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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달성궁교회 시대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377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스크랜톤 담임목사는 아직도 정동에 있는 감리교 병원까지 맡아 보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목회를 위하여 쓰는 시간이 적어 목회자나 교인이나 불편과 불만이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흩어져 있는 담임목사의 일터를 하나로 모아야만 했다. 즉 상동교회와 정동병원을 한 곳으로 모아 놓아야 하는 일이다. 정동병원을 상동으로 옮길 때라고 그는 확신하였다. 그러나 병원 이전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상동교회가 그 동안에 급속도로 커져서 상동의 건물을 가지고는 병원 환자와 교인들을 동시에 수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병원만으로도 환자와 사람들이 들끓는데 백수십 명의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기에는 도저히 장소가 모자랐던 것이다. 그러자면 상동 터에 이미 있는 건물을 전부 헐어버리고 다시 병원과 교회를 지어야 될 텐데, 이 일은 엄청난 돈이 드는 일이므로 이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정동병원의 상동 이전과 우리 교회의 확장이란 두 가지 어려운 문제를 스크랜톤 목사의 어머니 스크랜톤 대부인이 원만히 해결해 주었다. 즉 우리 상동교회 건너편에 있는 달성궁(達城宮, 지금의 한국은행자리)안에 큰 한옥을 한 채 장만하여서 이것을 잘 수리하여 교회로 쓰고 Annual Report, 1895, p.244~245.  지금까지 예배보던 상동교회의 건물은 정동병원에서 이전하면서 가져온 의료기구들과 환자들만을 위하여 쓰게 된 것이다. 물론 모든 경비는 스크랜톤 대부인이 마련하였다. 지금 우리 교회의 자리에 현대식 붉은 벽돌 예배당이 신축(1901)되기까지 상동교회의 터와 그 안에 있는 건물은 전부 감리교 병원으로 쓰고 상동교회는 길 건너편 달성궁 안에서 예배를 드렸다.                 상동의 달성궁교회 시대가 시작된 것은 1895년 6월의 일로 상게서, p.244.   1901년까지 이어졌다. 교회와 병원의 완전 분리였다. 두 기관이 따로 운영이 되니 두 가지 일이 더 잘 되어갔다. 특히 우리 교회의 교인들이 급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달성궁으로 옮기기 전까지의 주일예배 출석인원은 130명 정도였는데 옮긴 후로는 180명~200명으로 급증하여 머지 않아 300명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Official Journal, 1896, p.28.   특히 스크랜톤 대부인이 전도부인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부인반이 더 크게 부흥되어 여자반이 비좁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부인반은 천막을 쳐서 수용하기까지 이른 것이다. 상게서. 이 때의 우리 교회의 교인들의 구성은 주로 중류계급에 속한 사람들과 상업에 종사하는 계층이었다. Annual Report, 1895, p.244. 교인들이 많이 모이니 헌금을 바치는 열의도 대단하여 달성교회 시대의 첫 해(1895년~1896년)에는 교회 총수입이 89불 8전에 이르렀고 이 금액 중에 절반은 지방에 있는 어느 교회 건축을 위한 토지 구입비의 보조비로 도와주었다. Official Journal, 1896, p.28. 미국돈 1불은 당시 우리 돈의 2원에 해당되며 그 때에는 큰 돈이었다. 우리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모였지만 이렇게 초창기부터 ‘주는 교회’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겨울에 일감이 없어서 굶는 남대문 시장 일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를 위하여서도 상동교회는 앞장섰다. Annual Report, 1896, p.238. 그러나 교회가 이렇게 놀랄 만한 속도로 부흥 발전은 하였으나 교인들의 불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심방 부족에 대한 불만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목자와 양 사이의 친밀한 접촉이 적다는 것이다. Official Journal, 1896, p.79.   이것이 당시의 교인들의 불만이요 또 교회의 큰 약점이었다. 담임목사는 전국의 선교사업을 주관하는 감리사 직책 뿐만 아니라 상동병원 책임자, 또 성서 번역위원 등의 직책 때문에 목회에 전념할 수 없게 되었다. 전부터 스크랜톤은 한국에 최소한 6명의 선교사를 더 파송해야만 현재 벌여 놓은 선교사업의 현상유지를 할 수 있다고 거듭 미국 선교본부에 청원하였으나 Annual Report, 1896, p.237, Official Journal, 1896, p.27.  선교본부는 꿀먹은 벙어리였다. 장로교에서는 계속 선교사 후속 부대가 들어왔으나 감리교 선교사는 병 등으로 점점 줄어들기만 했다. 현지에서의 이런 도움을 요청하는 절규는 미국 감리교에는 그리 절실하게 들려지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 목사와 전도사의 훈련이 시급한 과제로 나타난 것이다. ‘한국인에 대한 선교는 한국인의 손으로’ 라는 슬로건은 그 당시의 불가피한 요청이었다. 