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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웟청년회 #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6,702
한국 엡웟청년회의 창립 경위와 초기 활동





                                                                                                          조이제(새누리교회 목사)







머리말



청년은 현실을 변혁하고 미래 사회를 열어가는 계층이다. 개신교가 이 땅에 전래되던 19세기말의 상황에서도 구국운동 등을 통해 청년들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교회 안에서도 청년들의 역할은 마찬가지였다. 한국 교회의 활동이 청년들에 의해 시작되고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나 받아들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 청년층이었다. 청년들은 다른 계층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고, 복음 전파와 함께 교회 발전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또 복음으로 현실을 바꾸는 일에 앞장섰다.

한국 교회의 청년운동을 논할 때 흔히 독립협회와 배재학당의 협성회 활동, 혹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서 그 시초를 찾는다. 그러나 그 구성원이 기독교인이라고 하여 독립협회나 협성회를 기독교 청년운동체로 규정하기는 어렵고, YMCA도 그 창설을 요구한 때로부터 시작해도 1899년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청년운동의 시작은 1897년에 조직된 한국 감리교의 청년단체인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로 보아야 한다. 또 '청년'이란 말의 사용도 YMCA에서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한국 엡웟청년회에서 먼저 사용한 말이었다. 감리교 신문인〈죠션크리스도인회보〉는 1897년 9월 8일부터 '청년회'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면서 '청년'이란 말을 수없이 사용하고 있다. 특별히 1897년 9월 15일자에는 '청년회'라 이름한 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이고 있다.



"청년회라 함은 노인과 상관없는 뜻이 아니라 청년들은 무론 남녀하고 노인에 비교하면 기력이 강건하며 심사가 활발하고 열심도 더한 고로 무슨 일이든지 합력만 된 즉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는지라 그런 고로 노인들은 뒤채를 잘 챙겨주고 청년들은 앞채를 잘 메여 교회가 잘 진보가 되기를 위함이오."



이로 미루어 청년이란 말은 1903년 10월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될 때 처음으로 사용된 말이 아니라 1897년 엡웟청년회가 조직될 때 이미 감리교에서 사용하고 있던 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기독교 청년운동은 이후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큰 공헌을 하며 교회 발전을 주도하였다. 그렇지만 그동안 청년들의 활동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소홀히 취급되거나 무시되었다. 이제부터는 청년운동의 활동과 성격이 제대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이 일이 방대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기는 하지만 침체된 오늘의 교회 청년운동의 활성화와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이 글이 작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현재 기독교대한감리회청년회(Methodist Youth Fellowship, 약칭 MYF, 감청)의 전신인 '엡웟청년회'의 초기 활동, 특히 1897년 창립될 때부터 정치 문제 참여로 1906년 공식 해산될 때까지의 활동을 민족·복음(교회)·민중이란 세 가지의 관점을 가지고 다루고자 한다. 어떤 단체의 초기의 활동이 그 이후의 활동을 규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한국 엡웟청년회의 창립 과정



엡웟청년회는 미국에서 시작된 감리교의 청년 신앙운동 단체이다. 교회 청년들의 신앙 훈련과 사회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엡웟청년회가 조직된 것은 1889년 5월이다. 엡웟(Epworth)이란 말은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웨슬리(J. Wesley)가 출생하고 성장한 영국의 지명을 딴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남"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 후 미국 남감리회, 캐나다 감리교회와 선교사들이 나가 있는 피선교지 교회들에서 엡웟청년회가 조직되었다.

한국 감리교회에서도 엡웟청년회를 창설하였다. 엡웟청년회를 조직하고자 하는 결의는 1897년 5월 5일부터 10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제13회 미감리회 한국선교회에서 이루어졌다. 선교회를 주재한 조이스(I. W. Joyce) 감독이 회원들에게 엡웟청년회를 설립할 것을 권면하자, 회원들이 이를 받아들여 조직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



