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실

> 상동소식 > 역사자료실
상동 관련 인물 - 백범 김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419
1.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출전 - 신용하 / 서울대 사회학)    백범 김구선생은 참으로 큰사람이다. 그 크신 특징은 무엇일까?    인물로서의 백범의 가장 큰 특징을 들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것은 그의 지고지순한 애국성과 애국심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청년으로 민족 의식이 정립된 이후 모든 것을 다 희생해 가면서 전 생애를 일제의 침략 하에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 나라와 겨레의 크기만큼 영구히 그를 역사에 기릴 큰사람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백범의 나라 사랑과 겨레 사랑은 일제의 고문으로 의식이 거의 희미해진 죽음 한 걸음 앞에서도 강철같은 힘으로 솟아오르고 있다.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으로 일제에게 모두 17년형의 언도를 받을 무렵,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야밤에도 몇 차례 죽었다 깨어나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 철장 안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그는 쓰러져 육신이 아파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다음과 같이 반성하고 있다. "저놈(왜경찰-인용자)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인 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백범일지』 이러한 지극하고 지순한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이 어찌 그를 '큰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인물로서의 백범은 또한 매우 '정의감' 이 높은, 참으로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비단 일제 침략에 반대하는 정의로운 독립 투쟁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주변 사회 생활 문제에까지 '정의' 로운 일이 아니면 결코 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백범이 일찍이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선생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고 평생 이를 지켰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한 백범의 성품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은 그의 '담대성'과 '용감성' 이다. 그의 담대한 성품은 어릴 때부터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백범일지]의 소년기 회상록 속에 보인다. 백범은 나라를 위하는 일이고 정의로운 일이라면 남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들을 담대하게 용감히 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케 하였다. 백범이 19세의 어린 나이로 동학의 팔봉 접주가 되고 선봉장이 된 일, 김이언 의병 부대에의 투신, 일본군 특무장교 쓰치다(土田)의 처단,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조직과 이봉창(李奉昌)의사, 윤봉길(尹奉吉)의사의 의거, 어려운 조건에서의 광복군 창군 등은 그의 이러한 담대한 성품과 관련된 일들의 임무였다고 할 수 있다. 인물로서의 백범의 큰 특징은 또한 '성실성' 과 '열성'이 매우 강한 것이었다. 백범은 어떤 일을 맡거나 하고자하면, 그것이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매우 성실하게 열성껏 하는 품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범이 실제로 맡아서 한일은 무엇이든지 잘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맡은 일을 열성껏 성실하게 집중해서 해내기 때문이었다. 백범의 품성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실질'을 매우 좋아하는 것이었다. 백범은 공리 공론을 가장 싫어했으며, '실질'적 논의 와 '실천'을 중시하고 좋아하였다. 백범이 동학, 유학, 불교, 기독교의 여러 가지 종교를 모두 섭렵했을 때에도, 그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주고 독립을 지원해주는 종교 내용의 '실제'를 취하였지만 그 종교의 이론에도 집착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백범은 종교적 배타성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백범의 인물의 또하나의 큰 특징은 '포용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백범은 공동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이 달라도 협상과 연합을 통하여 서로 포용하고 협동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였다. 백범이 임시 정부의 국무령(1927년)이 되었을 때에 민주적인 국무 위원제를 추진한 것이라든지, 임시 정부 말기에 좌파 독립 운동 단체들과 인물들을 포용하여, 일제 패망후의 좌우 분열 을 사전 방지한 통일 정부의 수립을 준비한 것은 그의 인품의 포용성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백범은 임시 정부 말기에 '대한 민국 건국 강령'을 공포한 후 좌파 민족 혁명당의 조선의용대를 포용하여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해서 광복군을 통일군대로 만들었으며, 의정원에도 좌파 사회주의 정당과 단체 대표들을 야당 의원으로 영입하여 의정원을 통일 의회로 개편하였고, 임시 정부에 부주석제를 신설하여 주석에는 민족주의 독립 운동의 대표로서 백범이 취임했지만 부주석에는 좌파 단체들을 대표하여 민족 혁명당 위윈장 김규식을 선임하였다. 백범이 광복 후에 남북 협상을 추진하여 처음부터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한 것도 이러한 백범의 포용성과도 관련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적 성품을 가진 백범이 실현하려고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그의 사상과 이념의 특징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백범의 사상의 몇 가지 특징을 들라고 요구한다면, 다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완전 독립 사상'이다. 