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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인물-장지연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4,964
1. 장지연 약력 언론인·우국지사. 호는 위암(韋庵). 1896년 이승만(李承晩)·남궁억(南宮檍)·양흥묵(梁興默)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어 총무위원으로서 정부 실정을 규탄하였고, 1899년 〈시사총보(時事叢報)〉의 주필로 항일구국의 필봉을 휘둘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써서 일본을 통박하고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10년 한일합병이 되던 날 자신이 주필로 있던 <경남일보(慶南日報)>에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하여 <경남일보>가 폐간되었다. 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유교연원(儒敎淵原)》 《동국유사(東國類史)》 《위암문고(韋庵文庫)》 등이 있다. 2. 황성신문과 장지연     장지연, 남궁억, 나수연, 유근 등 개신 유학적 배경을 가진 인사들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고금제로 1898년 9월 5일 《황성신문》을 창간했다. 이 신문은 한문에 익숙한 중류 이상의 지식층에게는 국문만을 쓰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다 하여, 국한문을 혼용했다. 《황성신문》은 1900년 8월 8일자에 러시아 공사가 일본 공사에 한반도의 분할을 제의했으나 일본측이 거절했다는 뉴스를 보도하여, 필화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남궁억은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신문의 보도가 문제되어 재판에까지 회부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번째 사장이 장지연이었는데 그 역시 1905년 11월 20일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쓰고 곧 경무청에 체포되었다. 이 논설에서 그는 보호조약 에 서명한 대신을 돈견으로 매도하였다.   《황성신문》은 뛰어난 논설로 명성을 얻었다. 장지연을 비롯하여 유은 박은식 등 한학에 조예가 깊은 인사들이 논설을 써 "논설의 황성"이라는 평판이 났다. 국한문을 혼용한데다 묵직한 논설을 실었기 때문에 이 신문은 주로 남성이 읽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사람들은 《제국신문》에 대비하여 숫신문이라 일컬었다. 이 신문은 총독부에 의해 1910년 9월 14일 종간했다. --------------------------------------------------------------------------------------------- 3. 해조신문사와 장지연    해조신문의 간행과 더불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신문사에서 일하였던 인물들이 누구였느냐 하는 것이다. 일간으로 간행되었으므로 적지 않은 인원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밝혀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해조신문사의 구성원을 도표로서 작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표1. 해조 신문사의 구성원 일람표 (1908년) 성명 지위  학력  재산정도 출신지역 입사전 활동  비고 崔晩學  (崔萬學)  발행인   편집인  .  . 함북 경흥  .  최봉준의생질   귀화인    崔鳳俊  사장  無學文盲者  30만 루블  함북 경흥 民會 회장  귀화인    鄭淳萬  (王昌東  자오생)  주간 주필 총무  田遇의 문인  . 충북 청주  의병, 保安會 민회 총무겸 서기  同義會 瑞甸書塾 대동공보   李剛  편집원  영어학교  . 평남 용강  共立協會 공립신문 주필  공립협회 특파원   張志淵  주필  張錫鳳 문하  . 함북 상주 황성신문 주필 사장  .   金河球  기자  早稻田 대학 . 함북 명천 宮內府 主事  . 朴永鎭  文選工 .  .  서울 의정부 관보과 대한매일신보  .   大竹次郞 기계담당  .  .  . .  일본인   李 鍾 雲 (이종원)  편 집 원  郭鍾錫의 문인 영어학교  .  진주경남  대한매일신보  .   듀꼬프  발행인 편집인  .  동양학 연구소  . 