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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상동교회 청년회와 을사보호조약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683
우리 상동교회는 스크랜톤이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벌인 의료사업으로 이미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민족운동의 중심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전덕기 전도사가 중심이 되어 벌린 상동교회에서의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반대투쟁으로부터이다. 보호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은 스크랜톤이 미국에서 돌아온 지 1년이 되었지만 그는 전국 선교사업을 관할하는 감리사의 직책을 맡고 있어 우리 교회는 스웨어러 목사가 가끔 와서 교회 치리를 할 정도이고 실질적인 목회는 전덕기 전도사가 계속 목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정동교회는 아펜젤러 목사가 1902년에 목포 앞바다에서 순직한 이후 최병헌 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어 이 때 한국의 감리교회 강단은 한국인 목회자들이 많이 맡고 있었다. 따라서 장로교의 경우와는 달리 감리교회는 선교사의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따라서 당시의 민족운동에 적극 가담할 수 있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전덕기 전도사는 한창 나이인 30세였고 그가 목회로 나선 지 3년째 되던 해로 일본, 러시아, 청 3국이 한반도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확립하려고 서로 세력 다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일본이  1894년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우선 청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제거하였고, 10년 후인 1904년에 러일전쟁에서 강적 러시아를 이김으로써 일본은 완전히 한반도를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용의주도하게 우리 나라의 완벽한 통치를 위한 음모를 진행시켰다. 러시아와 청국은 이제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구미국가들이 한반도문제에 간섭하면 또 문제가 곤란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선 미국을 설득시켜 일본의 한국통치를 합리화하고 그 통치를 지지해 주거나 최소한 묵인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런 정치적 고려의 결과가 저 악명 높은 가쯔라-태프트 밀약(桂-Taft 密約)이었다. 즉 1905년 7월 29일에 당시 일본수상 가쯔라(桂太郞)와 미국의 육군 장관이며 루즈벨트 대통령 특사인 태프트(W. M. Taft)와의 사이에 서명한 밀약으로 그 내용이란 밀림 속의 논리인 약육강식 식의 약속이었다. 즉 미국이 일본의 한국지배를 묵인하는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며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일본은 미국과 나누어먹기 작전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는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는데 반대할 나라는 이 지구상에 하나도 없게 되었다. 다만 형식적인 절차만 남은 것이다. 이리하여 일본이 꾸민 각본에 따라 1905년 11월 17일에 일본군대가 서울에서 왕궁을 포위하고 시위하는 가운데 일제의 강압에 의한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일본전권대사 하야시(林權助)와 한국의 외무대신 박제순(朴濟純) 사이에 조인된 전문 5조로 된 이 보호조약의 내용은 한국정부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統監府, 총독부의 전신)의 설치인데 이 조약으로 인하여 일본의 실질적인 한반도 통치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기막힌 소식이 ꡔ황성신문ꡕ 사설에 장지연(張志淵)의 저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時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으로 실리고 서울장안과 전국에 퍼지자 전국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시종무관(侍從武官)이던 민영환(閔泳煥)을 위시한 십수명의 충신들과 지사들은 자살로써 이 조약에 항의하였고, 전라도에서는 전 참판(參判)이던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켰고, 충청도와 강원도에서도 의병이 일어나서 총칼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특히 장로회와 침례교와 미미회(美美會-監理敎會)는 합동하여 연합기도회를 가지면서 이미 기울어진 나라를 위하여 철야기도회를 가졌다. ꡔ大韓每日新報ꡕ, 1905년 11월 19일 자. 그러나 이 때 우리 교회의 전덕기 전도사는 눈물의 기도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야만 했다. 우선 동지들을 모으기로 했다. 