이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하여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 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윈이 무엇이냐고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 라고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나의 소원」 둘째는 '자유 민주 사상'이다. 백범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여야 한다. (...) 나는 어떠한 의미든지 독재 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해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 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와,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 나라를 건설하자고." 「나의 소원」 셋째는 '아름다운 문화 국가 건설' 사상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오직 한없이 싸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자연 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나의 소원」 물론 백범도 우리 나라의 부강을 경시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나라가 가난하고 약한 상태에서는 반드시 부강을 실현해야 하지만 그것은 최선진 부강국과 같은 수준에 도달하면 족하고, 그보다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아름다운 문화 국가를 건설해야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백범이 가리킨 문화는 남을 모방하는 문화가 아니라, 자주성을 가진 창조적 문화였다. 백범은 우리 나라가 아름다운 높은 수준의 창조적 문화 국가가 되어 세계 평화가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 실현될 것을 소원한 것이었다. 넷째는 '통일 조국 건설' 의 사상이다. 백범은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목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 백범은 처음부터 통일 조국을 건설하지 않고 38선의 남북에 각각 두개의 정부를 수립하면, 남북 분단이 고착되고 동족상잔의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까를 매우 염려하였다. 백범은 이렇게 크고 큰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희생당하더라도 동포들의 비극을 사전에 막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유 민주의 통일 조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한국 민족의 영원한 큰 스승이었다. 2. 백범의 사상형성과 구국운동     (출전  이만렬 / 숙명여대 한국사)    백범 김구(1876-1949)는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 온 민족 독립운동가요, 해방된 조국을 민족, 통일 민주 문화의 바탕 위에서 굳건히 세우려고 애쓰다가 비명에 가신 근대 한민족의 큰 스승이시다, 백범의 가계는 안동 김씨로서 신라 경순왕과 고려 김방경 의 후예이며, 파(派)의 시조 익원공 김사형의 21세손에 해당된다. 그의 전대는 조선조에도 계속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방조(傍祖) 김자점의 역모 사건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되자 그의 선조가 경기도 고양을 거쳐 해주 서쪽 80리 지점의 백운방이란 곳에 자리잡았다. 백범의 선조들은 낙향 후에 양반의 문화생활은 멀리하고 짐짓 상놈의 행세를 하려고 역둔토와 군역전까지 경작하였다. 이같은 형편에서 이웃 마을의 진주 강씨와 덕수 이씨로부터 멸시를 받아도 제대로 항변조차 하지 못했다. 초기 백범의 사상 가운데에 양반에 대한 분노와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집념이 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가문의 형편이 이랬던 만큼 선대에는 불평객이 많았다. 백범의 아버지 순영(淳永)은 4형제중 둘째로 의협심과 정의감이 넘치고 양반에 대한 저항심이 강한 분이었다. 그는 약한 자를 돕고 자주 대변하였으나 그런 일로 양반들의 미움을 샀다. 그가 도존위(면에서 세금을 거두는 자리)의 직책을 수행할 때에는 양반들에게는 가혹하게 공전(公錢)을 거두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자기가 대신 물어낼지언정 더 거두지는 않았다. 그 결과 3년이 못되어 공금에 축을 내고 사임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풍 곽씨(이름, 낙원)로 l4의 나이에 열살 위인 신랑을 맞아. 17세 때 난산 끝에 백범을 낳았다. 부모는 백범의 교육을 위해 자기 집에다 서당 선생을 모시기도 하고, 부친의 병환으로 학자금이 부족할 때에는 이웃마을의 서당 훈장에게 간청. 무료로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모친은 백범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다. 백범이 옥에 갇혔을 때 옥바라지를 맡아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뿐아니라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에는 "경기감사를 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말함으로써 백범에게 큰 격려를 주었다. 일찍 죽은 며느리를 대신하여 손자 인(仁)과 신(信)을 양육한 자정이며, 백범이 독립운동을 하는 데에 지장되지 않도록 두 손자를 이끌고 귀국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는 인내며, 왜경을 따돌려버린 여성답지 않은 특유의 대담성과 지모(智謀)며, 백범이 일지(逸志)를 쓸 때 그 자세한 연월과 일시를 일일이 자문할 정도로 만년에까지 간직한 총기 등은 임정 주석 백범의 품격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백범은 1892년 과거에 낙방하는 것을 계기로 인생의 활로를 새롭게 모색한다. 그는 한때 풍수지리와 관상을 공부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19세기말의 민족적 수난을 감지하면서 동학에 입문한 백범은 최시형으로부터 황해도 팔봉접주로 임명받아 해주성 공격에 앞장섰으나 청군의 철수로 실패하였고, 황해도 동학군의 자중지란으로 세력을 잃게 되자 안중근의 부친 태훈의 호의를 받아들여 부모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들어가 잠시 우거하였다. 