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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렌톤에 관한 서술 (아현교회史) #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217
(1) 스크랜톤 가문에 관하여 



우리말로 시란돈으로 표기되는 윌리엄 벤튼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이다.

그는 1856년 5월 29일 미국 케네티컷주 뉴헤븐(New Haven)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와 가족환경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뉴헤븐에서 제조업을 하던 평범한 인물이었던 아버지(William T. Scranton)는 그가 열 여섯되던 해인 1872년 사망하였다.

반면 어머니 메어리 플레처 스크랜튼(Mary Fletcher Scranton, 1832.12.9∼1909.10.8)은 뿌리깊은 신앙 가문 출신이었다.

메리의 부친(E Benton)과 오빠도 감리교 목사였다.

매사추세츠 목사 집안의 딸로 태어나 1855년에 뉴헤븐의 윌리엄 스크랜튼과 결혼하여 둘 사이에 외아들을 두었으며 나이 40에 남편과 사별하였던 것이다.

그는 목사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신앙적으로도 모범적이었을 뿐 아니라 해외 선교에도 관심이 깊어 결혼한 후에도 해외 선교 기금을 헌금하는 외에 지역 해외선교회 모임의 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스크랜튼은 어려서부터 이런 어머니에게 신앙적·사상적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스크랜튼은 처음부터 선교사를 목적한 것이 아니었다.

1878년에 예일대학을 졸업했고 뉴욕 의과대학에 진학, 1882년에 졸업했다. 졸업하던 그 해, 그는 룰리 와이드 암즈(Loulie Wyeth Arms)와 결혼하였고 클리블랜드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그러던 중 1884년 여름, 일본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 Maclay)를 통해 한국 정부가 병원과 학교 설립을 허락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알려졌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감리교회에서는 한국 선교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게 되었고 선교사 물색에 나섰다. 그 때 매클레이가 클리 블랜드로 스크랜튼 가족을 만나러 왔다.



당시 상황을 스크랜튼 부인이 증언하였다.

"1884년쯤인가 제 생각으론 매클레이 박사인 것 같은데 한 분이 클리블랜드에 있는 어머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는 홀에서 나를 만나서는 한국에 선교사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해외선교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었습니다. 국내 전도나 인디안 선교에 관련해 조금 일을 하고 있을 뿐이며 국내 전도인들을 돕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내 대답은 '어이구머니! 안될 말이에요'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렇다면 가지 않는 게 좋겠군요'라고 하였습니다."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스크랜튼 부인의 계속된 증언이다.

"그 해 초여름, 스크랜튼 박사가 지독한 장티푸스 열병에 걸렸습니다. 그 때 아이까지 심하게 앓고 있어 남편을 돌볼 틈이 없었고 어머님이 그를 간호하였습니다. 남편이 회복된 후 우리는 차로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그 때 남편은 내게 놀라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자신은 중앙 아프리카를 제외한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나가 자신을 헌신하기로 하였다고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저도 가겠습니다'하였습니다. 또 한참 있을 후 '거기에 제 뼈를 묻겠어요'하였습니다. 나는 결혼하던 날 결심한 것 중의 하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을 거역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열병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스크랜튼은 선교사로 남은 여생을 헌신할 것을 결심한 것으로 보이며 그 과정에서 병간호를 맡았던 어머니 스크랜튼 대부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모자가 함께 선교사로 헌신할 결심을 한 것이다. 이러한 스크랜튼 모자의 병상 결심은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와 해외여선교회에 통보되었고 그에 따라 먼저 어머니 스크랜튼 대부인이 1884년 10월에, 아들 스크랜튼이 1884년 12월에 한국 선교사로 각각 임명받았다.



