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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사 2. (동대문교회)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9,275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함께 시작한 동대문교회 (1890년대) 



   한국 감리교회의 산 역사라 할 수 있는 동대문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함께 하는데서 시작하였다. 초기 동대문교회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스크랜톤(W. B. Scranton) 선교사는 버림받은 환자들을 위한 진료소로 '선한 사마리아 병원'(Good Samaritan Hospital)을 설립하기 시작하였고, 그 일환으로 1890년에 세워진 '동대문 시약소'가 동대문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1890년 가을 여선교사 로드웨일러(Miss L. S. Rothweiler)와 이화학당 교사인 이경숙(세례명, Drusilla)이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점차 동대문교회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기도처로 시작한 동대문교회는 2년만에 크게 성장하여 1892년 9월에 동대문구역으로 승격되었으며, 정동교회와 함께 미 선교부의 한국선교를 담당하는 중심 교회가 되었다. 이와 함께 동대문교회는 미 선교부 총무인 볼드윈(Mrs. L. B. Baldwin) 부인의 기부금으로 새 예배실(볼드윈 채플)을 짓고 한국 감리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한 장소에서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렸으며, '볼드윈 매일여학교'(Baldwin Day Girl School)를 시작하여 여성교육과 교육선교를 담당해 왔다. 





 

  신앙교육과 민족교육을 담당한 동대문교회 (1900년대)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동대문교회는 신앙 교육과 민족교육을 담당한 중심 교회가 되었다. 1900년 3월에는 당시 동대문교회 제4대 담임자로 파송되었던 노병선 전도사와 한승원 성도에 의해서 교회 안에 '흥인배재학교'가 세워졌고, 학생들을 신앙과 민족정신으로 무장시켰다. 또한 1906년에는 '볼드윈 매일여학교'가 '동대문보통학교'로 승인 받아서 정규 보통학교가 되어 많은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이와 함께 동대문교회는 의료사업과 교육사업 뿐만 아니라 전도사업에 있어서도 다른 교회의 모범이 되어 1908년부터 1913년까지 동대문 인근 지역에 12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교회성장과 사회선교의 기반을 다지는 동대문교회 (1910-1920년대) 



  전도의 활성화로 동대문교회는 교인 수가 증가하여 1909년 최초의 교회인 '볼드윈 채플'을 대신할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5월에 완공된 새 성전에는 당시 전도사역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전도부인을 양성하기 위한 '동대문부인성경학원'도 함께 설립하여 여성지도자들을 양성하여 배출하였다. 또한 1918년에 '동대문유치원'이 '흥인배재학교'에서 분리되어 운영됨으로서 유아 교육에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동대문교회 청년회가 1920년에 처음으로 조직되어 그 이름을 '엡?청년회'라 명명하고, 동대문 일대의 공장 직공들을 모아 가르치는 야간 대성학원을 운영하여 사회선교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동부연회 선교의 거점지가 된 동대문교회 (1930년대) 



  1930년 12월에 남북 미감리교회가 기독교조선감리회로 통합되면서 미 선교부로부터 독립함에 따라 동대문교회는 '경성지방'에 포함되었지만, 1934년 제4회 동부연회 건의안으로 본 교회를 중심으로 경동지방이 새롭게 조직되어 동대문교회는 동부연회 선교의 거점지가 되었다. 또한 지방 내의 모든 행사 즉, 부인대사경회, 감리교 임원수련회 및 연회 장소로 본 교회 예배당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동대문교회는 동부연회 및 조선감리회 내에서 명실상부한 어머니 교회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동대문교회 (1940-1950년대)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최고조에 다다른 1940년대 초에는 동대문교회의 제20대 담임자였던 정춘수 감독의 친일 행정으로 1942년 6월에 인재 양성의 산실인  '동대문보통학교'가 폐교되고, 또한 1944년에는 민족적 성격이 강했던 '흥인배재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다. 이와 함께 동대문유치원과 동대문지역 근로자들의 배움터가 되었던 대성학원 또한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다.



  하지만 동대문교회는 교육이 활성화되어 교회가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 1946년부터 주일학교 교육과 청년회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교회가 점차 부흥기를 맞게 되었고, 여선교회는 선교와 구제에 힘쓰면서 대외적인 활동에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는 동대문교회가 한국 감리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교회가 되었다. 감리교회 본부를 비롯한 주요 기관에는 본 교회 출신 및 소속 목회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동대문교회는 한국감리교회 성장에 있어서 큰 공헌을 하였다. 



 



 

  제2의 성장기에 들어선 동대문교회 (1960-1980년) 



  동대문교회의 괄목할 만한 성장은 1960년대에 들어서이다. 교회학교는 영아부에서 장년부까지 8부서를 고루 갖추게 되었고, 1970년에는 청장년회 주관으로 동대문 지역 불우 소년들을 위한 '동대문직업소년학교'를 설립함으로써 사회선교에 대한 열정도 다시금 되살아났다. 더욱이 1973년에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성전이 건축되었고, 1976년에는 교육관 건물이 신축됨에 따라 본 교회가 감리교회의 중견교회로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1980년 10월 제14회 총회에서 동대문교회 제29대 담임자인 오경린 목사가 감독회장으로 피선됨에 따라 동대문교회는 감리교회의 지도급 교회로 급부상 하게 되었다.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앞장선 동대문교회 (1981년-2000년 3월) 



  동대문교회는 1986년 10월 제17회 총회에서 제30대 담임자인 장기천 목사가 감독회장에 피선됨에 따라 감리교회 지도급교회로서의 위상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사회에 거세게 일던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동대문교회는 민족 구원의 터로서 자리를 잡고 민주화와 사회선교 운동에도 앞장서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한국교회 가운데서 민간 통일운동을 이끄는 중심교회가 되었고, 중국 도문시에 학교를 건축하고 장백현에 장백교회를 개척하여 북한 선교의 전초기지를 확보하였다. 이와 함께 매년 북한선교 기금을 마련하여 민간통일 운동에 지구력과 추진력의 기반을 다져 왔다. 



 



 

  새 천년 새로운 도약기를 맞는 동대문교회 (2000년 6월) 



  동대문교회는 새로운 천년을 맞아 새로운 목회자를 맞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고질화된 병폐와 고령화에 맞서 교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갈 젊고 유능한 목회자인 서기종 목사가 제31대 담임자로 취임하면서 동대문교회는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꿈꾸는 제3의 성장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역대 담임목사

        

  1대 스크랜톤선교사

  2대 헐버트선교사

  3대,9대 벙커선교사

  4대 노병선전도사

  5대 케블선교사

  6대 이경직 전도사

  7대 스웨어러 선교사

  8대,10대 김우권전도사

11대 장낙도 목사

12대 오기선 목사

13대 손정도 목사

14대 이하영 목사

15대 김종우 목사

16대 홍순탁 목사

17대 이익모 목사

18대 김응태 목사

19대 이동욱 목사

20대 정춘수 목사

21대 전효배 목사

22대,26대 조신일목사

23대 김순철 목사

24대 변홍규 목사

25대 조화철 목사

27대 마경일 목사

28대 송정율 목사

29대 오경린 목사

30대 장기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