상동교회에는 이미 엡웟 청년회가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운동이 필요하였다. 그러자면 전국에 있는 감리교 엡웟 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소집해야만 했다. 이리하여 상동교회에 전국청년회의 대표들을 모아들인 것이다. 선교부에는 연합회 사업계획 토의를 위하여 모이는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전덕기가 선교사들에게서 받은 복음이 바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갇힌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준다는 말씀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잔악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은 곧 그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요 결국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했기 때문에, 민족운동을 한다고 그들에게 미안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었다. 또 선교사들이 전하였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은 곧 사악한 일본 통치로부터의 자유와 구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통치는 불법이요, 강도 행위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덕기는 스크랜톤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고 따랐다. 그러나 민족운동에서 손을 떼라는 그의 충고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 이 두 사람의 신앙노선도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달랐다. 스크랜톤은 미국사람이요, 전덕기는 한국사람이었다. 전자에게는 그의 조국이 있었으나 후자는 그것을 약탈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 기막힌 현상을 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가. 스크랜톤 자신이 지적했듯이 일본인들의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착취에 못 이겨 열 명의 한국인들이 그들의 고향을 떠나서 만주나 중국 연해주 방면으로 떠나가면 그 자리에 일본인 천 명이 정치적 특권이나 경제적 이권을 위하여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Annual Report, 1905, p.308. 전덕기는 처음으로 자기 선생을 배신한 것이다. 아니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한 것이다. 이리하여 전국으로부터 연합회 간부들과 우국지사들이 몰려왔다. 그 중에는 진남포 감리교 청년회 총무로 있던 김 구(白凡 金九)도 왔고, 해아 밀사사건(海牙密使事件)의 주인공이고 이국 땅에서 비운 속에 죽은 이 준(李儁, 前 平理院檢事) 열사도 끼어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조직된 신민회에서 중요 멤버로 활약했던 이동녕(李東寧), 조성환(曺成換) 등도 왔다. 김 구, ꡔ백범일지ꡕ, 서문당(瑞文堂), 1973, p.162~3. 이들이 우리 교회에 모여서 결의한 사항은 보호조약의 무효를 위한 상소운동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도끼를 메고 대한문(大漢門)에 가서 이 조약 무효를 위하여 상소하자는 것이었다. 이 때 도끼를 메고 간다는 것은 폭력행사를 위하여 사용한다는 것이 아니고 여의치 못할 때 자기의 목을 도끼로 친다는 것이다. 상소를 하되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1회, 2회로 파상공격을 하며, 한 번에 4, 5명씩 가서 연명으로 상소한다는 것이다. 한 팀이 체포되면 다음 팀이 나가서 또 상소한다. 이런 전략에 따라서 제1차 상소팀으로 5명이 선정되었다. 이 선발대의 소주(疎主)는 최재학이 되고 상소의 글은 명필 이 준(李儁) 열사가 지었다. 김구까지 포함된 5명이 이 상소문에 서명하고 이 운동이 성공 될 때까지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우자고 결심의 기도를 올리고 상동교회를 떠나 일제히 대한문으로 달려갔다. 그 문 앞에 와서 형식적인 회의를 열고 상소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그 때 일본경찰대가 달려오더니 그들에게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명령을 들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일본경찰에게 일장의 연설을 하였다.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하여 우리 2천만 시민을 노예로 삼는 조약을 억지로 맺으니 우리는 죽기를 맹세하고 싸우자” 상게서, p.163.  라고 격렬하게 연설하니 일본경찰은 이들을 체포하여 경무청으로 끌고 갔다. 이들이 끌려가는 것을 본 다른 동지들은 종로 쪽으로 몰려가서 가두연설을 하였다. 그랬더니 거기에도 일본경찰이 와서 군중을 해산시켰다(보호조약 체결 전부터 일본경찰과 군인들은 이미 전국에 깔려 있었다. 이렇게 되니 연설하던 청년 하나가 일본경찰을 발길로 차서 거꾸러뜨렸다. 그러자 일본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하기 시작하였다. 