                                                                                                            < 아현교회  HP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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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선교 준비



스크랜튼은 1884년 12월 4일, 뉴욕동부연회에서 미감리회 해외선교회 책임 총무였던 파울러(C. Fowler) 감독 목사 안수를 받았다. 스크랜튼과 함께 한국 선교사로 선발된 이가 그보다 두 살 아래인 드루신학교 출신 아펜젤러였다. 신혼 중인 아편젤러는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 1885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울러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스크랜튼과 아펜젤러 가족 일행이 한국 선교사로 미국을 떠난 것은 1885년 2월 3일이었다.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2월 27일 일본에 도착했다. 당시 스크랜튼 가족은 스크랜튼 부부와 두 살된 딸, 그리고 어머니 스크랜튼 대부인으로 모두 네 명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도착해서 한국 선교 개척의 공로자 매클레이의 환영과 안내를 받으며 한국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1885년 3월 5일, 스크랜튼 일행이 일본에 도착한 지 엿새째 되던 날 도오쿄 아오야마에 있는 매클레이의 집에서 첫 감리교 한국 선교사 회의가 열렸다.



이들이 일본에서 한국 선교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미국 북장로회에서 파송한 언더우드(H.G.Underwood)도 도착하여 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갑신정변(1884.12.4) 뒤끝이라 한국 정세는 선교사들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다만 6개월 전에 들어간 북장로회의 의료 선교사 알렌(H.M.Allen)이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살려낸 것으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광혜원이란 병원을 시작하였다는 소식이 들려 오자 일본에 있던 선교사들은 방한을 시도하기로 했다.



제1진으로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가 선발되어 이들은 1885년 3월 31일 일본을 떠나 부산을 거쳐 4월 5일, 부활주일에 인천에 도착했다. 인천에 상했으나 서울에 있던 미국공사의 만류로 아펜젤러 부부는 인천에 며칠 간 머물다가 일본으로 귀환했고 독신인 언더우드는 서울에 들어 왔다. 아펜젤러의 일본 귀환으로 감리교의 한국 진출은 일단 제동이 걸린 셈이었다.



2차 시도는 스크랜튼이 나섰다.



                                                                                                          < 아현교회 HP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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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동 정착



스크랜튼은 아내와 딸, 어머니를 일본에 남게 하고 혼자 내한을 시도했다.

1885년 5월 30일에 인천에 도착했다. 1개월 전과는 사태가 많이 달랐다.

그는 곧바로 서울에 들어와 알렌의 제중원(광혜원의 후신)에서 의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6월 20일 일본에 남아 있던 나머지 감리교 선교사들이 내한하였다.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튼 부인과 어머니, 거기에 새로운 장로교 의료선교사 헤론(W.J.Heron)부부까지 합류했다.



스크랜튼은 자신의 가족과 아펜젤러 가족이 거주할 집으로 정동의 미국 공사관 길 건너편 성벽 아래쪽에 집 두 채를 마련하였다. 독자적인 거처가 마련되자 6월 24일 제중원 일을 그만두고 새로 마련한 집에 진료소를 차렸다. 미국에서 보내 온 약과 의료 기구로 진료소를 차리고 정식으로 문을 연 것이 1885년 9월 10일이었다. 진료소가 개설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와 처음 9개월 동안 522명을 진료하였다.



스크랜튼은 1886년 6월 15일 정동에 한옥을 구입해 내부를 개조한 후 독립된 병원 건물을 마련함으로 정식병원을 설립했다. 고종은 스크랜튼이 설립한 병원에 대해 호의를 표하며 병원 이름을 '시병원'이라 지어 주었다. "베푸는 병원"이란 뜻의 시병원은 스크랜튼의 한국 이름 '시란돈'의 앞 글자를 따서 지은 병원 이름이기도 했다.



스크랜튼이 처음 진료한 환자는 열병에 걸려 길바닥에 버려진 여인이었다. 환자 옆에는 네 살박이 딸이 붙어 있었다. 비록 그 환자는 희생되지 못하고 연말에 죽고 말았으나 고아가 된 환자의 딸 '별단이'는 선교사들의 돌봄을 받아 이화학당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스크랜튼이 처음 만난 환자들은 대부분이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가 1886년에 보낸 보고서에도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가 상대해서 일한 사람들은 거의가 극빈자들이었으며 종종 버림받은 자들도 돌보아 주어야 했습니다. 특히 후자의 사람들은 그 몸의 상태가 도저히 일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을 경우엔 치료받는 동안에 생활비 전체를 우리가 부담해야만 했습니다.