"지금이 결실의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 선교회는 다양한 형태의 청년 모임들을 엡웟청년회로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이로 인해 현대의 놀랄 만한 일 중의 하나인 청년운동(Young People's Movement)이란 교회 생활의 한 양태가 한국에 소개되었다. 위원회가 조직되고 총무도 선임되었다. 5지회의 설립을 위한 신청서도 시카고의 엡웟청년회 본부에 보냈다. 청년회(young people's society)를 조직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혁신적인 것이지만, 이같은 운동이 특별한 역할을 할 가능성은 많다. 그 추구하는 목적은 청년의 활기 및 한국 구원을 위한 밝은 희망과 큰 포부를 가진 열정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청년회를 조직하는 것은 당시 한국의 상황 속에서는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현대에 일어난 놀랄 만한 일들의 하나로 교회의 새로운 형태가 된 청년운동을 한국에 소개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운동은 크게 확장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청년회의 조직 목적이 "청년의 활기 및 한국 구원을 위한 밝은 희망과 큰 포부를 가진 열정에 참여"시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국 교회의 청년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선교회는 먼저 엡웟청년회의 중앙 조직인 대한중앙청년회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총찰위원)을 선정하였다. 처음에 선정된 중앙위원은 그 수가 선교사와 한국인이 같았다. 선교사는 인천과 강화 선교를 주관하고 있던 존스(G. H. Jones, 趙元時), 평양 선교를 담당하던 노블(W. A. Noble, 魯普乙), 이화학당 당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페인(J. O. Paine, 陛仁)이었고, 한국인은 제물포교회의 전도인 김기범(金基範), 배재학당의 교관 노병선(盧炳善), 상동교회의 전도인 이은승(李殷承)이다. 이처럼 1897년 5월에 열린 한국선교회에서 대한중앙청년회의 중앙위원을 선정하는 것으로 엡웟청년회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중앙위원들은 선교회가 끝난 후 중앙 조직의 임원을 맡는 등 실무적인 일을 수행하며 각 지방과 교회 중심으로 엡웟청년회 지회를 조직해 나갔다. 개 교회 청년회의 조직과 활동을 지원하며 엡웟청년회의 기초를 닦은 위원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이들 위원들 중에서도 특히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대한중앙청년회의 감회사(General Secretary for Korea)였던 존스와 서기로 활동한 노병선이다. 위원들은 세 가지의 일을 추진하였다. 첫째는 엡웟청년회 장정(규칙)을 번역하여 출판하는 일이고, 둘째는 엡웟청년회 회표를 제조하여 회원들에게 분배하는 일이며, 셋째는 개 교회에 엡웟청년회를 설립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데 인원이 부족하여 1898년부터 추가되어 1901년에는 위원이 1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902년부터 다시 위원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부터 한국인의 위원수가 줄다가 1904년부터는 한국인을 배제하여 선교사들로만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는 엡웟청년회가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선교사와 마찰을 일으켰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개 교회 엡웟청년회의 창립은 인천 내리교회(제물포교회)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 창립일을 기록한 직접적인 자료를 확인할 수 없지만 상동교회(달성교회) 엡웟청년회의 설립에 관한 1897년 9월〈조선그리스도인회보〉의 기사에서 내리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먼저 그 조직을 이루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월 오일은 례배일인대 하오 두뎜죵에 남대문안 달셩회당에셔 뫼혀 쳥년회  셜시하난대 제물포 목사 됴원시(존스) 씨가 사무랄 쥬장하여 회즁에 인원을 택뎡하고 여러 사럼을 모아 쳥년회 규측을 닑어 들니고 회원은 교회즁 사람으로 밧으되 년긔난 십오 셰로브터 삼십오 셰까지 허입하고 사무난 매 쥬일에 한번식 모혀 의론하되 례배 사일노 작뎡하니 달셩회당 교우즁에 위션 입참한 회원이 사십사 인이오 인쳔 제물포교회에셔도 또한 쳥년회랄 셜시하엿난대 회원이 이십팔 인이오 졍동 교즁에셔도 장찻 셜시한다더라."



위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두 번째로 설립된 상동교회 청년회가 9월 5일에 조직되었으므로 내리교회 청년회의 설립은 9월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내리교회와 상동교회에 이어서 평양의 아영동(남산현)교회와 서울의 정동제일교회에도 각각 엡웟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이로써 조직을 결의한 지 6개월만에 인천·서울·평양 등 감리교의 중요 선교 거점지에 5개의 청년회 지회가 설립되었고 회원수도 150명에 이르렀다. 이들 각 청년회 지회에는 엡웟청년회란 일반 명칭 대신에 한국을 다녀간 미감리회 감독들의 이름을 딴 고유한 명칭이 붙여졌다.

이제 각 교회의 엡웟청년회의 창립 경위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내리교회의 엡웟청년회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조직된 교회 청년운동 단체이다. 당시 내리교회에는 엡웟청년회의 책임을 맡았던 존스가 담임자로, 중앙위원인 김기범이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다른 교회보다 먼저 엡웟청년회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리교회의 엡웟청년회의 이름은 미국 엡웟청년회의 회장이며 1895년에 한국을 방문하고 제10회 한국선교회를 주관했던 나인데(W. X. Ninde) 감독의 이름을 따서 '나인데 지파'(Ninde Chapter)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엡웟청년회가 조직될 당시의 회원은 28명이었으며, 1899년에는 35명, 1901년에는 50명으로 늘어났다. 엡웟청년회에서 임원직을 맡아 활동을 주도한 이들은 김기범·김성호·안정수·장원근·강덕표·하춘택·강원석·이연수·김영기·김이제·최경식·함베드로·최선도·박대려·최봉현·이동호·복기선·천광은·안창호·박족신·신형진·박경태·홍기제 등이었다. 그리고 1899년 초에는 여성들을 위한 엡웟청년회를 따로 설립하였지만 별도의 이름을 갖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여성 회원은 모두 15명이었고, 회장은 존스 부인이 맡았다.

두 번째로 조직된 엡웟청년회는 상동교회 엡웟청년회였다. 앞의 인용구에서 보는 대로 상동교회 엡웟청년회는 1897년 9월 5일 조직되었다. 그 명칭은 1892년에 한국을 다녀간 말랄류(W. F. Mallalieu) 감독의 이름을 따서 '말랄류 지파'(Mallalieu Chapter)라 했다. 창립 당시의 회원은 44명이었다. 이후 김의식·전덕기·박승규·최재학·이은덕·박용만·임상재·공홍렬·정순만·이현석·윤성렬·이승만·남궁억·이동휘·이준·이동녕·조성환 등이 이 엡웟청년회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을 이끌었다. 상동교회 엡웟청년회는 민족운동의 요람지로 불릴 만큼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성격으로 상동교회 엡웟청년회는 1906년 한국의 엡웟청년회를 해체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04∼1905년 무렵에는 여자들을 위한 엡웟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여자 엡웟청년회의 이름은 역설적이게도 나중에 엡웟청년회 해산의 주역이 되는 해리스(M. C. Harris) 감독의 이름을 딴 '해리스 지파'(Harris Chapter)로  불리며 여성 계몽과 초등교육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세 번째로 조직된 평양 남산현교회(아영동교회) 엡웟청년회 지회는 1897년 9월 22일 창립되었다. 남산현교회 엡웟청년회의 명칭은 1891년 한국을 방문하여 제7회 한국선교회를 주관했던 굿셀(D. A. Goodsell) 감독의 이름을 따 '굿셀청년회'로 불리었다.



