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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교회(장로교)史 #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6,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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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남대문교회의 태동과 형성과제(1884-1918)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 의료 선교사 알렌 (Allen)운 문호개방 이후 정식으로 입국한 최초의 선교사였다. 우리 남대문교회의 태동은 알렌의 입국에서 비롯된다. 선교사 알렌은 당시 한국의 실정 때문에 의료사업을 앞세웠지만 사실상 그 근본 목적은 기독교의 복음사업이었다.



선교사 알렌이 한국에 도착한 1884년 9월 20일은 남대문교회의 탄생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며 한국 개신교사(改新敎史)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포도원이 땅 끝까지 찾아와 축복으로 한국에 건설되는 그 역사과정 가운데 직접적인 역할을 담당 했던 남대문교회의 태동은 선교사 알렌 의사의 도착과 함께 함을 우리는 중대한 사실로 주목해야 한다. 아직 선교의 자유가 없었던 상황에서 알렌은 그의 가족과 함께 예배를 그 가정에서 드렸지만, 이 예배공동체는 알렌의 의료 선교사업과 함께 남대문 밖 복숭아골 에 터를 잡아 남대문교회로 성장한 것이다. 장로회 사기(史記)에 기술되어 있는 거소가 같이 해론에 의하여 은연(恩筵)히 교회를 성립하였다고 함은 알렌의 가정예배에서 태동되었던 남대문교회가 제중원시대에 구형(舊形)을 갖추었음을 본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알렌의 입국과 선교사업의 터를 마련하기 위하여 제중원을 설립하기까지의 과정과 역동자 헤론에 의하여 구리개(銅峴) 제중원교회로 건설해 나가는 모습과 또한 에비슨의 활동으로 남문밖 세브란스병원의 개원과 함께 복숭아골의 남문밖교회가 새 시대를 맞이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로 성장하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외세의 압력으로 고난받는 한국 민족(韓國民族)의 역사적 상황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남대문교회는 태동하고 성립(成立)되었다. 이러한 남대문교회가 담임목사를 처음으로 초빙한 것은 1912년이었으니 제 1대 박 정찬(朴禎燦) 목사이다. 또한 제 2회 경충노회(京忠老會)가 남대문교회에서 열렸고 최초로 용산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제2대 왕손(王孫) 이 재형(李載馨) 목사도 본 장에서 그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최초의 선교사 알렌(Allen,安連)의 입국





(1) 입국(入國)의 역사적 배경





일본과의 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수신사의 왕래가 빈번해지는 동안 조선사람의 구미제국(歐美諸國) 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차차 바뀌게 되자, 구미제국의 태도 역시 일본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자국의 이해관계도 긴밀하다는 생각에서 적극적인 노력을 펴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국내반응을 보아도 쉽게 짐작이 간다.



1878년 [켈리포니아]주 출신 싸아젠트(Sargent) 상원의원이 제출한 결의안의 내용은 "본국을 대표할 만한 위원을 임명하여, 평화로운 수단과 일본관헌의 우호적 협조를 얻어 , 미한수호통산조약(美韓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도록 진력하라"고 헤이스(Hsyes) 대통령에게 요구하였다. 그는 연설을 통하여 대담하게도 제너란.셔먼(General Sherman)호의 사건에 언급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조선의 행동이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라고 시인하면서 1871년에 미국 극동함대 사령관 로저스(J.Rodgers)가 군함 4척을 이끌고 강화도를 포격한 것도 잘못이 미국측에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에 미국정부도 1879년 티콘데로가(Ticonderoga)호로 세계순항의 길을 떠나는 해군제독 슈펠트(R.W Schufeldt)에게 가능하다면 조선에 들려 조략을 체결하도록 명령하였다. 슈펠트 제독의 조선 방문은 1880년 5월 14일인 바, 그는 부산에 주제하는 일본 관할을 통하여 최초의 서장을 조선정부에 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정부의 태도는 완고한 견해를 버리지 못하였던 대이라 종전과 별다름 없이,중앙정부에 조회하지도 않고 동래부사가 이를 거절하여 버렸다. 당시 조선측의 기록으로 동래부사(東來府使)의 보고를 받아 경상감사 이 근필이 정부에 보낸 기록을 보면 슈펠트의 최초 조선 방문은 동래 관헌도 만나지 못하고 헛되이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이 되어 미국의 대한교섭(對韓交涉)은 또 다시 비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정세가 급속도로 바뀌게 되어 새로운 서광이 비치게 되었다. 이것이 곧 개화당(開化黨)의 대두와 그에 따른 대미정책(對美定策)의 출현이다. 고종 17년 예조참의 김 홍집(金弘集)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광동인 황 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이란 책을 가져다가 유포시킨 일이 있다. 황 준헌은 주일(駐日) 청국 공사관원으로 국제 정세에 밝은 사람이었다. 러시아제국의 극동정책(極東定策)이 바야흐로 두만강 연안을 엿보게 될 때 조선은 어떠한 정책으로 이에 대항하여야 하느냐 하는 데서부터 그의 책략(策略)은 전개된다.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구절들을 소개해 보면,"......홀연히 대국과 결맹하였다가 서교(西敎)의 선교사가 입국하여...... 그러나 종래의 서교한 것은 불란서의 힘을 배경으로 한 천주교(天主敎) 였지만, 미국의 야소교(耶蘇敎)한 것은 다른 바 있으니......중국이 구미제국과 통상(通商)한 이래 서교 살해사건은 있어도 한 사람의 야소교도가 없었음은 그간의 정을 증명하는 것이다. ....... 강대한 러시아를 방어함에는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방(聯美邦)으로 결맹하여 상호견제함이 오히려 유리하니......"



