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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상동교회와 전덕기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7,225
         1. 스크랜톤의 감화와 전덕기의 입교               전덕기 목사는 우리 교회 역사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사와 근대한국 민족운동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우리 교회가 초기 역사에 있어서 한국 민족 운동의 요람지가 된 것도 전덕기 목사의 덕분이다. 따라서 전덕기의 생애와 업적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전덕기는 1875년 12월 8일에 부친 전한규(全漢奎)와 모친 임씨(林氏)와의 사이에 출생하여 서울 정동(京城西部貞洞)에서 성장하였으며 이 호적원본은 전목사의 손부(孫婦)인 이소화(李小花) 여사가 종로구청에서 일제시대의 원본 보관창고에서 발견하였다. 또한 고 김진호 목사님의 차남인 김희영(金喜永) 씨 소장, 「목사 전덕기 약사(略史)」에서 발견되었다.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그가 9세가 되던 1884년 8월에 부친이 사망하고 이어서 3개월 후인 11월에 어머니마저 돌아감으로써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그 이후 숙부인 전성여(全成汝) 씨 집에서 기거하면서 평범한 소년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17세 되던 해인 1892년, 어린 나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드림으로써 그의 생애에 일대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만일 그가 이 때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그도 평범한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는 스크랜톤 목사를 통하여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 것이다. 그의 입교과정도 하나의 극적인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배타적인 한국 민족에게 선교사들의 모습이나 그들의 설교내용이 쉽게 한국인들에게 친숙해지거나 용납될 리가 없었다. 소년 전덕기 역시 그러하였다. 퍼런 눈이 쑥 들어가고 얼굴과 균형 잡히지 않게 큰 코와 피부색이 흰 선교사들의 모습은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낮도깨비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또 꼬부라진 말로 나오는 그들의 설교나 그 내용은 그들의 마음을 즉시에 감동시키기보다는 호기심이 먼저 앞섰다. 그러나 당시 우리민족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그들의 말이나 설교보다는 그들의 생활과 봉사활동이었다. 이런 초기 선교사들의 사랑과 봉사의 생활이 소년 전덕기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기에 이른 것이다. 어느 날, 전덕기 소년은 이 낮도깨비가 살고 있는 선교사 주택을 찾아갔다. 물론 그들의 설교를 들으러 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골려주고 약올리려고 간 것이다. 그는 다짜고짜 그 집에 돌을 던져 까닭 없이 그 집의 유리창을 박살나게 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마치 한국민족을 대표해서 폭발시키듯 폭발시켰다. 그리고는 그는 도망가지도 않고 당돌하게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정면으로 한 번 그들과 대결해 보겠다는 당찬 각오였다. 아닌게 아니라 그 집안에서 서양 사람 하나가 걸어나왔으나 소년은 달아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년은 선교사의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살기등등한 얼굴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뜻밖에도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소년의 계산이 크게 빗나간 것이다. 우리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라는 말과 같이 이런 여유 있는 서양 도깨비에게 소년은 우선 기가 꺾였고 다음에는 어떤 두려운 느낌까지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당혹해 하는 소년에게 다정히 다가온 그는 손을 소년의 어깨에 얹으면서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따뜻이 그를 위로하면서 그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고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노불부인편」, ꡔ승리의 생활ꡕ, 기독교 彰文社, 1927, p.50 참조. 이런 일은 이 소년으로서는 생전 처음 당하는 경험이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도리어 위로하면서 자기 피해를 불문에 부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설득력 있게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인격 앞에 돌과 같이 완악했던 전덕기 소년의 마음이 서서히 녹기 시작한 것이다. 