"구월 이십이일은 례배 삼일인  하오 칠졈죵에 평양 셔문안 아영동 회당에서 모혀 쳥년회를 셜시하난대 목사 로불 씨가 사무를 쥬쟝하여 회즁에 임원을 택뎡하고 여러 사람을 모와 쳥년회 규칙을 닑어 들니고 회원은 교회즁 사람으로 션거하되 년긔난 십오 셰로부터 사십 셰까지 허입하고 사무난 매 례배 륙일노 작뎡하엿고 교우즁에 위션 입참한 회원이 사십이 인이더라."



굿셀청년회는 엡웟청년회 중앙위원인 노블 선교사가 주관하여 당시 평양 선교 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창립 당시의 회원은 42명이었다. 이 엡웟청년회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은 교인 중에서 15세부터 40세까지의 연령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는 다른 교회의 엡웟청년회가 회원의 자격을 15세부터 35세까지로 규정하고 있는 것에 비해 그 연령의 폭이 더 넓은 것이다.

김락선·오석형·박승팔·임정수·오석찬·강인걸·김재선·김성호·김재선·이태황·김득수·임정수·염치언·이은성·안석훈·염치언·김귀혁·홍치범·강신화·베커·오기선·김찬흥 등이 활동한 평양 굿셀청년회는 크게 부흥하여 1901년 12월에는 회원수가 139명에 이르렀고, 매회 모이는 수만도 90명 가량이었다.

교인의 대부분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던 정동교회에서도 1897년 10월 28일 엡웟청년회를 창립하였는데 다른 교회와 달리 남자 엡웟청년회와 여자 엡웟청년회를 나누어 조직했다. 남자 엡웟청년회는 1887년 내한했던 워렌(H. W. Warren) 감독의 이름을 따 '워렌청년회' 혹은 '월은청년회'라 불렀고, 여성 엡웟청년회는 1896년과 1897년에 내한했으며 한국에 엡웟청년회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던 조이스(I. W. Joyce) 감독의 이름을 따 '조이스청년회'라 불렀다. 창립 당시의 남자 회원은 25명이었고, 여자 회원은 11명이었으며, 선임된 첫 임원들은 월은청년회에 회장 노병선, 서기 유영석, 회계국장 조만수, 전도국장 최병헌, 학문국장 양홍묵, 인제국장 윤양철, 다정국장 문경호 등이었다. 조이스청년회 회장은 프라이(L. E. Frey) 양이 선출되었고 다른 임원은 한국인 부인과 소녀들로 채워졌다. 특히 이 날 조직된 조이스청년회는 한국 기독교 최초의 여성 단체이자 일반 한국근대사에서도 최초의 여성운동 단체이며,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의 기원이 된 조직체라는 의의를 갖는다. 여러 번 활동이 중지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노병선·최병헌·양홍묵·윤양철·문경호·유영석·조만수·양홍묵·조한규·이경직·김연근·송석린·주상호·엄종면·김명준·강조원·윤창렬·신흥우·민찬호·윤성렬·유옥겸·김창호·김관희·이중진 등의 노력으로 다시 활동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강화·수원 등에도 엡웟청년회 지회가 조직되었지만 이들 지회의 설립 시기와 활동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강화 엡웟청년회는 1901년 11월 6일부터 1주일간 강화지방 사경회가 열렸을 때, 청년회를 조직하자고 결의한 것과 다음에 인용한〈신학월보〉기사를 살펴보면 1901년 혹은 1902년 무렵에 청년회가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화지방 무어청년회를 조직함. 일천구백삼년 십이월은 곳 청년회 체임할 님긘 고로 임의 작정하야 임원을 다시 선정할 새 회장은 김경일 씨뇨 전도국장은 신학일 씨요 인제국장은 김애일 씨요 학문국장은 김부일 씨요 다정국장은 최계원 씨요 통신국장은 김우제 씨요 회계국장은 주선일씨요 모히는 일자는 일주간 목일 상오 십점종이오 회원 수효난 남녀 합 오십사 인이라 회원 수효에 자라남을 수년 젼과 비교하면 맛치 게자씨 한 알이 왕성함과 갓사오니 모든 영화를 하나님께 돌이옵고 더옥 만히 도와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강화의 엡웟청년회에는 '무어청년회'라는 명칭이 붙여졌는데, 이는 1901년부터 1904년까지 매년 한국에 나와 선교연회를 주재했던 무어(D. H. Moore) 감독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이들은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에 모여 모임을 가졌으며, 회원은 남·녀 합하여 54명이었다.





2. 엡웟청년회의 부서와 기능



엡웟청년회의 집회는 처음에는 매주 목요일에 열렸다. 엡웟청년회에 가입할 수 있는 회원의 자격은 엄격하게 제한되지 않고 교인이면 대부분 참여할 수 있었다. 앞에 인용한 상동교회 엡웟청년회 설립에 관한 기사에 의하면 엡웟청년회에 가입할 수 있는 회원의 자격은 ① 교인이어야 하고, ② 나이는 15세에서 35세 사이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평양 아영동교회 엡웟청년회에서는 나이가 40세까지로 확대되어 있어 나이에서는 융통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엡웟청년회 안에는 회장·부회장·서기 등의 6개월 임기의 임원들과 효과적인 활동을 위한 임원국·전도국·인제국·학문국·다정국·통신국·회계국 등 7개 부서가 있었다. 이들 7개 부서에서는 각각 협의·선교·봉사·교육·친교·서기·재정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러한 부서활동을 통해 엡웟청년회는 교회 안에서는 교육과 친교 활동을 전개했고, 교회 밖으로는 선교와 봉사 사업에 헌신하였다.

임원국은 엡웟청년회 7국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부서로 회장·서기와 각 국의 국장들만 참여하며 엡웟청년회의 모든 활동을 논의하여 결정하는 임무를 가진다. 임원국은 한 달에 한번씩 모여 엡웟청년회의 발전을 논의하였다.