군중들은 곧 흩어지고 이들사이에 총격과 석전(石戰)이 벌어졌으나 중과부족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일본보병(日本步兵) 2개 중대가 달려와서 군중들을 해산하며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을 마구 체포하여 수십 명이나 잡아갔다. 이들의 상소운동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면 이 운동이 왜 실패했을까. 이들은 실패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하였다. 우선 힘이 없었고, 민중은 무지하여 호응이 없었다. 근본문제에 부딪친 것이다. 용감한 의병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하늘을 찌르는 의분(義憤)만 있었을 뿐이지 군사지식이나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도처에서 패전하고 분사하였다. 또 이런 결사적인 상소운동에 대하여도 민중들은 잠잠하기만 했다. 이런 상태에서 독립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할 수 없었다. 주권이 무엇인지 애국과 민족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 민중에게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아무 것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없음’ 상게서, p.164. 을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이번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이들에게 좋은 교훈을 안겨 주었다. 애국지사들에게 전략 변경을 초래케 한 것이다. 즉 교육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힘이 없는 민족은 강한 자에게 먹히기 마련이고, 또 이렇게 될 때 주위의 어느 나라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뼈져리게 느꼈던 것이다. “슬프다. 이 세상에는 다만 강권(强權)이 있을 뿐이요 소위 ‘공리(公理)’, ‘공법(公法)’은 없어졌다. 평화의 내용은 경쟁이고 보호의 실상은 합병(合倂)이다.” 朴殷植, ꡔ韓國獨立運動之血史ꡕ 上, 서문당, p.39.  기회 닿는 대로, 또 기회를 만들어서 교육을 통하여 인재를 기르고 무지한 민중을 계몽 조직하여 힘을 기른 다음에 일본과 결판을 내자! 우리 상동 교회에 모여서 보호조약 반대투쟁을 하다가 좌절감을 느낀 이들은 이렇게 굳게 약속하고 각자 자기 고향으로 또는 연고지로 내려가서 한마음으로 교육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전덕기 전도사는 독립협회 운동 이래로 독립운동에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미 우리 교회에 있는 공옥학교를 통하여 민족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있던 때였지만, 또 1904년을 전후해서 공옥학교와는 다른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을 설립하여 중등교육수준의 교육과 함께 순전한 민족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다. 공옥학교는 소학교의 보통교육 수준이었다. 이 상동청년학원은 후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또 우리의 민족운동에 큰 공헌을 하였으므로 이 문제는 따로 취급할 것이다. 김 구는 상동교회에서 그 길로 곧 황해도 안악(安岳)에 내려가 그곳에서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전덕기와 김 구의 깊은 우정과 동지의식은 이 때부터 굳게 맺어졌고 이들의 이런 우정과 동지의식은 후에 신민회의 조직과 활동을 통하여 더욱 깊어지게 된다. 전덕기와 이승만과의 관계는 이미 독립협회 운동 때부터 계속되어 왔다. 전덕기와 이승만과의 우정과 동지관계는 ꡔ民族運動의 先驅者 全德基 牧師ꡕ, pp.78~79, pp.94~97 등을 참조.      1. 엡웟 청년회의 해산         한편 서울을 한 때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상소운동이 서울 상동교회의 전덕기 전도사가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일본통감부(日本統監府)가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일본통감부는 이 사실을 중요시하고 당시 감리사로 있던 스크랜톤에게 협박 섞인 엄중한 경고를 하였다. 또 다시 이런 일이 상동교회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스크랜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이 엡웟 청년회를 그대로 두면 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서 그는 지방 내에 있는 모든 교회의 청년회를 해산시켜 버렸다. 이 청년회 해산의 이유는 청년회가 본래의 사명을 저버리고 정치적 활동에만 종사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세력과 결탁함으로써 교회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Annual Report, 1906, p.322. 교회가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면 선교사들이 입장이 아주 난처해지는 것이다. 미국의 국무성이 보호조약을 지지하고 있는 이 마당에 선교사들이 본국정부의 정책에 반대되는 보호조약 반대운동을 사주하거나 지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보호조약을 공공연하게 지지한다면 한국인의 미움을 사게 되고 한국인의 미움을 사게 되면 한국에서의 그들의 선교사업은 끝장이 나는 것이다. 