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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100년 이찬수(강남대) #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9 00:00 조회 5,450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100년  이찬수(강남대)



I.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현황



그리스도교는 조선 후기에 소개된 종교이며, 다른 전통 종교들에 비하면 그 연구의 역사도 일천하며, 한국의 그리스도교 전체를 정리한 자료도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연구는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어오고 있지만, 한국의 그리스도교를 대상으로 한 연구의 역사는 100년을 크게 넘지 못한다. 특히 한국인에 의한 한국 그리스도교 통사적(通史的) 연구는 1920년대에 선을 보였다가 침체기를 거쳐 196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정도이다. 한국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관련 자료들은 상당한 정도로 축적되어 왔지만, 한국의 그리스도교 전반에 <대한> 이차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는 아직 미진하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100여년 간 이루어진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결과들을 시기별로 세밀하게 구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사실상 큰 의미도 없다. 연구 태도상으로 보면 초기부터 있었던 호교론적 연구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가 하면, 다양한 방법론이 여전히 혼재해 있고, 연구 주제별로 보면 주로 교회사적 차원의 연구가 두르러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천주교 측 자료나 개신교 측 자료냐에 따라 같은 사람에 따라 평가가 상이할 정도로 이들은 그 동안 별도의 장에서 연구되고 서술되어 왔다. 천구교권의 그리스도교 연구와 개신교권의 그리스도교 연구는 그 주제와 시각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 천주교 관련 연구는 주로 교회사적 차원에서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앙 수용과 전파 과정 및 그 사이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에 관한 연구가 주종을 이룬다. 가령 해방 이후 출판된 한국 가톨릭 관련 연구 자료들 121건(논문 + 단행본) 가운데 통시적으로 다룬 연구는 12건으로 10% 미만이며, 일제 시대 이후의 시기를 다룬 자료들 역시 15건, 10% 정도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78%에 해당하는 94건이 주로 조선 후기 신앙 전래 경로, 초기 교회사, 인물 소개, 전례의 문제 등에 치중해 있다. 특히 해방 이전 자료들은 이 가운데서도 천주교 박해, 순교의 문제를 다룬 '순교자 전기'의 성격이 강하다. 이와 함께 우리 전통 종교 및 문화와의 비교 연구, 민족주의적 시각에 기초한 연구 등 한국적 상황을 중시한 그리스도교 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그나마 초기의 자료는 주로 외국인 주교의 시각에서 본 한국 천주교회 성립과정 및 순교자 현양에 관련된 자료 일색이고, 일제시기에 이르러서는 일본인에 의한 천주교 연구가 일부 있었을 정도로, 한국인에 의한 연구는 일제시기를 지나도록 거의 없었다. 해방 후 유홍렬(柳洪烈)이 천주교회사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최석우(崔奭祐), 이원순(李元淳) 등 일부 교회사가들이 60년대 등장하기 시작한 뒤, 70, 80년대에 들어서야 다양한 연구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수준이다. 70, 80년대 들어 출판되었던 천주교회 통사(通史)인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증보판, 1975), 최석우의 논문집인 {한국천주교회의 역사}(1982), 조광의 {조선후기 천 주교사 연구}(1988) 등에서도 거의 조선 후기나 일제시기 전반부까지의 상황에 머물고 있을 만큼 초기 그리스도교 연구에 치우쳐 있는 형편이다. 여전히 천주교 신앙 수용과 전파 과정 및 그 사이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개신교의 경우도 일제 초기까지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한 개신교 수용과정, 선교상황 및 한국의 실정 소개 등에 연구의 초점이 있었다. 이 가운데 주목할만한 책은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隱者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 1897)이다. 한국 그리스도교 자체를 주로 다룬 연구서는 아니지만,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글을 읽고서 한국 선교에 착수했을 만큼, 미국권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그러다가 한국인에 의한 연구가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에 백낙준(白樂濬)이 한국 그리스도교사(개신교사)를 영문으로 정리하면서부터이다. 이후 3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 신학 자체에 대한 논의가 생겨나기에 이르렀으며, 이후 이것은 한국 신학 사상사적 차원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로 이어졌다. 크게 말해 천주교가 주로 순교자 현양 관련 연구에 치중했다면 상대적으로 개신교는 신학 자체에 대한 논의를 더 중시한 셈이 된다. 그렇더라도 주로 교회사적 차원에서 한국 그리스도교를 연구해왔다는 점에서는 양쪽이 마찬가지이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본격적인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통사 중에는 교회사적 차원에서의 연구가 두드러진다는 말이다.



교회사 차원의 연구는 다시 천주교권의 '순교자 현양을 위한 교회사 연구',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두루 나타나는 '선교론적/호교론적 차원에서의 교회사 연구', 주로 개신교권에서 보이는 '민족의식적 차원에서의 교회사 연구'로 나뉜다. 이 가운데서 순교자 현양 차원의 교회사 연구는 달레(Dallet)의『한국천주교회사』(1874)와 김창문, 정재선 편 『한국 가톨릭의 어제와 오늘』(1963),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증보판)』(1975) 및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역사』(1983), 이원순의『한국 천주교회사』(1970), 박도식의 『순교자들의 신앙: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사』(1978), 김옥회의 『순교자들의 전기: 한국 천주교회 약사』(1986) 등의 두드러진 입장이다.