"엡웟청년회 칠국 즁에 임원국이 뎨일되난거산 소임잇난 국쟝과 임원들만 참예할 거시오 회즁 사무를 의론하야 결뎡하난대 만일 회즁에 잘못된 일이 잇사면 개뎡하고 부죡한 일이 잇사면 증보하되……임원국에셔 허물이 잇거드면 온 교회에 손해가 불소할지라.……임원국은 비유컨대 한 샘과 갓하니 쟝산 심곡에셔 나난 한 젹은 샘이 온내에 탁탁한 거슬 항샹 맑히난 것갓치 임원국에셔 의뎡하난 사무가 잇사면 샘과 갓고 사무가 업사면 마른 샘과 갓하나 사무가 져졀노 생길 거시 아니오 임원국 모히기에 각국 임원들이 사무를 만드러야 사무가 잇살지라."

 

임원국은 엡웟청년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부서이므로 임원국이 그 역할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엡웟청년회의 성패가 달라졌다. 그리하여 임원회의 역할은 끊임없이 물을 뿜어내는 깊은 산골의 샘과 같아야 했다. 이 샘에서 나온 물은 온 시내를 가득 채울 뿐 아니라 온갖 더러운 것을 맑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만일 샘이 물을 뿜어내지 못하면 모두가 목말라 죽어갈 뿐이었다. 이처럼 임원국은 엡웟청년회가 활동해야 할 것을 미리 준비하여 회원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전도국은 선교활동을 그 역할로 하였고, 인제국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구제하는 역할, 곧 복음을 실천하는 일을 했다. 황 형제(황현모)의 부인 황메례가 쓴 "인제국론"은 이 부서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인졔국은 도를 행하난대 뎨일 요긴한 사무라 이난 우흐로 하나님의 뜻슬 깃부시게 하난 것이오 아래로난 사람의 마암을 즐겁게 하난대 늙은이와 병든이랄 차쟈보며 나그네랄 심방하며 슐 먹난 것과 음행과 모든 고악한 거산 다 금하고 교회 셔책을 분용하난 것과 병인의게 향긔로온 꼿찰 보내난 것과 샘업 업난이 구쳐 하난 일과 구졔 하난 거살 다 샹관하고……예수씨의 됴흔 말삼으로 사람의 령혼에 맛난 음식을 만다라 가지고 그 심신들을 새롭게 하여 그 령혼을 잘 자라게 하난대 게을니 말고 부지런이 륙삭 동안 거륵한 소임을 잘 맛타 행하여 쥬에 뜻을 셰우고 또 행할 일을 똑똑이 긔렴하엿다가 토론회에 보단을 할 거시요."



학문국은 모든 입회인의 마음을 밝히도록 훈련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앙청년회의 학문국 사무를 맡았던 김기범은 이 부서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학문국 직분은 회원을 권쟝하여 은혜에셔 자라게 하며 지식이 굉쟝케하며 셩경책과 교회 사긔와 시셰 학문을 박학되게 하난 직무이니 뎨일 급션무라.……일 급션무난 학문국에셔 녀학교랄 셜시하고 본 회즁에셔 녀교사 일원과 남교사 일원을 션뎡하고 남녀 쟝유간에 결을 좃차 국문을 힘써 공부케 하고 각양 신문과 셔책을 구비하여 두고 회원들이 결을 잇난 대로 와셔 보게 하며 가난하며 책과 신문을 사보지 못하난 형뎨난 빌녀 보게 하면 그 학문국 효험이 적지 아니할 줄노 아옵나이다."



학문국은 신문이나 책을 구입, 비치하고 회원들이 빌려 보게 하여 학문의 증진에 힘쓰게 하는 직무를 지녔다. 또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을 교육시키는 일에도 앞장 섰다. 

다정국은 식구 가운데 여러 식구를 화목케 하는 사람과 같은 기능을 가졌는데, 교인들의 노소를 가리지 않고 강권하여 엡웟청년회에 입회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신입 회원을 구 회원들에게 소개하는 등 엡웟청년회원 사이의 친교 기능을 감당했다.

통신국은 통신 사무를 맡았으며, 통신국장은 대개 서기가 겸직했다. 중앙청년회 서기로 활동한 노병선은 통신국(서기)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셔긔(통신국장)의 직무난 첫재 회원의 거쥬와 셩명을 분명이 긔록하여 회원의 명안을 만다라 두며 일변 회원의 명록을 즁앙회로 보고하고 긔도회에나 토론회에나 특별회에셔 하난 일을 자셰히 긔록하엿다가 그 다음 회에 다시 밝히 닑으며 일이 매우 긴요하여 가이 회즁 사긔가 될 만한 일이면 긔록하여 둘거시요 신문샤에 보하여 셰샹에 광포할 일이면 신문샤에 보할 거시요."



이외에도 통신국장(서기)은 회의시에 회장의 옆에 앉아 회원의 활동 상태를 살피고 불참한 회원이 있으면 찾아가 그 사고를 보고하였다. 그리고 각 국장의 보고와 회원의 보고와 회계의 재정 보고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가 나중에 참고하게 하였다. 또 다른 곳으로 이사가는 회원이 있으면 이사간 곳의 엡웟청년회에 편지하여 이사간 회원을 그곳 엡웟청년회에 참석케 하였다. 모임이 있을 경우에는 회원들에게 통지하였고, 각종 서류들도 잘 간수하였다가 다음의 통신국장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회계국은 엡웟청년회의 재정 사무를 맡아 교회에 유익하도록 재정을 사용하는 임무를 감당하였다.

이처럼 중앙청년회의 임원과 각 부서 활동이 확정되자 엡웟청년회는 각 지역의 교회, 즉 서울·인천·평양 등의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3. 엡웟청년회의 활동



엡웟청년회는 복음전파 활동, 의식계발 활동, 민족운동 참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순수한 복음활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민족의식이 강한 한국인들이 엡웟청년회를 이끌어 나가면서, 토론회·의식계발사업 등을 통해 점차 충군애국과 국권회복을 추구하는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단체로 그 활동이 바뀌었다.