일본 앞잡이의 말을 귀담아 들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을사조약 반대투쟁을 정치운동으로 간주하고 교회는 정치에서 손을 떼도록 한국교회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러나 전덕기는 그렇게 쉽게 주저앉거나 단념할 위인(爲人)은 아니었다.       2. 독립운동의 계속          보통사람 같으면 선교사들의 충고에 쉽게 그대로 따랐을 것이겠지만 전덕기의 민족독립운동은 이미 일시적인 감정의 수준을 넘어선 종교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즉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 민족 사랑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것이고,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이 곧 복음의 내용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운동을 그의 목회의 연장으로 보았던 것이다. 전덕기는 그가 시작하고 주장했던 을사보호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은 일단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했다. 실패로 돌아갔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때문에 민족운동을 포기할 수는 없었고 다음 단계의 운동에서는 그 방법을  달리하였다. 우선 민족운동의 방법은 민족역량의 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이었다. 교육사업이라면 선교사들도 구태여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고 또 감리교회의 교육사업의 전통과도 일치되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 이미 있는 남녀 공옥학교와 특히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을 중심으로 해서 인재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학교 하나를 운영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상동청년학원은 공옥학교와는 달리 중등교육과정이 있었다. 따라서 공옥학교와 독립된 학교여야 하고 교사도 있어야 했으나, 급한 대로 공옥학교 교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전덕기는 우선 자기의 생활비를 학교운영비에 돌렸다. 그리고는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모금을 하여 경상비를 마련하였다. 승리의 생활, p.51. 다음으로 학과목과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편성하여 당시만 하더라도 구하기 어려운 활동사진이나 환등기 같은 시청각교육 매개체까지 동원하여 민족혼과 신앙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전덕기는 1905년부터 우리 교회에서 본격적인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게 되니 이 소문이 전국에 퍼졌고 그의 주위에는 뜻을 같이 하는 많은 독립지사와 애국자들이 모여들었다. 또 학교의 교사의 강연회의 강사들을 초빙하되 당시 전국에 널리 알려진 저명한 인사들과 독립운동가들을 모셔다 강의를 시켰으므로 자연히 이런 경로를 거쳐서 우리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은 당시의 민족운동이 중심이 된 것이다. 李恩淑, ꡔ民族運動家 아내의 手記ꡕ, 正音社, 1974, p.13;金世漢, ꡔ周時経傳ꡕ, 正音社, 1974, p.39. 이 상동청년학원의 원장은 전덕기 목사가 맡았으나 그 학감에는 광복 후에 부통령이 된 이시영(李始榮)의 형인 이회영(李會榮) 씨가 맡았고, 그는 이 자리에 약 2년간(그의 전체 가문 5형제가 1910년 12월에 만주로 망명할 때까지) 이 학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ꡔ民族運動家 아내의 手記ꡕ, p.13. 따라서 그의 주위에는 양반도 모이고 상인도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자라면 누구나 아무 부담 없이 모여들었다. 이 점이 그의 지도력의 매력이요 또 강점이기도 하였다. 1907년에 전덕기가 한국선교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상동교회의 담임목사로 정식으로 임명을 받고 우리 교회와 학교의 전체 운영권을 인계 받은 후부터는 전목사는 교육사업을 통한 민족운동과 목회생활을 선교사들의 큰 방해 없이 전개하였다. 이렇게 되니 전덕기 목사와 우리 교회는 자연히 일본통감부의 최대의 증오와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일본형사들이 부지런히 드나드는 제1급 사찰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제의 위협에 전 목사는 자기 몸을 조금도 도사리지 않고 동지들을 규합하고, 수시로 모여서 민족독립운동의 방향과 방법을 토론하며 연구하였다. 당시 상동청년학원과 전 목사를 중심으로 모여든 독립운동 지사들 중에는 김 구(金九), 이동휘(李東煇), 이동녕(李東寧), 이 준(李儁), 노백린(盧伯麟), 안태국(安泰國), 남궁억(南宮檍), 신채호(申采浩), 최광옥(崔光玉), 차병수, 이승훈(李昇薰), 이상설(李相卨), 최남선(崔南善), 이상재(李商在), 최재학(崔在學), 김진호(金鎭浩), 양기탁(梁起鐸), 주시경(周時經), 이용태, 윤치호(尹致昊), 이회영(李會榮), 유일선(柳一宣), 이필주(李弼柱), 이승만(李承晩) 등과 ꡔ周時經傳ꡕ, pp.190~201;전택부, ꡔ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ꡕ, 정음사, 1978, p.244;전택부, ꡔ人間 申興雨ꡕ, 1971, p.154;ꡔ민족운동가의 아내 수기ꡕ, p.13.  