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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인물-정순만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4,422
준비 중 (1) 정순만과 대동공보사의 관계 대동공보사의 구성원은 몇차례에 걸쳐 변동되었다. 이를 표로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시기 직원명단 1908년 창간시  사장  차석보, 발행인 겸 편집인 유진률,  주필 윤필봉,鄭淳萬, 회계 이춘식, 지방계 박형유,기자 이강 발행명의인겸 주필 미하일로프 1909년 1월 31일  사장 최재형, 부사장 李尙雲, 발행인 유진률, 서기 김만식, 총무 박인협, 재무 이상운, 주필 미하일로프, 주필대행 이강  1909년 9월 13일 총무, 재무만 차석보로 변경  1909년11월 14일 발행 명의인만 미하일로프에서 유진률로 변경  1910년 4월 24일 발행인 겸 편집 유진률, 사장 최재형, 부사장 이상운, 총무 金圭燮, 재무 차석보,                       서기 金晩植, 노문과 韓馨權, 일문 김모 주필 대리 鄭在寬  1910년 6월 9일 편집인 듀꼬프, 발행인 유진률  *1908년 창간시('왜정 갑구', 1910년 1월 20일 보고), 1909년 1월 31일 (대동공보 1909년 3월 3일, 3월 7일, 3월 10일, 신한민보 1909년 4월 14일), 1909년 9월 13일 (대동공보 1909년 9월 16일), 1910년 4월 24일('왜정갑구'1910년 4월 29일, 대동공보 1910년 4월 24일), 1910년 6월 9일(대동공보,1910년 6월 9일)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08년 11월 대동공보가 창간할 때에는 사장 차석보, 발행인 겸 편집인 유진률, 주필 윤필봉, 정순만, 발행명의인 미하일로프, 기자 이강 등이었다. (주)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1, pp 546-547, '왜정갑구'1910년 1월 20일 보고, 대동공보 1909년 5월 5일자 잡보 참조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발행 명의인 겸 주필이 러시아인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러사아인의 한인 배척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러시아군 휴직 중령으로서 당시 소송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던 인물인 미하일로프를 (주)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1, 980 내세움으로써 러시아 당국과의 마찰을 피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신문을 간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미하일로프가 대동공보에 관여하게 된 것은 유진률에 의해서인 것 같다. 유진률은 그와 가장 친밀한 인물로 파악되고 있는데, (주)위의 책, pp. 980-981 미하일로프는 자신이 안중근의 변호를 담당하기 위하여 여순으로 떠나는 1909년 11월 13일까지 발행인을 담당하였다. (주)위의 책, pp. 977-978 그리고 아울러 주목되는 점은 사장에 차석보가 임명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러시아 지역에 있는 평안도 출신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주)朝鮮駐箚憲兵司令部, '明治四十五年六月調 露領沿海州移住朝鮮人の狀態'(이하 노령이주상태로 약함), pp. 169-170 ] 1907년 블라지보스또크에서 '晨鍾'이라는 잡지를 간행한 바 있으며 (주)'아령실기'<교육> 최봉준의 소유인 해조신문의 기계 활자 등을 자신의 담보로 구입하여 대동공보를 간행하게 됨에 (주)대동공보 1909년 6월 6일 기서 사장에 임명되었다. 대동공보의 주필은 윤필봉, 미하일로프 그리고 해조신문의 주필 이었던 정순만 등이었다. 대동공보의 구성원은 1909년 1월 31일 특별 고주총회를 통하여 많은 변동이 이루어졌다. 그 구체적인 동기는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이었다. (주)대동공보 1909년 3월 3일자 샤설 여기에서는 차석보가 사장에서 물러나고 최재형이 사장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여 대동공보를 운영하게 되었다. (주)대동공보 1909년 3월 3일, 3월 7일, 3월 10일자. 신한민보 1909년 4월 14일자 이것은 대동공보의 재정권이 평안도출신에서 함경도출신으로 넘어간 것을 의미한다. 또한 투쟁방략이 창간시 지식계발을 주장하는 차원에서 무장투쟁이 보다 중요시되는 방향으로 전환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최재형은 1908년 李瑋鍾, 李範允 등과 함께 노보끼예브스크에서 同義會를 조직하여 활동한 인물로서 (주)'재외배일선인유력자명부'(하와이대 소장) p. 25 해조신문의 사장이었던 최봉준이 온건파로 분류되는데 반하여 (주)'왜정갑구'1910년 1월 20일보고 과격파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재러한인 사회, 특히 노보끼예브스크지역 한인 사회에서 가장 자산이 많으며 한인 사회의 비중 있는 지도자였다. 18세 때에 러시아 병영의 통역이 되었고, 다음에 러시아 해군 소위, 경무원 등에 봉직하였으며, 노보끼예브스크에서 러시아 군대의 군납상인으로서 牛肉을 납품하여 돈을 벌었다. 25세시에는 수백호를 거느리는 老爺에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노야의 대표격인 都憲으로 근무하면서 두번에 걸쳐 뻬쩨르부르크에 가서 러시아 황제를 알현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1905년 이후에는 국내와 간도로부터 이동하여 온 의병들을 규합하여 자신의 수많은 재산을 배경으로 의병운동을 지원하였던 것이다. (주)독립유공자공훈록편찬위원회, '독립유공자공훈록'5, 국가보훈처, pp. 806-808, '재외배일선인유력자명부', p. 25 대동공보는 그뒤 1910년 1월 초순부터 1910년 4월 23일까지 신문사 내의 당파 싸움으로 일시 정간되기는 하였으나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문사의 구성원에 커다란 변동은 없었다. 