1) 복음전파 활동



엡웟청년회는 교회 안에 설립된 신앙공동체였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실시한 활동은 청년들의 신앙을 굳게 하여 교회 공동체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청년들은 먼저 신앙적으로 깨어 있어야 했고 또 훈련받아야 했다. 이를 위해 대한중앙청년회에서는 기도회에서 논의할 토론 주제와 성경 말씀을 선정하였고 이를 개 교회에 알려 엡웟청년회의 활성화를 꾀했다. 토론 주제들은 감리교의 회보인〈조선크리스도인회보〉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와 같은 토론을 중심으로 한 활동은 협성회나 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이미 경험한 것이었으며, 그 효과도 입증된 것이어서 청년들은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다. 1897년 11월과 12월 두 달 동안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진행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후에도 엡웟청년회는 중앙청년회에서 설정한 토론 주제를 가지고 성경을 공부하며 신앙을 다졌고, 교회의 부흥과 나라의 개화에도 앞장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인천 내리교회의 나인데청년회의 경우는 매 주일마다 특별 전도를 실시했다. 이 특별 전도는 엡웟청년회의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서 훈련받은 것을 실제의 현장에서 펼쳐 보이게 하기 위한 뜻을 담고 있었다.



"졔물포 나인데청년회난 녜젼 구쥬께셔 칠십 명을 젼도 보내신 것갓치 둘식으로 각쳐에 전도하라 보내는대 혹은 션창에 나가셔 지겟군들의게 고롭고 무거온 짐진 사람들은 모도 구쥬님께로 도라옵쇼셔 젼도하고 혹은 강변에 나아가 칠통배에 올나셔 션인의게 구쥿긔셔 엇더케 바람과 바다 물결을 다사리난 젼도랄 하고 혹은 물건너 셤즁으로 가셔 구쥿긔셔 엇더케 어부들노 뎨자랄 삼난 젼도랄 하고 혹은 산으로 단이며 목인들의게 우리들이 이 셰샹은 화초와 갓하니 어셔 구쥬님을 밋어야 되겟다난 젼도를 하고 혹은 촌간으로 단이며 타조하난 사람의게 이 베를 까불너 죽졍이난 불에 태우고 알곡은 챵고에 두난 것갓치 구쥬님께셔 이 셰샹 끗날에 사람을 이와 갓치 하시리란 젼도를 매 칠일에 한번식 하니 엇지 긔도회 모힐 때에 자미잇난 말이 업사리오."



이 기록에서 보는 것처럼 청년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둘씩 짝지어 전도하러 나갔다. 그들은 전도 대상자들이 일하고 있는 삶의 현장을 찾았고, 엡웟청년회 토론을 통해 훈련받은 대로 대상자들의 처지에 적절한 말로 복음을 전하였다. 이러한 전도활동에서 엡웟청년회의 설립된 뜻을 깨달아 그대로 행하는 청년들의 초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평양 남산현교회 엡웟청년회의 경우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매주 모여 기도하며 신앙 훈련을 받았다. 청년들은 기도회를 통하여 영혼을 단련한 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청년들은 교회의 여러 행사를 주도하였다. 성탄절 등의 행사에서는 교회 안팎을 장식하였다. 교회 안에 글자를 크게 써서 달았고, 회당 밖에는 행사를 알리는 글자를 써 넣은 붉은 십자기와 태극기·성조기 등을 달기도 했다. 또 청년들은 새로운 예배당이 건립되자 괘종시계를 사서 걸었으며, 교인들의 장례를 위해 매장지를 구입하기도 했다.



"비록 란중이라도 한회 일도 정지하지 안코 항상 모혀 긔도하엿시며 회당 위하여 십칠 원 륙십오 전 주고 됴흔 괘종 일좌를 사서 걸엇시며 또한 이왕 교중 매장지로 쓰기 위하여 이십 원 주고 삼천 구백 보 주회되는 산지를 삿시며 지금 류치한 돈도 십팔 원이나 되오니 방장 이 돈으로 요긴이 쓸 곳을 찻는 중일너라. 돈을 이갓치 잘 모화 유조히 쓰는대 대하여 모든 회원뿐 아니라 특별이 재정 맛흔 국장 김찬흥 씨의게 치하할 만하고 또한 주를 위하여 힘써 전도할 일군이 만히 니러나오니 감사하오며"



이러한 활동으로 청년들은 새로 교회의 핵심으로 등장하였으며, 교회는 활기가 넘치고 부흥하기 시작했다. 많은 청년들이 성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상동교회 엡웟청년회를 주도한 전덕기가 "우리 청년회 회원들은 셩신의 부라시난 쇼래을 듯고 깁히 든 잠을 속속히 깨여서 마귀 결박을 밧지 말고 하나님 압헤 항상 거하야 평강한 복을 밧기를 원하오며 또한 다른 나라 사람들갓치 자유 활동과 죠흔 사업을 만이 행하여 보기를 원하노라"고 주장함 같이 엡웟청년회 회원들은 복음전파 활동에 헌신하였다.

또 청년들은 기독교의 본질이 훼손되는 어떤 타협이나 탈선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리교회 엡웟청년회의 경우 청년들은 세상에 물들어 교회 출석을 게을리하는 옛 교인을 데려다가 규탄 집회를 갖고 회개하고 새 생활을 하든가 아니면 교회로부터의 추방 중 어느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할 정도였다. 청년들의 활동으로 결국 그 사람은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2) 의식계발 활동



엡웟청년회는 봉건적 사회 구조 속에서 신음하던 한국 백성들의 의식을 계발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의식계발 사업은 토론회나 회보를 통해 전개되었는데 교인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활동으로 근로사상 고취, 한글 장려, 건전한 생활 권장, 자립정신 고취, 여성 의식계발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여성 의식계발 활동은 여성 개인을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 여성 단체를 조직하여 여성의 권익을 확보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1897년 10월 28일에 조직되고 3일 후인 10월 31일 주일에 다시 모여 결성식을 가진 정동교회의 엡웟청년회인 '조이스청년회'는 여성 단체의 효시가 되었다.



