읽고서 전도사가 됐습니다. 나는 공부하러 가지는 않았으나 삼촌이 하는 학교니까 드나들며 구경을 했습니다. 형편없는 학교였지요. 지금처럼 책상, 걸상이 무업니까. 땅바닥에서 공부했어요. 학생이 열 명은 넘었습니다. 그후에 서울 배재학당에서 왔다는 채선생이 영어와 산술을 가르쳤죠. 맨 처음 온 전도사가 이검파 선생이라는 이면석(李冕錫)씨였고 그 다음이 김상배(金相培)씨였고 그 다음이 삼촌 이하영 전도사였습니다."19) 







  위의 회고는 예배당과 학교를 함께 사용했다는 최초의 예배당에 관한 회고이다. 이규성 옹은 학교가 교회보다 일년 후에 세워졌다고 회고하고 있는데 이렇게 회고한 이유는 이명숙이 수원에 내려와서 집을 구하고 거주하기 시작한 때를 교회시작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학교의 시작은 분명 1902년 5월 이전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15명으로 학교를 시작하고 있다는 스웨어러의 보고는 1902년 5월 1일에 열린 연회보고로 연회 이전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된 최초의 예배당은 1984년 김세한씨가 <삼일학원 팔십년사>를 쓸 당시까지 만해도 지붕만 개조한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사진) 김세한씨는 이 책에서 수원 최초의 예배당이자 삼일학교 교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삼일학원이 보시동에서 개교할 당시 교사의 구조를 보면 두 칸 폭에 네 칸 장방으로 된 초가였다. 그때 목조교사도 현재 보존되어 있으며 현 북수동 116번지 이윤희(李胤熙)씨가 살고 있는 집의 안채였다. 지금은 짚지붕을 걷어 내리고 기와로 갈아 이은 것이 다르다. 학교 앞에 너른 채마밭이 당시 그대로 있으며 감나무가 여러 주(株) 숲을 이루고 학교 앞에 있었던 주씨의 집 창고도 80년전 삼일학원을 말해 주는 듯 옛 모습 그대로 존속해 있는 것이다. 교회 옆 샛길 동쪽에 초가집이 또 한 채가 있어 800여평의 토지 안에 교회는 두 채 초가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 북쪽에 두 칸 방이 붙어 있었는데 선교사들이 올 때면 이곳에서 숙식을 했다는 것이다."20)



  1984년까지 최초의 예배당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위치는 북수동 116번지이다. 김세한씨는 800평 토지 안에 두 채의 초가집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 중에 한 곳이 예배당으로, 북쪽에 두 칸 방이 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곳에 대해서는 선교사 보고서에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최초의 예배당과 최초의 삼일학교가 같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과 그 곳이 바로 1984년 당시 북수동 116번지였다는 것이다.