선교론적/호교론적 차원의 교회사 연구에는 개신교권의 백낙준, 『한국개신교사』(영문판 1929, 한글판 1973), Clark(Allen D. Clark),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1961, rev. CLSK, 1971), 보수적 선교사 신앙의 차원에서 한국 기독교의 의미를 서술하고 있는 김성준의 『한국기독교사』(기독교문화사, 1993) 등이 있고, 천주교에 관해서는 주재용, 『한국 가톨릭사의 옹위』(1970), 양한모,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생각한다』(1982), 최석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1982) 및 『한국 교회사의 탐구』(1982), 유홍렬,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1983), 이원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1986) 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입장의 교회사 연구는 1990년도 이후에도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부각되고 있는 연구 경향은 민족적 차원에서의 교회사 연구이다. 민경배의 {한국기독교회사}(개정판, 1982), 조광의 {조선후기 천주교회 연구}(1988) 및 {한국천주교 200년}(1989),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1989·1990) 등이 대표적이다. 이 민족의식 차원에서의 연구는 송길섭, 이성삼, 전택부, 오윤태, 김광수 등 1970-80년대 교회사가들에 의해서 꾸준히 추진되었다. 그밖에 민족의식을 중시하는 차원의 연구 중에는 이미 18세기에 이루어진 이기경(李基慶)의 {闢衛編}과 같은 서학 비판적인 연구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인 연구들은 아직 서학, 즉 그리스도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이루어지기 이전, 초기 그리스도교사에 흔히 있었던 일이기에, 개신교까지 한국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지난 100년 이래로 이러한 연구는 거의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개신교의 경우 193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근본주의적 선교론의 관점에서 주로 연구되어 왔으나, 그 후 한국적 상황을 중시한 신학논문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1960년대에 이르면 주체적 한국신학, 한국적 그리스도교의 형성을 위한 노력들로 이어지게 된다. 윤성범의『기독교와 한국사상』(1964), 유동식의 『한국종교와 기독교』(1965)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 책들은 한국적 상황에 어울리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적 모색이라는 점에서 관심 깊게 보아야할 연구서들이다. 그리고 이 책들은 80∼90년대에 등장한 본격적인 한국 신학사상사 연구서들, 즉 유동식의 『한국신학의 광맥』(1982), 송길섭의 『한국 신학사상사』(1987), 변선환의 『한국적 신학의 모색』(1997), 그리고 가장 최근에 저술된 주재용의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사』(1998) 등의 사상적 토대로 작용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한국의 정치 현실과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회과학적 시각을 중시하는 민중신학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이러한 움직임을 반영하여 1990년대에는 '민중사관'에 근거한 교회사가 출판되기도 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한국기독교100년사』(1992)가 이와 관련한 최대 작품이며, 이와 비슷한 시각에서 한국 천주교회사를 주제별로 쉽게 풀어쓰고 있는 문규현의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천주교회사』(I·II, 1994)도 의미 있는 자료이다.



비록 민중신학적 한국 교회사가 그리스도교사, 신학사상사 등의 연구로까지 이어지고 있지는 못한 형편이지만,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 안에 사회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1990년대에 역사학과 사회과학적 시각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가 탄생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990년대는 종교학적 시각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기이다.



이상과 같은 흐름들을 토대로 하여 이제부터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역사를 주요 단행본들을 중심으로 상세하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연구의 시각 및 범위







본 연구는 무엇보다도 천주교권 자료와 개신교권 자로를 두루 다루고자 한다. 그 동안은 천주교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와 개신교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가 거의 별개로 이루어져 왔다. 같은 단행본에 들어있는 경우에도 별도의 부분에서 상이한 시각을 가지고 논의되어왔다. 대표적인 사례로 {韓國文化史大系}(第VI卷 宗敎·哲學史. 高大民族文化硏究所, 1970)에서도 천주교사는 [韓國基督敎史(一)]이라는 이름으로 유홍렬(柳洪烈)이, 개신교사는 [韓國基督敎史(二)]라는 이름으로 김양선(金良善)이 비슷한 분량으로 독자적으로 서술했다. 최근의 연구라고 할 수 있을 한국종교학회 주최의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사에 대한 성찰(1997년 가을, "해방 후 50년 한국 종교연구사")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는 분리된 별도의 장에서 다루어졌고, 한국종교사회연구소에서 펴낸 {1945년 이후 한국 종교의 성찰과 전망}(1989)이나 {한국인의 종교}(정음사, 1987)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대다수는 여전히 '교회사' 수준에 머물고 있다. 천주교와 개신교를 망라한 종교학적인 차원에서의 전문적인 그리스도교 연구사는 거의 전무한 형편이라는 말이다.



이와 함께 천주교 교회사와 개신교 교회사를 함께 다룬다고 하더라도 개신교 연구자는 천주교 교회사를 개신교 교회사의 전사(前史) 정도로 다루고, 천주교 연구자는 개신교 교회사에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향이 크다. 이것은 천주교와 개신교의 상이(相異)한 교회관에서 오는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천주교와 개신교를 두루 아우를 수 있는 연구자가 부족하다는 것이 더 큰 이유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에 전래된 초기의 그리스도교는 천주교든 개신교든 모두 '한통속의' 서양종교로 비쳐졌다는 점에서, 이 둘은 반드시 동시에 연구될 필요가 있다. 별개로 연구하는 것은 한국 그리스도교라는 '숲'이 아닌 개개 종파라는 '나무'만 보게 만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사 연구가 천주교와 개신교를 함께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들은 함께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종교학적 시각에서 보자면 천주교나 개신교, 정교회까지 포함하여 모두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분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가령 교회사 연구라면 도가 서술도 가능하겠지만, 그리고 때로는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그리스도교사'라는 이름으로 분리 서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만일 세계종교사의 그리스도교 부분이나, 세계 그리스도교사를 서술할 때 천구교만 서술하거나 개신교만 서술한다면 호교론적 종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시각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난 100여 년간 이루어져 온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태도를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정리하고자 한다. 신학이나 한국 교회사 자체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그 연구의 태도가 어떠했으며, 그 동안 연구자들이 어떠한 시각에서 한국의 그리스도교를 연구해 왔는지 종교학적인 차원에서 종합적이고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려는 것이다. 천주교권 자료와 개신교권 자료를 두루 다루되, 두 자료의 시각이나 연구 경향이 상이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전체적으로는 이들을 구분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천주교 연구와 개신교 연구 모두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일부라는 시각에서 이들을 조화시켜가며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교'라는 말도 천구고와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권 자료와 개신교권 자료의 시각이 상이한 데다가, 대부분의 자료들이 자기 종파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는 현실을 감안하여, 전체적으로는 이들을 다른 장(章)에서 다루겠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일부라는 시각을 가지고서 서로 조화시켜가며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교'라는 말도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하는 말로 사용할 것이다.