비로소 그의 영혼에 빛이 비치기 시작하였고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은 그 이상 아무 진전 없이 서로 헤어졌다. 이것이 소년 전덕기와 스크랜톤의 처음 만남이었다. 그러나 이 만남은 전덕기 소년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그가 예수를 그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귀중한 계기가 되었다. 실로 한국판 사울의 회개였다. 살기등등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순식간에 회개함으로써 어제의 사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그의 젊음을 불태웠던 바울로 변신했던 일을 생각나게 한다. 그 후부터 전덕기 소년은 스크랜톤의 인격에 이끌리어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스크랜톤에게서 그를 이렇게 변화시킨 그리스도에 대하여 열심히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은 곧 그의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무서운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으나, 상게서.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그의 결심을 관철시켜 17세의 나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굳건히 영접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896년에는 스크랜톤에게서 세례를 받고 우리 교회에 정식으로 입교함으로써 그의 파란 많은 우리 교회에서의 신앙생활과 민족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앞서 1893년에 우리 상동병원교회가 정식으로 구역으로 승격되면서 스크랜톤이 담임 목사로 시무하게 되고 2년 후인 1895년에는 우리 교회가 상동에서 그 건너편에 있는 달성궁으로 옮겨가면서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다. 바로 이 해가(1895년) 청년 전덕기에게도 경사스러운 해였다. 20세가 된 총각 전덕기가 15세 된 신부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신부의 이름은 조정식(曺貞植)양이고 그녀의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부친은 조학선(學善) 씨, 모친은 안성여(安姓女) 씨였다. 결혼 3년 후에 이들 사이에 아들이 출생하였는데 장남인 무술(武述) 군이다. 또 3년 후에 차남 순경(順敬) 군을 얻었다. 이들은 아들만 4형제를 두었는데, 삼남과 사남은 총각으로 세상을 떠났고, 장남 역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 지금은 차남인 전순경 씨가 혈통의 대를 이어가고 있다. 한편, 청년 전덕기가 결혼하던 해인 1895년에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해였다. 이 해 8월에 일본이 저 잔악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대낮에 대궐 안에서 한 나라의 국모를 시해하는 행패를 부렸고, 이에 놀랜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수치스러운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났다. 그리고는 친로정부(親露政府)가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 이권을 러시아와 서구 열강에 팔아 넘길 때였다. 이 때에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徐載弼) 박사가 돌아 왔다. 그는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시켜 보려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 계몽에 힘썼으며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자주독립과 자유민권사상과 자강개혁(自强改革)운동을 일으켰다. 이 때 청년 전덕기는 독립협회의 이런 목적과 정신이 스크랜톤에게서 들은 복음의 내용과 어느 정도 일치되는 것을 느껴 이 독립협회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고통받는 자에게 평안을!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라면 억눌린 민족에게 자유를 주는 이 민족운동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곧 하나님의 사랑과 민족사랑으로 직결된 것이다. 신앙과 애국은 이렇게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독립협회의 민족운동에 처음부터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독립협회 내에서의 전덕기의 역할은 그의 나이의 탓(22세 전후)도 있었으나, 서재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이상재(李商在) 등의 기라성 같은 유명인사들의 그늘에 가려서 그의 역할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독립협회 시절에 이 운동으로부터 최소한 두 가지 중요한 것을 배웠고, 이 교훈과 경험이야말로 후일에 전덕기로 하여금 전덕기되게 한 밑천이 되었다. 그 하나는 이 운동으로부터 앞으로의 민족운동의 방향과 그 방법론을 배웠고, 다른 하나는 이 시절 그는 많은 훌륭한 민족운동의 동지들을 얻게 되고 또 이들과 친히 사귀게 된 것이다. 