이상과 같은 이론으로 그는 대담하게 문호개방을 역설하였으니.야소교와 천주교를 분리하여 야소교 신앙의 무해 유익함을 주장한 것은 당시에 있어 완고한 조선인의 생각 보다는 확실히 앞선 의견이다. 이상과 같이 정계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을 때 한층 자극을 준 것은 청국의 태도 특히 이 홍장의 태도였다. 그는 병자수호조약 체결 이후 적극적 진출을 꾀하고 잇는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서라도 한미간(韓美間)의 통상수호(通商修好)를 촉진시킴이 득책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홍장은 조선정부에 통상수호를 권하는 동시 북경 주제 미국공사에게도 유력한 암시를 주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주선으로 조선에 접근하려던 미국의 외교정책(外交政策)도 자연 포기되고, 이후로는 청국의 협조로 조선과의 조약을 체결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2년 봄 슈펠트제독은 이 홍장의 호의로 청국의 수사제독 정 여창(丁汝昌)과 마 건충(馬建忠)으로 더불어 군함을 탑승하여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몇해전 부산에서 일본 관헌의 소개를 받을 때,한마디에 거절하던 태도와는 달리 조선정부는 즉시 접대관(接待官)을 파송시켜 청.미 양국의 사신을 인천 관사(官舍)에 맞아 들이고, 통리위사 신 헌(申櫶)과 김홍집(金弘集)을 전권대신 및 부관으로 임명하려 즉시 담판을 시작하여 처음부터 별 문제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불과 10여일 만인 4월 6일에 14개 조항을 완전히 조인하게 되었다. 조약의 내용은 그 어느 점으로 보든지 "최혜"(最惠)란 관사를 붙여도 좋을 것이었다. 조선의 문호가 전혀 불가능한 것인 줄 믿어오던 구미인(歐美人)에게 있어서는 슈펠트 제독의 교섭은 확실히 역사적인 성공이었다. 조선과 미국과 외교관계가 맺어지자 1년 후 ((1883년 5월 13일 )무우트(H.Foote)가 초대의 미국공사로 조선에 내주하게 되었고,이에 조선에서도 답례로 민 영익(閔泳翊)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미국에 파견하게 되었다. 민영익을 비롯하여 부대신 홍 영식(洪英植), 종사관 서 광범(徐光範), 수행원으로 유 길준(兪吉濬), 고 영철(高永喆) 등 8명으로 일행이 구성되어 1883년 7월 하순 인천에서 출발하여 두 나라 사이의 우외를 두텁게 하였다.





(2) 알렌의 입국과 남대문 교회의 태동





한국의 문호가 개방된 이후 선교사로서 정식으로 입국한 것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뉴톤 알렌(Horace Newton A.hen) 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중국으로 파송되어 1883년 10월 11일 상해(上海)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선교사업을 정착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가 처음 지정받은 지역은 남경(南京)이었고 그후는 상해였으나, 당시의 상황을 알렌은 "우리는 1년 동안 중국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많은 모임과 흥미 있는 경험을 했으나, 정작 의료활동에 대한 전망은 용기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이 때에 상해에 있던 친구 핸더슨(DR.Henderson)이 선교지를 한국으로 변경하도록 권유하였다. 핸더슨은 그의 친구인 묄렌돌프(P.G.von Mollendoeff,穆麟德)) 통하여, 한국은 아직 선교사가 활동을 시작하지 안한 처녀 선교지라는 것을 알리고 한국에 가서 그 나라와 같이 자랄 것을 권면하였다. 알렌은 한국 세관에서 일하는 요셉 하스(Joseph Haas)에게 편지하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의사의 필요성을 타진하였다. 그리하여 알렌은 한국으로 선교지를 변경하기로 결심하였고 뉴욕에 있는 선교본부에 승인을 요청하였다. 다행히도 1884년 6월 8일자로 된 선교본부로부터의 한국에 가도 좋다는 회신전보를 7월 22일에 받게 되었다.