다음에는 대동공보의 주요 구성원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2. 대동공보의 주요 구성원 일람표 성명 생몰 연대  직위  학력  출신지역  입사전 활동 직업  비고  최재형 1858 - 1920  사장  . 함북 경원  동의회 우육청부  귀화인  유진율  1866 - 발행인 편집인  신학교  함북 경흥  . (재산가)  귀화인 청년회  이강  1878 - 1964  기자 주필  영어학교 평남 용강  공립협회 신민회 .  공립협회의 특파원  정순만  1873 - 1928  주필  한학  충북 청주  독립협회 공립협회 동의회 .  .  차석보  1866 -  사장 총무 재무  .  평안도  신종 객주,인부 청부업 대차업  귀화인  이상운  1878 -  부사장  . 함경도  . 잡화상  .  정재관  1880 - 1930 주필  .  평북  공립협회 신한민보 대한인국민회 .  .  이춘식  1885 -  회계  .  함경도  . .  .  박인형  .  총무  .  .  가게 운영 .  .  김만식  .  서기  .  .  . .  .  김규섭  1879 -  총무  . 함경도  . 약국운영  .  윤필봉  .  주필  .  .  . .  . 한형권  .  로어 담당  경성로어 학교  .  . 해삼위 세금징수원  .  미하일 로프  .  발행인 주필  .  . . 소송대리인  러시안군 휴직중좌 전 참령  듀꼬프  .  편집인  동양학 연구소  .  군인 .  .  표2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동공보의 사장으로 일한 인물은 차석보와 최재형이다. 그리고 발행인은 미하일로프와 유진률이 당당하였으며, 편집인은 처음에는 유진률이, 다음에는 러시아인으로서 해조신문의 고문이었던 듀꼬프가 당담하였다. 그리고 신문의 내용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되는 주필의 경우는 정순만, 윤필봉, 이강, 정재관, 미하일로프 등이 담당하였다. 구성원의 학력을 알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다. 다만 대동공보의 중심인물인 유진률과 주필이었던 정순만과 이강 그리고 편집인인 듀꼬프의 경우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유진률은 블라고베쉔스크(ܑܻܾܰܳܲܵ݉ܵܽ݁ܺ)의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주)신용하, '안중근의 사상과 의병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p. 185 정순만은 한학과 아울러 신학문을 공부하였으며, 이강은 하와이에서 1년간 영어학교를 다녔다. (주)졸고, 앞의 논문, pp. 309-310 그리고 듀꼬프는 블라지보스또크에 있는 동양학연구소를 졸업하였다. (주)박보리스, '국권피탈 전후시기 재소한인의 항일투쟁',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992, p. 1063. 그후에 주필로 일한 윤필봉, 정재관 등도 주필의 업무의 성격상 한학과 신학문을 아울러 공부한 인물로 생각된다. 한편 1910년 4월부터 대동공보에서 로어 번역을 담당했던 한형권은 서울에서 경성노어학교를 다닌 것으로 일려지고 있다. (주)'노령이주상태'p. 134 출신지역을 보면 크게 함경도출신과 평안도출신, 기호 출신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당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는 이들 3지역이 북한파(북파), 경성파(경파), 평안도파(서파)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한다 (주)'노령이주상태'pp. 169-170 우선 함경도 출신으로는 최재형, 유진률, 이상운, 이춘식, 김규섭 등인데, (주)위와 같음 이들은 사장, 부사장, 발행인, 편집인, 회계, 총무 등을 담당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신문의 운영과 재정을 담당하였다고 하겠다. 즉 대동공보는 소위 북한파라고 불리우는 함경도 출신의 인물들이 주도하고 있었으며 아울러 그 수령으로 일컬어 지는 최재형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위와 같음 평안도 출신은 이강, 차석보, 정재관 등이 있었다. (주)독립유공자공훈록편찬위원회, '독립유공자공훈록'1, 1986, pp. 208-209, p. 205 그중 차석보가 그 중심인물로 알려져 있다. (주)'노령이주상태', pp. 169-170 그 밖에 평안도파로는 金成武, 咸東哲 등을 들 수 있다. (주)대동공보 1910년 4월 24일자 제국통신 기호지방출신으로는 정순만을 들 수 있으며, (주)대동공보 1909년 5월 5일자 잡보 그밖에 대동공보에 관여한 기호파로서 정순만을 추종하던 세력들이 있다. 李致權, 李民福, 李基, 安漢周, (주)'노령이주상태', pp. 117-168 尹⧚炳, 金顯土, 강순기, 권유상 등이 그들이다. (주)대동공보 1910년 4월 24일자 제국통신 그들 가운데 이치권, 이민복, 이기, 안한주 등은 양성춘의 살해 사건으로 1910년 9월 12일 투옥 중이었다. 