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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상동교회의 신축과 봉헌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849
우리 교회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아담한 현대식 벽돌 예배당을 1년 안에 건축하여 봉헌하게 된 것은 스크랜톤 목사의 어머니인 스크랜톤 대부인의 노력의 덕분이었다. 당시 가난한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던 우리 교회로서는 아무리 재간을 부려도 이런 큰 예배당 건축은 처음부터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물론 다른 교회처럼 벽돌이 아닌 한옥과 같은 예배당은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시하게 지을 수는 없었다. 이미 3년 전에 정동교회가 아름다운 벽돌 예배당을 짓고 봉헌까지 하였기에 최소한 그 정도는 지어야 했다. 스크랜톤의 자존심이 아펜젤러에게 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크고 넓은 교회 건축의 필요성은 달성교회 시대에 절실히 느꼈고, 300여 명이 천막을 치면서 예배 볼 정도였으므로 넓은 예배당은 당장 필요하였다. 게다가 선교부의 예산 절감으로 상동병원이 현상유지만을 할 정도라면 그 병원을 없애고 선교의 본래 목적인 예배당 건축과 그것을 통한 선교와 봉사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리하여 스크랜톤 목사와 그 어머니 등이 제2차 안식년 휴가(1898. 11~1899. 8)를 이용하여 미국에 갔을 때, 이런 웅대한 새 교회 건축을 위한 모금을 위하여 이 모자가 백방으로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스크랜톤 대부인은 한 분의 유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미국 커넥티컷 주 스탠포드에 있는 미드 양(Miss Mead of Stanford, Connecticut)이 그녀의 어머니를 기념하여 4,000불이나 되는 거금을 내놓은 것이다. Official Journal, 1901, p.48, p.67. 당시로서는 이 돈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물론 이 돈으로 건축비 전액을 충당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큰 힘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우선 건축을 이 돈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제2차 안식년 휴가에서 큰 선물을 안고 돌아온 셈이다. 스크랜톤은 돌아와서 이 기쁜 소식을 교인들에게 알렸고 또 교인들에게도 건축헌금을 할 기회를 주었다. 교인들의 호응은 대단하였다. 전 교우가 헌금에 가담한 것이다. 1901년의 우리 교회의 교인수가 316명(입교인 211명, 원입인 105명, 이 때 정동교회는 입교인 198명, 원입인 62명, 합계 260명) Official Journal, 1902, p.92. 이었는데 헌금한 수는 남자교우 137명, 여자교우 176명, 합계 313명이었으므로 금액의 다소를 막론하고 빠짐없이 참가한 것이다. 이 때의 헌금 총액은 당시의 돈으로 96원 85전, 작정 금액이 156원 71전이었다. 1900년도 상동교회 약사. 이 때에 헌금한 우리 교회 교우들의 명단은 부록에 있다. 이 금액은 우리 교회의 전년도(1900)결산총액의 거의 두 배에 이르는 액수였다. 이렇게 되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으므로 새 예배당 건축을 위한 역사적 기공식이 19세기가 저물어가는 1900년 7월 30일 오후 여섯시에 감리사 스크랜톤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 두 분에 의하여 집행되었다. 상게서. 이 공사는 심의석 씨가 맡았고, 공사감독은 우리 교회의 탁사였던 박원식  탁사가 맡아 보았다. 상게서. 이 때 우리 교회를 이끌어 갔던 직원들의 면모는 다음과 같다. 담임목사:스크랜톤(감리사 겸직) 전 도 사:리은승 리창학 전도부인:스크랜톤 대부인  뚜루실나  셰라  쥬리엣  해나 권    사:리국혁 고시형 속    장:강셩환 심상완 손호석 심완기 장사연 김진우 리국혁 조명운                 전봉운(전덕기) 박원식 김권흥 리도성 유    사:리창학 리은승 리국혁 전봉운 손호석 김유옥 앨미러 매트린                 거들녀 탁    사:스크랜톤 대부인 박원식 림원길 조명운 손호석 리은승 상게서. 