그무렵에 알렌은 상해에서 트렌튼(Trenton)호의 선장을 만났는데 그는 지난 5월에 미국에서 민 영익(閔泳翊)을 비롯한 한국 외교관들을 태우고 제물포에 왔기 때문에 한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알렌은 ,트렌튼호의 선장 피디안(Pythian)이 서울에 주재하는 미국 공사(美國公使) 푸트(Gen.Lucius H.Foote)에게 보내는 편지와 핸더슨이 묄렌돌프에게 보내는 편지를 함께 가지고 9월 14일 상해를 떠나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이틀 후에는 서울로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주한 장로교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입국하게 되었다. 알렌의 입군은 좋은 환영을 받았는데, 의사가 필요한 상황이어서 즉시 미국 광사관의 공의(公醫)로 임명받았다. 그는 그 후에 영국, 중국, 일본 공사관의 의사로도 활동하였다. 공사관의 의사로 임명됨에 따라 그 당시 선교사의 자격으로는 입국이 거부되던 상황에서 알렌의 한국 주재는 가능했다. 알렌은 미국 공사관 직원의 협조로 공사관 근처에 한국식 기와집을 한 채 사서 생활하기에 적합하도록 수리했다. 그는 10월 에 상해로 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10월 26일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집에는 일본인 요리사와 중국인 유모(乳母)와 이 하영(李夏榮)이라는 한국말 어학선생이 같이 살았다.



알렌이 1884년 9월 22일 서울에 도착하여 이튿날인 23일에는 미국 공사관을 방문하고 푸트(Foote) 장군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는 그날 의 방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의사가 없어서 큰 곤란을 겪고 있었던 때인 만큼 나를 여간 기쁨으로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푸트장군은 나를 공사관의 관의(官醫)로 정식 채용하였고 무보수(無報酬), 나를 여러 면으로 도와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10월 8일자로 알렌이 서울에서 엘린우드(Ellinwood)에게 보낸 편지에 씌여 있다. 그러므로 국왕이 알렌은 선교사가 아니냐고 프트장군에게 물었을때에 "그는 공사관 소속 의사입니다."라고 대답할 수가 있었다. 알렌이 한국에서 자기가 선교사라는 사실을 밝혔다면 용납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알렌이 매입(買入)한 선교사업을 위한 가옥은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때 살해된 사람이 살던 집으로 흉가(凶家)라고 하여 비어 있었다. 일본에 잇던 감리교 선교회 대표인 맥클레이(Robert S.mclay) 박사가 1884년 7월 3일 부인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그 때 이집에 들어 있었고, 이 집을 선교사업에 사용하였으며 좋겠다고 미국공사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미국공사는 맥클레이 박사가 이 가옥 매입을 졸라대기 때문에 사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선교사업을 당장에 할 수는 없고 ,때가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했던 만큼 푸트공사가 이 집을 알렌에게 알선해 주었을 때 "선약(先約)대로 하라고 사양도 하였지만 계약이 이미 성립되어 취소할 수는 없었다."고 매입 경위와 이 집을 매입함으로 인하여 맥클레이의 감리교 선교회가 크게 불편하거나 한국 선교사업의 시작에 곤란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의 편지를 맥클레이에게 전하였다.



