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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사 4. (아현교회) #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539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파송된 스크랜튼 선교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서대문 밖 마포로 내려가는 사거리 애오개에 시약소를 개설하고, 1888년 12월 12일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 아현교회  HP 자료 >



(1) 아현교회 역사  - 1



1887년 스크랜튼은 몇 가지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궁궐과 외국 공사관들이 즐비한 정동에 가난한 사람들이 오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정동 바깥에 병원을 세우려 하였다. 서울 사대문 밖에는 그런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1887년 선교 보고에 그런 구상이 담겨 있다. "서울 대문 바깥으로만 나가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가능하면 이런 곳에 집 한 채를 사서 음식과 의료 혜택을 주고 싶다. 곧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Good Samaritan Hospital)을 시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는 처음에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Good Samaritan Hospital)을 동대문 방면과 인천 제물포에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이 두 곳의 병원은 재정과 인력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했고 정부에서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은 선교사들이 서울 밖까지 나가 사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정동에 여성 전문 병원이 설립되었다. 이 여성 병원은 1887년 10월에 내한한 여의사 하워드(M.Howard)에 의해 추진되었다. 아직도 '남녀유별'이 강했던 풍토에서 스크랜튼의 시병원은 여성 환자 치료 활동에 제약이 많았다. 스크랜튼도 이 점이 아쉬워 선교부에 여의사 파송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스크랜튼은 하워드는 자기 집에서 환자들은 보기 시작했는데 1년 사이에 2천여명을 진료하였다. 하워드 진료소는 점차 병원 형태를 이루어 '보구여관'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정동의 시병원과 보구여관이 호응을 받게 되자 선교부는 1887년 11월에 서울 밖 사업을 허락하였다. 그렇게 해서 1888년 가을, 서대문 밖 애오개에 집 한 채를 마련하였고 12월부터 시약소 형태로 의료 사업을 시작하였다. 애오개 시약소가 설립된 곳은 조선시대 전염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던 '서활인서'가 있던 곳이었고 가까운 언덕에 공동묘지가 있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이곳에 진료소가 세워지자마자 환자들이 몰려들어 불과 7개월 사이에 721명을 진료하는 업적을 보였다. 스크랜튼은 정동의 시병원과 서대문 밖 애오개 진료소를 모두 맡아보아야 했고 틈틈이 하워드의 보구여관 일도 거들어 주어야 했다. 1889년 두 번째 의사 맥길이 내한함으로 애오개 시약소 일을 그에게 맡길 수 있었다. 이 시약소는 환자들만 치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환자들과 주민을 대상으로 복음 전도도 실시하였는데 그 일은 1889년 내한한 올링거와 스크랜튼 대부인의 몫이었다. 이것이 아현교회의 시작이다.





(2) 아현교회 역사 - 2



1888년 12월 시약소로 시작된 '애오개' 선교는 1년만에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스크랜튼은 1889년 내한한 맥길에게 애오개 시약소를 맡기고 그는 정동의 시병원과 보구여관 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맥길이 병원을 맡은 후로 애오개 시약소를 찾는 환자들의 숫자가 줄어들더니 1890년 여름이 되어서는 찾아오는 환자가 끊겼다. 이에 여름 더위가 시작되는 6월 14일 맥길은 일방적으로 시약소를 폐쇄시켜 버렸다. 이 일로 스크랜튼과 맥길 사이에 의견 충돌이 빚어졌고 둘 사이에 감정 대립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애오개 의료 사업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스크랜튼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시약소로 시작된 애오개 선교는 중단되지 않았다. 1889년 내한하여 정동교회를 맡게 된 올링거가 애오개를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였고 스크랜튼 대부인도 나와서 여인들을 전도하였다. 이는 시약소를 통해 애오개에 교인들이 생겨났음을 의미하며 이들은 정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선교사들의 방문전도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올링거의 뒤를 이어 노블부부가 와서 2년간 '애오개 집회'를 인도했는데 노블 부인의 '오르간 연주'가 동네 주민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로써 정식 교회는 아니지만 '기도처' 형태의 아현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1894년 선교 보고는 애오개 예배처에 세례 입교인2명, 학습인 1명이 생겼음을 보고하여 독립된 교회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 뿌리는 애오개 시약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올링거, 노블 등이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감으로 애오개 집회는 자주 중단되었다. 그래서 한 때 선교부는 애오개 시약소로 사용하던 건물을 매각하여 다른 곳에서 새로 사업을 하는 방안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애오개에 있던 열심이던 여성 교인들이 선교사들을 찾아 가 '매일학교를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하여 그 맥이 이어졌다. 1898년 애오개에 이화학당 다음으로 서울에 여학교가 설립되어 10여명 학생이 공부를 하였고 1900년 이들을 지도할 교사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출신 부부가 왔다.