이리하여 우리 교회에서도 젊고 유능한 사람들을 발굴하여 하나님의 포도원의 부름에 응하도록 한 것이다. 이 부름에 노병일 전도사가 호응하였으나  쓰러졌고, 그의 뒤를 이은 강훈식 전도사도 갔다. 모두가 단명이었다. 달성교회 시대에는 이윤승 전도사가 활약을 하였다. 전덕기 속장은 이 때 아직 평신도로서 우리 교회에 봉사하고 있을 때였다. 청년 전덕기가 우리 교회에 입교하던 해인 1897년에 우리 교회는 큰 손실을 보았다. 그렇게 열심이던 송성옥 형제가 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는 비록 나이가 들어서 우리 교회에 들어왔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후로부터는 멀리 자기 고향까지 내려가서 그의 친지와 일가친척에게 대담하게 전도했던 분으로서 당시 우리 교회 교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분이다. 이 송성옥이야말로 한국교회 장례식 때의 곡을 폐지한 분이다. Annual Report, 1897, p.241.   기독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절망이 아니요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인데 왜 우느냐는 것이다. 죽음은 절망이 아니요 소망의 시작이기 때문에 부모의 초상에 있어서 우는 것보다는 찬송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상게서.    관철시켰으며, 이 전통이 오늘까지 한국교회에 내려오고 있다. 이런 영향력 있는 분의 죽음이 우리 교회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장례식을 당하였을 때 누가 송성옥과 같은 설득력 있는 설교로서 슬픔 당한 가정을 위로할 수 있을까. 1898년에 들어와서는 바스티드(Basteed) 의사까지 병으로 귀국하게 되니 상동병원은 이 해에는 거의 휴업하다시피 되었다. Annual Report, 1898, p.266.   감리교 병원 사업에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그렇다고 후속 부대도 오지 않았다. 맥길 의사는 元山에서 활약하고 있고, 스크랜톤은 감리사의 일 때문에 의료 활동은 거의 할 수 없게 되고, 이렇게 하여 서울에서의 감리교의 의료 선교사업은 큰 벽에 부딪치게 된다. 즉 서울에서 감리교의 병원 사업을 계속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선교사들에게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1. 상동 청년회의 조직              상동교회와 상동병원에 위기의식이 감도는 가운데서도 우리 교회의 청년들의 움직임은 활발하였다. 지금의 감리교 청년회의 전신인 엡웟 청년회(Epworth League)가 1898년에 전덕기 속장 등의 노력으로 조직된 것이다. 이 때의 청년회원수는 40명 Official Journal, 1898, p.46. 이었는데 이 청년회야말로 후에 상동교회로 하여금 한국 민족운동의 요람지로 약동하게 한 그 모체였던 것이다. 이 때 전덕기 속장은 23세의 젊은 나이로서 교회 안에서는 청년 속장으로 전도사업에 힘쓰고, 밖에서는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 일에 가담하여 당시의 쟁쟁한 우국독립지사들과 손잡고 민족운동을 하던 때였고, 이 때부터 전덕기 속장의 능력과 활동이 세인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전덕기의 독립협회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ꡔ민족운동의 선구자 전덕기목사ꡕ, pp.23~30 참조. 우리 교회의 청년회 조직 초기에는 눈에 뜨일 만한 대외적인 민족운동은 없었고, 다만 교회 안에 그 활동이 제한되어 있었으나, 1905년부터는 대외적이고 대대적인 민족운동이 전덕기 전도사의 지도하에 전개된다.           2. 스크랜톤 제2차 안식년 귀국               그 동안에 우리 교회의 큰 약점이었던 인가귀도(引家歸道)가 되지 않았던 문제는 주로 스크랜톤 대부인의 노력으로 거의 해결되었다. 교회 중진들의 부인들과 가족들이 이제는 가족을 동반하여 교회에 출석하게 됨으로써 이것이 우리 교회의 자랑이요 장점이 되었다. Annual Report, 1895, p.245. 달성교회로 이사오면서 이런 약점이 사라지고 교회가 크게 부흥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다가 스크랜톤 목사의 제2차 안식년 휴가가 왔다. 스크랜톤 목사 가정은 이 휴가 때문에 제2차 안식년 귀국을 하게 된다. 이 휴가는 이번에는 10개월(1898년 11월~1899년 8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없는 동안에 우리 교회는 그 해 우리 나라에 입국한 콥(George C. Cobb) 선교사와 이윤승 전도사가 담임하였다. 그러나 실제 목회는 이윤승 전도사가 전담하였고 주일 아침 예배 설교도 이 전도사가 맡았다. 이 전도사의 설교는 은혜에 충만한 말씀의 선포에 중점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설교가 교인들에게 대인기였다. 오히려 스크랜톤이 있을 때보다 교인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다. 영감에 넘치는 우리말 설교에 교인들은 비로소 도취하게 된 것이다. 그의 영감 있는 설교가 진행될 때는 예배가 보통 두 시간 때로는 세 시간씩이나 계속되어도 교인들은 지루한 줄 모르고 그의 설교를 경청하였던 것이다. Official Minutes, 1900, p.52.   