알렌의 서울에서의 생활은 외국 거류민들의 의사로서 여간 바쁘지 않았고 한국어 익히기에 힘을 다하였다. 장로교 선교사로서 알렌은 당시의 선교사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고 있다. 즉 "우리는 날마다 기도와 예배보는 정도의 일밖에 못하였으나, 이만한 일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예배가 알렌의 한국인 어학선생에게 뚜렷한 감동을 준 것만은 사실이었다.알렌의 맨 처음 어학선생은,후에 워싱톤 주제 한국 대리공사가 된 이 하영(李夏榮) 이었으나 ,두 번째 어학선생은 노 도사(盧道士)로 알려지고 있는 노 춘경(盧春京)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처음으로 노 춘경이 1886년 7월 11일 세례를 받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알렌의 집에서 드리던 이 예배공동체에서 구리개(銅峴)에 있던 제중원교회(濟衆院敎會)로 이어지는 남대문교회의 태동과 맥락을 여기에서 찾게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알렌의 집에서 예배가 드려졌다는 사실을 말한 바 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종교적 성격의 집회는 1885년 6월 28일의 주일예배였는데, 알렌은 그의 일기에다 이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오늘 저녁식사 후 여덟시에 최초로 공식 주일예배가 있었다. 참서간 사람 들은 해론내외,스크랜톤 의사의 어머니, 그리고 나와 나의 아내였다."한국에서 최초로 세례가 1886년 4월 25일 에 베풀어졌다. "오늘 한국에서 맨 처음으로 개신교 세례 예식이 집행되었다. 스크렌톤 박사와 아펜젤러 목사의 어린 딸과, 그리고 일본공사관의 영어 통역관이 세례를 받았다."



의사와 선교사 그리고 외교관이었던 알렌(H.N Allen,安連)은 1858년 4월 23일 오하이(Ohio)주 델라웨어(Delaware)에서 개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들 가운데는 미국 독립선언서의 서명자도 있었으니 그는 분명히 명문의 후예로 퓨리턴적 정신과 칼빈주의적 생활 신조를 그의 선조에게 물려 받았다. 이와 같이 그는 날 때부터 개척자적인 본능과 강한 의무감, 근면과 자신만만한 투지, 그리고 관용을 허락하지 않는 준엄한 비판의식을 타고났다. 그는 데러웨이에서 나서 자랐을 뿐 아니라 교육도 여기서 받았다. 1881년 오하이오 웨슬레안(Ohio Wesleyan) 대학의 신학과를 졸업한 그는 해외에 나가 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싶은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이미 해외에서의 기독교 활동에 대하여 관심이 매우 컸었다. 그것은 대학 신문이 늘 이에 관한 동창생들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경의 연경대학(燕京大學)을 창설한 조오지.데이비스와 하이란.로우리 등에 관한 기사를 대학신문에서 읽었을 때는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다시 오하이오주 옥스퍼드(Oxford) 에 있는 마이아미 의과대학(Miami Medical College)에서 학업을 닦아 1883년에 졸업하였다. 대학을 나온 그는 신앙이 투철한 미모의 여인 프란시스. 메센저와 결혼하였고, 곧이어 장로교 외국선교부의 중국 선교의 사로 임명되어 1883년 10월 11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알렌의 두 번째 어학 선생이었던 노 춘경은 한국인으로서 국내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인데, 선교사들의 자료 중에서는 노 도사(盧道士)로 불리우고 잇는 인물이다. 그가 1886년 7월 11일에 세례를 받고 난 후 7월 29일에 서울에서 언더우드가 보낸 편지 가운데 노 춘경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노 춘경은 기독교를 반대하는 문헌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읽게 되었다. 즉 한문서적에서 그리스도교 신도와 그리스도의 종교를 반대하는 구절을 읽다가 그게 대체 무엇인가 하는 호기심에서 기독교를 더 알고 싶어졌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종교는 외국 종교이기 때문에 외국인을 만나 사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헤론의사의 어학선생과 알게 되었다. 그 후 이 어학선생은 알렌의 통역으로 일했는데 노 춘경이 친구를 만나러 알렌의 집에 갔을 때 책상 위에 마가복음과누가복음이 잇는 것을 발견하고는 들고 나가 밤새도록 읽고나서 언더우드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한문 사복음서(漢文四福音書)를 다 읽은 다음 중국어로 된 성경 주석과 '성당수위(聖堂守衛)''심령의 구원'같은 몇 권의 한문 전도서적과 '야소교교리이지(耶蘇敎敎理易知)'라는 작은 책을 읽었다. 또한 그는 영어예배회에 여러번 출석하였으며 주일집회에도 참석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주일이 정기 성찬주일이므로 마태복음에 쓰여 있는 성만찬에 관한 것과 이에 대한 주식서를 읽고서 세례를 받고 싶다는 뜻을 고백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세례 문답을 했는데 묻는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대답을 잘 하였다. 기독교 교리에 관한 작은 책자는 분명히 그에게 많은 진리를 깨닫게 하였다. 원목사(元牧師)는 나라의 법이 아직도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고 잇다는 사실과. 또 만약 믿기로 작정하였다가 다시 돌아서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했다. 노 춘경의 표정은 모든 문제를 알았다는 듯하였다.