그 동안의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는 주로 한국이라는 곳에서 산출된 다양한 장르의 그리스도교 관련 글들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지배적인 경향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연구 제로들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제대로 할 겨를이 없었다. 본 연구는 한국 그리스도교를 가능한 한 통시적이고 전체적으로 다룬 단행본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그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평가해보고자 한다. 교회사 관련 책이든, 신학 사상사 관련 책이든 한국 그리스도교 안에서 전개된 일들을 가능한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는 단행본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일부 관련 논문들을 보조자료로 삼겠다. 그렇지만 개신교의 장로교나 감리교 등 특정 종파만을 다루거나 천주교의 교구 내지는 수도회의 역사 등을 다룬 연구서 및 교육, 사회사업 등 주변적인 사항들을 다루고 있는 것들, 그리고 한국 교회의 특정 인물이나 박해, 순교, 조상제사 등 특정 개념만을 다룬 글들은 제외했다. 먼저한국 천주교 연구의 대표적인 저작들의 내용과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III.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100년







1.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경향





1) 순교자 현양을 위한 교회사 연구들



(1)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1874)



한국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수용과 초기 전파 과정을 비교적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최초의 대작은 한국 밖에서 나왔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인 샤를르 달레(Claude-Charles Dallet, 1829-1878)의 {韓國天主敎會史}(Histoire de L'&Eacute;glise de Cor&eacute;e; Paris, 1874)이다. 달레는 조선에서 전교하던 신부들의 편지와 그들이 불어로 번역하여 보낸 조선측 기록이나 보고들 - 특히 다블뤼(Daveluy) 주교가 조선의 국한문 원자료를 불어로 번역한 자료들 - 에다가 정약용이 썼다는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 등을 일부 참조하여 이 책을 남겼다. 초기의 기록이 순교자 전기를 중심으로 남아있었던 것처럼, 달레의 기록도 순교자에 관한 기록이라면 중복되는 경우에도 삭제하거나 일부러 요약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한다. 그만큼 이 책은 기본적으로 한국에서의 천주교 박해와 순교 등을 중심으로 하여 순교 정신을 현양하려는 종교적이고 호교론적인 목적에서 저술된 책이다.



그것도 한국에는 한번도 머문 적이 없는 외국인 신부의 눈으로 프랑스 측 자료를 중심으로 한 저술인 까닭에 한국 교회 내부의 시각은 반영되고 있지 못하다. 서론에서 조선의 정황에 대해 개관한 이후 본론(전체 2편 9권)에서는 주로 조선 내 프랑스 신부들의 활동 상황과 신자들의 박해 및 순교 상황 등을 담은 서한의 내용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전개 방식은 마치 조선이라는 나라를 실험자가 실험실에서 이렇게 저렇게 '요리해보는' 자세처럼 느껴진다. 조선을 제 3의 땅으로 보고 관찰하는 '객관적 관찰자'의 시각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그곳에 조선 측 관변 자료에서 보이는 교회관련 사회와 정부의 입장 등, 일차적인 자료들이 들어갈 여지는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전모를 밝혀주는 책은 물론 아니다. 더욱이 1871년까지의 일만 수록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러한 문제는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의 실상을 밝히고 있는 대다수의 책들이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불과 2년만에(1872-1874) 비교적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에서, 한편에서는 달레의 천재성을 볼 수도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각종 자료를 고증 없이 성급하게 이용했다는 점도 느껴진다. 가령, 그의 책의 골격은 다블뤼 주교가 프랑스로 보낸 자료들을 근간으로 해서 이루어졌는데, 다블뤼 주교가 불확실하니까 이용하지 말라고 한 자료들까지 저술에 사용한 점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조선 역사와 제도, 언어, 풍속, 관습에 대해 다룬 서설(序說)은 조선의 자료가 아닌, 다블뤼 주교가 모은 자료 및 중국과 일본의 자료 일부를 참조하여 작성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을 중국의 속국 차원에서 묘사한다든지, 조선의 기원을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따라 본다든지, 임진왜란 이래로 부산 지역은 여전히 일본인이 점령하고 있다든지 하는 예 등을 거론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이와 함께 조선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상숭배, 점복, 푸닥거리 등 미신적 행위가 활개치며, 유교와 불교라는 '저급한' 종교적 전통들만 지니고 있다는 식으로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조선의 천주교인들의 신앙에 대해 논할 때는 모두 좋은 가문의 영재들이라는 식으로 주로 묘사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보잘것없지만, 천주교인이 된 자는 한결같이 훌륭한 자들이라는 '천주교 우월적' 시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분량으로나 체계로나 달레의 책은 초기의 책이면서도 여전히 당시의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을 가장 상세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이고 기초적인 책으로 남아있다. 무엇보다 다양하게 흩어져 있던 방대한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분류하고 체계화했다. 그런 탓에 달레 이후의 저서는 거의 대부분 달레의 작품을 참고하고 있으며, 따라서 적어도 달레의 서술 내용과 중복되는 시기에 관해서는 달레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드브레의 {조선천주교회의 기원과 발전}(1924)도 달레의 것을 요약한 데 지나지 않으며, 앞으로 비교적 자세히 살펴볼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도 달레의 책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했다.





(2) 일본인에 의한 한국 천주교의 연구



달레 이후에는 본격적인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서는 등장하지 않다가, 일제 시대 야마구치(山口正之)나 우라카와(浦川和三郞) 등과 같은 일본인 신부에 의한 연구서들이 한 두 권씩 보이기 시작한다. 이 가운데 우라카와는 우라카와는 달레의 {朝鮮天主敎會史}와 로네의 {韓國79位殉敎福者傳}(1925)을 참조하여 1846년까지 일어난 순교자들의 전기를 기록한 800쪽 이상의 방대한 책 {朝鮮殉敎史}(1944)를 남겼으며, 그밖에 赤木仁兵衛, 石井壽夫 등의 학자가 사회사, 사상사적 측면에서 조선 교회사를 연구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조선 천주교사를 근대적으로 연구한 선구자적 인물은 야마구치이다. 그는해방 후 일본에서 {黃嗣永帛書硏究}(大阪: 全國書房, 1946)를 출판했고, 그의 죽음(1964) 직후에는 유고집 {朝鮮西敎史}(大阪: 全國書房; 東京: 雄山閣, 1967)가 출판되었다. 그의 책 중 {黃嗣永帛書硏究}는 다소 평면적 접근이기는 하지만, 「황사영 백서」를 처음으로 집중 분석한 책이며, {朝鮮西敎史}는 16세기 조선 그리스도교의 여명기에서부터 조선천주교회 박해기를 거쳐 「황사영 백서」 및 프랑스 주교들의 서한을 소개하는 형식을 통해 조선 천주교회사를 정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동·서양의 다양한 자료들을 참조하면서 교회사적인 시각보다는 문화사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 참신하게 느껴지는 책이다.