" 극빈자(poorest class)와 버림받은 자(outcasts)들을 대상으로 한, 말 그대로 민중병원이 되었다. 스크랜튼이 정동에 시병원을 건립하고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해 줄 뿐 아니라 생활까지 책임져 준다는 소문이 나고 시설이 제중원보다 낫다는 소문까지 나게 되면서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 결과 환자를 진료하는 초인간적인 활약을 보였다. 특히 콜레라가 만연했던 1887년 5-6월에는 한 달 반 동안 5백 명을 치료했다.



                                                                                                             < 아현교회  HP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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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교사업의 확장



1887년 스크랜튼은 몇 가지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궁궐과 외국 공사관들이 즐비한 정동에 가난한 사람들이 오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정동 바깥에 병원을 세우려 하였다. 서울 사대문 밖에는 그런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1887년 선교 보고에 그런 구상이 담겨 있다. "서울 대물 바깥으로만 나가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가능하면 이런 곳에 집 한 채를 사서 음식과 의료 혜택을 주고 싶다. 곧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을 시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는 처음에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good Samaritan Hospital)을 동대문 방면과 인천 제물포에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이 두 곳의 병원은 재정과 인력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했고 정부에서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은 선교사들이 서울 밖까지 나가 사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정동에 여성 전문 병원이 설립되었다.

이 여성 병원은 1887년 10월에 내한한 여의사 하워드(M.Howard)에 의해 추진되었다. 아직도 '남녀유별'이 강했던 풍토에서 스크랜튼의 시병원은 여성 환자 치료 활동에 제약이 많았다. 스크랜튼도 이 점이 아쉬워 선교부에 여의사 파송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스크랜튼은 하워드에게 여성 환자 진료를 전담시켰다. 하워드는 자기 집에서 환자들을 보기 시작했는데 1년 사이에 2천여명의 진료하였다. 하워드 진료소는 점차 병원 형태를 이루어 '보구여관'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정동의 시병원과 보구여관이 호응을 받게 되자 선교부는 1887년 11월에 서울 밖 사업을 허락하였다.

그렇게 해서 1888년 가을, 서대문 밖 애오개에 집 한채를 마련하였고 12월부터 시약소형태로 의료 사업을 시작하였다. 애오개 시약소가 설립된 곳은 조선시대 전염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던 '서활인서'가 있던 곳이었고 가까운 언덕에 공동묘지가 있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이곳에 진료소가 세워지자마자 환자들이 몰려들어 불과 7개월 사이에 721명을 진료하는 업적을 보였다. 스크랜튼은 정통의 시병원과 서대문 밖 애오개 진료소를 모두 맡아 보아야 했고 틈틈이 하워드의 보구여관 일도 거들어 주어야 했다.

1889년에 두 번째 의사 맥길(W.B.McGill)이 내한함으로 애오개 시약소일을 그에게 맡길 수 있었다. 이 시약소는 환자들만 치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환자들과 주민을 대상으로 복음 전도도 실시하였는데 그 일은 1889년 내한한 올링거(F.Ohlonger)와 스크랜튼 대부인의 몫이었다. 이것이 아현교회의 시작이다. 이처럼 스크랜튼에 의해 의료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학교 사업도 착실하게 추진되어 아펜젤러는 1885년 6월 8일에 6명 학생으로 배재학당을 시작하였고 스크랜튼 대부인은 1886년 6월 이화학당을 시작하였다.

특히 스크랜튼 대부인은 1888년 12월 서대문 밖 애오개에 진료소가 개설되자 그리로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 노방 전도를 실시하여 애오개 교인들을 얻었다. 이처럼 병원, 학교 일이 순조롭게 풀려 나가자 선교사들의 본래 목적인 복음 전도와 교회 설립도 빨리 진행되었다. 처음엔 아펜젤러 집에서 선교사들과 정동에 있는 외국인들이 예배를 보다가 남대문 근처에 한옥 한 채를 마련하여 1887년 10월 9일 한국인을 위한 첫 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당은 '벧엘'(Behel)예배당이라 이름 붙였는데 오늘 정동제일교회 출발이다. 아펜젤러는 서울 외에도 평양·의주를 방문하여 그곳에 감리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 결과 187년 교인 수를 150명으로 보고할 수 있었다.

