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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인물-김진호 목사(2) 배재학당과 관련부분 #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316
* 애산 김진호목사 배재학당과 관련부분



배재사(培材史) - 단기 4288년(1955년) 6월 8일 발행, 배재중고등학교

pp 143 - 147 중에서



제 12 편 교목제(校牧制)



1. 교목실(校牧室)

  배재학당 창설 당시에는 창설자 H. G. 아펜셀라 목사가 아침 기도회 시간을 지도하였고 아펜셀라 목사가 황해 바다에서 순직한 후 1902년 9월 벙커목사가 후임으로 취임하여 아침기도회 시간을 지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배재학당에 입학하기 전에 "대체 배재학당이란 어떠한 곳인가?" 하여 알려고 할 때 제일 먼저 노블교사가 인도하여 보여 준 곳이 기도회 시간이었다. 배재가 다른 학교와 다른 것은 모든 학과를 시작하기 전에 반성의 고요한 기도회 시간을 갖는다는 점과 학과목 중에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아무리 과학과 철학이 발달할지라도 인간(人間) 완성에 있어서는 기독의 가르침 외에 완전 무결한 인격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인격을 학생들의 생활에 소개하므로서 진실한 교육을 할 수 있다. 종교적인 교육을 하는 데는 교목제도를 두어 학교에 전속한 목사가 있어서 학생들을 기독의 정신 사상에서 지도하도록 하였다. 학생 전체의 종교적인 움직임을 계획하고 실시하도록 하는 곳이 교목실이다.



2. 초대교목 김진호 목사

  1873년 10월 20일 경상북도 상주(尙州)에 출생하여 20년 간 한문을 수학하였다. 1914년 3월에 협성신학교를 2년 수학하고 상동교회에 목회를 하다가 1916년 4월에 배재학당의 초대교목으로 취임하였고 1922년(1920년) 10월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태원교회와 홍제동교회를 학생들로 더불어 설립하였고 20년 동안 교목으로 근속하였다.



3. 학생 기독청년회

  A. 기원과 발달

  1903년 9월에 학생회가 시작되었으나 회규(會規)를 완비한 회체(會體)는 못되고 몇 명의 학생들로서 동기가 되어 활동하다가 1910년 11월 12일에 와서야 비로서 완전한 회체를 갖춘 배재학생 기독청년회가 조직되었다.

  그후 1917년 4월 1일에 와서는 회무를 확장하게 되어 전임 총무를 초빙하여 회무실을 특설하고 전력을 다하는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사업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

  매 주마다 회원을 시내와 시골에까지 각 교회에 파송하여 주일학교를 돕게 하고 연설회와 토론회 같은 집회를 주최하여 개최하고 여러 가지 부속사업을 많이 하였다. 그 당시의 임원은 다음과 같다(1)



  회      장 : 김병호

  부  회 장 : 신봉조

  총      무 : 홍범규

  회      계 : 김헌수

  서      기 : 이병설, 염의동

  사      찰 : 김태규, 김은식

  전무총무 : 김기연

  의사부장 : 김준원

  종교부장 : 진평원

  사교부장 : 장용하

  운동부장 : 홍   호



  1922년 12월 13일에 학생기독청년회의 회규(會規)를 수정하는 동시에 사업부(事業部署)를 확장하였다. 종래에 없던 부서 문학부(文學部)와 음악부(音樂部)를 더하여 문학부에서는 문학심을 장려하기 위하여 "배재"를 발간하여 학술(學術) 강연회(講演會)를 주최하여 회원 "학생들에게 문학적 사상을 보급하고 소질을 길러 주며 또는 도서실을 경영하고 배우는 과정 외에 문학, 실업, 과학등의 실 사회에 대한 지식을 얻게 한다"

  "음악부에서는 학생 음악 외에 사회 음악의 강의회(講義會)를 열어 음악에 대한 지식과 수준을 높이도록 하고 음악회를 주최하여 열도록 한다"(2)



  B. 사업

    ㈀ 교회를 설립

  1922년 3월부터 학생 전도대를 매주 이태원에 파송하여 40명의 신 신자를 얻고 황학동에다 집을 사들여서 예배를 보아 오다가 그 집을 팔고서 현 교회의 기지를 사들여 새로 교회를 건축하였으며 정동교회에서 김은(金恩)목사를 파송하였는데 목사의 보수는 학생기독청년회에서 반 부담을 하였다. 홍제동에다 학생전도대를 매주 파송하여 오신 신자를 30명을 얻고 처음에 초가집을 사들여서 예배를 보아 오다가 새로 100평의 기지를 사들여서 1922년 5월에 목조 함석 집을 건축하였다.



