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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협회 #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4,890
대한협회  



1907년 11월 10일에 창립된 한말의 정치단체. 일제의 침략정책에 항거, 투쟁하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일제 통감부에 의하여 강제 해산된 뒤 대한자강회의 고문이던 오가키(大垣丈夫)가 이토(伊 博文)의 내락을 얻어 윤효정(尹孝定)·장지연(張志淵) 등 이전의 대한자강회 간부들과 천도교의 대표로서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추가시켜 10명으로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사무소는 서울 탑동(塔同)에 있었고, 회원은 약 5천명이었으며, 평양·대구·진주 등 37개 지휘가 있었다. 총재에 민영휘(閔泳輝)가 선출되었으나 취임을 사양하여 공석으로 있었고, 회장 장박(張博)도 취입을 사양하여 남궁억(南宮檍)이 되었다. 부회장에 오세창, 총무에 윤효정, 평의원으로 장지연·권동진·유근(柳瑾)·정교(鄭僑)·이종일(李鍾一)등 23명, 찬의원(贊議員)으로 지석영(池錫永)·김중환(金重煥)·정봉시(鄭鳳時) 등 10명, 그밖에 감사원·회계·서기 등이 있었고, 교육부장에 여병현(呂炳鉉), 회보발행소장에 홍필주(洪弼周), 편집 겸 발행인에 이종일이었다.



1908년 7월에는 남궁 억의 사임으로 김가진(金嘉鎭)이 회장이 되었으며, 일본인 오가키와 시가(志賀祐五郞)가 고문으로 선출되면서 협회의 성격도 크게 변하였다. 본래 이 협회는 국가의 부강, 교육과 산업의 발달을 추구하였는데 국가는 개인의 모임이며, 개인은 분자이니 양자가 합심하여 자립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를 위해 국민의 거국적인 협조로 정치·교육·산업을 강구하여 국민의 자질을 향상시키고자 한 것이다. 또한 관인 폐습의 교정, 근면 저축의 실행, 권리·의무·책임·복종 등 국민의식의 고취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활동에서 주권수호 등의 정치활동은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조직활동의 강화, 월보간행, 회관건립사업의 추진, 인권옹호 등이 있었으나 때로는 항일·친일의 모호한 성격도 나타났다. 부서로는 교육·법률·재무·실업·지방부 등 5부를 두었고, 부서별 활동은 비교적 활발하였으며, 세율의 교정, 재산피탈사건의 조사, 강연회 등을 통해서 국민의 권리 보호에 앞장섰다. 또한 이와 같은 일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신리강구소(伸理講究所)를 설치, 토호의 탐학금지와 부당함 등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국민을 지도, 계몽하였다. 또한 회보를 통하여 정치·사상·역사 등을 밝혔으며, 각 부서의 활동을 통하여 《대한지지 大韓地誌》·《외교약사 外交略史》·세계지리·문에 등을 광범위하게 취급하여 교양·계몽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