군인  러시아인   표1 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최만학과 듀꼬프가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되어 있다. (주) 해조신문 창간호. 최만학의 경우 한자로는 崔晩學이라고 하기도 하고(황성신문, 1908년 5월 21일 관보) 崔萬學이라고도 한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재러한인발행신문ゝ で해조신문사원의 신공 박영진と) 그중 듀꼬프는 1906년에 블라지보스또크에 있던 동양학연구소 중국·조선학과를 마치고 (주)박보리스, 앞의 논문, p. 1063. 동시베리아 제13보병연대의 중위로서 근무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연해주 군지사에게 해조신문의 간행을 허락해줄 것을 청원했던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해조신문이 러시아지역에서 간행되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한편 최봉준은 사장으로서 일하였으며, (주)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1, p. 946. 정순만은 총무 겸 주필 즉 논설기자로서 활약하였다. (주)정순만은 해조신문의 주간('위암문고', 연보) 또는 주필(뒤바보, '俄領實記', 상해판 독립신문 1920년 4월 8일) 또는 총무(で해조신문사원의 신공 박영진と)로 일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 이강, 장지연, 김하구 등 외부에서 온 인물들은 주필 또는 기자, 편집원 등으로서 일하였다. (주)뒤바보, '아령실기', 상해판 독립신문 1920년 4월 8일자 참조. 이강은 해조신문(1908년 4월 3일자등)에는 본사 편집원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한형권도 편집원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주로 러시아어를 번역하였다(해조신문 1908년 4월 23일 별보) 그 밖에 박영진은 문선, 이종운은 일어와 영어의 번역을 담당하였다. (주)김현구, '검은유전', p. 102. 해조신문에 이종운은 이종원으로 나오며 직책은 편집원이다(해조신문 1908년 4월 2일자 등) 기계를 담당한 인물은 대죽차랑이라는 일본인이었다. (주)で해조신문 사원의 신공 박영진と 일본인이 어떠한 경위를 통하여 기계를 담당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해조신문사의 사장인 최봉준이 원산의 전 북한실업신보의 주인인 길전수차랑에게서 윤전기 등 인쇄기 일체를 구입했을 때 함께 영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 갈 뿐이다. 기계를 담당한 인물가운데에는 일본인 이외에 한국인 기술자도 있었다. (주)゛재러한인발행신문ゝ 중에서 2월 2일부로 블라지보스또크 총영사 野村基信이 통감부 총무국장 鶴原定吉에게 보고한 ゛한어신문발행계획에 관한 건ゝ에 ぢ널리 한국인 가운데 구독자를 모집하고 일면 신문사에 충당하기 위한 가옥도 건축하고 윤전기 한대를 握付해서 한인의 기사 1인을 雇入하고っ라고 한 내용이 이를 말하여 준다. 하지만 그 한국인 기술자가 누구였는지 하는 것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구성원의 학력을 보면 한학과 신학문을 모두 공부한 인물이 다수인 것 같다. 정순만은 ゛儉隱遺傳ゝ에, 鄭淳萬의 號는 儉隱이니 淸州 黑岩地方에서 高宗 丙子(1876)에 生하였다. 學問의 造詣와 言行의 謹愼으로 早年에 學者의 榮譽가 遠聞되었고 田簡齊의 門下에 執贄하였다. (주)김현구, '검은유전', p. 80. 라고 있듯이, 기호학파의 중심인물인 전우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우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주)금장태· 고광식, '유교근백년', 박영사, 1984, pp. 213-215. 적극적인 현실참여파였던 것 같다. 그는 유인혁, 李範錫 등과 함께 의병활동에 종사하였다. (주)김현구, '검은유전', p. 81. 한편 정순만은 신학문에 대하여도 상당한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즉 그는 상동교회 청년회 부회장으로 일하였고, 또한 이상설 등과 함께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 학생들에게 근대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주)윤병석, '이상설전', pp. 49-51. 