    ㈁ 순회전도대

  종교부의 주최로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수원지방을 목표로 하고 순회전도대를 조직하였다. 연사(演士)는 노쾌징(盧快徵), 박병화(朴炳華), 이시웅(李時雄)이었고 악사(樂士)는 김상준(金相駿), 홍재유(洪載裕)이며 김진호목사의 인솔하에 1922년 12월 26일에 수원읍 종로교회에 도착하여 밤 7시에 400명의 청중이 모인 회장에서 본 교회의 김세환(金世煥) 청년회장의 사회로 김시웅의 연제를 "감추인 보배"라 하여 은혜로운 시간이었으며 김홍우(金洪雨)의 아름답고 정중한 주악(奏樂)이 있었다.



  27일 오후 7시에는 동 교회에서 박병화는 "예수의 마음"이라는 연제로 이시웅은 "생명의 신"이란 연제로 일반 청중에게 감동을 주었다.



  28일은 수원읍을 출발하여 안용면(安龍面) 고삭리(古索里)교회에서 김성묵(金聖默) 청년회장의 사회로 박병화는 "하나님은 참됨"이라는 연제로 노쾌징은 "잘 살려면" 이시웅은 "복스럽게 살려면"이란 연제로 주악을 섞어 가며 연사들의 열변에 감동한 그들은 목놓아 우는 사람이 있었다.



  29일에는 수원으로 돌아와 오산교회(烏山敎會)에서 홍전준 전도사의 사회로 박병화는 "하나님은 참됨" 이시웅은 "심은대로 거둠"이라는 연제로 청중에게 감동을 주었다.



  30일도 동 교회에서 노쾌징은 "우리의 집" 이시웅은 "생명의 길" 이라는 연제로 열변을 토하였다. 31일은 주일이어서 저녁 집회에 이시웅이 "사랑의 신"이란 연제로 전도하였다.



  1923년 1월 1일 수원군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교회에서 김진호 목사님이 "길, 진리, 생명"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고 2일밤도 김진호 목사가 "중생과 천국"이라는 제목으로 전도하였다.



  3일에는 사강리교회를 출발하여 음덕면(陰德面) 남양리(南陽里)교회에서 박병화는 "삼각의 생애" 이시웅은 "예수교와 조선인"이라는 연제로 전돠였다.



  4일에는 동교회에서 노쾌징이 "서로 도웁자" 이시웅은 "예수 앞으로 나오라"의 연제로 전도하였다.



  5일 12시 20분 차로서 많은 복음을 뿌려 놓고 일행은 돌아왔다.



  1924년 2월 17일 정동제일예배당에서 제14차 총회를 모이고 임원을 총 선거한 후 동 19일에 신 임원회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은 새 사업에 대한 결의를 하였다.



  ① 내화(內和) - 교내 단합

  ② 외친(外親) - 일잔 사회에 동정을 요함

  ③ 애교적 사업 - 자세한 세목은 월례회에서 결의 함

  ④ 문화의 보급운동

  ⑤ 종교의 향상운동



  1924년 7월 19일로 동 31일 12일 간에 걸처서 하기 순회 전도대를 조직하여 김진호 목사 인솔하에 인천부근, 강화 각 도서에 복음의 씨를 뿌리었다. 1925년 4월 29일 배재학생기독청년회 주최로 중앙기독청년회 회관을 빌어서 음악회를 개최하여 만장의 성황을 이루었다. 동 5월 29일에는 문학부 주최로서 교내 웅변대회를 개최하였다.(4)



    ㈂ "배재"지를 발간

  학생 기독청년회 문학부에서 학생의 기관지로서 "배재"를 편집하고 인쇄 발행하였다.





  따로 학생회라는 것이 없고 학생 생활의 모든 활동은 본회를 통하여 하여 오다가 1945년 12월 7일에 학생기독청년회는 회대로 있고 배재학생회라는 회가 조직되어서 "배재"를 학생회에서 그 때부터 편집하고 발행하였다. 그리고 학생기독청년회에서는 기관지로서 "등대"라는 잡지를 발행하게 되었다. 이 "등대"는 1945년 12월 20일에 제1호를 내고 이번 70주년 기념식을 기하여 특집호로 8호를 내어 놓게 되었다.



  주) (1), (2), (4), "배재지" (3), 김진호목사 기록에서



                                                                                    애산교회  HP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