그는 거기서 일생동안 자신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 척사위정(斥邪衛正)계의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그의 섬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백범은 청계동을 찾아온 김형진을 만나 의기투합, 조국 순례에 나선다. 그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을 돌아서 간도땅에 이르러 국경지역 주변에 거주하는 동족들의 어려움을 목도한다. 강계 부근에서는 김이언 부대를 따라 '국모' 의 원수를 갚는 의병운동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였다. 청계동으로 돌아온 백범은 그가 없는 동안에 고능선의 요청으로 그의 손녀와 약혼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기뻐하였으나 김치경의 방해로 성혼되지 못했다. 백범은 다시 '방랑의 길'에 올랐다. 이때 국내에서는 명성황후가 '왜놈' 들에게 시해당한 데다가 단발령 시행으로 백성들의 분기가 탱천하여 이곳 저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방랑길'에 오른 백범은 대동강 하류인 치하포 주막에서 만난 일본인을. 그가 명성황후를 죽인 미우라(三浦梧樓) 공사이거나 그 일당의 하나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살해하였다. 그 일본인은 '육군중위' 쓰치다(土田)였다. 이 일로 그는 해주 감영을 거쳐 인천 감옥에 수감되었다. 백범은 재판을 받으면서 그의 거사가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여 관리들과 수감자들은 물론 인천 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백범은 일본의 압력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국왕의 재가로 사형집행은 면했다. 감옥 밖의 구출운동이 한계에 이른 것을 안 백범은 탈옥의 비상수단을 감 행하였다.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삼남 지방을 주유하다가 공주 마곡사에 이르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탈옥에 따른 위험을 감추기 위해서는 승려로 신분을 위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범은 평안도의 영천사 방주(房主)를 끝으로 일년여 동안의 승려 생활을 청산하고 환속, 귀가하였다.   그에게는 민족을 위한 새로운 구상이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즉 그가 감옥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와 [세계지지 (世界地誌)] 등을 통해 깨달은 신지식에 의하면,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취했던 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민지(民智)를 깨우쳐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를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하였다. 1902년 부친상을 당한 백범은 그 이듬해 해상(解喪)과 함께 예수교에 입교함과 동시에 구국교육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예수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예수교가 애국계몽운동에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과거 시험을 위한 공부와 잡학(雜學)에서 시작, 동학·유학·불교를 거쳐 예수교에 정착하는 사상적인 방랑을 경험하였다. 백범은 장연의 광진학교와 봉양학교. 문화의 서명의숙, 안악의 양산학교와 안신학교, 재령의 보강학교 등에서 가르치는 한편 사범 강습회를 열어 교사를 양성, 훈련하였고 '해서교육총회' 를 조직, 학무총감으로 활동하였으며, 환등기를 가지고 황해도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왜놈' 원수들을 갚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잠시 진남포 감리교회의 의법 청년회 총무의 일을 맡아 서울에 올라와 상동교회파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을사조약반대 상소운동에 앞장섰고 1907년에는 안창호·전덕기·이승훈 등과 함께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였다. 백범은 고능선의 손녀와 혼약이 깨어진 후에 결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부친의 거상 중에 여옥을 만나 해상 후에 결혼하기로 했으나 여옥의 죽음으로 불가하였고, 평양 사범강습 중(1904)에 최광옥의 소개로 안창호의 동생 신호를 만나 약혼 단계에 이르렀으나 신호 측의 사정으로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해 말에 최준례를 만나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혼하고 최준례를 서울의 정신학교에 유학시킨 후 곧 결혼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한국강점을 서둘렀다. 한국인의 저항은 여러 형태로 일어났다. 1909년 10월에는 안중근의 의거가, 12월에는 이재명의 의거가 있었다. 백범은 안중근의 의거로 잠시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무혐의로 곧 출감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연말 '안악사건(일명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징역을 언도받았고 수감 중에 터진 '105인사건' 에 걸려 또 2년을 추가받아 17년의 징역에 처하게 되었다. 처음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1914년에는 17년전 치하포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어 항만 축조공사 등에 강제 노역당했다. 그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이름 김구(金龜)를 김구(金九)로 바꾸고, 호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고, 호를 바꾼 것은 "우리 나라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의 정도는 되고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소원을 가지자"는 뜻에서였다. 1914년 인천감옥에서 가석방된 백범은 안악으로 돌아왔다. 출옥은 하였지만 아직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부인이 교원으로 있던 안신학교의 일을 돕다가 신천 동산평의 농감이 되어 농장 내의 소작인들에게 근검절약, 상부상조의 질서를 가르치는 한편, 학교를 세워 자녀교육에 힘쓰도록 하였다. 