또한 그가 작성한 해조신문의 간행 취지서에서, (주)1908년 2월 26일 이전에 간행되었던 해조신문의 간행 취지서는 정순만에 의하여 간행된 것이 아닌가 한다. 장지연의 '위암문고'연보에 장지연이 블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한 때에 이미 정순만이 신문사의 주간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간행 취지서 역시 그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1908년 2월 26일자 논설 ゛우리동포에게 경고폑ゝ과 1908년 2월 27일자 논설 ゛교육이 업스면 이 시韡에 생존폑을 엇지 못폑ゝ은 비록 저자가 で자오꿷と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 인물 역시 정순만이 아닌가 한다. "정치와 법률과 학문과 상업과 공업과 농업의 새 문자를 날마다 번역 게재함っ이라고 하여, 신학문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그의 신학문에 대한 관심을 짐작케 한다. 장지연은 장석봉· 許薰· 張福樞 등 退溪學派에 속한 성리학자들에게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1898년을 전후하여 史禮所· 황성신문사 등에 몸을 담고 서울을 무대로 활약하면서 국제적 감각과 식견을 쌓는 한편, 청말 變法思想家들의 저서를 통해 신학문도 수용하였다. (주)유숭, ゛위암 장지연의 생애와 자강사상ゝ,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5, pp. 5-13. 이종운은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寒州 李震相의 문인인 郭鍾錫으로부터 수년간 한학을 공부하였다. (주)금장태· 고광식, '유교근백년', pp. 464-466. 그후 서울로 상경하여 1894년 2월에 개교한 영어학교에 (주)이광린, ゛구한말의 관립외국어학교ゝ, '개정판 한국개화사연구', 일조각, 1980, pp. 138-139.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 (주)김현구, '검은유전', p. 99. 이와 같이 하여 이종운은 영어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영어 번역 담당으로 고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강은 7세부터 17세까지 향리인 平安南道 龍岡郡 池雲面 立城里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 후 중국에 유학하기 위하여 압록강 대안인 安東縣까지 갔다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되돌아 와서 기독교의 감리교에 입교하였다. (주)이강훈, '독립운동대사전', 동아, 1985, p. 605. 1902년에는 미주개발회사에서 모집하는 이민에 들어서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영어공부를 하였다. (주)독립유공자공훈록 편찬위원회, '독립유공자공훈록'1, 국가보훈처, 1986, pp. 208-209. 김하구는 조도전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이와 같이 해조신문의 구성원 가운데에는 한학과 신학문을 모두 공부한 인물이 많았다. 이것은 해조신문의 내용 가운데 신교육의 보급 및 풍속의 교정에 관한 기사의 게재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밖에 최만학은 1895년에 노보끼예브스크에 있는 러시아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주)한인신보 1917년 9월 30일 강동꼥해 최봉준은 で無學文盲者と로 알려져 있다. (주)'주한일본공사관기록'゛재러한인발행신문ゝ 중 で외국신문 발행 기타의 건と 재산정도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다. 다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봉준의 경우만 그 대략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최봉준은 1900년 블라지보스또크 러시아 군대에 물품을 대는 사업으로 장사를 시작하여 )한인신보 1917년 9월 30일 강동꼥해 러일전쟁시 특히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주)한인신보 1917년 10월 7일 강동꼥해 그 후 그는 일본에 가서 천톤급의 상선 복건환 1척을 7만원에 구입하여 俊昌號라 이름하고 태극기를 달고 원산, 성진, 블라지보스또크를 운행하는 한편, 소를 수입하여 큰 수입을 올렸다. (주)한인신보 1917년 10월 7일 강동꼥해 그의 재산 정도에 대하여는 해조신문 1908년 3월 26일자 사설 ゛본사주 최봉준씨 역사ゝ에, 지금은 공의 믡샨이 부요폁야 젼국에 상업가로 뎨일 명예를 엇은지라. 