                                                                                                             < 아현교회  HP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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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아소동



그러나 초기 감리교회 선교가 이처럼 순탄하게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서양인들의 내한 활동에 대해서 수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보수파 사람들은 국왕이 병원 및 학교 이름을 지어 주며 적극 후원하고 나섬으로 공개적인 반대는 하지 못했으나 속으로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결국 수구파 음모로 소요가 일어났으니 그것을 '영아소동'(Baby riot)이라 한다. 1888년 여름, 영아소동은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아이들을 잡아다가 삶아 먹거나 미국에 노예로 팔아 넘긴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는 아이들을 잡아다 가두는 수용소이며 병원은 실험실이라는 것이다. 유언비어였지만 선교사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무리를 부추겨 배재, 이화학당에 있던 학생들이 도망쳤고 대중들은 몽둥이를 들고 학교와 병원을 습격했다. 정부의 선교사 보호와 해명으로 4개월만에 진정되었지만 이 소동으로 한동안 선교사업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오히려 민중들에게 기독교와 선교사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소동을 겪은 후 스크랜튼은 본국에 낸 보고문을 통해 이제 기독교가 한국 민중의 시험을 통과했노라고 밝혔다. "우리는 가까스로 민중 시험기를 지났습니다. 민중은 암암리에 우리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우리가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해도 코웃음을 칠 뿐이었습니다. 민중이 요동치며 소란을 벌이면서도 한편으론 우리가 그들에게 베푼 일과 초지일관하는 우리 의도에 동정심을 표하기도 하고 감사의 뜻을 전하는 듯 싶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들로 인해 다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향받게 될까요?" 영아소동은 '민중 시험기'(the time of probation with the people)였다. 그 시험기를 통과함으로 기독교는 민중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처음엔 도움을 요청해도 코웃음치던 그들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돕고 나섰다.

스크랜튼의 병원에도 다시 환자들이 찾아 들었다. 영아소동의 와중에서도 스크랜튼은 1888년에 5,500명을, 1889년에 3,939명을 진료하였다. 용기를 얻은 스크랜튼은 1890년 10월 남대문 안에 진료소를 하나 더 마련하고 애오개 시약소 일을 보던 맥길에게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전도인 노병일을 보내 전도를 병행했다. 자연히 서대문 밖의 시약소는 기능이 약화되고 대신 남대문 시장 안에 있는 남대문 시약소는 붐비기 시작했다. 스크랜튼은 정동에 있던 병원을 상동으로 옮길 구상을 세웠다. 1891년 스크랜튼 보고다. "1890년 가을 맥길 박사에 의해 남대문 진료소가 개설되었습니다. 이 장소는 지금 썩 잘 되어 가고 있으며 장래성도 밝습니다. 계획 중인 새 병원을 이 장소에 지을 예정입니다. 이 거리는 도시 중에도 가장 번화한 거리 중의 하나이며 우리가 자리잡은 곳은 주변 땅보다 20피트 정도 높이 솟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구상은 3년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스크랜튼 가족은 1891년 3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2년 5월에 귀환하였다. 그 사이에 시병원은 성공회 선교사 와일즈(L Wiles)와 감리교 선교사 버스티드(J. R. Busteed), 홀(W.J.Han)등이 맡아 보았다.

                                                                                                             < 아현교회  HP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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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선교관리자



1892년 5월 스크랜튼 부부와 딸 3명, 그리고 어머니 스크랜튼 대부인이 1년 6개월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는 즉시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간 아펜젤러 대신 미감리회 한국 선교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스크랜튼은 이후 1907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기까지 주관자 혹은 장로사로 한국 선교를 지도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스크랜튼이 주관자로 임명된 1892년 한국 선교 연회에서는 새로 네 군데에 선교 사업을 개척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맥길로 하여금 원산에서, 홀로 하여금 평양에서, 존스(G.H.Jones)로 하여금 인천에서 각각 선교 사업을 개척하게 하였고 서울 시내에서도 동대문을 개척할 것을 결의하였다. 동대문 개척은 스크랜튼 자신이 맡았다. 여선교회에서도 적극 돕고 나섰다. 이화학당 학생들도 동대문으로 나가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 결과 1893년에는 이곳에 세례 입교인 14명, 학습인 23명을 포함하여 모두 73명의 교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스크랜튼은 의주·평양·원산·대구·전주·공주 등지에 산재해 있는 감리교 선교 사업을 총괄하면서 교회일 뿐 아니라 정동의 시병원, 상동과 애오개 진료소, 정동 보구여관 등의 병원을 돌보아야 했고 배재·이화학당 교육까지 감독해야 했다. 또 올링거가 주관하는 미이미교회 인쇄소 일도 감독하고 존스가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위해 시작한 신학회에도 나가 강의했다.