(3) 갑신정변과 제중원의 설립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조선에 대한 청(靑)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내정간섭은 강화되었고 청병(淸兵)과 천국 상인의 횡포는 극심하여 국민의



청나라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다. 김 옥균, 박 영효, 홍 영식 등은 청의 세력을 배제하여 자주독립을 확고히 하는 한편, 일본의 유신정치(維新政治)를 본받아 획기적인 정치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믿는 청년 정치가들이었다. 이들은 독립당을 조직하여 척족(戚族) 중심의 사대당(事大黨) 일파를 제거하고자 했고, 이러한 그들의 계획을 일본 공사 다께조에(竹添進一郞)와 서울 주둔 일본 병력의 힘을 빌어 실천하려 했다. 이들 독립당이 그들의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본의 힘을 빌리기로 한 사실은 일본이 조선에 그들의 세력을 침투시키려는 야망에 영합되는 것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안남(安南)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 중에 있었다. 전세는 청군이 프랑스군에게 격파되어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은 재빨리 조선에 적극적인 진출을 꾀함으로써 임오군란 이후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독립당과 주한 일본 공사는 쿠데타를 모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립당은 마침내 1884년 12월 4일에 신설된 우정국의 개국 축하 만찬회를 이용하여 사대당의 거두들을 암살한 후 정치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에 주재하던 각국 외교관들과 많은 정부의 고관들이 이 잔치에 참석하였으나, 일본 공사는 몸이 편치 않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독립당은 사대당의 거두들을 살해하기 위하여 낙성연회장과 가까운 곳에 장사들을 숨겨두었다. 거사의 신호는 연회장에 인접한 가옥과 안동(安洞) 별궁(別宮)에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연회장에서 다과가 나오고 있을 때 갑자기 문 밖에서「불이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시 소방도구의 관리 책임을 지고 있던 이는 우영사(右營使) 민 영익(閔泳翊)이었다. 그는 마침 이런 때 자기의 직분을 수행하게 된 것을 재수 없는 일이라고 투덜대면서 옆방에 있던 병사들과 시종들을 대동하고 나갔다. 이틈에 예리한 칼로 무장한 다섯 사람의 젊은이가 그의 호위병을 밀어 젖히고 군졸 한 명을 죽인 다음 민 영익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일곱 군데나 칼에 맞아 커다란 상처를 입었는데, 그 중 두군데는 고의 머리를 거의 베어 버릴 뻔한 것이었다.



1884년 12월 5일에 쓴 알렌의 일기에 "어젯밤은 서울에 있는 외국사람들에게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밤이었다."고 쓰여 있다. 분명 12월 4일 밤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밤이었다. 이날 밤 자객(刺客)의 칼에 맞은 수구파 대신 중의 한 사람은 민비(閔妃)의 조카뻘되는 민 영익으로서 얼마전에 한미조약의 비준을 교환하기 위하여 미국을 다녀온 사람이었다. 민 영익은 동맥이 끊기고 머리와 몸에 일곱 군데나 칼을 맞아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때마침 한국 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인 묄렌돌프의 관저에 당도하니 한의 (漢醫)들이 열네 사람이나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알렌의 치료를 반대하였으나 알렌은 민 영익의 생명을 구하기로 하였다. 그가 성공하기 까지는 걱정과 불안 속에서의 설달 동안이나 걸린 조심스런 치료의 결과였다. 이에 대한 보응은 과연 놀라웠다. 왜냐하면 서양의술의 신비스런 효과는 왕가의 신망을 얻게 되었고, 따라서 공개적인 선교활동의 길을 마련하였기 때문이었다. 1885년 1월 27일에 이르러서 민 영익의 건강 상태가 호전되어 알렌에게 사의를 표할 수 있게 되었다. 민 영익은 10만량을 보내면서 이것은 존경하는 의미에서 보내는 것이니 받아서 배불리 먹고 즐겁게 써달라고 하였다. 이 돈은 자기 손님에게 드리는 선물이지 치료비의 보수는 못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알렌은 조정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얼마 안되어 구한국 왕실의사를 겸하여 고종의 정치고문 역할을 하게까지 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민 영익과의 인연으로 고종(高宗)의 시의(侍醫)로 정식 임명을 받은 알렌은, 이 기회에 정식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 그는 이미 수많은 병자들의 치료와 간호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의 의료사업은 점점 확대되었기 때문에, 환자들로부터 자기집에 와서 치료하여 달라는 요청에 다 응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고종(高宗)의 후원을 얻어 병원을 설립할 생각을 하였다. 1885년 1월 22일, 알렌은 서울 주재 미국 대리공사 폴크(George C.Foulk,福久)를 통하여 국립병원 설립안을 궁중에 제출하였다. 알렌의 제의는 외국인 의사를 찾아드는 환자들의 수가 날로 증가되어 병원이 있어야만 되겠다는 이유와 자기는 오직 국민의 복리를 위하여 병원 일을 맡아 볼 것과, 청년들에게 서양의학을 가르쳐 줄 것과, 미국 자선사업기관에서 생활비를 받고 있느니 만큼 무보수로 일하겠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이 병원 개설에 꼭 필요한 조건은 환경이 깨끗한 곳에 건물 하나가 있어야 할 것이며, 일년 경상비와 약품대로 3천 달라만 있으면 될 것이라 하였다.