본항에 쥰창호샹졈을 크게 열어 연츄 셩진 원산등디에 지镱을 셜립폁며 상폡 연쯡 하르빈 일본각디에도 오륙쳐 물화ꏡ매폁鏅 샹镱이 잇스며  대소륜선도 수삼척이 잇셔 鏡외국물화를 교통폁며 본국인과 아셷일 삼국인의 교용폅쟈도 수꟢여명이 다 공의 자본을 우러러 꿷업폁鏅쟈도 수꟢여명이오 믁녀도 폅 오륙남ꏡ가 잇鏅韡 모다 학교에 입학폁야 뭗학교에 졸업폅쟈도 잇고 가쯢도 四五쳐에 버려두엇스며 라고 있고, 또한 한인신보 1917년 9월 30일자 ゛최봉준씨의 별셰ゝ에, 실업으로난 백만원 이샹 거래를 하야 쳔여돈되는 화륜션 준챵호를 부리며 내외국항구에 상업지镱이 즐비하얏스며 라고 있는 데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주)최봉준의 사업은 1911년에 망하였으며, 그 후 최봉준은 칩거생활을 하였다고 한다.(한인신보 1917년 10월 22일 강동꼥해)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은 최봉준의 재산은 그의 생질인 최만학에 의하여 관리되었다는 것이다. (주)일본외무성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明治四十五年 六月調 露領沿海州移住鮮人の狀態ゝ 중 で結社團體及排日鮮人と 가운데 최만학조 및 한인신보 1917년 10월 22일 강동꼥해. 최만학은 해조신문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서 활동하였는데 이 점은 그가 최봉준의 재산관리인이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출신지역을 보면 함경도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최만학· 최봉준· 김하구 등이 그들이다. (주)최만학의 출신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최봉준의 생질임을 고려할 때 최봉준과 마찬가지로 함경북도 경흥이 아닌가 한다. 김하구('재외배일선인유력자명부'김하구조) 당시 블라지보스또크에는 주민들도 함경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趙昌容, ゛本港遊覽錄ゝ, '白農實記'참조 그러므로 대중적 기반을 갖고 있던 함경도출신의 세력들이 강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더구나 해조신문은 함경도 출신인 최봉준이 재정후원자였으므로 함경도 토착세력의 영향력은 상당하였을 것이다. 그 밖에 이강은 평안도, (주)독립유공자공훈록 편찬위원회, '독립유공자공훈록'1, pp. 208-209. 장지연과 이종운은 경상도, (주)장지연('위암문고'연보), 이종운(김현구, '검은유전', p. 99) 정순만은 충청도, 박영진은 서울이다. (주)で해조신문사원의 신공 박영진と 해조신문의 창간 당시에는 지방에 따른 파벌 의식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에서 西北學會· 關東學會·嶠南學會 등 학회들이 지방별로 조직되어 지방열이 고조되자 해조신문에도 그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러한 여건 때문에 장지연은 목숨이 위태롭게 되어 상해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주)김현구, '검은유전', pp. 89-95. 당시 블라지보스또크에서 장지연과 함께 활동했던 趙昌容은 '白農實記'゛本港遊覽錄ゝ에서 이에 대하여, 본국 京城人이 多潛入港來하야 誣讒海朝新聞社社主崔鳳俊하야 請殺張先生하고 夜半에 以亂類輩로 歐打逐出社外하고 其旅館을 嚴守不得出入케 하고 又外人를 不得入케 하다. 此는 前日 皇城新聞時에 北鄙之類等說이 是也라. 卽指李容益하야 言之也라 又張先生을 逐出하야 入於露市街俄館中이어늘 余卽問往求하야 扶携越來開拓里하고 라고 하여 서울인들이 다수가 몰래 블라지보스또크로 들어와 해조신문사 사주 최봉준에게 모략하고 장지연을 죽일 것을 청하여 해조신문사에서 장지연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즉 함경도인과 기호인이 경상도인인 장지연과 사이가 좋지 않은 듯하다. 