  제 3장. 기틀을 잡아가는 수원읍교회



  1.버딕의 부임과 수원읍교회의 발전



  190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원선교는 해가 거듭될수록 커다란 발전을 하였다. 1903년 초에는 예배당으로 병행해 쓰는 한국인 사역자 주택과 수원순회구역 사역자들을 위한 숙소, 그리고 매일학교가 들어서면서 초기 단계의 선교부가 세워지게 되었다. 여성선교도 1902년부터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1902년 여선교부에서는 하몬드(Alice Hammond)21)와 피어스(Nellie Pierce)22)를 파송하였고 이듬해 구다펠(Minerva Guthafel)23)을 파송하였다.24) 이들은 상동교회를 중심으로한 상동구역을 맡으면서 공주를 포함하는 서울이남지역 전체의 여성사업을 맡게 되었다. 한편 그해 남녀 매일학교를 시작하여 교육를 통한 선교에 나섰다. 이와 같이 교육사업을 통해 수원선교를 시작한 이유는 수원이 다른 지역에 비해 양반층이 많아 교육열이 상당적으로 높았기 때문이었다. 수원의 매일학교에 관해서는 이후에 보다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수원은 수원순회구역의 중심지로 서울이남의 감리교 선교구역 중 충청도 지역을 제외한 경기도 일대를 선교구역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이 넓은 선교구역을 지원할 여러 시설이 긴급했다. 앞서 말한 대로 선교사들을 위한 숙소, 그리고 학교와 병원과 남선교사와 여선교사들이 기거하며 선교할 수 있는 주택이 시급하였다. 그래서 1901년 한국인 사역자가 기거할 주택을 마련하고 1902년부터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수원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예배당 부지를 비롯한 선교부 부지를 물색하였다. 1902년 이명숙은 인접한 지역에 작은 집이 달린 부지를 매입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오랫동안 계획해 오던 선교사를 위한 숙소를 지었다. 이 곳은 개량된 한옥으로  흙벽돌로 벽을 만들고 그 위에 기와로 지붕을 얹혔다. 이렇게 해서 1902년부터는 예배처소를 이명숙의 집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1902년 봄의 일이다.25) 이 집이 앞에서 김세한씨가 기술한 1984년 당시 북수동 116번지의 집이다. 다시 말해 이 집에는 예배당과 선교사 숙소로 쓰이는 한옥집 한 채와 학교 교실로 사용하는 집 한 채가 있었으며 1901년 구입하여 이명숙이 살고 있던 집은 이 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이와 같이 수원읍교회를 중심으로 수원선교부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한편 감리교회에서는 1901년부터 비로서 지방이 생기게 되었는데 서한국지방(West Korea District)과 북한국지방(North Korea District) 그리고 남한국지방(South Korea District)이 그것이다. 남한국지방의 경계는 서울의 상동교회를 비롯하여 서울이남지역 전체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때는 아직 수원에 선교부가 들어서지 않을 때로 수원순회구역의 중심교회는 수원읍교회로 장지내와 아리실교회26)가 속해 있을 정도였다. 1903년에 수원에 남,녀매일학교와 선교사 숙소 그리고 한국인 사역자 주택과 예배당이 마련되자 이듬해부터는 수원순회구역은 인근의 시흥순회구역과 남양순회구역27)까지 선교구역이 확장되었다. 수원순회구역이 이처럼 확대되자 선교부에서는 이곳 전담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이름은 버딕(G.M. Burdick)이었다.28) 버딕이 본격적으로 수원선교를 책임지게 된 때는 1904년 이후이다.29) 그는  1년간 스웨어러를 도와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선교의 현장을 익혔다.      



  버딕이 수원선교부에 전속으로 일하게 되었다. 스웨어러는 초임선교사인 버딕을 도우면서 주로 공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선교를 감당하게 되었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됨으로서 수원은 교통의 중심지로서 더욱 선교가 활발해 졌다. 경부선은 1901년 착공하여 전체적으로는 1905년에 개통되었으나 부분적으로는 이미 1903년 말에 개통되어, 서울 주재 선교사들이 하루에도 두 번씩 수원에 올 수 있었다. 아직 수원에는 선교사 주택이 없었다. 철도가 생기자 수원은 인구가 계속 늘어났고 명실공히 수원은 경기도 행정의 중심지로 서울이남 선교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수원이 선교의 중심지가 되면서 수원읍교회는 교인들이 급증하였다. 버딕은 "교인수가 160명이나 되며 교인들의 신분은 아주 상위권으로 훌륭하게 보이는 많은 노인들과 매우 유력한 청년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부녀자도 6,70명이나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보고하고 있었다.30) 1902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원읍교회는 불과 2년 사이에 이처럼 교인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3,40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출석하는 열성적인 교인들도 있었다. 특히 선교초기부터 여선교사들과 전도부인을 파송하여 선교한 결과 여성들이 많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이렇게 교인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이들 중에는 다른 목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도 많았고 또 이사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중도에 포기하는 예는 그들에게 닥친 문제 때문에 교회를 찾았다가 교회가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주지 못하자 그만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들의 입교동기는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순수하지 못했다. 이 무렵 교회가 민족을 구원할 것이라 믿어 입교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들 중에는 선교사들의 철저한 현실 도피적인 태도에 실망하여 다시는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동기로 교회에 나왔다가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완전히 입교한 이들도 있었다. 1905년에만 62명의 교인을 정리하였으나 새 신자로 등록한 이가 98명이나 되어 전체적으로 수원읍교회의 교인증가는 계속되었다. 상당수가 나가고 상당수가 들어왔으며 그 중에 많은 이들이 참된 교인이 되었다.  