대담한 제의를 했다고 해서 고종의 허락이 반드시 있을 것은 아니었다. 두 가지 큰 낙관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묄렌돌프의 훼방이었다. 알렌은 그에 관하여 말하기를 "내가 궁중에 영향력이 있음을 알고 자기가 의과대학을 창설하고 나를 제마음대로 부리려는 고약한 계책을 꾸미고 있다"고 했다. 다른 하나의 나관은 신청서 중의 "자선사업기관" 조항이었다. 그러나 폴크와 알렌의 꾸준한 노력으로 교섭을 진행시킨 결과 1885년 4월 10일 병원개원(광혜원)을 보게 되었다. 병원 건물은 갑신정변 때에 살해된 홍 영식(洪英植)의 집을 병원으로 사용하게 하고, 파손된 집을 6백달라 내지 천달라의 비용을 들여서 고쳤다. 이때에 장로교 본부와 광혜원과의 관계는 장로교 본부는 진료의 책임자를 제공하는데 불과한 것으로 분명히 알고 있었고 한편 한국 정부는 건물과 제반 설비 및 경상비 등을 부담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한국에 상주하는 선교사의 사업기초가 놓여졌다.



1885년 4월 10일에 시작한 왕립병원 광혜원은 개원 13일 후인 4월 23일 제중원(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이라고 개칭되었다. 개원하여 진료를 개시한 후 환자 수가 날로 늘어나 알렌은 침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분주하였다. 하루에 최고 265명의 환자를 진료할 때도 있었으며, 1년동안에 외래환자와 왕진환자의 총 수가 거의 1만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알렌이 6월 21일 입경한 헤론(Heron) 의사와 함께 일해오던 중 날로 증가하는 환자로 시설의 협착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갑신정변 때 개화파로 참화를 당한 홍 영식의 주택이던 재동에서 구리개(銅峴, 현 을지로 1가 구 내무부 자리)로 1887년에 이전하여서 1904년 남대문 밖 세브란스 병원이 신축될 때까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제중원병원 보고서(1886년 보고)



1884년 정변 전에 서울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정변에 부상한 민 영익공의 치료의 청함을 받고 다수한 정국 부상병 치료에도 종사하였다. 차 등의 치료의 호결과를 증험한 다수의 인사가 태서의학의 우월함을 신임하여 의탁하게 된 까닭으로 점차 병원 양식의 가옥과 설비의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고로 주한 미국공사 폴크의 찬성을 얻은 후 그 계획 및 차에 대한 설계서를 작성하여 조선정부에 제출함에 국왕의 찬절하신 비준을 얻어 즉시 실행에 착수하여 기지선택에 필요한 건물, 수 백 달라의 약품 및 의료기계 등의 구입을 위시하여 다수의 관리를 임명하여 조선정부측 직원을 대표하였다. 연이나 여 1인으로는 도저히 임무를 감당치 못하겠으므로 미국에서 의학선교사 1인을 초빙하기로 결정되어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는 헤론(J.W. Heron)의사 도착전까지 조력한 것은 감사하였다.



환자는 각종 계급을 망라하였으니 걸인 나환자로부터 궁정의 귀인까지 포함하여 왕진도 실시하였다. 제반 환자가 필히 엽전 20푼을 지불하고 진찰권을 사게 한 것은 실상 수입의 목적보다도 무용의 관람자를 제한함에 있었고, 표에는 번호를 기입하여 혼잡을 피하도록 하였다.