특히 장지연은 정순만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장지연이 저술한 해항일기 곳곳에 이러한 내용들이 산견되고 있다. (주)1908년 4월 9일자, 4월 26일자, 4월 29일자, 4월 30일자, 5월 11일자, 5월 22일자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특히 1908년 4월 29일 저녁에는 신문에 관한 일로 정순만과 크게 다투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4월 30일에는 정순만과 다투던 중에 정순만이 장지연을 칼로 찌르려고 하였으나 민장인 양성춘의 만류로 제지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이에 장지연은 1908년 5월 11일에는 해조신문사를 그만두고 떠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장지연과 정순만의 갈등은 단지 지역적인 문제에 의한 것 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장지연의 해항일기 1908년 3월 25일 조를 보면, 처음 一初(정순만-필자주)와 뜻이 맞지 않아 은연히 嫌猜하는 기색이 보이니 한탄할 일이다.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즉 1908년 3월 2일 장지연이 블라지보스또크에 온 이후 얼마되지 않아 이들의 갈등관계가 조성된 것 같다. 이점은 장지연이 오기 전에는 해조신문의 논설 등을 정순만이 담당했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블라지보스또크 한인 사회에서의 이들의 위상에 관한 문제 때문에 갈등관계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해조신문사의 구성원들이 해조신문사에서 활동하기 이전 구성원들의 경력을 보면 미국과 국내의 신문사에서 일하였던 인물이 상당수를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강은 샌프란시스코에서 1905년 11월 20일부터 공립협회의 기관지로서 발행된 공립신보의 (주)김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 Readley Calif. U.S.A., 1958, p. 88. 주필로서 활약하였다. (주)독립유공자공훈록 편찬위원회, '독립유공자공훈록'1, pp. 208-209. 그리고 장지연은 1899년에 황성신문의 주필로서 일하였으며, 1901년에는 이 신문사의 사장으로서 활동한 (주)'위암문고'연보 국내의 대표적인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진은 의정부 관보과, 일진회 회보의 발행소, 광문사, 대한매일신보사 등에서 문선공으로 일하였으며, 이종운은 대한매일신보사의 번역부에서 활동하였다. (주)'검은유전', p. 99. 구성원 가운데 이처럼 과거에 신문사에서 일했던 경험의 소유자가 많았던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더욱이 해조신문이 러시아에서 최초로 발행된 교포신문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신문 간행의 경험이 있던 자들이 누구보다도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블라지보스또크에 살고 있는 한인들이 조직한 민회에서 활동하였던 인물들도 참가하고 있었다. 최봉준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그는 이 민회의 회장으로 일했다. (주)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1, p. 986. 최만학 역시 민회에서 최봉준을 보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밖에 정순만도 민회에서 일하였다. 그는 1906년에 이동녕· 이상설 등과 블라지보스또크로 망명한 이후 (주)宋相燾, '騎驢隨筆', 국사편찬위원회, 1971, p. 116. , 최봉준의 장조카인 崔禮簿와 친하게 되었다. 최예부는 민회에서 재무를 맡고 있었다. (주)김현구, '검은유전', p. 83. 이들 민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물들은 당시 러시아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조창용의 '백농실기'゛본항유람록ゝ에는, 李範允 柳山林(유인석--필자주) 安應七등이 以舊日韓國御使官馬牌로 假稱韓國勅使라하고 勒奪民財할새 老爺 金學萬 民長 楊成春氏가 命使居留巡使하야 卽捕縛此三人할새 李範允 安應七은 도주하다. 柳山林은 卽拿取於學校內하고 卽打碎骨하야 幾至死境이라. 其行裝內文簿를 調査則果然也라. 柳山林은 老者也라. 卽放送하고 其他同黨多數人은 被囚於露國警廳하니라. 