그리고 스크랜튼은 이미 1890년부터 성서 한글 번역에 참여하고 있었다. 안식년 휴가를 다녀 온 후에도 성서 번역에 참여하여 로마서·에베소서를 주로 번역했으며 예배용으로 구약의 창세기·출애굽기·시편 등을 번역하였다. 이와 함께 감리교 교리서와 전도문서 번역도 착수하였는데 이미 1889년에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 등을 번역하였고 감리교 교리와 장정에 관한 문서들을 번역 출판하였다. 이처럼 스크랜튼은 안식년 휴가를 다녀 온 후 의사, 목사, 교사, 번역인 그리고 선교 주관자로 1인 5역의 막중한 책임을 지고 착오없이 일을 추진해 나갔다. 그 사이에 어머니 스크랜튼도 이화학당 뿐 아니라 애오개, 동대문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벌여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안식년 휴가를 다녀 온 후 애오개와 동대문 여성 교인들이 증가하였다.

                                                                                                             < 아현교회  HP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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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상동교회 설립



스크랜튼이 병원을 상동으로 옮기려는 생각은 이미 1890년 가을부터 가지고 있었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당시에는 맥길을 그곳에 보내 진료소 형태로 운영하게 하였으나 1892년 맥길이 원산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상동은 공백이 되었다. 이에 스크랜튼은 시병원을 정동에서 상동으로 옮기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스크랜튼이 상동으로 병원을 옮기려고 강한 의욕을 보인 것은 맥길과 그의 전도인 노병일에 의해 이미 이루어 놓은 선교 업적을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893년의 스크랜튼 보고다. "상동에서 거대한 의료 사업을 추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난 수년간 그곳에서 맥길 박사와 노씨가 뿌린 씨앗의 열매가 풍성하게 익어 가고 있습니다.



노씨 인도를 받은 사람 중 일곱 명이 나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노씨 이야기로는 그들 말고도 26명 교인이 있어 그들을 통해 그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동을 택한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상동이 갖고 있는 지역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병원이 성공하려면 가장 필수적인 것이 대중의 요구에 맞도록 번잡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동에 있는 남대문 병원은 제 판단으로 본다면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한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위치라든가 주변의 교통량, 사람들이 밀집 해 사는 환경 등의 요인들입니다.



그곳은 민중이 있는 곳인 반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외국인 거주 지역입니다." 남대문 안 상동은 시장 지역이었다. 스크랜튼은 '민중이 있는 곳'으로 병원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점을 선교회에 강력하게 건의하였다. 그 건의는 받아들여져 1894년 병원은 정동에서 상동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시병원 건물을 빌려 교회도 같이 시작했다. 이것이 상동교회다. 스크랜튼의 예상은 적중했다. 1894년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상동교회는 계속 성장하였다. 1895년에 이르러 교인수는 131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처럼 교인이 늘어나자 시병원 건물이 비좁았다.



이에 스크랜튼 대부인은 자기 돈 800달러를 들여 지금의 한국은행 자리에 있던 달성궁에 널찍한 한옥을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도록 주선하였다. 상동교회가 설립된 지 불과 5년만에 300명이 넘는 성인 교인을 얻게 되기까지는 담임 목사인 스크랜튼과 그의 어머니가 보여준 열성적인 목회와 전도가 있었다. 특히 스크랜튼 부인이 네 딸의 교육 문제로 1895년 12월 스위스로 가고 난 후 스크랜튼 모자는 목회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어 교회의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상동교회는 숫자적으로 성장한 것만이 아니다.