같은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모였다. 이승만은 1910~1912년 사이에만 전덕기 목사와 같이 활동하고, 독립협회 운동 이후와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시에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이 중에 많은 인사들이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교회에서 을사보호조약 반대투쟁 때에 전덕기와 함께 국내에서 크게 활동하던 인물들이었다. 1907년의 해아 밀사사건이 우리 교회의 지하실에서 모의되고, 또 신민회가 조직되었으며, 그 본부가 우리 교회에 있게 된 것이다. 이필주 목사 약력. 전 목사도 유능하고 성실한 동지들과 선배들을 얻게 되니 기쁘기 한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사관을 찾아오는 인사들의 식사 대접만도 큰 일이었다. 이 일은 특히 전 목사의 부인에게 큰 어려움을 주었다. 부인은 원래가 건강하고 부지런한 분이었다. 子婦인 張姬玉 여사의 증언. 다음의 자료도 張女史의 증언에 의함. 목사관에 음식 재료가 넉넉하거나 돈이 있었다면 문제는 없었겠지만, 뻔한 목사의 월급을 가지고는 계속하여 모여드는 독립운동지사들을 대접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끼니때가 되면 더욱 난감하였다. 전 목사는 때가 되어도 손님방이나 사랑방에 음식상이 들어오지 않으면 부인에게 독촉과 성화가 불같았다. 쌀독에 쌀이 있는지 없는지 부엌사정은 도무지 모르면서 때만 되면 그렇게 부인에게만 독촉하니 부인의 괴로움은 본인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 남편은 사정도 모르고 독촉만 하니 부인은 부엌에서 혼자 울 때가 많았다고 한다. 부인은 결국 하는 수 없이 짬짬이 시간을 내어서 자기가 벌어서 이들 독립지사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부업이라야 겨우 이웃집의 빨래를 해주거나 또는 경사가 있는 동네집의 가사나 돌보고 또는 바느질을 해 주는 일 정도였다. 세상은 전 목사의 눈부신 민족운동만 알고 있지, 그 뒤에서 남모르게 많은 고생과 수고를 한 그 부인의 노고는 모르고 있다. 우리는 훌륭한 목사나 인물 뒤에 숨어서 큰 수고를 한 분들을 잊기 쉽다.      3. 상동파의 신민회 조직          이렇게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부터는 흩어져 있었던 민족운동 세력들이 다시 서울을 중심으로 특히 우리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국내에서 민족 운동의 핵이 없었는데 이제 우리 교회의 전 목사를 중심으로 동지들이 을사보호조약 반대투쟁 이후 다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에 이승만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고, 안창호(島山 安昌浩)는 1907년에야 국내로 들어왔던 사실을 중요시해야 한다. 즉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신민회는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창설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1907년에 안창호가 미국에서 귀국하기 전에 세상에서 말하는 상동파(尙洞派) ꡔ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ꡕ, pp.100~102, ꡔ인간 신흥우ꡕ, p.154. 가 엄연히 상동교회의 전 목사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모의하며 활동을 계속하던 애국지사들의 국내 모임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즉 상동파란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하여 모였던 민족운동가들의 국내단체를 이른다. 이 상동파는 안창호가 미국에서 1907년에 돌아오기 전인 1905년부터 이미 존재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보호조약 반대투쟁을 전후하여 이미 안창호 없이도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상동파가 국내에서 상동을 중심으로 교육사업과 언론사업 문화사업을 통한 민족운동을 계속하고 있을 때 안창호가 국내사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가족을 미국에 둔 채로 일시 귀국하게 된 것이다. 안창호가 8년만에 귀국하여 보니 그의 눈에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주권은 이미 일본의 통감부에 넘어갔다. 