라고 하여 재러한인 사회의 지도자인 노야 김학만과 민장 양성춘이 의병지도자인 이범윤, 유인석, 안중근 등을 포박하고자 하였으며, 그 중 유인석을 잡아 심한 고문까지 행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신문사의 사주인 최봉준은 약간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1909년 6월 12일) 의병파들을 ぢ폭도っ 라고 비난하고 있다. (주)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5, 1986, pp. 160-161. 그러나 민회 참여자 가운데 정순만은 국내외에서 의병운동에도 참여한 인물이었으므로 토착세력인 함경도출신들과 점차 갈등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정순만은 해조신문이 폐간될 무렵인 1908년 5월 경 노보끼예브스크에서 최재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의병조직인 同義會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주)박민영, 앞의 논문, pp. 79-81. 한편 민회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최봉준과 최민학은 러시아에 귀화한 인물들이다. (주)'明治四十五年 六月調 露領沿海州移住鮮人の 狀態'゛結事團體及排日鮮人ゝ 중 최만학조 참조. ⧚908년 당시 러시아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 가운데 귀화한 사람은 16,007명이었고, 귀화하지 않은 사람의 수는 29,390명이었다. (주)고승제, 앞의 논문, p. 164. 한국인이 러시아에 귀화하면 러시아 정부에서는 약 15제샤찌나(ܔܵ݁ݏ݂ܸܽܰ) (주)미터법 이전의 러시아에서의 지적 단위. 1.092헥타르에 해당됨. 에 해당되는 농토를 무상으로 주었다. 또한 귀화한 한국인들은 러시아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주)박영석, ゛노령지역의 항일민족독립운동ゝ, '한로관계100년사', 1984, pp. 249-252. 따라서 최봉준과 최만학이 러시아 지역에서 신문을 간행할 수 있었고 러시아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富를 축척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결국 블라지보스또크 민회에 참여하고 있던 함경도 출신 귀화한 인사들의 축적된 재산과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러시아로 망명을 한 인물과 국내 및 미국에서 활동하던 언론인들의 결합에 의해 해조신문은 간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밖에 주목할 점은 李剛이 1908년 1월에 金成茂와 함께 共立協會에서 파견되어 온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주)김원용, 앞의 책, p. 81. 이로 미루어 볼 때 공립신보와 해조신문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현재로선 그 구체적인 실체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 3. 경남일보와 장지연 2) 慶南日報의 탄생   1905년 露日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대통령 루즈벨트의 주선으로 포츠머스에서 양국의 전권대표가 만나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여 美, 英, 러시아 등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을 보장받고 곧 이어 같은 해 11월 18일 을사조약(을사오조약, 제2차 韓日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키로 하였다.   을사조약의 체결이 세상에 알려지자 국민은 분노하여 강력한 반대항쟁을 벌였다. 서울은 철시하고 학교는 폐교하였으며 통분한 민중은 시가로 몰려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을사오적을 규탄하고 일제의 침략을 성토하는 소리는 전국을 휩쓸었다.   皇城新聞은 11월 20일자 신문에 張志淵의 「是日也放聲大哭」이란 논설을 실어 을사조약에 서명한 각료들을 마치 개 돼지 같이 매도하였다.   皇城新聞 뿐만이 아니고 大韓每日新報, 帝國新聞등의 민족지들은 일제와 매국노를 매도하고 민중의 자각을 촉구하는 논조를 펴나갔다.   이러한 민족언론의 보도에 대해 통감부의 탄압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통감부는 같은해 11월 20일 皇城新聞의 발행인이며 필자였던 張志淵을 구속하는 한편 정간처분을 내렸고 다음해인 1906년 3월 17일 帝國新聞사장 李鍾一을 검열 삭제지시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문초를 했으며, 帝國新聞도 3일간의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한편 일제는 언론탄압을 강화하기 위해 1907년 7월 24일 李完用내각의 법률 1호로 新聞紙法을 공포했다. 