이상의 직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같이 뛴 결과 건축은 예상 외로 빨리 진행되어 1년만에 봉헌식까지 거행하게 되었다. 공사비는 위에 말한 금액으로도 모자라서 스크랜톤 대부인이 여러 곳에 수소문하여서 500불을 더 모금하였고, 또 전에 4000불을 헌금한 바 있던 미드 양 일가에서 교회내부 장식을 위하여 500불을 또 추가하여 보내왔으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드디어 다음 해인 1901년 5월 12일 주일 아침에 새로 완공된 우리 교회에서 봉헌 예배가 거행되었다. 마침 이 해의 한국 연례 선교회가 모어(David H. Moore) 감독의 주재 아래 새로 봉헌될 우리 교회에서 5월 9일부터 모이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전국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역자들이 다 모인 때였다. 주일 예배를 겸한 이 봉헌식은 스크랜톤의 사회로 모어 감독이 주례하였다. 회중의 찬송이 있은 후 기도와 사도신경 합송에 이어, 특송으로 혼성 사중창이 있었다. 그리고 모어 감독의 집전으로 교우에 대한 세례식과 유아 세례식이 스크랜톤 목사의 보좌를 받으면서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다음으로 성전 봉헌 문답이 있은 후 모어 감독의 다음과 같은 주제의 설교가 있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빌 2장5절).” 존스(G. H. Jones) 목사가 이 설교를 우리말로 통역하였다. 설교와 찬송에 이어 시편 122편을 교독하고 스웨어러 목사가 우리 교회 탁사부를 대신하여 ‘이 성전을 전능하신 하느님을 위한 예배와 봉사’를 위하여 쓰도록 이 성전을 감독에게 위임하였다. 다음으로 모어 감독은 영어로 이 성전의 봉헌됨을 정식으로 선언하였고 스크랜톤 목사가 이 선언문을 우리말로 번역 낭독하였다. 그리고 기도와 송영 축도로 감격적인 성전 봉헌식은 끝났다. Official Journal, 1901, p.10. 이렇게 봉헌된 우리의 새 성전은 이 봉헌식의 취지대로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가난한 민족을 위한 봉사기관으로 실제로 사용되었다. 특히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전덕기를 비롯한 우리 교회 교우들은 하나님 예배와 민족 봉사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생각하였고, 또 이 민족의 소원인 자주독립을 위한 민족독립운동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교회로 하여금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1. 스크랜톤의 제3차 귀국              성대한 봉헌식이 끝나자 스크랜톤이 병든 어머니 스크랜톤 대부인을 모시고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Official Journal, 1902, p.22. 대부인은 그 동안 우리 교회의 건축을 위하여 그렇게 밤낮으로 노심초사하더니 봉헌식을 마치고는 그 동안의 피로가 겹쳐 그만 쓰러지고 만 것이다. 효심이 강한 스크랜톤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어머니를 속히 치료하여야만 했다. 이리하여 그가 제2차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 온지 2년도 못 되어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태평양을 건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선교부에서는 이 일을 아주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아무리 개인사정이 급하다 할지라도 한국 전체의 선교사업을 관할하는 감리사로서 일손이 모자라서 쩔쩔매는 선교 현장을 어찌 이탈할 수 있을까? 이 때 선교본부에서의 이런 불평은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평양에서 의료선교사로 일하던 홀(Dr. W. J. Hall) 의사의 미망인 홀(Rosetta Sherwood Hall) 여사도 병으로 한국을 떠났고, 벡(S. A. Beck) 선교사도 병든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니 상게서.  