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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상동교회의 지교회 개척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735
우리 교회는 선교하며 애국하는 교회였다. 애국과 동시에 선교도 잘 하는 교회로도 이름이 나 있었다. 특히 이 시대에는 아직도 선교사들이 한국교회를 주도하여 나가던 때여서 새로운 교회의 설립이나 개척은 주로 선교부의 선교비에 의하여 계획되고 집행되던 때였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1907년부터 1913년까지 7년간 서울 근교에 무려 6개 처소에 선교부의 도움이 없이 순전히 우리 교회의 힘으로 지교회를 세웠다. 이 7년간은 전덕기 목사가 스크랜톤의 뒤를 이어서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겸하여 성공적으로 목회하던 때였다. 우리 교회가 이 때에 세운 지교회들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계속 발전해 가고 있다. 처음 세운 지교회는 해아 밀사사건이 일어났던 1907년인데, 이 해에 무려 두 교회를 개척하여 세웠다. 그 하나는 지금의 공덕동교회(孔德洞敎會)요 또 하나는 지금의 세검정교회인 창의문교회(彰義門敎會)이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08년에는 지금의 청파교회와 합동했던 연화봉교회(連花峯敎會)를 개척하였다. 우리 나라가 일본에 합병당하던 1910년에는 북장동교회(北壯洞敎會), 1912년에는 지금의 마포중앙교회인 사촌리교회(沙村里敎會)를 세웠고 또 전 목사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13년에는 녹번현교회(碌磻峴敎會)를 세웠는데 牧師全德基略史.  지금까지 이 모든 교회는 그 이후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① 공덕리교회 1907년에 우리 교회가 처음으로 세운 이 교회는 우리 교회의 교육전통을 이어받아 설립 초창기부터 교회 내에 학교를 세워 선교에 힘썼다. 교회가 시작된지 4년 후인 1911년에 공덕리 여자보통학교를 세워 여자교육을 겸한 선교에 힘쓰면서 성장하여 왔다. 그 후 이 교회는 새 교회 건축을 위하여 노력한 결과 공덕동 로터리에 아름다운 3층 건물의 웅장함을 나타내고 있다. ② 세검정교회 창의문교회(彰義門敎會)라 불리던 지금의 세검정교회도 공덕교회와 같은 해(1907년)에 세워진 우리 지교회이다. 세검정교회는 해방 전까지 계속 우리 교회의 전도사나 장로님들이 자주 나가서 설교하거나 심방하여 우리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바 있다. 이 교회는 1977년에는 강서구 신정동에 세신감리교회를 개척하였다. 이렇게 보면 세신교회는 우리 교회의 손자뻘 되는 교회인 셈이다. ③ 연화봉교회(蓮花峯敎會) 1908년에 지금의 용산구 서교동산 언덕에 세운 연화봉교회도 우리 교회의 교육전통에 따라 그 시작부터 연화봉여학교를 세워서 선교와 교육을 병행하여 전도를 진행시켰다. 그러다가 30년 후인 1938년에 이웃 청파동에 있는 청파감리교회와 합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합동하여 발전한 청파교회는 일제 말기의 시련기와 해방 후의 혼란기를 거쳐 꾸준히 발전하여 지금은 총 건평 400평에 1억 2천만 원을 들여 세운 새 성전이 1980년 가을에 완공 새로 봉헌되어 전보다 더 빠른 교회 발전이 기약된다. ④ 북장동교회(北壯洞敎會) 우리 교회가 이 시기에 네번째로 1910년에 세운 북장동교회는 지금의 어느 지점에 세워졌는지 또 어느 교회와 합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본의 강점 이후에 일본이 서울시와 그 주변에 동네이름을 거의 바꾸어 놓았으므로 북장동을 아직 확인할 수 없다. 이 지명 확인과 그 교회의 약사에 대하여는 앞으로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⑤ 사촌리교회(沙村里敎會) 이 교회는 1912년에 다섯번째로 우리 교회가 세운 지교회인데 이 교회는 처음에는 지금의 용산역 남쪽에 있는 새남터(沙南基)에 세워졌다. 한강을 굽어보는 낮은 언덕에 세워진 이 사촌리교회는 1925년에 있었던 저 유명한  을축년 대홍수 때에 이 교회건물이 홍수에 쓸려가 버렸다. 이후로 이 교회는 마포의 도화동(桃花洞)으로 그 자리를 옮겨서 계속 발전하였으나, 일제말기인 1944년에 일제의 교회탄압과 침략전쟁 지속을 위한 자금 마련의 일환으로 이 교회건물은 일제에 의해 강제매각처분을 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고 교인들도 흩어지고 말았다. 해방 후 이 교회는 그 당시 김종명 목사가 건물을 다시 찾아 재건을 서둘렀고 이후로 꾸준히 발전하였다. 1976년에는 영동제일교회를 개척하고 이어 1977년에는 계속하여 한강감리교회를 개척하는 등 이 교회의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1977년 7월에 교회의 이름을 도화동교회에서 마포중앙감리교회로 개명하였고, 계속적으로 선교에 힘쓰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⑥ 녹번현교회(碌磻峴敎會) 1913년에는 서대문 녹번동에 여섯 번째의 지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교회의 정확한 지점과 이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이 큰 유감이다. 이 시기에 우리 교회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하면 담임목사 전덕기의 목회원리인 선교와 애국을 동일시하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과 동시에 일제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병행시켜서 그의 선교정책을 펼쳐나갔는데 이런 그의 목회 원칙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대단히 적절한 것이었다. 민족의 소원과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민족의 여망을 목회에 반영시킴으로써 우리 교회는 어느 외국 선교사의 교회가 아닌 한민족의 교회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이 민족이 상처를 받고 강도 만난 나그네와 같이 길가에 쓰러지고 있는 형편인데 그 곁을 그대로 지나가지 않고 그 민족의 상처를 싸매주고 어루만져 주고 위로하는 그런 자세야말로 우리 교회가 이 민족을 향하여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의 근거가 된 것이다. 우리 교회를 중심했던 이 시대의 민족 독립운동은 어떤 정치적 야망에서 나온 운동이 아닌 순수한 종교적 확신에 의한 운동이었기에 더욱 귀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가 언급한 그런 엄청난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도 동시에 당시의 어떤 교회도 감히 할 수 없었던 여섯 곳의 지교회를 6년간에 세운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