이상 일본인에 의한 연구 결과들이 달레의 저술보다는 좀 더 객관적이고, 전체적으로는 후기의 사건들까지 기록하고 있는 근대적인 연구 성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대체로 한국 천주교인의 자율적인 태도가 배체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달레의 작품이 그렇듯이, 외국인에 의한 연구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인에 의한 한국 천주교 전반의 연구는 일제시기 내내 전무하다시피 했다. 거의 예외적인 책이 1931년 조선교구설정 100주년 기념으로 경성천주교청년연합회(京城天主敎靑年聯合會)에서 간행한 {朝鮮天主公敎會略史}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그 동안의 교회사가 주로 외국인 신부에 의해 씌어졌고,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도 일본에 납치되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로부터 잡으려는 움직임이 컸으나, 그러한 경향을 배제하고서 한국인의 신앙과 교회 창설을 한국인의 자율적 역사로 서술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그 분량이나 학문적 깊이 등에서는 매우 빈약해, 정식 연구서라 하기는 힘들다. 서술 태도 역시 자기해명적 호교론의 자세에서 기록된 문헌이다. 그 후 한국 그리스도교(천주교) 연구는 다시 황무지 상태에 빠진다.



1930년대에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되었으며, 그 후 40년대에 들어서도 일제의 한국 그리스도교 말살정책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관련 연구가 거의 휴면기에 들어갔다. 해방 이후에도 곧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1950년도 초반까지 그리스도교 연구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막론하고 답보상태로 접어들었다. 천주교의 경우는 해방 이후에야 유홍렬, 홍이섭, 주재용 등이 등장해 한국인에 의한 교회사 관련 문헌들이 비로소 쌓이기 시작한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도 한국 천주교회사 최대의 통사서(通史書)로 남아있는 유홍렬의 작품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3)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1949 - 1975)



전형적인 유교적 양반 가문에 속하던 집안의 분위기를 뒤로하고 천주교로 개종한 이래(1936), 한국 천주교 역사 연구에 뜻을 둔 유홍렬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와 일본인 신부 야마구치(山口正之)의 논문을 주로 참조하여 1949년에 {한국천주교회사} 상권(上卷)을 출판했다. 이 책은 1871년까지의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처럼, 첫 번째 천주교 박해인 신유교난(1801)과 그 후 1830년까지에 이르는 교회 재건 운동 정도만 수록했었다. 그 이후 1962년까지의 자료들을 곳곳에서 모아 기존 상권의 내용을 보완하고 나머지 역사를 이어 쓴 {한국천주교회사}를 1962년도에 출판했다. 이것은 피아첸티니(Arthur Piacentini) 수사가 엮은 리델(Ridel) 주교의 전기(1890)와 뮈뗄(Mutel) 주교의 일기 및 그의 {한국 가톨릭의 기원과 발전}(Le Catholicisme en Core&eacute;, Son origin et ses progres, 1924)을 주로 참조하고 우리 나라의 각종 자료와 비교하며 엮은 것이었다. 초기 프랑스 신부들의 기록과 그간에 쌓인 한국의 기록들을 견주면서 비교적 체계 있게 종합해낸 책으로서, 1975년도에는 최종 증보판이 출판된다. 이 책은 지금까지도 한국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사 가운데 가장 큰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워낙 척박한 토양에서 이루어놓은 종합적인 작품이라는 점에 이 책의 기본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시각에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낸다. 무엇보다 지나친 천주교 우월적 호교론이 두드러진다.



가령 이 책은 천주교 신앙 전래 이후로 1970년대 중반까지의 교회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개신교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거나, 있다 해도 상당히 열등시한다. 루터의 언행에 대한 그의 언급은 한 예이다. 한국의 전통적 종교문화에 대해 언급할 때는 더욱 그렇다. 개신교의 일파인 장로교의 조선 선교를 묘사할 때, 그리고 조선말에 생겨난 민족종교 동학(東學)에 대해 언급할 때 이러한 태도가 보인다. 또 서학을 금지하는 정부의 행위는 '악마의 책동' 차원에서 해석하면서, 조선 정부가 청나라의 힘을 빌어서라도 '동학란'(東學亂)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는 당연시하거나 정당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런 식으로 유홍렬은 천주교 전교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은 '선'(善)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던 것은 '악'(惡)으로 보는, 비교적 단순한 태도로 일관한다. 대부분의 사건을 천주교 신앙과 언어에 근거한 호교론적 태도로 판단하며, 천주교 신앙 전래에 도움이 된 일이라면 거의 대부분 복된 일이라는 식으로 묘사한다. 하느님께서 돌보시는 천주교인에게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듯 묘사하고, 교회사의 주요 인물들을 다분히 신앙중심적인 기준에 따라, 아니 교리를 얼마나 잘 지켰느냐 하는 교리중심적 기준에 따라 그 신앙 상태를 점검해 나간다.



전체적으로는 국사학자답게 연대기적 사실 나열에 충실하다가도 종교적 관점이 개재될 때는 지극히 초보적인 호교적 신앙관을 드러낸다. 교회 역사상의 온갖 자료들을 소화하려던 노력은 대단하지만, 그 해석이 지나치게 '신앙적'이어서, 그가 제시한 역사적 사실마저 옳은 것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달레의 책이 쓰여진 지 1세기가 지난 후의 출판물이지만(수정증보판의 경우), 전체적으로 1세기 전 외국인 신부의 시각과 대동소이하다. 1970년대에 완성된 글이라는 느낌을 거의 받지 못한다.