한국선교부는 비다시피 되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스크랜톤은 2년 반(1902년 7월~1904년 2월) 동안 한국으로 되돌아 오지 못했다. 감리사의 직책은 존스(G. H. Jones) 목사가 대행하고 인원이 부족하니 상동, 정동, 동대문은 스웨어러 목사가 혼자서 담임하게 되었고 그 밑의 한국인 전도사들이 실제 목회를 하게 되었다.             2. 한국 최초의 한국인 목사 안수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은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감리교회와 한국교회 역사상 중요한 해이다. 우선 우리 교회로서는 서울의 명물의 하나가 된 새 성전이 완공되어 서울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까지 구경꾼들이 줄을 이었다. 감리교회적으로는 교세가 크게 성장하여 지금까지 단일 지방으로 되어 있던 한국선교지역을 세 지방으로 분할 관리하게 된 일이요, 한국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 해에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 두 사람이 탄생한 일이다. 장로교에서는 이 후부터 6년 후인 1907년에 와서야 한국인 목사가 출연하였으니 가히 역사적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들은 김창식(金昌植), 김기범(金箕範) 목사로서 한국교회의 초창기를 빛나게 장식했던 영웅들이었다. 이들은 1888년에 선교부로부터 전도사의 자격을 처음 얻은 분들로서 이 후로 12년간 실지 전도사업에 종사하면서 감리교의 교리 장정에 따른 엄한 목사 훈련과 신학 교육을 받아왔다. 연회에서 이들은 성품 통과와 엄격한 신학교육 과정심사를 거쳐 드디어 20세기의 첫 해에 모어 감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이다. 그것도 새로 봉헌된 우리 교회에서 연례 선교회가 진행되고 있던 1901년 5월 14일에 있었다. 상게서, p.18. 1901년의 연례 선교회의를 주재하기 위하여 한국으로 온 모어 감독은 더 활발한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한국 감리교 선교지역을 이 해부터 세 지방으로 분할하여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새로 조직된 지방회의에서는 모든 회무처리를 원칙적으로 우리말로 진행시켰기 때문에 한국인 교역자들과 평신도 대표들에게 지방회에 대한 관심과 열의를 더욱 고무 시켰다. 상게서, p.24. 연례 선교사 회의가 끝난 후 지방사정에 따라 각 지방회가 처음 조직되었는데, 먼저 서부 지방회가 1901년 11월 1일에 제물포에서 조직되었다. 이 서부지방회는 제물포 부평 남양 강화 교동 연안읍과 황해도에 있는 교회들을 포함하고 있고, 이 지방의 행정 책임자는 존스(Rev. G. H. Jones) 목사가 장로사(長老司, Presiding elder)로 임명되었다. 다음으로 북부지방회가 1901년 12월 1일에 평양에서 조직되었는데, 이 북부지방에는 평양지역의 교회들과 진남포, 안주, 여포, 삼화, 춘산, 운산, 수안, 원산, 함경도와 강원도의 광활한 지역이 편입되었다. 이 지방의 장로사에는 노불(Rev. W. A. Noble) 목사가 임명되었다. 마지막으로 남부지방회가 1902년 5월 1일에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이 지방회에는 서울과 서울 이남이 전부 포함되어 우리 교회를 비롯한 서울 시내 교회와 수원, 이천, 광주 구역까지 포함되었다. 처음에는 스크랜톤 목사가 장로사로 임명되었으나 그가 미국으로 떠났으므로 아펜젤러 목사가 장로사의 직책을 인계받았다. 또한 이 세 지방의 교인수도 크게 증가되어 1902년의 통계에 의하면 세 지방 교인수의 합계가 6,915명이고, 주일학교 학생 3,123명까지 합하면 이 때의 전체 감리교인의 수는 10,000명이 넘었다. Official Journal, 1903, p.77. 한국교회의 이런 급성장은 물론 선교사들의 공도 크지만 1888년 이후로 전도사의 직책을 받고 헌신적으로 전도를 담당한 한국인 전도인들의 수고의 대가라고 본다. 그런 예는 우리 교회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달성교회 시대에 스크랜톤이 제2차 안식년 휴가를 떠났을 때 우리 교회의 교인수가 줄기는커녕 이윤승 전도사의 유능한 목회와 은혜에 넘치는 설교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