주)'노령이주상태', pp. 117-168 대동공보에 근무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 지역적인 갈등과 대립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정순만 등에 의하여 한인 전 거류민 단장인 양성춘이 피살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대동공보에서는 1910년 4월 24일자 <양씨피살상보>에서 1909년 러시아력 12월 26일 밤에 이 사건이 벌어졌으며, 그 이유는 평안도파와 기호파와의 대립에서 발생된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주)정순만의 양성춘 살해 사건은 기호파와 평안도파의 갈등과 대립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평안도파에 속한 인물은 차석보, 양성춘, 유진률, 정재관, 김성무, 이강, 함동철 등이었고, 기호파는 정순만, 윤일병, 김현토, 안한, 강순기, 권유상 등이었다. 정순만 등 기호파에서는 김성무가 미국에서 대동공보에 연조한 돈을 , 그리고 윤일병은 정재관이 미주 태동실업회사의 돈을 착복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김현토는 평안도 인사들이 불공평하다고 비판하였다. 이와 더불어 정순만은 평안도파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였는데 그 구성원은 안한, 강순기, 권유상 등이었다.(대동공보 1909년 4월 24일자 제국통신) ⧚리하여 1909년 11월에는 대동공보가 정간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주)대동공보 1910년 4월 24일 논설 이에 1910년 1월 2일 이후 정간되었던 신문을 다시 간행함에 있어서 대동공보에서는 1910년 4월 28일자에 <本港에 있鏅 同胞志士鏅 黨派의 分爭을 速히 平和평 지에다>라는 논설을 게재하고 특히 기호파와 평양파가 싸우는 것을 금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입사전 활동단체를 보면 공립협회에서 활동하였던 인물들이 다수임을 알 수 있다. 이강, 정재관 등은 1905년 4월 5일 안창호 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한 인물이다. (주)김도훈, '공립협회(1905-1909)의 민족운동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4, 1989, p. 12 특히 정재관은 공립협회 2대서기, 3대총무, 4대 총회장 등을 역임한 공립협회의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주)위의 논문, p. 15 그는 1909년 4월 헤이그 밀사로서 미국을 순방하고 있던 이상설과 블라지보스또크으로 왔다. (주)독립유공자공훈록편찬위원회, '독립유공자공훈록'1, p. 225 정순만은 1908년 11월 15일경 공립협회에 가입, 1909년 1월 7일에는 블라지보스또크 지방회의 부의장으로 일하였다. (주)김도훈, 앞의 논문, pp. 29-30 그리고 이강과 정재관은 공립협회에서 발행하던 공립신문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그들은 주필로서 활동하였다. (주)이강('독립유공자공훈록'1, p. 208), 정재관(최기영, '미주 교포의 반일언론: '공립신보'·'신한민보'의 간행, '대한제국시기 신문연구', 일조각, 1991, p. 205) 정재관은 1909년 2월 공립협회와 하와이에 있는 合成協會가 합쳐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되자 여기에도 참여하여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주)윤병석, '미주 한인사회의 성립과 민족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일조각, 1990, pp. 295-296 대동공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간행되는 신한민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것은 바로 신한민보의 전신인 공립신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이강, 정재관과의 관련에 의해서일 것이다. 더욱이 정재관은 1909년 그곳에서 조직된 신한민보의 발행기관인 대한인국민회의 중심인물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대동공보의 사장인 최재형은 1908년 노보끼예브스크에서 同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으며, (주)독립유공자공훈록편찬위원회, '독립유공자공훈록'5, 1988, p. 806, '왜정갑구'1910년 1월 20일 보고 정순만 역시 이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주)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사료'7, 1978, pp. 256-257 유진률은 블라지보스또크에서 靑年敦義會에서 활동하였다. 이 회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9년 4월에 창립된 단체로서 회장은 金致寶가 담당하고 있었다. (주)'왜정갑구'1910년 1월 20일 보고 직업을 보면, 알 수 있는 인물들은 대체로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최재형은 牛肉청부업, (주)독립유공자공훈록편찬위원회, '독립유공자공훈록'5, p. 806 차석보는 객주, 인부청부업, 貸車業, (주)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1, p. 951, '노령이주상태', p. 166, 대동공보 1909년 4월 7일자 광고를 보면 차석보의 명의로 캄차카 반도에 고기 잡으로 갈 인부를 모집하고 있다. 이상운은 잡화상, (주)'노령이주상태', p. 125 박인협은 블라지보스또크 한인 거류지 487호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주)대동공보 1909년 3월 31일자 특별광고 김대섭은 약국을 (주)대동공보 1909년 3월 3일자 광고를 보면 광제국이라는 약국을 운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사업을 통하여 모은 자산을 가지고 대동공보의 주주가 되어 자금을 투자하고 있었으므로, 대동공보는 주로 이들 임원진의 조력에 의하여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러시아인인 미하일로프는 러시아 휴직 중좌로서 소송대리인으로 일하였다. (주)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1, p. 980 그리고 대동공보의 발행인 겸 편집인인 유진률 역시 약간의 자산이 있었다. 