훗날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될 인물들이 스크랜튼에게 감화를 받아 교회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전덕기다. 고아출신 전덕기는 호기심으로 스크랜튼을 만나러 갔다가 그의 행동에 감화를 받고 1896년 스크랜튼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전덕기는 상동교회 속장, 권사를 거쳐 1905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엡윗 청년회, 청년학원, 공옥학교 등을 통해 민족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이동휘·양기탁·이준·주시경·윤치호·이승훈 등 민족운동가들과 폭넓은 교제를 나누었다. 그는 '상동파'로 지칭되는 기독교 민족운동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신민회·황성기독교청년회와 같은 민족운동단체의 산파역할을 하기도 했다. 전덕기 외에 의병장 출신 이필주, 안중근과 함께 이토오를 저격 모의에 가담했던 우덕순도 이 무렵 스크랜튼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고 교인이 되었다. 이들로 인해 상동교회는 한말 민족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 아현교회  HP 자료 >

(이분에 관한 사실은 바르게 잡아야 한다. 전덕기 목사님이 고아출이라는 부분, 호기심으로 스크렌톤을 만나러 갔다는 등 재정리한 후 바로잡기 필요)

---------------------------------------------------------------------------------------------(8) 선교사 사임



감리교 남방지방회 장로사, 선교 주관자로 바쁜 일정을 보내던 스크랜튼이 1901년 7월 말 갑자기 미국으로 가게 된다. 어머니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칠십 고령의 어머니는 한국에 온 후 20년 동안 이화학당과 여선교회를 주관하며 한국에 진출한 감리교 뿐 아니라 전체 기독교 여선교사들의 대모로 활약하였다. 특히 상동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상동교회에 머물면서 경기도 지방 여선교사업을 주관하였고 일년에 수차례 지방을 순회하며 교회와 교인들을 지도했다.

이처럼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건강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며느리와 손녀들은 아직도 유럽에 있었다. 결국 스크랜튼 모자는 계획에 없던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노령에 든 병이라 회복이 빠르지 못했다. 스크랜튼이 없는 공간은 너무나 컸다. 더욱이 1902년 6월에 아펜젤러가 해난 사고로 순직하는 바람에 한국에 나와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은 두 개척자의 부재로 인한 공허감을 뼈저리게 느꼈다.

1902년 존스가 본국에 보낸 보고이다. "선교회는 아펜젤러 목사의 비극적인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우리 선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이며 수년간 선교 주관자로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선교회가 겪어야 했던 또 다른 큰 손실은 가족 문제 때문에 스크랜튼 목사가 은퇴 압력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도 우리 선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이며 역시 수년간 훌륭하게 주관자 일을 맡아 보았습니다.

스크랜튼 박사의 어머니께서는 아들과 함께 선교회를 창설하는 데 갖은 고난과 위험을 감수하셨으나 이제는 악화된 건강 때문에 현장을 떠나실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던 스크랜튼은 은퇴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은퇴할 나이는 아니었으나 돌볼 사람이 없는 고령의 어머니 병간호 때문에 조기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한국이 필요로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도, 어머니도 건강이 회복 되는 대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스크랜튼 대부인의 건강 회복이 늦어지면서 3년 세월이 흐른 것이다.

1904년 2월에야 어머니와 함께 귀국했다. 이번에는 아내도 함께 동행했다. 한국의 선교사들은 그를 환영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경기도 지방회 장로사로 취임하였고 선교 주관자 자리도 다시 얻게 되었다. 그는 장로사로서 서울을 비롯하여 이천·광주·수원·여주 등 맡은 구역을 순회하며 돌보았고 선교 주관자로 평안도 지방회, 황해도 지방회, 경기 서부 및 충청도 지방회, 기르고 여선교회 사업까지 총감독해야 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선교 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특히 1905년 5월에 한국과 일본 선교를 관리할 감독으로 해리스가 나오면서 종종 선교 정책과 방법에 있어 해리스 감독과 마찰을 빚었다. 미국 오하이오 출신인 해리스는 1873년 일본 선교사로 부임하여 12년 동안 활약하였고, 1866년 미국 태평양 연안의 일본인 교회를 관장하는 감리사로 봉직하다가 1904년 미감리회 총회에서 감독으로 선출되어 한국과 일본 선교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런 그의 과거 전력으로 그는 일본에 편향된 선교 정책을 펼쳤고 그 때문에 한국 교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 목사'로 불리게 되었다. 스크랜튼은 이런 해리스의 '일본 편향적인 선교 정책'에 우려를 표시하였다. 