"광무 원년[1897년] 시월 삼십일 일……그날 하오 칠뎜 반에 또 다시 모히여 쳥년회를 셜시하엿난대 배재학당 교우 즁에 회원이 이십오 인이요, 리화학당 녀 교우가 또한 쳥년회를 셜하여 회원이 십일 인인대 이 쳥년회난 회즁에 전도국과 인제국과 학문국과 다졍국과 통신국과 회계국이 잇셔 교회 사무를 동심합력하여 교회가 흥왕하기를 힘쓴다더라."



조이스청년회는 엡웟청년회의 지회 성격을 띤 단체로 이화학당 학생 등 청년 학생들이 주축을 이룬 계몽적 선교단체였다. 초대 회장은 프라이 선교사였고 다른 임원들은 한국 여성들이었다. 이후 조이스청년회는 전도와 구제라는 선교활동, 토론회와 강연회 등을 통해 여성 계몽과 의식계발을 추구하였고 무엇보다 "한국 여성이 한국 여성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주체적 선교의식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00년 이후에는 장년층이 중심이 된 실천적 선교단체인 '보호여회'로 발전하여 여선교회의 기원이 되었다.

1897년 12월 31일에는 정동교회 새 예배당에서 남녀 엡웟청년회가 함께 토론회를 여는 일이 있었다. 토론 주제는 "남녀를 같은 학문으로 가르치고 동등으로 대접함이 가하다"였다. 이에 대해 가(可) 편에 김연근·서재필, 부(否) 편에 조한규·윤치호가 연사로 참석하여 활발한 토론을 벌였고, 여성들도 "이와(하와)가 비록 죄를 지엿시나 마리아가 아니시면 예수께셔 엇지 셰샹에 오서셔 죄를 대쇽하셧시리오"라고 적극적으로 발언하였다.

인천 내리교회도 1899년초 그동안 남녀가 함께 모이던 엡웟청년회에서 여자들을 위한 엡웟청년회를 따로 설립하였다. 1894년 자력으로 여성 전용 예배당을 건립하고 다음 해 2월에 봉헌하여 여성 선교에 앞장 섰던 내리교회로서는 여자 엡웟청년회의 설립은 다소 늦은 감이 있으나 당연히 이루어야 할 일이었다. 여성 회원은 모두 15명이었고, 회장은 존스 부인이 맡았다. 여자 엡웟청년회는 매 주일 오후 3시에 개회하여 성경을 공부하였다. 상동교회에서도 1904∼1905년 경 해리스 지파란 이름의 여자 엡웟청년회가 조직되어 여성을 계몽하였고 초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엡웟청년회는 여성 의식계발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 그 노력은 노병선의 "부인의 교휵[교육]이 뎨일 급무"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집안이 흥함과 나라이 부함과 백셩이 강함이 전국 녀인을 교휵식히난데 달녀거날……여러 가지 악한 풍속이 생계 미개화국이 되난 거슨 실샹을 궁구하여 보면 당초에 녀인을 가라치지 아니한 연고라. 그런 고로 우리 대한도 개영하난 날은 부인의 학문이 잇난 날노 긔악하노라."



1903년 5월에는 평양 남산현교회 엡웟청년회에서 여성들의 의식 계발을 위해 부인들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 모임에는 4백여 명이 참가하였는데, 여성이 중심이 된 이러한 공개적인 행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일이었다. 문제는 '화덕'이었고 운자는 '게, 네, 세'였다. 소개하는 다음의 작품들은 이 때 출품된 것들인데, 지은이들이 모두 북한 지역의 초기 여성 지도자들이었다.



강메불

저긔노흔 쇠통보게 치운사람 덥게하니

엄동설한 요긴하네 생각건대 화덕일세



임통달

식은지체 되지말게 네가참말 화덕이냐

항상사람 덥게하네 덥게하니 화덕일세



전삼덕

찬화덕에 불씨두게 우리마암 차고차나

석탄불노 덥게하네 성신불노 덥게하세



김또라

맘이잔자 이리오게 예수천하 화덕되니

천국화덕 여긔잇네 온화하고 더움일세



위 글들은 신앙고백적인 글들로 전통과 관습을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엡웟청년회는 이처럼 여성 해방을 위한 의식계발에 앞장섰고, 여성들의 활동 기회를 제공하였다.



3) 민족운동



엡웟청년회는 민족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독립협회와 협성회를 통해 배출된 청년들이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대거 엡웟청년회로 들어오면서 청년들의 민족의식은 크게 향상되었다. 이러한 청년들의 민족운동 참여는 민족적 문제에 직접 뛰어드는 청년운동의 한 흐름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다른 한편으로는 선교사들과 갈등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 나중에는 엡웟청년회의 해산 명분이 되고 말았다.

1901년 9월 고종 황제의 50회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를 청년들은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계기로 삼았다. 인천 내리교회의 경우, 청년들은 미리 50원을 헌금하여 태극등 2개씩을 사서 달고, 태극기를 좌우에 높이 게양하여 회당을 장식하였다. 경축식에서는 안정수·강원석·함베드로·존스가 각각 연설한 후 대황제 폐하를 위한 만세와 애국가를 불러 충군애국적(忠君愛國的) 민족의식을 표출하였다. 그 날 밤에 다시 모인 집회에서 장경화는 "대황제 폐하께서 우리나라에 예수교를 막지 아니하사 우리 예수교회가 날로 진보되니 무한히 감사"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1901년 이전에도 내리교회에서는 고종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었다. 1896년의 경우 교인들이 모여 기도회를 가졌는데 그 때 김기범은 아래와 같은 경축가를 지어 불렀다.