그는 블라지보스또크 조선거리에 두채의 집이 있었으며, 200루블 정도를 융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위의 책, p. 978, pp. 980-981 상업에 종사했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러시아에 귀화한 인물들이었다. 최재형의 러시아 이름은 최 뻬짜(ܟ݂ܵݏ)이며, (주)독립유공자공훈록편찬위원회, '독립유공자공훈록'5, p. 806 차석보는 니깔라이 미하이로위치 차가이이다. (주)'노령이주상태', p. 166 그 밖에 유진률은 니깔라이 뻬뜨로위치 유가이이다. (주)위와 같음 이들은 대부분 일찍부터 러시아로 이주하여 살던 인물들이 아닌가 한다. 최재형의 경우 9세에 연해주로 망명한 인물이었으며, (주)독립유공자공훈록편찬위원회, '독립유공자공훈록'5, p. 806 이들이 대체로 대동공보의 운영을 맡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검토해 볼 때 대동공보의 구성원의 학력은 주필 등만이 구학문과 신학문을 공부한 인물들이며, 출신지역은 함경도, 평안도, 충청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특히 함경도 출신이 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그들은 바로 대동공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 주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평안도, 충청도 출신이 주필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입사전 활동을 보면 주필로 활동하던 인물들 가운데 해조신문, 그리고 미주에서 간행된 공립신보 등에서 일한 인물들이 보이는 점이 주목된다. 직업을 보면 대체로 상업에 종사하는 인물들이 다수 보이며, 이들은 대동공보의 운영을 담당하는 간부들로서, 재정을 담당하는 주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는 러시아에 귀화한 인물들로 생각된다. 결국 대동공보는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함경도, 평안도, 충청도 출신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간행한 신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비록 출신 지역은 다르나 각각 항일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신문간행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다만 그들이 국권회복을 주장한 이유는 당시 그들 각 인사들이 처한 입장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예컨대 1860년대부터 경제적 이유로 러시아 지역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최재형 등 다수의 함경도 출신들과 1905년을 전후하여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국내, 미주 등지에서 이곳으로 온 이강 등 평안도 출신, 정순만 등 기호출신들은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재러한인의 최대 당면 과제인 러시아인의 한인 배척론을 극복해야 러시아에서 안정된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생존의 문제에서 항일에 보다 적극적이고 그 투쟁 방법 또한 강렬하였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즉 그들은 한국인들이 이처럼 일본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러시아인들에 가시적으로 보이고 싶어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정치적 망명을 한 후자의 경우는 재러한인들 가운데 자신들의 출신 지역 동포들이 함경도파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었으므로 생존의 문제보다는 국권회복이라는 대의명분에 강한 집착을 보인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러시아 지역은 함경도 출신들에게는 삶의 현장이지만 평안도, 충청도 출신들의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건설 지역이라는 인식이 강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3파 가운데 평안도, 충청도 출신들은 대립 갈등이 심하였으므로 상대적으로 함경도 출신 인사들의 입지가 강화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더구나 함경도 출신들은 재력가이면서 대중적 기반을 갖고 있었으므로 대동공보의 내용에도 함경도 출신들의 입장이 보다 많이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러시아의 한인배척에 대한 대동공보의 대응은 이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주)그렇다고 하여 러시아의 한인 배척에 대하여 평안도, 충청도 출신들이 찬성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 역시 이에 반대하였다. 다만 러시아의 한인 배척에 대하여 느끼는 위기감이 그 지역에 삶의 기반을 둔 함경도 출신이 타 지역 출신들에 비하여 보다 강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