이 신문지법의 특색은 창간시에는 허가를 받아야하고 보증금을 받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시 되는 것은 벌칙에 있어서 발행 정지권을 비롯하여 벌금형과 동시에 체형을 규정한 것과 기계를 몰수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1908년 6월 15일 서울 영국 대사관에서 大韓每日新報의 발행인 베델(裵說 Bethell 영국인)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일본의 정책과 일경들의 난폭상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등을 트집잡은 것이었다. 그 결과 베델은 3주간의 감금형을 받아 上海로 압송되었다. 1908년 7월 12일에는 大韓每日新報 총무인 梁起鐸을 국채보상금 횡령이란 오명을 뒤집어 씌워 구속하였다.   통감부는 위와 같이 항일 선봉지인 大韓每日新報등에 탄압을 가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李完用내각으로 하여금 新聞紙法에 의한 민간 신문을 몇개 허가했다. 이것은 하나의 회유책으로서 극도로 긴장과 악화일로를 걷고있던 당시의 민심을 돌리고 우리 지도자들의 투쟁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때 창간된 것이 서울의 大韓民報(1909년 6월 2일), 大同日報(1909년 8월 28일), 時事新開(1910년 1월 상순), 大韓日 日(1910년 6월 4일)과 晋州의 慶南日報(1909년 10월 15일)등이었다.   慶南日報는 진주에서 영남 유림계 인사들인 金弘祚(1868-1922년), 鄭鴻錫, 曺敏煥, 李判洙 등이 金榮鎭등 수명의 실업인들과 함께 張志淵을 초빙하여 창간한 한국 최초의 지방지였다. 1909년 8월 19일자로 정부 내부의 인가를 받아 같은 해 10월 15일 창간 되었다. 한일합방이 되기전 10개월전의 일이었다.   당시 진주는 경상남도의 관찰부가 있던 곳으로 행정의 중심지였고 진주부는 1896년 현재 인구가 9만5천명으로 전통적인 농업에다 상공업이 싹트는 시기에 있었고 유림의 뿌리가 깊이 박혀있는 고장으로 민족지가 하나 쯤 있을 법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경남일보가 발행 허가를 신청중에 있을 때 1909년 6월 22일자 대한민보는 「慶南日報請認」이란 제하의 기사로 「경남 진주군 인사 제씨가 자금을 모집하여 신문을 창간코자 하여 목적은 실업이요 명칭은 慶南日報요, 편집겸 발행인은 울주군 金弘祚로 해 관찰부에 청원 하였는데 일간 內部를 轉報하여 승인한 후에 즉행 발행한다 하니 我國人 지방에서 신문업을 設함은 此報로서 효시가 되겠더라」 고 보도하고 있다.   진주군 城內1동에 주소를 둔 경남일보는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6단 36행 1행 13자로 국한문 혼용 체제였다.   편집 내용은 1면에 외보, 현행법령, 지방민권, 자치제, 三綱逸史, 詞藻, 2면에 사설, 잡보, 중앙정계, 수한초록(隨閒抄錄) 경성통신 등을 실었고, 3면에는 문명록, 관청휘보, 농공상업계, 여묵(餘墨), 촌적(寸適), 4면에는 관보 광고 등을 실어 다양성을 보였다.   창간 당시의 진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장겸 발행인 :   金弘祚 주 필 :   張志淵 대변사장 :   鄭鴻錫 부사장 :   姜渭秀 총 무 :   曺旼承 대변총무 :   徐珍旭, 鄭禧協 회계감사 :   金琪邰 회 계 :   姜周湜 이사장 :   崔寅薰   경남일보가 창간 당시 복잡한 적재로 구성된 것은 출자 인맥 등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창간 6개월만에 열린 제1회 정기 주주총회(1910. 4. 12)에서는 임원진이 대폭 바뀌어 사장에 姜渭秀 부사장에 金琪邰가 선임 되었다.   창간 당시 임원진 구성에서 張志淵이 주필에 추대 되었는데 그 동안 張志淵은 皇城新聞이 폐간되고 2개월여의 옥고를 치룬후 1908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海朝新聞주필을 지냈다. 이 신문 마저 경영난으로 폐간도자 上海등지로 전전하다 진주유지들의 초빙에 의해 이곳에 내려와 경남일보에 몸을 담게 된 것이었다.   경남일보는 일간을 계획했으나 재정사정등으로 제 20호 부터는 일요일에 관계없이 격일간으로 발행했다. 