특히 전덕기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한 신민회 활동을 전개할 때 그의 주위에 모여든 민족투사들이 대부분 독립협회 운동에 가담했던 쟁쟁한 인사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궁억(南宮檍), 양기탁(梁起鐸), 이승만(李承晩), 안창호(安昌浩), 신채호(申采浩), 이승훈(李承薰), 박은식(朴殷植), 이동휘(李東輝), 이 갑(李甲), 최광옥(崔光玉), 이 준(李儁), 박용만(朴容萬) 등은 전부 독립협회 시대부터 고락을 같이 했던 가까운 동지들이었던 것이다. 민족운동의 선구자 전덕기 목사, p.28. 따라서 독립협회 운동은 전덕기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교회 안에서 청년 전덕기는 1898년, 그의 나이 23세 때 속장의 직책을 맡고 중견직원으로 크게 활약을 하였고, 특히 같은 해에 우리 교회 안에 엡웟청년회(기독청년회)가 조직되면서 이 청년회 운동의 핵심멤버로 일하게 된다. 전덕기 속장의 이상과 같은 초보적인 교회 안팎에서의 활동은 달성교회시대의 일이고, 그의 본격적인 목회활동과 민족운동은 새로운 현대식 예배당이 지금의 자리에 건축된 1901년 이후부터의 일이다.           2. 전덕기 전도사의 노방전도               1901년에 스크랜톤이 봉헌식 후에 갑자기 모친의 병 때문에 미국으로 떠났다. 봉헌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이 때에 상당히 성장하여 있었다. 선교사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전도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스크랜톤 목사가 없는 동안 전덕기 속장이 권사가 되면서 김상매 전도사와 함께 담임목사가 없는 우리 교회의 목회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Offical Journal, 1902, p.41. 전덕기 권사는 다음 해인 1902년에 전도사의 자격증을 연회 선교회에서 얻게 되면서 전도사 1년급의 자격으로 활동하게 되나, 그 전 해인 1901년까지는 평신도로서 담임목사가 없는 동안 목회를 도왔다. 따라서 주일아침 설교는 전도사 자격증을 가진 송기영 전도사가 주로 설교하였는데 그는 배재학당의 한문선생으로 있었다. 그리고 전덕기 권사는 교인심방과 병자심방, 새 신자 전도와 노방전도를 담당하였다. 특히 전덕기 권사의 새 예배당 앞에서의 노방전도는 남대문 일대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의 노방전도 방법이 교통을 방해하거나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 소음공해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그의 노방전도가 어찌나 신사적이고 점잖고 간절하였던지 경찰이나 당국으로부터 아무 제지도 받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상게서, p.41, p.55. 전덕기 권사의 노방전도에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서 주일예배에는 새로 지은 그 넓은 예배당이 차고 넘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노방전도를 듣고 학습인으로 등록된 사람이 7명이나 나올 정도였다. 상게서. 우리 나라 속담에 큰 소가 나가면 작은 소가 들어온다더니 스크랜톤이 출타하자 작은 전덕기 전도사가 들어와서 교회를 계속 부흥시켜 나갔던 것이다. 전덕기 전도사의 괄목할 만한 전도사업 목회 업적은 다음 해인 1902년의 지방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우리 상동구역회에서 지방회에 전덕기 권사를 전도사로 천거하여 그 자격증을 얻게 하였을 뿐 아니라, 지방회에서 우리 상동교회로 전도사 파송을 받게 된다. 그리고 담임목사의 직무는 인천에 있는 존스 목사가 가끔 올라와서 돌보다가 후에는 스웨어러 목사에게 인계하여 그가 가끔 와서 세례식과 성찬식을 거행하여 구역회를 소집하고 교회 사무처리를 하였다. 상게서. 주일설교는 송기영 전도사가, 심방, 병자심방은 전덕기 전도사가 전담하였다. 따라서 전덕기의 우리 교회에서의 목회는 1902년부터 시작되어 그가 순직하는 1914년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1903년의 한 해 동안은 우리 나라에서 세번째로 목사 안수를 받은 한학자인 최병헌 목사가 우리 교회에 파송받아 전덕기 전도사와 함께 목회를 하였으나 상게서.  최목사는 다음 해에 정동교회의 목사로 파송되었다. 1904년 2월에 미국 선교부에서 스크랜톤의 한국선교지 복귀를 허용함으로 겨우 우리 나라에 오게 되나 이번 일이 큰 이유가 되어 그는 1907년에 자원 은퇴하여 감리교선교부와는 손을 뗀다. 그 후 한국정부의 요청으로 직산광산 등 기타 광산의 의사로 끝까지 가난한 자의 친구로 지내다가 1916년~1917년에는 만주 대련에서 개업하였으며, 1919년 이후부터는 일본 고베에서 개업하였다가 5년 후인 1922년에 그 곳에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딸만 넷을 두었는데 이들은 다 극동에서 일하던 미국영사, 영국영사들과 결혼하였다. 스크랜톤이 은퇴한 1907년부터는 인기가 대단하던 전덕기가 그 해 선교연회에서 집사 목사(Deacon, 지금의 준회원 목사)의 안수를 받고 정식으로 담임목사로 파송받아 그의 화려한 목회생활과 피맺힌 민족운동을 한층 더 활발하게 진행시킨다. 그러나 이 시기의 우리 교회의 활발한 전도활동과 놀라운 성장은 하나님의 크신 역사와 스크랜톤 목사나 전덕기 목사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시에 우리 교회에 출석했던 유명, 무명의 우리 교우들의 단결되고 헌신적인 노력과 활동의 결과였음을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