이와 함께 그의 몰민족적 태도도 두드러진다. 천주교의 전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면, '조선은 소인국(小人國)'이라는 자기비하적인 태도도 빈번히 드러낸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천주교도의 박해는 "하잘 것 없는 정권 다툼과 타인을 흠뜯는 당파싸움판에," "줏대 없고 얼빠진 정치 하에서" "희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정도로 민족적인 시각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반대로 천주교회 전래사는 구세력을 타도하는 "무저항주의의 거룩한 투쟁사이며 몽매한 인지를 근대적으로 계발시킨 개명사"라 요약한다.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천인공노할' 자료로 평가할 수밖에 없을 황사영의 {백서}에 대해서도 황사영의 신앙적 열정만을 높게 사며 극찬한다.



이러한 시각은 천주교 신앙과 조선의 종교 문화를 지극히 대립적인 것으로, 조선의 전통은 없어져도 좋을 것으로 보는 황사영의 시각과 거의 같다. 또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천주교박해(辛丑敎難)의 원인을 많은 사람이 천주교회로 나오게 되자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교회를 비방한 미신 신봉자 무당들"과 "제주도 사람들의 배타주의 사상"에서 찾을 때도 이러한 몰민족적 시각이 스며있다. 한국적 맥락, 한국의 종교문화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박해받던 당시의 신앙에 감정이입된 상태에서 서술해나간다고 말해도 과장만은 아니겠다.



유홍렬의 책이 한국 천주교회사 분야로는 불모지와 같은 상황에서 어렵사리 여러 차례에 걸쳐 보완한 역작인 것은 분명하지만, 저자 자신의 독창적 그리스도교사관에 근거한 연구라기보다는 달레 신부와 리델, 뮈델 주교의 기록을 확인하는 차원에 주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한계이다. 특히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시각과 내용을 많은 경우 그대로 따른다. 그리고 프랑스와 한국 양측의 자료를 비교하며 엮다 보니, 다른 장(章)에서도 이전 장에서 말한 것과 같은 사실을 중복, 서술하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그때 그때 준비된 자료를 연대기적으로 엮다 보니 이전 자료들과 겹치는 사례들을 철저히 가려내지 못한 데서 온 결과로 보인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천주교인 '순교사'(殉敎史) 수준이듯이, 유홍렬의 책도 '순교사'에 가깝다. 주로 외국인 신부의 입국, 순교, 국내 신자들의 순교 동향, 정부의 천주교 박해 등, 신앙인의 눈에 비친 교회의 '희생적' 사실들을 나열하는 수준에 머문다. 주로 외국인 신부들의 입국 의도를 강조하고, 달레의 저술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정하상, 김대건 등의 개인 기록을 반복, 소개하는 식으로 전개해나간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순교사에 가까우면서도, 정작 그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근거와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은 미진하다. 그것이 한국천주교회를 이끌어 가는 핵심으로 분석되어야 마땅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저 '천주의 은총'으로 해석하는 수준에 머문다.



교회가 조선에 끼친 구체적 영향 분석이나 천주교회의 전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들어갈 여지도 거의 없다. 한국 천주교회의 '독자적 창설'을 강조하지만, 무엇이 독자적인 창설인지, 무엇을 <한국> 천주교회라고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미흡하다. 여기서 한국은 그저 장소의 개념으로만 등장할 뿐, 한국의 역사·문화가 천주교회와 맺을 수밖에 없는 관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1975년에도 증보판이 나왔고, 형식상으로는 1970년대의 자료들까지 일부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상 거의 모든 내용이 일제시기 이전까지만 다루고 있다는 문제점도 있다. 1970년도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낸 {韓國文化史大系}(第VI卷 宗敎·哲學史)의 일부인 유홍렬의 [한국기독교사(一)]도 그 시각이나 주제, 연구 범위 등에 있어서 거의 이와 같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인에 의한 본격적인 천주교회 통사서로서는 지금까지도 거의 유일한 책이다. 바꾸어놓고 말하면, 이 책 이래로 오늘날까지도 체계적인 한국 천주교회 통사는 아직 등장하고 있지 못할만큼 천주교 통사 부분은 아직 미진한 형편이라는 뜻이다. 1950-60년대에 걸쳐 홍이섭과 주재용이, 60년대 이후에는 이원순, 최석우 등이 천주교회사 관련 자료들을 상당수 발표했고, 개신교 목사였던 김양선도 천주교회사 관련 자료들을 많이 간행했다. 김구정, 김옥희 등도 교회사 연구에 전념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연구와 더불어 한국 천주교회 통사의 기초는 최석우에 이르러 확립된다.





2) 호교론적 한국 천주교회 연구 ― 최석우의 『한국천주교회의 역사』(1982)





유럽 유학 후 1960년대에 돌아온 최석우(崔奭祐)는 현재까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독일 본 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 『초대감목대리구의 설립과 한국 가톨릭 교회의 기원』(1961)을 통해 한국 초기 교회사와 관련된 여러 종류의 서양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 창설기의 상황을 자세히 밝혀주고 있다. 무엇보다 1964년 가톨릭대학 부설 한국교회사연구소장으로 취임했다가 1975년 새롭게 독립한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주관하면서 이 분야 연구의 폭을 넓히는데 결정적인 공을 쌓고 있다. 유홍렬의 호교론적이고 종파중심주의적 태도는 최석우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수정되기 시작한다.



최석우는 60년대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썼던 논문들을 모아 {한국천주교회의 역사}(1982)를 출판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해 들어가는 방식과 태도가 달레나 유홍렬에 비하면 객관적이며, 또 진지하고 정교하다. 그러나 체계적인 연구서라기보다는 논문집의 형태인 까닭에 각 장마다 서로 겹치는 내용들이 있으며, 또 각 장마다 글의 난이도에서 차이가 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내용도 여전히 19세기 조선천주교회사 서술에 머물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저자 자신이 서언에서 "개항 이후의 현대까지의 교회사 연구가 너무 부족한 현실"이라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서도 20세기의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는 극히 미진하며, 일제 시기 한국 천주교회 연구는 전무하다. 다만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한 북한 종교실태를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부분(제7장)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총체적 연구를 위한 디딤돌이 될 것으로 본다.