또 일본인들이 정치적 특권과 경제적 이권을 위하여 계속 좁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한편 일본인들에게 밀려서 우리 민족은 만주로 중국으로 살 길을 찾아서 탈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독립협회 운동 때부터 알고 있던 동지들이 건재하여 자기가 없는 동안에도 계속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독립투쟁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큰 감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소망과 큰 용기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협회 때부터의 동지인 청년 전덕기가 이제는 상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서 상동교회와 공옥학교 그리고 상동청년학원을 통하여 유능하고 의리 있는 동지들을 모으면서 열심히 민족운동을 전개하며 후배와 인재 양성에 힘쓰고 있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안창호는 미국에서 일시 귀국할 때 그가 국내에서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내독립운동을 하려고 온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가족은 계속 미국에 있었고 따라서 그는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한 것이다. 1910년 이후에 신민회 간부들이 분사하여 신민회 활동을 계속하려고 했을 때 안창호는 미국에서 활동하려고 미국으로 갔던 것이다. 이 때 전덕기는 계속 국내에 남아서 신민회의 총책으로 있으면서 국내외의 동지들의 연락까지 맡았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따로 “상동교회와 신민회”에서 다루기로 한다. 안창호의 귀국 동기 기사를 보면 “도산이 귀국할 때의 목적은 주로 국내 사정을 직접 알아본 뒤에 다시 미주로 건너가 그 곳 동지들과 함께 구국운동을 진행시키는 방략을 세우고자 함이었으나, 새로이 사귀게 된 국내 동지들은 도산에게 국내에 머물러서 전국민을 상대로 하여 애국사업을 일으킬 것을 굳이 권하였고 도산도 이에 뜻을 결하고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게 된다.” 주요한, ꡔ安島山傳ꡕ, 三中堂, 1975, p.46.   라고 하였다. 신민회가 마치 안창호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애써 동지들을 모아서 그것을 조직하였다 ꡔ獨立運動血史ꡕ 上, 1947, p.78.   라는 것은 사실을 왜곡한 보도이다. 안창호가 미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국내에는 이미 성숙한 지도력을 필요로 하는 상동파가 있었고, 안창호에게는 국내 조직이 필요했다. 그래서 1907년 이후 국내의 조직과 국외의 경험 있는 지도력이 만나서 신민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가 지은 안창호 전기에는 ‘그는 우선 기본되는 동지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기본되는 동지를 구하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믿을 만한 사람이요, 하나는 각도에서 골고루 인물을 구하는 것이니 이것은 본래 여러 가지로 불리한 악습이 된 지방색이란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이리하여 구한 동지가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전덕기(全德基), 이동휘(李東輝), 최광옥(崔光玉), 이승훈(李承薰), 안태국(安泰國), 김동원(金東元), 이덕환(李德煥), 김 구(金九), 이 갑(李甲), 유동열(柳東悅), 유동작(柳東作), 양기탁(梁起鐸) 등이었다.’ 이광수, ꡔ도산 안창호ꡕ, 大成文化사(社), 1947, pp.23~24.  여기에 나타난 신민회의 창립회원이며 중요간부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이미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들은 거의가 1905년에 전덕기와 함께 독립투쟁을 하던 사람이거나, 또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계속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였던가. 말하자면 안창호가 얻었다는 동지들은 그가 보기에도 믿음직했던 상동파의 동지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민회의 조직과정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즉 신민회는 안창호가 어떤 그의 사전 계획에 따라 동지들을 규합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안창호가 귀국하기 전에 이미 상동파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던 국내파 민족운동조직이 안창호의 영도력을 영입하여 이 신민회가 발족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내에는 이미 상동교회를 중심한 민족운동조직이 있었고 이 국내조직이 미국에서 훈련된 안창호의 영도력을 받아들인 것이다. 후에 안창호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 예비심문에서 “신민회는 피고인(안창호)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것인가” 라는 검사의 질문에 대하여 도산은 “아니다. 양기탁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다” 주요한, ꡔ安島山傳ꡕ, p.61.   라고 진술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그가 지적한 양기탁은 바로 상동파의 주요 멤버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민회의 창설이 국내파 인사들에 의하여 실질적으로 조직되었던 것을 또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