술과 노름으로 일삼던 그 농장은 백범의 노력으로 희망의 새 동산으로 변화되어 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백범은 자유롭게 뛰어들지 못하는 자신의 가석방 신세를 생각하면서 민족독립을 위한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망명이었다. 3월 3일 사리원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넌 백범은, 1945년 11월 23일 그의 나이 70세에 환국하기까지, 27년간 근대사에서 가장 긴 시간을 버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붙들게 되었다. 3. 임시정부와 백범의 독립운동    (출전  윤병석 / 인하대 한국사)    대한제국 시기에 정열적으로 구국계몽활동을 벌이다가 세 차례나 투옥되어 10년 동안이나 잔인한 고문과 인천 부두 축조공사 등의 고된 노역에 시달렸던 백범김구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서둘러 망명 길에 올랐다. 백범은 안동(安東)을 거쳐 독립운동을 돕던 이륭양행(怡隆洋行)의 선박 편으로 그 해 4월 13일 상해에 당도하였다. 그 날이 마침 3.1운동의 결정(結晶)으로 성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포 일이었다. 백범은 바로 애국계몽운동 시절의 선배이며 임시 의정원 의장인 이동녕(李東寧)을 찾아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1945년 11월 임정 정부의 주석으로 임정 요인을 이끌고 환국할 때까지 전후 27년 동안 임시정부의 보위, 발전(保衛 發展)과 국내 ·외 독립운동을 영도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름 구(龜)를 구(九)로 고치고 백범이라 자호(自號)하였던 김구는 안창호(安昌浩)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원하였다. 초창기 임시정부를 주도하던 안창호는 국무회의 결의를 거쳐 백범을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5년 남짓 그 자리에 재임한 백범은 당시 다망다난(多忙多難)하던 임시정부 요인의 안녕과 임시정부 수호의 중임(重任)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백범에게 주어진 임무는 다양하였다. 이동녕과 안창호는 물론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그를 이은 제 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 연해주에서 부임한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국치이래 상해에서 독립운동 기반을 닦은 신규식(申圭植) 등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을 모시고 임시정부의 보위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20여명의 정복 또는 변복(變服)의 경호원을 거느리기는 했지만, 일제측의 파괴공작과 임정요인 위해 공작으로 백범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임정요인의 변절이탈과 친일파의 암중 활동까지 경계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경무국장이 심문관, 검사, 판사로 (죄인의 사형 등) 집행(執行)까지 하게 된다"는 백범 자신의 술회와 같이 임시정부의 경찰 사법권을 전담하다시피 해야만 하였다. 백범은 임시정부가 그래도 활기찼던 초창기를 지나 안팎으로 존립의 위험이 닥칠 무렵 내무총장에 선임되었다. 침체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된 것이 이 무렵이었다.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코자, 독립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국내외 대표가, 그것도 제제창명한 인사들이 모두 상해에 모여, 신망있던 안창호와 김동삼(金東三) 등이 차례로 의장이 되어 개최하였던 국민대표회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놓고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로 분열하여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범은 여기서 중대결정을 내렸다. 내무총장의 직권으로 그 회의를 해산시켜 비등하던 정국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국민대표회의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끊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국내외 독립운동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으로 판단하였던 까닭이다. 창조파들만이 모여 만들었던 김규식을 주석으로 한 조선공화국정부도 자괴하고, 결국 임시정부는 그 법통을 지킬 수 있었다. 또한 백범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면직과 2대 대통령 박은식의 사임 등 정국 변동으로 만주에서 온 이상룡(李相龍)과 진강(鎭江)에서 온 홍진(洪震) 등이 개정된 헌법에 의하여 국무령(國務領)으로 선임되었지만 조각(組閣)도 못 한 채 무정부 상태에 빠졌을 때, 이동녕의 천거로 국무령에 선임되어 윤기섭, 오영선, 김철. 이츄홍 등을 규합하여 조각에 성공함으로써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으면서 국무령제로 고치고 윤번 주석제를 채택, 임시정부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어 보다 시련이 가중되면서, 임시정부는 단돈 30원에 불과한 임시정부의 청사 조금(租金)이나 20원 미만이던 불가결 용인(庸人)의 월급도 지불하기 어려운 곤경에 빠져 그 활동이 극히 위축되었다. 겉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던 일제가 속으로는 혹독한 파괴공작을 펴게 됨으로써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던 연통제(聯通制)가 거의 발각, 와해되었고, 아울러 국내외를 연결하던 교통국 역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일제의 마수에 걸려드는 독립운동의 동지들이 점차 증가하여 그들에게 투항하거나 혹은 피체되어 본국으로 압송 송환되는 사례가 늘어갔다. 예컨대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鄭仁果), 독립신문사 사장 이광수(李光洙), 군무부 차장 김의선(金義善) 등이 연이어 일제에 투항 변절하는 판이었다. 더욱이 1930년을 전후해서는 일제는 대륙침략을 가속화시켜 만보산 사건(萬寶山 事件) 등 한·중간에 이간책을 쓰면서 관동군(關東軍)을 동원, 9·28만주사변을 일으켜 남·북 만주를 강점하고 1932년에는 만주국(滿洲國)을 세워 그들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독립운동의 중요 해외기지가 무너져 적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이와 같은 난국에 직면하자, 백범은 다음과 같은 활동을 통하여 난국에 대처하고 임시정부의 새 활로를 찾았다. 