전체적인 시각에 있어서 이 책은 달레나 유홍렬의 그것과 비교해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정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다. 유홍렬이 천주교 호교론적 신앙관에 근거해 몰민족적 태도를 강하게 나타냈다면, 최석우는 다소 온건해진다. 유홍렬이 아무런 해석도 없이 일방적으로 타종교 억압적, 천주교 중심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과는 다르게, 최석우는 유교적 배타성, 조선왕조 정교일치(政敎一致)의 문제점 등도 직접적이기보다는 우회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런 식으로 온건한 천주교 중심적이고 옹호론적 태도를 견지한다.



동학난을 다룰 때나 개신교와의 관계를 다룰 때도 유홍렬처럼 배타적인 자세를 견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천주교 중심적 판단을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가령 한글 성서번역의 역사를 다룰 때는 이미 개신교권에서 선교사 로스가 이응찬의 도움으로 1887년에 신약성경인 {예수셩교젼셔}를 번역 간행했는데, 최석우는 1910년 한기근 신부가 번역한 {사사성경}(四史聖經)을 최초의 번역으로 거론한다. 어떤 때는 협의의 교회론을, 어떤 때는 광의의 교회론을 펼치며, 한국에서 벌어진 교회관련 일들을 긍정적인 차원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교회에 대한 자기비판적인 목소리가 약하다. 그만큼 천주교 중심적이고 옹호론적인 역사 서술에 익숙해 있다는 증거이다.



순교자에 대한 언급에서도 비록 찬양 일변도로 나가지는 않지만, 한편에서는 "천주교인들의 불굴성과 순교자들의 영웅적 용기 자체가 하나의 웅변적 호교(護敎)였을 것이고, 유배지에 있어서의 교우들의 궁핍한 생활과 인내도 이교인에게 감화를 주었을 것"이라며 순교자적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박해의 결과는 역시 교회의 승리를 의미한다"며 박해를 이겨낸 교회를 '신앙의 견지에서' 해석하면서 교회에 대한 자긍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조선의 천주교회가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둔감한 채, 그 동안 식민지 정책과 포교정책을 분간하지 못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거론한다. 박해 자체를 주로 '신앙의 사실'로 해석한다는 점에서는 달레, 유홍렬 등의 시각과 큰 차이가 없지만, 당시 조선 정세와 정책을 잘 읽지 못한 책임이 교회에도 있음을 지적할 때는 신앙의 사실과 정치·사회적 사실을 구분하는 다소 중립적인 자리에 선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최석우의 한국 천주교회 역사 연구에서도 '한국'은 그저 장소 내지는 공간 개념으로 등장할 뿐, 한국 사회, 민족, 문화, 역사 등이 지닌 독특성과 구체성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천주교회 중심의 역사적 사실(Historie) 나열에 충실하며 옹호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사실은 해석이 있음으로써 유의미해지고 방향성도 드러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천주교회사를 다룬다 해도 '사실사' 나열에 머물기보다는 천주교회의 한국 토착사, 신앙 해석사(Geschichte)의 측면을 중시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해석은 당연히 사회적 흐름을 반영한다. 그러기에 <'한국>이라는 장소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할 수 있게 해주는 근본적인 토양이 된다. 여기서 분파적 서술은 애당초 자가당착이 되고 마는 것이다.





3) 민족사적 한국 천주교회 연구 ― 조광(趙珖)의 {한국천주교 200년}(1989)





이러한 현상은 조광(趙珖)의 80년대 후반 저서인 {조선후기 천주교사연구}(1988) 및 {한국천주교 200년}(1989)에서 어느 정도 수정된다. 조광의 연구에 이르러서 한국 천주교회사는, 비록 정치·사회사적인 의도가 두드러지고 있기는 하지만, 비로소 '해석'되기 시작한다. 그는 민족적인 시각과 교회 비판적인 시각을 어느 정도 겸비하고서 달레, 유홍렬은 물론 최석우에게서도 근본적으로 교정되지 않고 있는 호교론적인 시각과 사실기술적 태도를 지양한다. 조광은 '동아시아 문화사'에 근거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가 한국 전체 안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도록 반성적으로 해석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가령 한국 천주교회에서 지독한 박해가 이루어져 왔던 현상을 두고 제국주의적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대외적 현상과 성리학적 질서에 대해 반성하고 실학을 비롯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던 대내적 분위기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달레가 「황사영 백서」등의 자료에 근거해 천주교인 박해를 주로 당쟁(黨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유홍렬이 그대로 답습하던 것과는 다른 태도이다. 천주교 박해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 왕조의 성리학적 통치 질서에 반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지, 당쟁 자체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가 '효'(孝)라고 하는 사회질서 전통으로서의 조상 제사를 용납하지 못한 것은 동양 문화 전통에 대한 서유럽 교회의 몰이해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교회도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정약용, 이승훈, 이벽 등 초기 천주교 사대부들이 천주교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을 단순히 '배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애당초 학문적 관심과 보유론적(補儒論的) 자세에서 출발했던 이들 양반 계층의 당시 입장에서 도리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평가를 한다.



유홍렬은 교회가 사회 고위층의 교회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곳곳에서 유명인사들의 입교를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소개하지만, 조광은 사실상 천주교회는 양반 교회가 아니라 중인 이하의 교회, 상놈들의 교회였다는 사실을 도리어 중시한다. 신자들의 교리 수준이 낮아서 가성직 제도가 시행된 것이라고도 보면서, 한편에서는 교회를 위한 자발적인 노력의 반영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하기도 한다. 교회가 조상 제사를 용인하지 못한 편협함은 물론 한일합방을 묵인하거나 그에 동조했던 일, 일제하 3·1운동에 교단 차원에서 참여하지 못한 일, 그리고 신사참배를 인정했던 일들 모두 변명의 여지없이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조광의 이러한 지적에 이르러서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 민족 공동체의 일부이고 또 일부이어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분명히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광은 교회를 비판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비판 속에서도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애정을 담는다. '순교'의 의미를 그저 신앙의 차원에서만 찾지 않고, 개인의 인격이 매몰되어 있던 조선 후기적 상황에서 자신의 양심과 인격을 보고서, 자기의 신념을 위해 죽을 수 있었다고 하는, 개성의 발견 차원에서 높게 해석하며 평가한다. 이렇게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과 애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행위는 유홍렬이나 최석우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일이다. 그것은 한국 천주교 연구 태도에 중요한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광의 이 책은 세세한 한국사, 교회사의 자료에 근거를 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알려진 사실에 근거한 자기 반성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교회사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 것은 없다는 말이다. 한국 천주교 200년의 역사에 대한 한국 정치·사회적 시각에서의 반성 수준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부분에 관한 한,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범주보다는 한국 역사 연구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하겠다.



