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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 관련 인물-몽양 여운형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4,793
1886년   4월 22일(음력)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꼴 출생

1889년 ~ 1900년  향리에서 한문 수학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단양으로 피난.

1895년   양평 묘꼴로 귀가

1899년   용인 출신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결혼.

1900년   신학문에 뜻을 두고 배재학당에 입학.



1901년  흥화학교로 전학.

1902년   관립우체학교

1903년   8월, 상처(喪妻)

             10월. 조부 별세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수학 단념. 모친 별세

1906년   부친 별세. 농사를 지으며 사서삼경 독파.

1907년   기독교에 입교. 고향인 양평에 광동학교 설립.

1908년   고향 양평에서 '국채보상 단연동맹(斷煙同盟)'을 조직하고 각지에서

             순회연설. 양친의 3년상을 마친 후 조상 신주(神主)를 묻고

             노비를 해방하는 등 봉건제도에 대한 일대 개혁을 단행.

1909년   구한국군 상등병 황봉연(黃鳳淵)에게 광동학교 인계.

             이 무렵 서울에서 곽안련 목사를 돕다.

1910년   강릉 초당의숙에 교사로 초빙되다.



1911년  초당의숙에서 일본 연호를 안쓴다고 퇴거 명령 받다.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

1913년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및 서간도 각지를 순방하며 조국 광복의

             웅지를 펴다.

1914년   중국 남경 금릉대학에 입학.

1917년   상해 협회서국에 취직. 한국 청년의 구미 유학과 도항 절차 알선에

             힘쓰다.<자림보> 기자 진한명(陳漢明) 소개로 처음 손문을

             만나다. 여름에 은밀히 귀국, 이범석을 망명시키다.

             9월. 선천 장로교 총회에 참석.

1918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당수에 취임하여 광복운동의

             거보를 내딛다.

             상해에서 고려교민 친목회 조직.

             12월,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조선 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그의 특사인 크레인에게 전달.

1919년   상해에서 서겸(徐謙)과 함께 재차 손문을 만나 파리 대표 파견을

             협의.

             1월, 김규식박사를 파리 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 독립을 요구.         

             2월, 시베리아. 만주,북경등지를 순회하면서 동지 연락에 분주.

             4월, 상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5월, 동생 여운홍을 다시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고 조국 독립

             획득을 위해서 최대한의 활동을 전개케 하다.

             11월, 일본정부 초청으로 동경에 가다.

             12월, 중순 동경에서 상해로 귀환.12월 28일자 <독립신문>에 동경

             제국호텔 연설 기사를 일본 신문에서 전재.

1920년   여름, 중국 노산고령 피서지에서 각국 대사, 정객, 실업가들

             앞에서 조선 독립에 관해 연설하다.

             8월, 미국 국회의원 100여명이 상해,북경 시찰시 조선 독립을 역설.



1921년  봄. 소련 청년 보이진스끼를 만남. <상해교류 동포에게>라는 책자

             발간. 상해에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조선 독립과

             중국혁명을 위해 한-중 유기적 유대를 맺다. 

             5월, 안창호, 김위택 등과 '국민대표자대회 주비위원회' 조직.

             8월, 4인조 테러단에 피습.

             광동정부 총통 손문을 방문하고 조선 독립과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해방 문제에 대해 토의하다.

1922년   1.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피압박 인민대회에 김규식, 나용균,

                정광호, 김시현 등과 참석하여 5인 주석단(主席團)의 일인으로

                피선되다.

            2. 모스크바에서 레닌, 뜨로츠끼 등과 회견, 조선 독립에 관해

                적극원조 요청.

            3.  상해에서 노병회(勞兵會)를 조직, 노병양성과 군비조달에 진력.



1923년  1-5월. 상해 프랑스 조계 민국로 침례교회에서 국민대표대회 개최.

              7월. 안창호, 이동녕, 김구, 노백린, 이유필, 조완구, 김붕준 등과

              조선독립 촉진회 조직.

1924년   중국국민당에 가입. 한-중 상호협력을 위해 남방혁명군을 도와 활동.

1925년   12월, 7인단 테러에 피습.

1926년   1월, 광동 국민대표자 대회에서 연설. 조봉암에게 소련 도항증 알선.

             7월, 상해 프랑스 조계 3*1당(堂)에서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

             4백여원을 헌납.

1927년   중국혁명군이 무한삼진을 함락시킨 후 한구(漢口)승첩 경축 대회

             에서 연설.

             상해에서 백숭희(白崇禧) 쿠데타 때 기지로 위기 모면.

1929년   상해 복단대학 축구단을 인솔하고 동남아 각지를 순회하면서

             싱가포르, 마닐라 등지에서 영, 미 식민정책을 통렬히 성토하는

             강연을 하여 물의를 일으키다.

             6월, 아시아 민족대회와 영자신문 발간 의뢰 서신을 장개석으로

             부터 받음

             7월, 상해 요동운동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되다.

193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3년 징역형 언도받다.



1932년  7월, 대전 형무소에서 출옥하다. 우가끼 총독의 농촌자력 갱생

              협력 요청을 거절. 이께다 경무국장의 충청도 500석 추수 농지

              제공을 거절.

1933년   3월,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에 취임. 