첫째는 '편지정책'을 통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고 활동자금을 지원받았다. 뿐만 아니라, 미중 한인사회가 연대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게 한 것이다. 백범은 이를 위하여 이미 임시정부에서 퇴임당한 이승만에게 '호형(呼兄)'하면서 그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재임명하여 구미외교를 강화시켜 갔다. 또한 미주와 하와이 한인 사회의 유지들인 김경(金慶), 안창호, 현순(玄楯), 김상호(金商浩) 이홍기(李鴻基), 임성우(林成雨), 김평(金平), 홍언(洪焉), 송종익(宋鐘溺) 등은 물론 멕시코, 쿠바의 김기창, 이종오, 인천택, 박창운 등에게도 임시정부의 어려운 형편과 조국 광복의 경륜을 홍보하여 그들에게 임시정부 지지와 독립운동 자금의 출연(出捐)을 유도함으로써 적지않은 송금이 정기, 혹은 부정기적으로 답지하게 되었다. 둘째는 백범이 임시정부 재무장(財務長)의 자격으로 임시정부의 예산의 절반가량을 투자한, 과감한 특무공작을 펴 세기적인 거사인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결행하게 하였다. 백범은 1931년초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임시정부의 운명을 가늠하는 특수공작의 전권을 위임받고 극비로 열혈 구국청년을 모아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치밀한 준비를 갖추어 1931년 1월에 일왕 폭사 응징을 위한 이봉창의 동경의거(東京義擧)와 그해 4월에 윤봉길의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義擧)를 차례로 거사함으로써 한중 양국 인민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후 이 거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독립운동의 새 국면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백범은 홍구공원 의거와 관련하여 1933년 5월 남경(南京)에서 장개석(莊介石)을 만나 한·중 항일의 유대를 강화하고 낙양중앙군관학교(洛陽中央軍官學校)에 한인군관반(韓人軍官班)을 두어 장래(將來) 독립운동을 지휘할 한인 청년 군관 양성을 시작하였다. 만주 독립군의 영장들인 지청천(池靑天), 이범석(李範奭), 오광선(吳光鮮), 김창환(金昌煥) 등을 교관으로 보내어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온 독립군 전사와 관내 북경(北京), 천진(天津), 상해(上海), 남경(南京) 등지에서 증모한 청년 100여명이 제1차로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일제는 홍구공원 의거 직후 백범의 몸값을 30만원에서 60만원으로 올리는 등 백범 체포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일시 비취 목사 댁에 몸을 숨겨 있던 백범은 가흥(嘉興) 피신을 시작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도 상해를 떠나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진강, 장사(長沙), 광주(廣州), 유주(柳州) 기강을 거쳐 1940년에 중국 국민당 정부와 같이 중경에 도착, 전시체제로 재정비되었다. 임시정부가 이와 같은 전시 중 장정(長征)하던 동안에 백범이 벌인 여러 활동 중에서도 감격적인 일은 스스로 '대가족' 이라 칭하던 100여명이 넘는,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의 안전 수송과 생계대책에 대한 헌신이었다. 온갖 방책을 다 동원하여 중국 정부의 후원을 얻어내는 한편. 가족들의 상호 협조와 자활을 유도하여 마침내 중경에까지 무사히 옮겨놓고, 토교(土橋) 봉취지역에 한 지단까지 마련하여 집을 짓고 그들을 안주케 한 일이다. '대가족'에 대한 정성은, 상해 탈출시 미처 연락이 되지 못해 낙오되었던 안중근 의사의 부인 김아려(金亞麗) 여사를 모셔오고자 두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그때 거금을 들여 파견하였던 안공근에게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유기(遺棄)함은 군(君)의 가도(家道)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불인한 사(事)"라고 크게 질책한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또한 백범은 이 파천 중 많은 '가족'을 잃었다. 독립운동의 원훈(元勳)이며 그가 가장 경모하던 이동녕이 71세로 진강(鎭江)에서 작고, 그곳에 안장하였고, 중경 당도 직후에는 그의 모친 곽대부인(郭大夫人)이 하세하였다. 백범은 망명초 국무총리 이동휘를 만나 공산주의 이념과 노선의 수용을 권유받았으나 그를 거절하였다. 그후 세차게 밀어닥친, 새로 풍미하던 여러 이념과 사상의 갈등 속에서도 끝내 그는 지론인 민족주의 이념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활동은 민족주의 구현의 테두리 속에서 공산, 사회주의 및 그밖의 무정부주의자들과 합작과 협동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를 위하여 상해 시절에는 이동녕,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차이석(車利錫), 송병조(宋秉祚), 김봉준 등과 한국 국민당을 창당하여 조선혁명당 및 한국독립당과의 3당 통합논의를 벌였고, 1920연대 후반기에는 다시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에도 그는 한국독립당을 이끌고 의열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미주독립당 등과 5당의 통합운동에 가담하였다. 1940년대 중경 시절에는 다시 좌우 합작운동이 전개되어 5당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국무위원과 윤회 주석제를 폐지하고 임시정부를 내외에 대표하는 주석과 그를 보좌하는 부주석제를 채택하여 백범이 주석에, 그리고 김규식이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나아가 이시영, 조성환, 황학수, 조완구, 차이석, 장건상, 박찬익, 조소앙, 함주식, 김붕준, 유림, 김원봉, 김성숙, 조경한 등 좌우를 망라한 14인으로 강력한 국무 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백범은 이와 같이 임시정부를 강화하면서 연래의 숙원인 한국광복군을 창설, 지청천을 총사령관, 이범석을 참모장, 그리고 황학수를 서안(西安)의 전방사령관에 선임, 항전을 시작하였다. 처음 30여명의 인원으로 미주 교포의 성금을 바탕으로 발족한 한국광복군은 김원봉(金元鳳)이 지휘하던 조선 의용대까지 통합하면서 병력을 증강, 1945년 8월 해방전후에는 700여명 내외의 임시정부 국군으로 성장하였다. 그동안 광복군은 OSS훈련이라 칭하는 미군과의 합작 특수공작 훈련도 받았고, 대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 2차대전에 참전, 본토 수복을 위한 국내 정진작전(挺進作戰)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패망과 조국 해방의 소식을 들었다. 