기계 고장으로 1주일이나 휴간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남일보의 발행부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창간 직후인 1909년 11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가 「경남일보 발행부수 8천여부, 자본금 3만원」 이라는 기사를 실었으나 1910년 4월 10일자 경남일보에는 「구독자 1천여명 未過」 라 했고 또 같은해 10월 15일자에는 「애독자가 이제 1천100명을 넘었다」 는 것으로 보아 창간 당시의 부수는 1천부 안팎인 것으로 추정된다.   경남일보의 자금 형편은 창간때 부터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신문의 11월 30일자 제 17호에 「지묵(紙墨) 우표등 제반 경비를 조달할 길이 막연하여 4주간 휴간한다」는 사고를 내고 12월 1일부터 휴간에 들어가 근 한달만인 12월 29일 제 18호를 속간했다.   초창기부터 운영난에 허덕인 경남일보는 일반국민에게 딱한 사정을 솔직히 밝히고 신문구독을 권유하는 사설을 자주 싣기도 했었다. 또 운영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반인의 신문 구독을 간절히 권고하는 실정이었기에 신문 구독을 거부하는데 대해서는 지상을 통해 신랄하게 매도하기도 하였다.   경남일보의 어려운 사정을 돕기 위한 각계의 기부도 없지 않았다. 1910년 2월 16일자에는 「謹謝錦陵尉 閣下 寄附金盛意」라는 사설을 싣고 있는데, 이는 錦陵尉 朴泳孝가 금화 50원을 기부한 데 대해 감사의 뜻을 표시한 것이었다.   경남일보는 어려운 재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발행을 계속하여 1910년 6월 21일에는 지령 제 100호를 내면서 기념식과 함께 신축 사옥 낙성식을 가졌고, 이어 11월 14일부터는 사내에 야학교를 개설하여 교육과 계몽에도 직접 나섰다. 야학의 교사진을 한문과 張志淵, 일어과 金明見, 법률과 崔東燮 등이었다.   경남일보는 같은해 12월 13일자에 소설 공모 사고를 내어 문예에 대해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합병 다음해인 1911년 1월에는 서울에 경성지사를 설치하는 등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경성지사 설치 이전에 이미 대구 마산에도 지사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12년 1월 27일자로 회사령에 의한 주식회사설립 허가를 받았다.   경남일보의 주필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張志淵이었으나 1913년 3월 權道溶(아호 秋帆 유학자)으로 바뀌었다. 2대 주필 권도용은 같은해 연말에 사퇴하고 서울의 姜筌(강전)이 3대 주필에 취임, 1914년 가을 폐간 될때까지 재임했다.   경남일보는 창간 초에는 지방기사나 지방문제에 관한 기사를 주로 많이 실었으나 1910년에 들어와서부터 중앙 정계의 동향등에 대한 반일적 기사나 논설등도 자주 게재하였다.   예를 들면 1910년 5월 20일자부터 2회로 나누어 실은 「李在明公의 변론, 安변호사의 변론」과, 같은 해 9월 7일자에 실은 당시 내각의 모든 대신들을 공격한 사설과 같은 것이었다.   경남일보는 창간 당시에는 국내 정세로 인해 강경한 항일 논조를 지켜 나갈수는 없었으나 합방 때까지는 항일 언론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1910년 3월께부터는 기사를 자주 삭제당하거나 신문을 압수당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1910년 10월 11일자(제184호)는 한일합방에 분개하여 1910년 9월 10일 음독 자살한 梅泉黃炫의 「絶筆四章」을 실은 것이 禍가 되어 신문이 압수당하고 10월 14일자로 발행정지 처분을 당했다가 10월 25일 해제 되었다. 경남일보는 경영의 어려움과 일제의 탄압등 많은 수난을 겪다가 1914년 가을에 폐간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폐간일자 및 폐간에 이르게 된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경남일보는 한일합방 바로 직전인 1909년 10월에 창간, 5년 뒤인 1914년 가을에 폐간되었으나 대한제국 말기의 유일한 지방지로서 한때 나마 항일의 소리를 높였다는데서 우리 나라 신문사상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경남일보의 제1호는 보관되어 있지 않으나 제2호부터 폐간 무렵까지의 신문은 현재 嶺南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