약가로는 매인에게 엽전 1백개를 징수하였으며, 수개월간 이 방식을 계속하여 엽전 약 20만개(약 125달라)의 수입이 있게 되었다. 연이나 혹자에게는 여차한 사소한 금액도 지불하기 곤란한 자가 있으므로 이 제도는 폐지하고(전부무료?)내진하지 않고 금계랍만 청구하는 자에게는 매 10gr에 엽전 5백개 씩 징수하였다. 고귀한 부인 등도 일시 치료에 응대하였으나 즉시 사절하여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매번 여차한 부인이 내원할시는 병원 내외를 경계하기 위하여 다른 환자의 내왕이라던지 남자를 접근치 못하게 하는 등 각종의 폐단을 발견한 후이었다. 이와 같은 폐단을 피하기 위하여 수인의 기생을 채용하였으니 그것은 조선풍속에 기생은 남녀 양성간에 간격없이 출입 응대할 수 있는 까닭이었다. 인이나 불원하여 그 여성들은 총명하고 필요한 기술을 능히 습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정으로 해고하고 말았다.





(4) 알렌의 일화(逸話)





① 알렌이 갖고 온 유성기(留聲機)



알렌은 1884년 그가 한국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1905년 미국에 돌아갈 때까지 전후 20여년 동안을 처음에는 의료선교사로서 많은 공적을 남겼고 다음은 정계(政界)에서 박 정양(朴定陽) 공사를 따라 워싱턴에 가서 여명기의 한국 외교계에 많은 공헌이 있었다. 그후 다시 한국에 와서는 서울 주재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있다가 1897년에 정식 공사(公使)로 임명되어 을사조약(乙巳條約)의 성립에 의하여 구한국의 외교관이 박탈됨에 따라 공사관이 철수하기까지 9년간 공사 노릇을 하였으니 이는 미국공사로서 가장 오래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 왔던 각국 외교관 중에서도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알렌의 풍모는 신장이 보통 이상이었고 수척하고 대담한 것이 링컨의 후신인 것 같았으며 호발(虎髮)의 그 풍채가 보기에 외교관 같지는 아니하였으나 그의 이면에 담긴 인후(仁厚)한 도량은 누구나 곧 보아 알 수아 있었다. 각국 공사 중 한국 황제로 하여금 유사시(有事時)엔 반드시 그의 충고와 위안을 힘입게 하였다.



다음에 소개되는 이야기는 알렌이 공사로 재임하고 있을 당시의 일화 한 토막이다.



왕세자 이은(李垠)이 태어나던 해의 일이다. 의사로 있다가 일약 한국 주재 공사가 된 알렌(安렌)은 당시 친로(親露) 내각이던 각부 대신들을 정릉의 자택으로 초대했다. 그 중에는 외국에 갔을 때, 옷을 입고 목욕한 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는 완강한 보수파요 외부대신인 조 병식(趙秉式)을 비롯아여, 역관(譯官)으로서 친로풍조에 편승해서 정계를 주름잡던 김 홍륙(金鴻陸) 등 쟁쟁한 대관들이 참석했다. 칵테일을 마치고 여흥으로 들어가자, 알렌은 유성기(留聲機)라고 하는 것을 꺼내 놓았다. 물론 거기에 참석한 대신들로서도 처음 보는 진기한 물건이었다. 그 때의 축음기는 지금과 같은 원반(圓盤) 레코드가 아니라, 납으로 만든 중공(中空)의 원통(圓筒)레코드였다. 녹음과 재생이 되는 녹음기, 축음기 구실을 겸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복제(複製)는 불가능했고 소리도「문풍지 떨듯」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당시 미국에서도 요즈음 트랜지스터를 듣듯 이어폰을 끼고 들었으며 주로 약방에서나 손님을 끌기 위해 이 신기한 축음기를 비치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 유성기에서 소리가 나기 사작하자, 대신들은 눈을 뚱그렇게 뜨고 놀라면서도 짐짓 그 표정을 감추느라고 애를 썼다. 심지어 조 병식 같은 이는 잔기침을 하며 유성기로부터 등을 돌려 앉기까지 했다. 사람의 음성을 흉내내는 기계였으니 흉물로 인식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흉물에 접하면 지기(志氣)가 상실(喪失)된다는 생각으로 돌아앉았을 것이며, 놀라움을 직접 표정에 드러낸다는 것은 대인의 도가 아니기에 목석(木石)처럼 표정을 죽였었을 것이다.