한편, 백범 주도하의 임시정부는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마련, 임시의정원의 심의를 거쳐 확정 공포하였다. 이 건국강령은 임시정부의 정치 이념과 건국방략을 결집한 것으로, 임시정부는 이 강령에 따라 전시체제를 확립하면서 광복군을 통한 대일 항전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임시정부는 조국해방을 목전에 두고서 광복방략과 경륜을 보다 체계화하면서 복국(復國)과 광복에 대한 비전과 규범을 제시하려 하였다. 백범이하 임시정부 요인은 그 해 11월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중국 군용기 편으로 꿈에도 그리던 조국을 향하여 중경을 이륙하였다. 이 환국의 비햄은 바로 임시정부의 금의환국(錦衣還國)이었으나 상해에서 미국기로 옮겨 타면서 임시정부의 법통은 무시되고, 임정 요인들은 조국을 잃었던 망명객의 개인 자격 환국이라 지칭되었다. 4. 민족 통일의 화신 백범    (출전 조동걸 / 국민대 한국사)    백범 김구는 1945년 11월 23일 임시 정부의 제 1진으로 환국하였다. 백범과 함께 환국한 이는 모두 15인이었다. 제2진 19인 12월2일에 환국하였다. 백범은 도착 이튿날 방송에서 미군정 측의 요구로 "나와 나의 각원 일동은 한갖 평민의 자격을 갖고 들어왔습시다" 라고 말한 것처럼, 대외적으로는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27년간의 독립운동자로서, 임시정부 주석으로 귀국하였다. 그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고 부인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김구 주석이 자리잡은 경교장(京橋莊)에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인사 행렬이 줄을 이었고 12월1일에는 오세창, 권동진, 이인 등이 주선한 임시 정부 환국 봉영회가 서울 운동장에서 열렸고, 제 2진이 돌아온 뒤인 12월 13일에는 김석황, 안재홍, 홍명희 등이 앞장선 임시 정부 귀국 환영 국민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김구 주석이 귀국할 당시의 정국은 대단히 착잡하였다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출범한 여운형,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는 안재홍이 탈퇴한 후 인민 공화국을 설립했는데, 그것은 좌파의 연합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 외에도 미군정청에 등록한 정당이 205개나 되어 10월 5일부터는 주요 정당대표들이 정당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때에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하자 좌우 정당의 연합체로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獨立促成中央協議會)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친일파까지 포함한 단합 방침으로 독립 운동자를 실망시켜 그의 정당 통합의 초당적 위치는 흔들리고 말았다. 11월 16일에 조선 공산당이 탈퇴하면서 20일 인민 공화국 산하에 전국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대립했던 것이 그것을 말한다. 그때에 임시 정부 주석 김구가 환국한 것이다. 수백 개로 난립한 정당, 좌우와 중립으로 노선이 분화된 정국의 수습은 이제 임시 정부가 떠맡게 되었다. 임시 정부는 중경(중경)에서 통일 전선 형성에 성공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해방후 9월 3일에는 1940년에 공표한 건국강령(建國綱領)에 입각하여 당면 과제를 발표하였다. 그에 의하면 임시 정부는 귀국하여 과도 정부를 세우고 해체한 후 과도 정부가 정식 정부를 건립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12월 19일 임시 정부 환영대회가 열렸을 때, 백범은 답사에서 "임시 정부는 결코 어떤 일계급. 어떤 일파의 정부가 아니라 전민족 각계급 각당파의 공동한 이해에 입각한 민족 단결의 정부였습니다. 친일파 민족반도를 제외한 우리 동포는 단결해야 합니다. 오직 단결시 있은 후에야 우리 독립 주권을 창조할 수 있고, 소위 38도선을 물리쳐 없앨 수 있고 친일파 민족 반도를 숙청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좌파가 계급 국가를 지향했다면 백범은 모든 계급의 공동 이해에 입각한 국가를, 이승만이 친일파까지 단결을 지향했다면 백범은 친일파를 숙청한 단결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환영대회가 끝나고 백범이 민족 세력의 총집결체로서 특별정치위원회(特別政治委員會)의 구성을 준비하자 정가의 주목을 한 몸에 모았던 것이다. 그런데 뜻과는 달랐다. 좌파의 인민 공화국은 임시 정부와 대등한 정부적 존재로 자처하였고,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임시 정부 이상의 권위를 행사하려고 했다. 그런 가운데 한민당이 친일파 숙청을 주장하고 있던 임시 정부와 대립이 심화되어 자연 이승만과 한민당의 결속이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백범이 중경에서 계획한 과도 정부 수립을 위한 특별정치위원회의 구성도 쉬울 수 없었다. 그럴 때 1943년부터 걱정되던 신탁 통치안을 노골화한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의 결정 소식이 전해왔다. 그것은 12월 28일의 일이었다. 5년간의 신탁 통치와 그 기간에 필요한 임시 정부를 미소 주둔군사령관으로 구성된 공동위원회(共同委員會)가 한국의 정당과 협의하여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오자 백범은 곧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반대 결의를 하고 각정당 대표와 종교 언론 관계자를 모아 반탁 운동을 새로운 독립 운동으로 선포하면서 30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를 결성했는데 이것은 이미 추진하던 특별정치위원회의 대안이기도 했다. 반탁 위원회는 권동진, 안재홍의 이름으로 조직하여 31일에는 백범이 선두에 선 시민 대회를 서울 운동장에서 개최하는 한편, 임시 정부에서는 같은 날 국자(국자) 제1호를 선포하여 전국의 행정과 경찰 기구를 접수한다는 것과 국자 제2호로써 "국민은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 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고 주권행사를 선언함으로써 미군정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것은 분명히 자주 독립의 적극적인 표현이었으나 미군정으로 보면 반탁 정변이었다. 혹은 반쿠테타라고도 한다. 미군 점령하니까 반탁 쿠테타이기는 해도 외세를 배격하는 백범의 투철한 의지가 극명하게 드러난 역사적사건이었다. 