해리스가 1905년 5월 방한해서 보여준 행적에 대해 스크랜튼은 미국 선교 본부에 다음과 같은 편지(1905.5.15)를 보냈다. "(해리스) 감독은 지나칠 정도로 일본편입니다. 내 생각에는 지나치게 편파적인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일본 사람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일본인 거류민들과 관리, 저명 인사들과 기독교인들이 만찬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제물포에 있는 그의 숙소에서 비슷한 환영 만찬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열광적인 환영은 그에게 대단히 만족스런 것이며 일본 감리교회의 이익을 여지가 없습니다. 외국인으로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한국에서 일본이 잘 해주기를 기대하는 한, 일본 편을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한국에 동정적이며 지역적 관점에서 한국을 보아야 합니다."

그 무렵은 을사5조약을 체결하기 직전으로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이 악화되어 있던 때다. 스크랜튼은 이러한 때 선교사들이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중립적'위치를 지켜야하며, 기독교인들의 정치 참여 문제에도 '중립적'위치를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해리스처럼 노골적으로 일본 편을 드는 행위도 비판하였지만 과격한 민족주의 기독교 신자들이 정치현실에 참여하여 투쟁을 벌이는 것도 비판하였다. 1905년 11월 1일, 엡윗청년회가 종교적인 목적을 떠나 정치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해산 명령을 내린 것도 그런 이유였다. 당시 전덕기를 심한 상동교회 엡윗청년회는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교회에서 구국 기도회를 개최하고 청년 회원들이 도끼를 메고 대한문에 나가 '을사5조약 무효 상소운동'을 벌이는 한편, 정순만은 황해도에서 장사들을 데려와 '을사5적'을 척결하기 위한 군사 훈련을 시킬 정도로 과격한 민족운동을 벌였다.

그는 이런 과격한 정치운동이 교회 안에서 논의되고 집행되는 것을 금했던 것이다. 엡윗청년회를 해산한 그 날 (1905. 11. 1), 그가 선교 본부에 보낸 편지다. "오늘 저는 전례없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는데, 앞으로 엡윗청년회는 내가 공적으로 허락하지 않는 한 모일 수 없다는 사실을 각처에 알렸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일반적인 불안요소 때문에 엡윗청년회에 삼사를 거치지 않은 신입 회원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정의감에 사로잡힌 무리들이 청년회 이름으로 활동할 뿐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으로 불법 행위를 기도하여 그 목적이 모호해져서 우리가 보기에도 일본 정부든 한국 정부든 이 모임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청년회는 애국심이 강한 단체가 되었는데 이는 곧 반일 정서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양국 정부 사이에 정치적 분규를 야기시킬 빌미를 주어선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양국 정부와 아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이 점차 노골화되고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이 점차 강화되는 정치, 사회 현실에서 '중립'은 이론상의 입지일 뿐이었다. 일본 편향적인 선교 정책을 고수하는 '감독'인 해리스의 지시를 따라야 했던 '장로사'로서 스크랜튼의 고뇌는 깊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한국 침략을 더욱 노골화하는 일본측을 지지하며 한국 교회의 민족운동 열기를 억압하는 해리스 감독의 편향적 입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울분을 터뜨리는 한국 교인들과 친일적 감독 사이에서 스크랜튼은 고민하였다. 일제가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권까지 장악하는 1907년에 이르러 그 도는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그를 실망시킨 또 다른 사건이 벌어졌다. 1907년 5월, 감리교와 성공회가 함께 선교 사업을 추진하고 있던 강화도 온수리에서 성공회 교인과 감리교회 교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 때 감리교회 대표 자격으로 스크랜튼이 성공회의 터너주교와 함께 내력서 진상을 조사하고 해결책을 모색했다. 장로사와 주교가 함께 내려와 교인들을 중재하고 화해시켜 두 교회 교인들은 서로 평화 협정을 맺고 서로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감리교인이 온수리 성공회 사제 힐러리부인을 희롱한 사건이 또 터졌다. 이 사실이 스크랜튼에게 알려졌고 이에 스크랜튼은 그 감리교인을 데려다 잘못을 꾸짖고 스크랜튼이 그 일로 힐러리 부부에게 사과하였다. 편협한 교파주의자의 행패로 인한 마찰이었다. 강화에서 이런 사건이 있은 직후 1907년 6월, 감리교 선교연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해리스 감독이 주재한 이 연회에서 스크랜튼은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그가 사임하면서 선교 본부에 보낸 편지(1907. 6. 14)에서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3년 전에 저의 장로사 자격으로 선교지에 부임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감독과 선교본부, 선교회의 요청이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는 선교지로 귀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저는 본국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감독께서 저를 초청한 것이지 제가 먼저 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또한 제가 하는 선교사업과 정책이 감독과 선교본부, 선교회의지지를 받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어느 한 쪽으로부터라도 지지를 얻는데 실패한다면 자리를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폭풍 같았던 2년 세월을 지나고 나니 나의 정책과 사업에 대한 불신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임하는 것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감독과 선교본부, 선교회에 비난만 하지 말고 다른 시각에서 살펴 본 후, 잘못된 것이 있다면 교정하도록 1년 기간만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현시점에서 사임하는 것외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결국 해리스 감독과 그를 지지해 준 선교 본부와의 갈등 때문에 선교사직을 사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감독이드 sal국 교회 본부든 한국을 지배하는 일본 정부의 비위를 거르스기 싫었던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 중립'을 호소하며 해리스 감독의 '일본 편향적 선교 정책'을 비판한 스크랜튼의 충고가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1907년 연회는 스크랜튼의 사임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선교사직은 물론 목사직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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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말년