이 유성기가 최초로 상품화된 것은 불과 몇년 전의 일이었으므로 미국사람들 자신도 신기하게 여기는 판인데, 이 한국인들의 무표정한 안색을 보고 어리둥절해진 알렌 공사는 이들을 정말 한번 놀라게 해주고 싶어졌다. 알렌은 곧 일어서서 짧은 연설을 하고 그 연설을 받아 한 대신이 답사를 하게 했다. 물론 이 연설과 답사는 몰래 녹음되었던 것이다. 약 반시간 후에 그 녹음을 유성기로 틀어 재생시켜 놓았다. 그런데도 이 근엄한 한국의 대신들은 눈만 약간 크게 떴을 뿐 여전히 청이불문(聽耳不聞)한 채 천장을 보거나 창 밖을 보거나 돌아앉거나 하며 결코 경악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성기를 둔 이 부동심(不動心)이야말로 정말 신앙에 가까운 훌륭한 한국적 도덕이라고 알렌은 감탄했다.





② 이 승만의 실명을 고친 알렌



이 승만(李承晩) 박사가 어렸을 때 천연두에 걸려 시력을 잃어 몇 달 동안 완전히 장님이 된 적이 있었다. 절망에 빠진 아버지 이 경선은 6대 독자인 아들의 실명을 고치려 한의사를 불러 최소한 백 가지 이상의 치료를 받게 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마침내는 의료선교사인 알렌 박사에게 데리고 왔다. 알렌은 이 승만의 부친 이 경선(李慶善)에게 액체로 된 약을 주면서 3시간 만에 한 번씩 눈에 떨어 뜨리면 사흘 후에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그날은 이 승만의 열번 째 맞는 생일이었는데 어머니가 밥상을 가져와 수저를 손에 쥐어 주었다. 그때 갑자기 소년 이 승만은 마루에 있는 짚방석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향해 기어가면서 눈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책을 읽던 아버지가 벼루를 들어 보이니 즉시 알아 보는게 아닌가? 이 경선은 쉰목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우리 아들이 눈이 보여"하고 소리쳤다. 부모들의 기쁨은 말 할 수 없어 계란 한 줄을 선물로 들고 이 승만을 데리고 알렌 박사에게 가서 그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알렌은 선물을 거절하면서 나보다는 당신의 아들에게 계란이 더욱 필요하니 잘 먹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 승만 박사가 경험한 미국과 관련된 첫 경험이 되었으며 기독교와의 첫 접촉이기도 하였다.





(5) 한국에 처음 온 선교사 문제





1934년 선교 50주년을 기념함에 있어서 누가 먼저 왔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다음의 글은 정 상인(鄭尙人) 목사가 한국에 처음 온 선교사의 문제를 다룬 것이다.



"장로교측에서는 「알렌」의 입국으로부터 50주년이라 하였고,감리교측에서는「맥클레이」의 내방으로부터 50주년이라 하였다. 그려면 누구를 맨 처음 온 선교사로 정하여야 할까? 하는 문제에 있어서, 맥클레이라 하는 이유는, 즉, 맥클레이는 갑신년(1884년) 6월 하순 동경으로부터 서울에 와서 김 옥균(金玉均)을 통하여 고종황제에게서 학교와 병원 설립의 면허를 얻었다. 이 면허를 얻어 후에 오는 선교사들에게 많은 편의를 주었다는 것이었고,알렌은 갑신년(1884년) 9월 하순에 들어와서 미국공사관 의관(醫官)으로 행세하였으니 선교사의 본색을 감추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클레이를 최초의 선교사라 하기 어려운 이유는, 맥클레이가 한국에 처음 올 때에 선교본부의 파송을 받고 왔던 것이 아니라 까우처 박사 개인의 청에 의하여 왔던 것이기 때문에 그 목적이 시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고종황제의 면허에 대한 해석문제는 면허를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듬해 들어오던 선교사들에게 불편이 있게 되었으며, 들어온 후에도 숨어지내야 했으며, 편의를 제공하였다면 감리교 선교사로 들어온 스크랜튼씨가 알렌이 개설한 광혜원에서 일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 등이었다. 그러나 알렌을 미국공사관 의관이라 한 것은 바울이 로마시민이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것이 선교의 길을 열어 놓는 방법이었으며,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받은 것도 1884년 7월 22일이었다. 서울에 들어오기는 같은 해 9월 23일이었다. 맥클레이는 2주간 방문객이었지만 알렌은 파송을 받고 왔던 선교사이었으니, 맨 처음으로 온 선교사라고 해야 한 것이다. 또한 알렌을 처음 온 선교사라 함은 그가 선교할 목적으로 들어와서 그 목적을 위하여 지금 세브란스의 전신인 광혜원을 개설하였고, 또 광혜원을 통하여 종래의 선교사들에게 편의를 주었다는 것이었다.



여하튼 맥클레이도 공은 있지만 선교사가 되진 못하였으며 알렌은 선교의 기초를 세운 개척자로서 의사로 기초를 닦아 선교사업에 종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