"남녀노쇼 인민들은 경츅가를 불너보셰

츙심애군 하난거슨 백셩마다 본분일셰

죠션관민 노유간에 문명진보 일심하셰

우리백셩 합심하니 자쥬독립 만만셰라

경츅하셰 경츅하셰 하나님  경츅하셰

우리모도 일심으로 셩샹폐하 경츅하셰

국태민안 부국강병 셰계샹에 영화로다

독립문을 굿게셰니 만민화락 즐겁도다

만셰만셰 만만셰 셩샹폐하 만만셰

우리백셩 경츅으로 만슈무강 하옵쇼셔"



이와 같은 충군애국적 신앙 형태가 나타난 것은 강력하게 침투해 들어오는 외세로부터 국가를 보위해야 한다는 역사적 과제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황실의 안녕을 곧 국가 수호의 길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로 기도회나 연설회를 개최하곤 했는데 내리교회 엡웟청년회에서도 이런 민족의식에 동참했던 것이다.

상동교회 엡웟청년회는 민족운동의 요람지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박용만·이동녕·이동휘·이상설·이승만·이시영·이준·이필주·이회영·전덕기·정순만·정재면·주시경·최재학 등 많은 민족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었다. 상동교회 엡웟청년회는 1904년부터 그 활동이 본격화되어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고 민족과 나라를 위한 일꾼을 양성하였다. 1905년에는 그 활동을 해외에까지 확대하였다. 멕시코 교포들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를 당시 엡웟청년회 서기였던 정순만이 "국민이 진위노예(盡爲奴隸)어날 수능구호(誰能救乎)아"란 제목으로〈황성신문〉에 보도하여 국민들에게 알리며, 백성의 안전에는 관심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찾는 관리들의 자세를 질타하였다.



"若視民爲國家之本즉 設有外人이 蔑視我同胞의 無識無學하고 荀使誘引以綱利라도 爲官人者 當訓動干各府郡市場與港口하야 毋或人民之見欺爲賣하고 亦使無兩國政府之契約而擅設殖民會社之弊하야 必以公法으로 聲討其國하야 嚴辭談辦하야 懲其賠罰則安有如是痛天號地之怨恨哉"



이처럼 멕시코 교포를 위해 여론을 환기했음에도 정부가 대책을 세우지 못하자 상동교회 엡웟청년회는 교포들의 실태 파악을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5조약이 조인되자 상동교회 엡웟청년회는 을사5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1주일 동안 개최하였다. 이 기도회는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수천 명의 교인들은 이 기간 동안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萬王의 王이신 하나님이시여 우리 韓國이 罪惡으로 沈淪에 드럿스매 오직 하나님밧게 빌대업사와 우리가 一時에 祈禱하오니 韓國을 불샹히 녁이사 耶利未亞(필자 주, 예레미야)와 以賽亞(필자 주, 이사야)와 但以理(필자 주, 다니엘)의 自己 나라를 위하야 懇求함을 드르심갓치 韓國을 救援하사 全國 人民으로 自己 罪를 悔改하고 다 天國百姓이 되여 나라이 하나임의 永遠한 保護를 밧아 地球上에 獨立國이 確實케 하야 쥬심을 耶蘇의 일흠으로 비압나니다."



그러나 이같은 방법만으로는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을사조약 무효 상소를 올리는 것이었다. 회원들은 도끼를 메고 대한문으로 나갔다.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해산당함으로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상동교회 엡웟청년회의 나라를 위하는 정신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더욱이 전덕기·정순만은 평안도 장사 수십 인을 모아 박제순 등 을사5적 암살을 모의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국권회복운동에는 상동청년회 회원들만이 아닌 지방의 청년들도 합세했는데, 김구는 이것을 그의 자서전《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 때에 나는 진남포 엡웟청년회의 총무로서 대표의 임무를 띠고 경성대회에 참석케 되었다. 대회는 상동교회에서 열렸는데 표면은 교회 사업을 의논한다 하나 속살은 순전히 애국운동의 회의였다. 의병을 일으킨 것이 구사상의 애국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은 신사상의 애국운동이라 할 것이다."



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에서도 주도적으로 역할하여 상동교회는 '헤이그 밀사 사건의 온상'이 되었다. 밀사들 가운데 이상설·이준은 상동교회 엡웟청년회 회원이었고, 이들을 도운 전덕기·김상궁·이회영·박용만·정순만·헐버트·윤병구 등도 상동교회와 관련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7년 4월 창립된 신민회도 상동교회 엡웟청년회 출신들의 주도로 조직되었다. 신민회는 표면적으로는 "종래의 구습을 타파하고 실업을 장려하며 또한 교육을 진행하여 문명 한국인이 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공화국 수립과 항일독립군 기지조성"을 위한 비밀결사였다.







4. 엡웟청년회의 해산



엡웟청년회는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선교 봉사 활동에 헌신했을 뿐 아니라 민족의 문제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엡웟청년회는 감리교회 내의 신앙운동을 주도하는 단체로서 뿐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깊이 참여하는 민족운동 단체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각 지역에 설립된 엡웟청년회가 교회 안의 한 기관에 머물지 않고 사회 참여적인 활동에 계속 관여하자 엡웟청년회의 활동이 문제되었다.