백범이 선봉에 선 전국적인 반탁 열기와 반탁 정변에 놀란 것은 미군정 당국과 인민 공화국을 이끌던 좌파였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장군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전부터 신탁 통치가 알려지면서 한국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한 바 있었지만 백범의 임시 정부가 주권 행사를 선언하고 나설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하지는 임정 요인을 감금 추방할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긴장이 극도에 오른 새해 1월 1일 반도호텔에서 김구, 하지회담이 열려 가까스로 사태는 수습되었다. 평화적 반탁 운동의 전개로 합의한 것이다. 반탁 운동에 동참하고 있던 좌파가 놀란 것은 임시 정부가 주권 행사를 선언하고 나서면 그들의 인민 공화국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아니더라도 반탁 운동을 통해 백범과 그의 임시 정부가 전국민적으로 부상하여 인민 공화국이 무척 격하되고 있었다. 그래서 인민 공화국 중앙위원회는 1월 1일 임시 정부에 대해 두 정부를 해체하고 통합할 것을 제의하고 이튿날 10시까지 회담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거절당하자 좌파는 북한의 찬탁 정국에 맞추어 2일 신탁 통치 찬성으로 돌변하고 3일 찬탁 대회를 열었으며 백범을 공격하고 나섰다. 이에 찬탁 반탁정국은 좌우익의 대립구도로 대치되어갔고 그 가운데 백범은 반탁과 우익의 영수로 자리 잡혀져 갔다. 백범은 1월 4일 좌파를 향해 비상정치회의(非常政治會議)를 소집하여 임시 정부를 좌파가 참여한 정부로 확대 개편하고 이어 임시 정부를 대신하고 정식 정부를 수립할 과도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의했다. 그를 위하여 김원봉, 김성숙, 조소앙, 조완구, 장건상을 대외 교섭위원으로 파견하였다. 여기에서 통일 전선을 추구하면서도 당시 정부의 정통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던 백범 노선을 살필 수 있다. 임시 정부의 법통을 전제한 모임에 좌파가 호응할 것으로 기대하기란 힘들었으나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둔 마당이어서 1월 7일 한민당·국민당·인민당·공산당의 4당회의가, 8일에는 신한민족당이 참가한 5당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것이 무산되자 백범은 20일부터 5일간 비상정치회의 준비회의를 개최하여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합류할 것을 합의하고 이승만·김구·김규식을 중심한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를 개최키로 결의하였다. 이승만 합류에 임시 정부의 혁신계 인물인 김원봉, 성주식, 김성숙, 장건상이 탈퇴하여 국민회의는 우파의 집멸체가 되었다. 2월 1일과 2일에 그러한 비상국민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군정청에서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위원으로 그들의 자문기구인 민주의원(民主議院)을 구성하여 비상국민회의는 사실상 민주의원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때 좌파에서도 15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하니 좌우익 조직이 구조적으로 정착해 갔다. 백범 김구의 인품은 소박하면서도 다양성을 포용할 아량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고, 사상은 다원주의에 근거하면서도 자주적 민족주의를 추구했고, 독립 운동의 경력으로 보면 시종 임시 정부를 지킨 유일한 지도자라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대표적 독립 운동자로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인격과 사상과 경륜이 뛰어난 백범이지만, 미소의 대립이 냉전 체제로 치달아 남북의 국토 분단으로 전이됨에 따라 정국도 좌우 구도로 고착되어 가는 것을 약소 민족의 지도자로서 극복하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소 공동위원회 제 1차 회의가 열리던 3월 20일부터 5월 25일까지, 또 미군정의 알선으로 5월 25일부터 김규식,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백범은 그것을 관망이라도 하듯 자체 정비에 나섰다. 4월 18일에 국민당(안재홍)과 신한민족당(권동진)을 흡수하여 한국독립당을 확대 개편하고 [백범일지]도 손질하기 시작하였다. 5월 18일부터 반탁 운동의 맹장 조소앙, 신익희를 앞세워 민립대학 설립을 돕는 한편, 독립 운동에서 신세진 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에 투신한 이래 연고지를 찾아 은혜를 보답하는 여정을 갖기도 했다. 그것은 신의를 소중히 여기는 백범다운 행각이기도 했지만 70을 넘은 노경이기도 했다. 그러던 6월 3일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정읍(井邑) 발언이 들려와 그후부터 이승만과 반탁 운동을 함께 전개하면서도 노선을 달리했다. 즉 백범의 반탁은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난 2월 8일에 반탁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를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 협의회와 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를 결성했지만 6월 29일에는 이승만이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를 결성하며 독주하는 등 이승만과의 노선 차이가 노골화되자 어떤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6월 30일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골을 봉환하는 일이 백범으로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특히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백범이 1931년에 만든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작전을 완수하고 순국한 의열 동지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의 활로를 개척한 은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유해를 봉환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일을 끝마친 9월부터 조선 공산당이 지하 투쟁으로 전환하여 정국은 더욱 긴장된 가운데 대구 10.1사건이 터졌다. 