이들이 애오개에 정착한 첫 번째 사역자인 셈이다. 이후 여선교부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은 애오개 매일학교를 중심으로 다시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정동교회와 상동교회로 다니며 예배를 드리던 애오개 교인들이 1909년 '서문밖구역'으로 독립 구역을 조직하게 되었다





(3) 아현교회 역사 - 3

1887년

"서울 대문 바깥으로만 나가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가능하면 이런 곳에 집 한 채를 사서 음식과 의료 혜택을 주고 싶다. 곧바로 '선한 사마리아 병원'을 시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1887년 스크랜튼 선교보고) 



1888년

"지난 해 11월에 허락이 나 성 밖에서 시작 된 '사마리아 병원'사업이 아직은 준비중이다. 이번 가을이면 건물이 마련되고 의사 한 명도 오게 될 것이다."(1888년 스크랜튼 선교보고) "1888년 12월, 인천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초입 서대문 바깥 네 거리,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시약소를 개설했다. 매월 100여 명을 치료했다."(1889년 스크랜튼 선교보고) 



1889년

"(선교사 연례 회의에서) 스크랜튼 박사는 맥길 박사와 스크랜튼 박사 사이에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기까지는 맥길이 서울 병원에서 일하는 것을 중지시킬 것을 요청하였고, 다만 애오개 시약소 재개 문제만큼은 맥길 박사에게 일임하기로 건의하였습니다. 저는 그(맥길)가 오기 전에도 혼자서 이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음에도 저는 그가 이 곳 사람들에게 하는 행동을 막을 자유는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더위 때문에 중단된 애오개 사업 재개건을 그에게 일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곳 사업은 그가 부임한 이래 그가 전적으로 관리하였으며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맡은 후부터 숫자가 점점 줄더니 환자가 한 명도 오지 않는 날도 여러날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참을 수 없는 한낮 더위로 뜨거운 어느날 오기로 한 환자마저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맥길은 문을 닫기로 결정하고 나도 동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며칠간 병원 일을 그에게 전적으로 맡겼습니다만 그가 그 일을 달가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의 지시를 받지 않고 혼자서 일하고 싶어했습니다. 지난 해 우리 사업은 다음과 같습니다. 애오개 사업은 맥길이 맡았는데 6월 13일 그에 의해 폐쇄되기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부인병원 일을 책임지고 있으며 서울병원 일은 함께 하고 있습니다."(1890. 8. 21 스크랜튼 편지) "1889년에 개설했던 애오개 시약소 사업은 중단되었다. 의사가 왕래하며 다닐 만큼 환자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의 선교사업이 중단된 것은 아니다. 올링거가 와서 몇 달동안 복음 전도사업을 하였으며, 스크랜튼 대부인이 이곳 여성들을 상대로 전도사업을 하고 있다."(1891년 스크랜튼 선교보고) 