장로교에서는 교인들의 사회 참여적 경향에 대해 이미 1901년 9월 교회의 비정치화 선언을 통해 "교회 일과 나라 일은 갓흔 일 아니라 또 우리가 교우랄 가라치기랄 교회가 나라 일보난 회가 아니오 또한 나라 일은 간셥할 것도 아니오……교회난 셩신의 붓친 교회오 나라일 보난 교회 아닌대 례배당이나 회당 샤랑이나 교회 학당이나 교회일을 위하야 쓸 집이오 나라 일 의론하난 집은 아니오 그 집에셔 나라 일 공론하러 모힐 것도 아니오 또한 누구던지 교인이 되여셔 다란 대셔 공론하지 못할 나라 일을 목사의 샤랑에셔 더윽 멋할 거시오"라고 입장을 밝힌 바 있었다. 감리교에서도 청년들의 독립협회 활동 등을 통한 사회 참여가 문제되어 1904년 2월에 개최된 한국선교연회에서 엡웟청년회에 대해 논의하였다. 한국선교연회에서는 엡웟청년회의 장정을 개정하기로 했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조항은 삭제할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개정 작업은 페인 선교사가 맡았다. 그러나 개정 작업이 진전되지 않아 이후에도 계속 엡웟청년회의 존립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란은 한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전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평양에서 활동하던 노블 부인은 1905년 12월 9일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청년회에 대해 크게 걱정하고 있다. 심지어 정치적 목적을 지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엡웟청년회나 YMCA의 이름으로 정치 권력을 획득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잠시 동안 그 활동을 중지시켰는데 이로 인해 큰 소란이 일어나고 있다."



스크랜턴도 그의 장로사 보고에서 이미 엡웟청년회의 해산 조치를 내린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장로사(필자 주, 오늘날의 감리사에 해당되는 직책으로 당시 한국 선교를 관장하였다)에 의한 엡웟청년회의 해산 조치가 불가피했음을 보고합니다. 이 조치는 연회 때까지도 그 효력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조치를 내린 이유는 청년회가 여러 곳에서 교회의 목적에서 벗어나 정치 단체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구역회의 권한도 침해당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앞에서와 그들 사이에서 이중적인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더구나 청년회는 교회의 통제를 인정치 않고, 대개 외부인들의 통제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외부인들은 준회원으로 받아들였는데, 투표권도 갖지 못했던 그들이 이제는 청년회를 교회의 목적에서 벗어나 세상의 목적으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린 1906년 연회에서는 노블 장로사의 제의로 엡웟청년회 규칙 개정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한 후 다시 스크랜턴이 엡웟청년회 위원회를 대표하여 보고하자 이 보고가 받아들여졌다. 또 벙커가 동의한 다음의 결의안도 채택되었다.



"장로사에 의한 규칙의 번역이 진행되는 동안, 위와 같은 동의안이 제안되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교회에 어떤 형태의 엡웟청년회도 조직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건의한다"



이러한 결정으로 엡웟청년회는 조직된 지 10년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마침 엡웟청년회가 해산되던 때는 한국 교회에 대부흥운동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며 한국 교회의 비정치화 내지 몰역사성 경향이 구체화되고 있던 때였다.

엡웟청년회가 해산당한 1906년의 연회를 주재한 감독은 해리스 감독이었다. 그는 초대 통감 이토와 각별한 사이였고, 일본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길 뿐 아니라 "일본이 한국의 지도자임은 하늘의 섭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철저한 친일 인사였다. 또 당시의 선교사 존스나 스크랜턴도 일제의 선정을 희망하고 협조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해리스 감독 등 선교사들은 국가의 정치 문제 등에 참여하고 간섭할 뿐 아니라 일제의 정책에 대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엡웟청년회의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해리스 감독은 연회가 끝난 후〈호교〉(護敎)지 기자와의 면담에서 이와 같은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다. 



"연회 개회 중에 에포스동맹회(필자 주, 엡웟청년회) 대회를 열고 싶다고 했으나 결국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청년들은 걸핏하면 종교 집회를 명목으로 국사를 열심히 논하고 정치의 득실을 논하여 결국은 분규를 일으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엡웟청년회는 위의 글에서처럼 종교 집회를 명목으로 나라의 정치 문제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 참여는 민족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고 일제와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리하여 일제의 정책에 협조하던 선교사들로서는 엡웟청년회의 활동을 제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근본 조직까지도 없애는 방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 감리교의 엡웟청년회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맺음말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엡웟청년회는 1897년에 조직되어 한국 민족과 함께 하며 기독교의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다. 엡웟청년회의 활동은 청년들에게 한국 구원을 위한 밝은 희망과 큰 포부를 주는 활동이었기에 한국 감리교의 신앙운동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한국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곧 엡웟청년회는 감리교 안의 한 기관에 머물지 않고 당시의 한국적 상황을 극복하려는 민족운동 단체로 역할한 것이다. 엡웟청년회의 이러한 정치 참여적 활동은 엡웟청년회가 순수 신앙운동 단체이기를 바라던 선교사들과 갈등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 조직이 해체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해체 결정이 엡웟청년회의 활동 중지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개 교회의 청년회는 비록 엡웟청년회라는 이름을 빼앗기고 활동도 위축되었지만 복음과 민족을 향한 열정을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황이 어려워도 새로운 날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청년 자신들이 주역이 될 그 날도 준비되었다. 이후 1916년에 다시 엡웟청년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 글은 한국 엡웟청년회의 창립 경위와 초기 활동을 다루었다. 그것도 엡웟청년회의 활동과 성격을 분석 평가하는 작업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단지 창립 경위와 초기 활동을 정리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엡웟청년회의 활동을 통해 복음이 이 땅에 전해지던 선교 초기의 교회 청년들의 역할과 활동을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교회 청년들은 복음을 받아들여 반봉건적인 사회 구조를 바꾸는 힘으로 역할하도록 했고, 이 땅의 민중들이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자신들을 헌신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엡웟청년회의 조직과 활동, 해산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곧 엡웟청년회는 처음부터 교회와 민중을 위해, 수난당하는 한국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이 한국교회사에서 교회 청년들을 살려내고, 그 활동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과거에 역할했던 교회 청년들이 다시금 그 역할을 감당하고자 새 시대의 문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