한편 국대안(國大案) 반대문제로 학원조차 시끄러웠고 11월 23일에는 좌파 3당이 통합하여 남로당(南勞黨)이 결성된 숨가쁜 일이 연이어 일어나 백범으로서 이승만이 남한 단정을 발설하고 김규식이 좌우 합작 운동에 나서 3인 3색처럼 나타난 것을 우파의 분열로 보일까봐 어떤 조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새해 들어서면서 더 참을 수 없어 1947년 1월 24일에는 백범을 중심으로 한 반탁투쟁위원회(反託鬪爭委員會)를 결성했다. 백범이 새삼스럽게 반탁투쟁위원회를 가결성한 것은 그에 앞서 1월 11일 하지 군정사령관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추진하고 있는 소련과의 왕복 문서를 공개한데 대한 조직적인 응수였다. 더구나 지난 연말에는 이승만이 미국을 방문하러 떠나, 무슨 정략이 있을 수도 있는데 대한 강력 대응이었던 것이다. 또 미군정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빙자하여 임시 정부의 비상국민회의와 이신동체격인 민주 의원을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 의장 김규식 부의장 최동오, 윤기섭)으로 대체한 마당에 그에 대한 경계도 필요하여 반탁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백범노전의 계승 인력을 위하여, 3월 20일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를 개설하였다. 1기생 1백명씩 백범이 암살 당하기까지 9기생을 배출하였다. 1946년까지는 임시 정부 주석으로 대동 단결을 위하여 정력을 쏟았으나 1947년부터는 백범 자신의 조직과 인력이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47년은 5월 21일부터 7월 10일까지 열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의 문제로 정국이 크게 변화하였다. 우파에서 김규식과 한민당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수용하면서 좌파와 함께 참가 방침을 세웠고, 한독당에 합류해 있던 안재홍도 탈당하여 6월 21일 신한국민당을 결성하고 그에 합류하여 남한의 425개 정당 사회단체(북한 38개)가 조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공동위원회에 참석하니 백범의 임시 정부와 반탁 운동은 궁지에 몰린 듯했다. 그럴 때 반탁을 고집하던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노골적으로 추진하여 8월 26일에는 총선거대책위원회(總選擧對策委員會, 위원장 신익희)까지 구성함에 이르러 백범의 반탁 통일 정부수립 계획은 최대 시련을 맞게 되었다. 미국은 이승만의 단정안을 지원하였다.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시켜 11월 14일 한국 총선거안을 가결하였고 유엔 한국임시위윈단을 설치하였다. 백범은 총선거안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지만 단독 정부로 몰고 갈 것을 막기 위해 12월 22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경주하였다. 1946년 후반부터 전국에서 폭력과 폭동이 난무하더니 1947년 7월 19일에는 근로 인민당의 여운형이, 12월 2일에는 한국 민주당의 장덕수가 암살 당한 비극이 연출되어. 이러한 비극은 통일 정부 수립으로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백범은 전망하였다. 아니면 민족의 대참극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한 백범이었다. 대참극이란 말할 것도 없이 6.25와 같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12윌 20일 결성한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이 제기한 남북 지도자 회담에 동의하여 남북 협상의 길을 열어간 것이다. 1948년은 연초부터 단독 정부 수립안이 기세를 올렸다. 1월 8일에 입국한 유엔 한국위원단의 입북을 소련 측이 거절하자 미군정과 이승만과 한민당이 합작하여 단정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하여 백범은 김규식과 합작하여 단정 반대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이때의 일은 복잡하므로 간추린 일지를 통해 보기로 한다. 1월 27일 : 김구 김규식. 유엔한국위원단 면담에서 단독선거 반대 2월 03일 : 이승만, 단독선거 촉구 성명(이승만. 단독선거를 위한 다양한 교섭에 2월 26일 유엔한국위원단 메논 위원장의 보고를 심의한 유엔소총회가 단선을 결의했고, 3월 1일 하지 사령관이 단선 실시를 발표) 2월 04일 : 김구 김규식, 남북협상에 합의 2월 10일 : 김구, '삼천만 동포에 읍고함' 의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성령 2월 16일 : 김구 김규식, 북측의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 협상 제의 2월 27일 : 김규식을 비롯한 단선 반대자 20여명 입법 의원 탈퇴 3월 12일 : 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단선 불참 공동성명 3월 25일 : 북한, 남북 회담안 수락 발표 3월 31일 : 김구 김규식, 남북 왕복 문서 공개 4월 03일 :유림이 주도한 통일 독립 운동자 협의회 결성, 남북협상지원 4월 18일 : 문인 108명, 남북 협상 지지 성명 4월 19일 : 김구, 평양 남북 대표자 회의 참석차 출발 (김규식 21일 출발) 5월 05일 : 김구 김규식, 서울 귀환 남북협상 이야기는 장황하므로 위의 일지로 대신한다. 북한측에서 6월 2차 회담을 해주(海州)에서 열자고 제의해 왔으나 이번에는 '북측에서 홍명희를 대표로 보내라' 고 회신하고 응하지 않았다. 결국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남북에서 각각 단정이 수립되어 백범의 통일 노력은 봉쇄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백범은 남북 정부 모두의 냉대를 받았고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까지 탄압을 받다가 1949년 6월 26일 12시 45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운명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민족의 비극이 아니던가. 백범이 마지막 맞던 새해, 194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유일한 최고의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뿐이다. 소련식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공산 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해도 독점 자본주의로 무산자를 괴롭힐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자기 상품 시장화하는데는 찬성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이는 민족의 영원한 교훈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