이 때문에 주일 아침 예배에는 무려 325명씩이나 몰려들었다. 상게서.  1899년 5월부터 스크랜톤이 올 때까지 몇 달 동안은 스웨어러(Wilbur C. Swearer) 목사가 담임했으나 주일 아침 예배는 계속 인기 있는 이윤승 전도사가 맡았고 스웨어러 목사는 주일 저녁 예배에 노병선 전도사(당시 배재학당 영어선생)의 통역을 통하여서 설교하였다. 이런 현상을 보아도 우리 상동교회는 19세기 말까지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도 넉넉히 교회를 잘 꾸려 나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다른 약한 교회도 도울 수 있는 형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재정적 실력도 크게 향상이 되어서 1899년 결산보고서를 보면 일년 총수입이 178원 41전인데 전도사의 봉급으로 39원이 지출되고(월평균 2원~3원) 가난한 자의 장례비용으로 12원이 지출되고 12원 64전은 선교사업비로 114원 77전은 교회경상비에 충당되었다. 상게서, p.53.   아직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였던 우리 교회로서 이 정도의 예산을 집행한 데 대하여 선교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상게서.   이 때의 우리 교회의 재적수는 313명(입교인 205명, 원입 108명)이었다. 상게서.   스크랜톤 없이도 우리 교회가 이렇게 부흥이 되어 주일학교도 잘 되어가고 선생님들도 열심이었다.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스웨어러 목사댁에 모여 열심히 학교운영을 위하여 토론하고 교수방법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주일학교 학생수도 평균 250~260명으로 급상승하였다. 상게서, p.52.  한 가지, 이 때에 우리가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일은 스크랜톤이 없는 동안 우리 교회 강단에 1907년 해아 밀사사건에 깊이 관련되고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헐버트(Homer B. Hulbert) 목사가 서서 여러 번 설교하였다는 사실이다. 상게서. 이 때 헐버트은 한국에서 영문잡지인 The Korean Repository의 주필로 일할 때였으며, 전덕기는 이 때 우리 교회의 속장으로 있으면서 독립협회 일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우리 교회에서 가까이 지내면서 기울어져 가는 우리 나라의 국운을 한탄하며 필시 이의 회복을 위한 토론이나 계획에 대하여 의견 교환이 있은 줄로 안다. 따라서 이들이 을사보호조약 이후 해아 밀사사건을 계획하고 추진할 때 서로 믿을 만한 동지로 연락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교회의 어두운 면도 있었다. 교인의 비윤리적인 생활이 징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한번은 어떤 교인의 아들이 당시 유행하던 몹쓸 병으로 죽고 그의 며느리도 병상에 눕게 되었다. 생계에 당장 위협이 온 것이다. 병을 치료할 돈도 없고 하여 생각다 못하여 그는 12세 된 손녀를 팔아 버렸다. 상게서, p.53. 이 소문이 곧 스웨어러 목사에게 전달되었다. 아직도 인신매매가 있다니 하고 분개하면서 그 집으로 가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는 엄히 꾸짖었다. 그리고 팔려간 그 소녀를 찾아 우리 교회의 어느 직원의 집에 맡겨 놓았다. 또한 아직도 앓고 있는 그 소녀의 어머니는 감리교 여선교회에서 경영하는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하게 하고 이 소녀는 이화학당에 입학시켜 이런 역경을 극복하고 후일 한국 여성을 위한 훌륭한 일꾼이 되도록 길렀다. “너희 부모가 너를 버릴 지라도 너희 주님은 너를 돌보시리라.” 상게서. 이 말씀이 그 가정에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 소녀의 어머니는 그 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었으나, 그녀는 죽기 전에 자기 어린 딸을 우리 교회에 위탁한다는 위임장을 쓰고 죽었다. 이렇게 하여 그 소녀는 우리 교회의 노력으로 남의 집 종으로 팔려가기 직전에 구원받은 것이다. 스크랜톤이 그의 제2차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1899년 8월에 다시 서울로 돌아오니 우리 교회가 자기 없는 동안에도 이렇게 놀랄 만큼 크게 발전한 것을 보고 한편 놀라고 또 한편 기뻐하면서 이제는 병원 선교보다는 교회 발전에 전념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이런 선교 정책 변경의 또 다른 이유는 뉴욕에 있는 감리교 선교부가 한국에 대한 선교비를 예산 부족 때문에 삭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돈이 드는 병원 사업을 서울에서는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는 우리 교회 실력도 크게 성장하였으니 병원전도 없이도 자립적으로 선교사업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리하여 웅장한 교회건축을 꿈꾸게 된 것이다. 당시의 이런 상황이 우리 교회의 현대식 벽돌 예배당 건축 추진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