1935년   충남 아산 충무공 묘소에 공덕비를 건립.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대회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되고 사장직에서 물러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 이만규 및 미국 유학생 등에

             일본 패망을 언명.

1938년   미나미 총독 비서 시오바라, 보호관찰소장 나가사끼, 윤치호,

             한상룡 등의 전쟁 협조 요구를 단연 거절.

1940년   2월, 창씨개명에 반대. 일본 동경에 체류하면서 세계정세를

             포착하여 유학생을 규합하고 해방될 조국의 인재 양성을 위해 활동

             3월, 육군성 병무국장 다나까, 전 수상 고노우에,육군대학 교수

             오오까와 등을 만남.



1942년  1월, 해방을 예견, 장권에게 치안대 조직을 연구케 하다.

             12월, 일본에서 귀국 도중 시모노세끼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재차

             투옥되다.

1943년  6월, 3년간 집행유예로 출옥.

            11월, 양주 봉안면에 소개 명목으로 은거. 동지 연락과 청년

            지도에 진력.

1944년  5월, 정무총감 엔도가 봉안에 와서 중국행을 종용했으나 거절하다.

            8월,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다가올 해방에 대비.

            10월, 양평 용문산에서 농민동맹을 조직하다.



1945년  4~5월. 2차례 조선병기청장 채모(蔡某)를 만나려고 손기정을 보냄.

             5월, 황족 데라무라가 봉안에 와서 중국과의 화평 교섭을 다시 종용.

             7월, 정무총감 엔도가 다시 중국행 화평 교섭을 종용하고 난국

              타개책을 묻다.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건국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하고 3차에 걸쳐 송진우와 협력을 교섭하다.

             8월 18일 자정, 자택 앞에서 괴한에게 피습.

             9월 6일, 인민공화국 부주석에 추대되다.

             9월 7일, 원서동 대로에서 괴한들에게 밧줄로 묶이다.

             9월 14일, 인민공화국 부주석에 추대됨.

             10월 초, 미 군정장관 아놀드와 하지 중장을 만나다.

             11월 12일, 인민당을 조직하고 당수에 취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찬반 회오리 속에서 한국 임시정부 수립은

              삼상회의 결정 지지로만 가능하다고 결론 내리다.

1946년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 5인 의장단의 1인으로 취임.

             4월, 평양에 가서 김일성 등과 회동.

             3-5월, 미소 공동위원회의 순조로운 진행에 전력을 기울이다.

             5월 8일, 미소공위 무기 휴회.

             6월,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 구성.

             7월 17일, 신당동 산에서 교살 직전 탈출.

             8월 16일. 3당(인민당,신민당,공산당)합당으로 인민당 해체.

             9월. 다시 평양에 가다.

             10월, 자택 문앞에서 납치되어 소나무에 묶이다.

             좌우합작 7원칙에 합의.

1947년   1~2월, 사회노동당 해체와 인민당 재건 준비에 착수.

             3월 17일. 괴한이 침실 폭파.

             4월 3일, 혜화동 로타리에서 승용차 피격.

             5월 21일, 미소공위 재개.

             5월 24일, 노동인민당 창당.    

             6월, 좌우합작과 미소공위 성공토록 적극 활동.

             7월 19일 정오, 서울 혜화동 로타리에서 괴한에 피격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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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기목사와 몽양 여운형



이만규 저 '여운형 투쟁사' 중에서 나타난 상동의 자취



몽양이 야소교인이 된 것도 그의 애국적 정치사상의 발전이었다. 당시에는 국사에 관심을 가지고 혁명에 뜻을 둔 이가 많이 아소교 속으로 들어갔었다. 이상재, 이승훈,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제 선배가 다 그러하였고, 청년들도 그러하였다.



몽양은 청년의 1인으로서 상동그룹의 인사와 교제가 되어 교인이 되었다. 당시 상동교회 안에는 덕망높고 애국심많은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우국지사와 애국청년들이 모여들어 교제하고 연락하고 모사를 하는 한 그룹이 있었다.



이동녕, 이회영, 여준(몽양의 숙부), 이승훈, 현순, 김진호, 김창환, 주시경 등 제인이 청년학원과 공옥학교의 직원이 되어 표면으로 학교 일을 보면서 이면에는 딴 경륜을 하였었다. 그리하여 이시영의 서간도 신흥사관학교 설계도 다 여기서 생긴 것이다.



몽양의 신교한 동기가 이러한 그룹과 연락한데 있게 된 것은 몽양의 사상으로 보아 당연한 이성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 전덕기 목사님과 몽양선생님은 아마 신민회 활동을 같이 하셨다고 증언되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여운형투쟁사 15페이지부터 16페이지에 걸쳐 씌어진 것인데 여기서 비밀연락조직을 만들었고 이면에서 경륜사업을 하면서 신흥무관학교를 설계한 상동그룹, 이것은 바로 신민회를 명료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이 됩니다.



또한 몽양은 1906년 21세부터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이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몽양이 때 1907년 4월 초에 창립된 신민회에 가입했으며, 신민회 청년회원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종래 발표되지 않았는데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가 주장한 내용입니다.(학민사 간,여운형 노트 중에서)





             62세를 일기로 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