선교사직을 사임한 스크랜튼은 미국에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머물면서 개인적 차원의 일을 하였다 그는 비록 감리교 선교사는 아니었으나 한국에 나와 있는 다른 의료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 그는 자기 집을 사무실로 하여 「한국의료선교사회」(The Medical Missionary Society of Korea)를 조직하고 한국에서 의료 선교 사업을 지원하였다. 또한 그는 1910년 남대문 상동에 외국인을 위한 「서울 요양원」(Seoul Sanitarium)을 만들었다. 이 곳은 미국인 간호사가 상주해 있어 외국인 환자 뿐 아니라 피로에 지친 선교사들이 쉴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도 이용되었다. 이런 일들은 교차 교회 선교 사업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교파 교회 소속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간접 선교 사업'으로 효과가 있었다. 그 사이에 선교사든 한국인 교인이든 누구에게나 '대부인'으로 불렀던 어머니 스크랜튼이 1909년 10월 8일 새벽 상동 자택에서 향년 77세로 별세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스크랜튼 부부는 1910년 성공회로 교적을 옮겨 스크랜튼은 한국 성공회 상임위원이 되었고 '터너주교 기념 사업회'서기로 활약하였다 그가 성공회로 교적을 옮긴 이유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의 부인의 영향이거나 아니면 1907년 5월 강화 온수리 교인 분쟁 때 만난 터너주교나 힐러리 신부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스크랜튼은 1911년 1월 평북 운산에 있는 미국인 소유 금광회사 소속 의사로 진료 활동을 벌였다. 그가 하던 서울 요양원은 폐쇄되었다가 1914년 로버가 맡아 문을 열었지만 영업이 활발하지는 못했다. 1911년 4월, 그가 길러 낸 전덕기 목사가 결핵에 걸려 찾아와 치료한 적도 있었다. 비록 해리스 감독이 지도하는 감리교 연회를 떠났지만 전덕기를 비롯한 감리교인들과의 교류는 끊어지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스크랜튼은 1916년경 충남 직산에 있는 금광 부속병원으로 갔다가 1917년에 중국 대련으로 가서 의사로 활동하였고 1919년 경 일본으로 건너가 코오베에서 개인 병원을 차리고 말년을 그곳에서 보내다가 1922년 3월 23일, 고오베에서 쓸쓸히 별세하였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그것(죽음)은 마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갈 때 방문을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유해는 코오베 카스가노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해방 후 로코산 외국인 묘지로 옮겨졌다



                                                                                                             < 아현교회  HP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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