한국 천주교 연구사에 끼친 조광의 공헌은 한국 천주교 문화의 절대성과 상대성, 보편성과 특수성을 구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한국 천주교 문화의 부정적 측면을 보는 안목을 지니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종교를 상대화시킬 줄 아는 것은 성숙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는 1980년대에 들어 자신을 상대화시켜 보기 시작한 셈이라고 하겠다.





4) 1960-90년대 한국 천주교 연구의 흐름 및 과제





해방 후 1960년대까지 유홍렬, 홍이섭이 활동하였고, 최석우, 이원순 등이 활동을 개시한 이래, 1970년대에 이르면 최동희, 김옥희, 금장태, 조광, 노길명 등의 연구자가 등장하여 한국 천주교회사 관련 분야에 현재까지 활발히 작업하고 있다. 1977년도에는 최석우 신부가 주도하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정기 연구 논문집인 {교회사연구}를 창간해,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주로 철학, 종교사와 관련하여 '주제별 천주교회사' 연구에 몰두할 뿐, 한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체적 연구로까지는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



이와 함께 1980년대에는 앞에서의 연구자들과 최기복, 하성래 등이 등장하고, 90년대 차기진 등의 연구자가 가세하면서 철학, 역사, 정치, 문화 등으로 연구의 폭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도 초기 교회사, 박해사 등을 연구하는 경향은 크게 달라지고 있지 않다. 한국 교회사 연구의 현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이원순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전반에 어울린다:





한국 교회사 연구는 한국신학을 위한 구원사 연구와 한국 사학을 위한 인간사 연구의 두 국면으로 전개되어 왔다. 전자의 경우 우리 나라의 교회사 연구에서 순교자 현양 의식에서의 순교사 연구는 있었으나 아직 한국 신학을 위한 구세사적 연구는 지극히 미흡하다. 아니 불모의 상태라 할 수 있다.





순교사 연구, 그것도 순교자 현양 차원의 연구는 한국 종교사, 좁게는 천주교사를 박해자와 피박해자로 이원화해 대립적으로 보게 만든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사는 과연 박해와 순교의 역사이기만 한가? 천주교회가 전래되던 시절 많은 피해자가 생겨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피해를 '박해' 내지는 '순교'라고만 볼 때, 그러한 사건의 원인과 배경에 있는 조선시대의 종교 문화, 특히 유교적 질서를 적대적이고 오류에 물든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되는 문제를 앞으로 한국 천주교회 연구가들은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큰 과제로 남아있는 셈이다. 순교사 수준, 더 나아가 교회사 수준을 넘어, 아니 교회사를 다루더라도 한국 종교문화의 일부라는 시각을 가지고 한국 종교문화적 상황에 어울리는 체계적 천주교사를 낳아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개신교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1990년대의 한국 천주교 연구사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개신교와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거나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한국만의 경향은 아니다. 사실 세계 가톨릭 교회사 연구의 주요 흐름도 이와 다르지 않다. 김성태의 다음과 같은 비판적 지적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가톨릭 교회에서 나온 많은 교회사 저서들은 가톨릭 교회에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물론 이 저서들은 교회 분규와 이단 운동의 발생에 대한 배경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후에는 더 이상 이 운동들의 진전 과정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가톨릭 교회사가들은 그들이 가톨릭 교회인이기 때문에 엄밀한 가톨릭적 의미의 단어로 교회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일치의 분위기가 증진되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 가톨릭 역사가들이 그리스도교 전체에 대해 무관심하고 교회사의 대상을 가톨릭 교회에 국한시키는 것은 역사적 결함이다. 폭넓은 안목의 교회론에 입각하여 가톨릭 교회사가들은 그들의 저서에서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사회의 역사를 취급함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김성태의 지적대로 하자면, 개신교인이 더 많은 한국에서조차 천주교 중심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전개하는 것은 자칫 '게토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애당초 천주교회사만을 서술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해도, 천주교회사를 중심으로 서술할 수는 있어도 개신교회사를 무시하거나 열등시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교라는 이름 하에 개신교의 실정만을 다룬 대다수의 책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일이다. 종파적 사시 나열에 머물지 말고, 그러한 사실에 대한 해석과 함께 그 동안 전무하다시피 했던 종교로서의 천주교 연구, 신학사상사적 통사 연구 등, 그리스도교 관련 사건과 추이에 대한 사상사적, 종교사적, 신학적 해석작업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5) 국학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 ― 이능화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1928)