1894년

"애오개 교회 - 노블이 맡고 있다. 수년 전 스크랜튼 박사가 시약소를 시작했고 맥길 박사가 뒤를 이었다. 교회는 2년동안 올링거가 맡았고 뒤를 이어 노블이 어려운 가운데 맡아 보고 있는데, 노블 부인이 돕고 있다. 연초에 노블부부가 작은 오르간을 갖다 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어떤 때는 1백명이 넘었다. 노블 부인은 다른 방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비숫하게 에배를 드렸다. 오르간이 없어지자 방문객 수도 처음의 사분의 일로 떨어졌다. 꾸준하게 참석하는 구도자는 다섯명인데 그 중 하나는 여성이다. 사업을 계속하려면 토착 전도인 한 명과 오르간이 있어야 하겠다. 이웃에 천주교인 한 사람이 있어 방해를 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1894년 스크랜튼 선교 보고) 



1895년

"애오개 교회는 노블이 맡고 있다. 사업 내용은 실망스럽지만 노블 부부가 열심을 다하고 있다. 천주교인의 방해는 여전하다. 전체 교인은 2명이다. 건물이 낡아 당장 수리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이다. 수리비는 50달러 정도다."(1895년 스크랜튼 선교보고) 



1896년

"이런 저런 이유로 사업이 성공적이지 못하다. 6,7년 일해 보았으나 효과가 별로 없다. 사업을 중단할 것을 건의한다. 건물을 팔아 보다 효과있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1896년 스크랜튼 선교보고) 



1897년 

"지난 몇 년동안 애오개 사업이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그 곳에서도 우리를 보고 와서 가르쳐 달라는 요구가 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여인 다섯 명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하였다."(1897년 스크랜튼대부인 선교보고) 



1989년

"애오개 사업에 대해 별로 보고할 게 없다. 정동교회와 상동교회의 사역자들이 나가 틈틈히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애오개에 사는 교인 몇 명이 상동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현재로선 담임자를 보낼만한 곳이 못된다."(1898년 스크랜튼 선교보고) "서대문밖에 설립된 매일학교에 현재 9명이 등록되어 있다. 페인은 희망적으로 보고 있다."(1899년 미감리회해외여선교부 선교보고) 



1900년 

"우리는 애오개 사업을 재개하려 한다. 어떤 의미에선 이미 시작되었다. 지난 여름, 배재 출신 신랑과 이화 출신 신부가 결혼을 한 후 이화 여선교사들과 케이블의 재정적 후원으로 이 곳에 안락한 집을 마련한 후 부녀자들을 상대로 전도를 시작하였는데 소년 소녀들이 몰려들고 있다."(1900년 아펜젤러 연회보고) "애오개에서 젊은 부부가 새로 단장한 자기 집에서 매일학교를 하고 있는데 소녀들이 말씀을 



1901년

"애오개 매일학교 학생은 6명이다."(1901년 프라이 선교보고)



1905년

"애오개 매일학교는 이교도 이웃이 심하게 박해해서 주민들이 아이들을 보내려 하지 않고 있지만 어려움을 잘 극복하여 여학생 30여명이 다니고 있다. 믿음 좋은 선생이 잘 가르치고 있다. "(1906년 페인 선교보고) 



1909년

"서대문밖 구역 - 현순 목사가 담임하고 있다. "(1909년 미감리회 한국매년회 회록) 



1912년 

"서대문밖 구역 - 레퍼트 담임"(1912년 미감리회 조선매년회 회록) "4월 22일 애오개, 삼개, 공덕리, 서강 네 교회가 계삭회를 조직하고 자립 헌금을 하고 있다."(그리스도회보, 1912. 5. 15 ;1913년 미감리회 조선 매년회 회록) 



1913년 

"아현구역 - 윤성렬 전도사 담임"(1913년 미감리회 조선매년회 회록) 



1916년

"아현구역 - 루퍼스 담임"(1916년 미감리회 조선매년회 회록) "아현교회 교인 김운호와 최희태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각각 자기 가족을 전도하여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기독신보, 1916. 2. 16) 



1920년

"아현구역 - 한석원 담임"(미감리회 조선매년회 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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