  한편 버딕은 특히 이 해 한국교회의 자급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추진하였다. 이때까지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한국인 사역자들의 사례비를 당연히 선교사들이 책임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고루한 생각은 수원읍교회가 특히 심했다. 이미 오래 전에 평양과 제물포지역에는 교인들이 스스로 나서서 예배당을 짓기도 하였으나 수원읍교회는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없었다. 어쩌면 교회가 창립된 지 불과 3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나 버딕은 이런 의존적인 사고방식이 선교의 상당한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수원순회구역에서 선교사로부터 월급을 받는 한국인 사역자들의 생각부터 바꾸려 노력을 하였다. 즉 그들이 당연히 생활비를 선교사들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교인들의 헌금으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려 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의 선교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선교비로 한국인 사역자들의 생활비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선교사업에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원읍 교인들에게도 한국인 사역자들의 봉급은 그들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교인들 중에는 이런 선교사의 태도에 반감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이렇게 사역자들과 교인들에게 자급정신을 불러일으킨 결과 1905년 수원읍교회 교인들은 한국인 사역자의 월급을 한국 돈으로 미화 60불에 상당한 돈을 모았다. 이 정도면 수원읍교회로는 많지 않은 금액이었으나 반감을 가진 적도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상당한 진전이었다.    



   이명숙 전도사는 1901년 수원에 내려와서 살면서 본격적인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가 수원에 내려올 때는 아직 권사과정에 들어가지 못한 속장이었다.31) 이명숙은 1903년 연회록에 비로서 수원순회구역의 권사 3년급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해부터 그는 수원순회구역의 파송기에 명단이 빠지고 그 대신 "버딕과 김상배 보충"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1903년부터는 이명숙 대신 김상배 전도사가 파송되어 버딕을 도와 사역한 것으로 보인다. 김상배 전도사의 이름은 1904년까지 연회록에 나오는데 그 이후에는 수원순회구역 파송기에 버딕만 나오지 다른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이를 통해 버딕은 본격적으로 수원선교를 책임지면서 수원선교부의 사역자를 다른 선교현장에 배치하고 자신이 수원읍교회를 직접 담임하면서 수원선교를 지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상배 전도사는 1904년경 교역을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32) 그에 관해서는 1937년 <감리회보>에 나오는 수원읍교회 담임전도사 재직 시에 "교회발전을 크게 도모하는 중 교회청년을 위하여 청년회를 조직하고 각 방면으로 전도활동을 하였다. 어느때 교인중 한사람이 무슨 사고로 관가에 피착(被捉)되였는데 청년회에서 군수에게 직접 교섭하여 무사 방면케하니 기세가 더욱 크게 일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상배 전도사 다음으로 수원읍교회에서 사역한 이는 이하영(李夏榮)전도사이다. 그에 대해 1937년 <감리회보>에 실린 수원읍교회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의 공로를 기술하고 있다.



  "본교회 유공자 이하영 목사는 교회창립시대부터 현재까지 유공한 목사이시다. 목사는 건전하고 기운찬 분으로서 초창 당시 사회의 명망이 높았던 착실한 청년이었다. 주를 믿자 사회적 악에 대항하는 투사가 되고자 기도하던 중 주님의 부르심을 깨달고 중생의 길을 시작하였다. 곧 현실적 생활에서 오는 윤택미를 잃고 불운과 고민에 떨며 나약한 사람을 위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함축된 주의 복음을 정하여야 하겠다는 가장 침통(沈痛)한 아픔과 희열을 느꼈다. 그러므로 온 몸에 큰 변동이 일어나 이 모든 뜻을 이해하여 종(從)으로 본교회 창립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변의 지조와 횡(橫)으로 조선일대에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목사. 본교회는 물론이요 조선교회의 유공한 분이시다."



  연회파송기에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그냥 버딕 혼자서 수원교회를 담임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 무렵 그는 삼일학교와 삼일여학교 학당장으로 일하면서 버딕을 도와 수원읍교회 보조사역자로 겸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하영전도사는 수원읍교회의 초기 교인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1902년 개종한 이래 삼일학교를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그의 개종동기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으나 앞서 설명하였듯이 수원읍교회가 조직되자마자 초기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삼일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보아 그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통한 교육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개종한 것으로 보인다. 개종 후 삼일학교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동안 선교사들과 깊은 교분을 가지게 되었으며 스웨어러와 후임인 버딕은 그를 사역자로 추천하여 사역자 진급과정을 밟게 되었다. 1905년까지는 이명숙과 김상배 전도사가 수원읍교회를 담임하였고, 이후 버딕을 도와 수원읍교회에서 사역하였다. 이 무렵 그는 속장과 권사과정을 밟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02년 개종한 후 아무리 빨라도 본처전도사 과정에 진급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정식으로 전도사 직분으로 파송을 받은 때는 1909년이다.33)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