천주교권의 자료를 주로 다루었으면서도, 천주교권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는 작품이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 1928)이다. 이 책은 간단한 서양 소개로부터 그리스도교의 東來를 거쳐 憲宗 당시의 기해교난까지를 담고 있는 상권과, 조선 근세사에서 그리스도교로 인해 일어난 전반적인 영향 및 조선 외교사를 싣고 있는 하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광의 연구를 제외하고서, 앞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서들이 모두 '호교론적 관점'에 있거나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 책은 1920년대에 국학(國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연구서이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연구서들이 '벽위' 계열의 서학 비판서를 제외하면,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인에 의해 저술된 것에 반해 이능화는 불교신자로서, 그리스도교를 비롯해 한국 종교 전반을 연구했다. 그 가운데 {조선기독교급외교사}는 조선민족의 시각을 견지하고서 우리나라 사람이 쓴 최초의 한국그리스도교사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능화가 한국 그리스도교를 연구하던 1920년대는 그리스도교는 물론 한국사 전반이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국내에서 참고할 수 있을만한 본격적인 문헌이라고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1874), 드브레의 {한국천주교 - 그 기원과 발전}(1924)와 같은 불어권 천주교 자료들뿐이었다. 그러나 이 책들은 조선 측의 자료를 도외시하고 있고, 또 이능화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유학중이던 개신교 교회사가 백낙준이 주로 미국 선교사들의 자료를 이용해 한국 개신교사를 학위논문으로 정리하고 있던 시절에, 그는 천주교 측 자료들에다가 조선 측의 관변(官邊) 기록 및 그리스도교를 한국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하게 해줄만한 학인들의 자료들을 참조해 써내려 갔다.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 조선 기독교사를 서술한 거의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 한국문화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개신교보다는 천주교회를 주로 다룬다. 아마도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의 개신교를 다룬 문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당시의 조선 정치 현실상으로 보면 천주교가 더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해 가는 과정도 외교적 문제 해결에서 비롯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그가 천주교 박해의 원인을 당쟁이라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보고, 조선조 유교 사회도 소수 양반을 위한 것이었지 일반 백성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보며, 당시의 쇄국정책도 강하게 비판할 만큼 정치적인 관심을 기울일 때 더욱 드러난다. 그는 조선의 근대화과정을 중시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교가 조선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 및 역할을 정치, 외교, 사회, 문화라는 다양한 차원에서 검토한다. 한 마디로 '사회사적 관심'을 가지고서 그리스도교를 서술해나간 셈이다. 이러한 연구 방법 내지는 시각이 이능화 그리스도교 연구의 근대성, 이능화 저술의 독자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때로는 그의 저술이 독창적인 해석이 아니라 '자료의 나열'에 그친다는 비판도 있으나, 그는 바로 그러한 나열을 통해 한국종교사를 서술하고자 했고, 또 한편에서는 한국의 종교들을 나름대로 해석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의 선구자라는 평가는 정당해 보인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한국 그리스도교에 관한 일본 학자들의 연구도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불교도로서 그리스도교에 대해 독자적으로 연구했다는 사실에서 이능화는 근대적인 의미의 '비교종교학의 개조', '한국종교학의 아버지'로까지 평가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이 책은 후대 천주교회사가나 개신교회사가 모두에 의해 동등하게 인용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다. 그런 점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호교론적이고 종파중심적 연구태도를 완화시켜 주고, 이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데서도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사적 의미가 지대하다 하겠다.







2. 한국 개신교회사 연구의 경향





1) 선교론적/종교 변증적 차원의 연구: 1920-30년대 개신교 연구 경향





이능화가 조선의 그리스도교에 대해 연구하던 무렵, 한국 개신교 안에는 신학이라는 것이 비로소 논의되기 시작했다. 한국 그리스도교의 연구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길선주, 최병헌, 윤치호 등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학적 원리와 내용을 한국 교회와 사회 안에 전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양주삼, 남궁혁, 송창근 등이 등장해 한국 안에서 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단초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의 그리스도교 변증적 신학 연구는 본격적인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라고 할 수는 없어도 한국 신학사상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 그러나 역시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전반과 관련하여 1920년대에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백낙준이다.





(1)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1929)



백낙준(白樂濬, 1895-1985)은 "초기 한국 교회의 선교 역사를 정리하여 한국 교회의 위상을 평가하여 준 역사신학자"이며, 근대적 의미의 교회사가이다. 물론 백낙준이 등장하기 전에도 한국에 개신교의 선교 상황을 소개한 문서들이 여러 편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서양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 안내서에 가깝지, 한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총체적인 서술이나 연구서들은 못되었다.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사와 관련해서 보자면, 이 작품들은 백낙준과 같은 교회사가가 한국의 교회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게 해주는 토대로 작용했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백낙준은 이러한 저술들에 근거해 1927년 미국 예일대학에서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1929년 숭실전문학교에서 영문 간행)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된다. 그는 이를 통해 최초로 한국의 개신교사를 정리하였다. 이 책은 방대한 서양의 자료를 수집해 서구적 학문 방법론에 따라 객관적으로 연구하려는 자세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선구자적이다. 아울러 저자는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미주에 알리기 위한 예비적인 지침서 차원에서 이러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사 정리에 공헌한 야마구치(山口正之)가 비판하는 대로, 조선 측의 사료는 거의 소개되고 있지 않다는 데 이 책의 기본적인 한계가 있다. 저자 자신이 미국 선교사가 되어 한국을 피선교국으로 대상화해버린데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러한 사태를 잘 반영해준다:





기독교사는 그 본질에서 선교사(宣敎史)이다. 또한 반드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독교사상의 한 중간적 존재이다. 우리 주님이 죽으심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만 존재하게 되어 있다(고전 11:26). 이 중간적 존재체인 교회의 철두철미한 사명은 복음 선포이다. 기독교사는 자초지금에 선교사로 일관되어 왔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우리 한국 개신교사도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가 비록 선교사(宣敎史)라 하면서도 "외인 선교사(宣敎師)에 의한 피선교 과정으로 해석하여서 만은 아니 된다"고 이어서 덧붙이고 있지만, 사실상 외인 선교사에 의한 선교 과정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외국인에 의한 선교만이 아니라 한국인에 의한 선교도 포함되어 있다는 식의 소극적 선교론에 머문다. 선교라는 것을 주로 '한국 밖에서 한국 안으로'라는 방향성에서 보는 까닭에, 한국 측 사료를 인용했는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한국 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못하다." 서구적 시각에 의한 일방적 선교론의 차원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총론에서 이렇게 자신의 연구 태도를 밝히고 있다: "선교사 측에서 능동적으로 선교를 선행한 사실에 치중하여 이 편에서 다루는 초기 전래사를 선교사로 서술하기로 한다."



그는 이러한 선교사관을 예일대학교의 라투렛(K.S.Latourette) 교수에게서 배운 뒤, 선교사는 단순히 종교사의 일부가 아니라 인류와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역사과학의 한 분야로 규정한다. 그는 이 선교적 사관을 통해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벗어나 인간의 근원적인 신앙의 세계와 보편적인 인류 문명의 연관성을 본다. 자연스럽게 개신교 전래 과정과 조선의 개화 과정, 개신교의 전파와 신(新) 문화의 전개를 같은 맥락에서 본다. 한국 민족사의 핵심을 문화사로 보고, 개신교가 한국 문화사를 바꾸어 놓았다는 시각을 견지한다. 그러나 문제는 선교사를 아무리 정치, 경제, 역사학의 일부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의 표현대로 '전수자(傳受者)'보다는 '전수자(傳授者)'를 더 중시하는 한, 그 때의 한국문화에의 공헌이란 사상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