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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6대 목사 전덕기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7,710
(1) 전덕기(全德基) 민중, 민족 목회자



1.생애 개관



전덕기 목사는 운양호 사건에 이은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오랜 쇄국의 빗장을 풀고 개항을 표시햐ㅏ던 1875년 12월 8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全漢奎)와 어머니(林)씨는 그가 9세 도딘 해 모두 별세하여 고아가 되었고 이후 숙부인 전성여(全成汝)의 집에 들어가 성장하였다. 숙부의 직업이 숯장수인 것으로 미루어 전덕기 가문의 신분 계층은 상인계층일 것으로 추측되며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적인 고독과 경제적 곤란을 체험하며 살았다.



그의 나이 17세 때인 1892년 그는 당시 "양귀자"(洋鬼子) 즉 '양도깨비'로 오해받던 서양 선교사를 스스로 찾아갔다. 정동에 있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W.B.Scranton)의 집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가 스크랜턴을 찾아간 동기는 신앙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경제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장하여 이제는 자립의 생활을 해야 할 그로서는 경제적 수단의 하나로 선교사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스크랜턴은 그를 자기집 고용인으로 맞아 들였고 전덕기는 신용있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러나 스크랜턴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 수단으로 선택한 선교사,그의 뒤에 있는 기독교가 그를 정신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결국 4년만인 1896년 그는 스크랜턴에게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의 기독교 신앙고백은 그보다 훨씬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스크랜턴은 1893년 상동구역을 조직, 병원(1889년 설립)과 함께 교회 조직을 갖추었고 1895년부터는 아주 상동으로 집을 옮겨 주로 상민을 대상으로 한 선교에 전념하였는데 전덕기가 그의 동역자 역할을 한 것이다.



전덕기는 1898년 상동교회 속장이 되어 평신도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때 교회 안에 엡윗청년회를 조직,민주적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899년에는 교회 안에 설립된 공옥학교 교장이 되어 주로 불우한 형편에 있던 청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1년 평신도로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권사직을 받았고 1902년에는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전도사로 임명받아 목회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3년 엡윗청년회가 정치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선교사에 의해 해산당하자 교회안에 청년학원을 설립, 보다 적극적인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같은 민족주의 사상을 지닌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이나 1907년의 헤이그밀사 사건은 상동청년학원 내지는 '상동파'로 불리는 민족주의자들의 항일운동이었다.



그러면서도 감리교 선교부가 주관하는 교역자 양성과정인 '신학회'에 꾸준히 참석하여 마침내 1907년 집사목사(현재의 감리교 준회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스크랜턴의 후임으로 상동교회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회자로 부임하여 별세하기까지 목회하였다. 상동교회 담임목사 외에 그는 공옥학교 교장으로 계속 교육에도 종사하였고 황성기독청년회(현YMCA)조직과 활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1907년 미국에서 안창호가 일시 귀국하면서 산재해 있던 민족운동 세력들이 규합되어 소위 신민회가 형성되었는데 전덕기는 이 모임의 핵심 멤버가 되어 본격적인 민족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이 신민회 조직은 일제의 조선 합병에 걸림돌이 되었고 이에 일제는 합방(1910년)직후 항일 민족세력 제거에 나서 그 첫 대상으로 기독교인이 주축을 이룬 신민회를 삼았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1911년의 '데라우찌 암살음모사건'으로도 알려진 '105인 사건'이다. 윤치호,이승훈,양기탁,임치정 등 신민회 핵심 멤버들이 모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는데 이때 전덕기도 체포되어 엄청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11년 봄,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그해 겨울에 졸업하였는데 졸업 즉시 체포되어 악형을 받았다. 재판에까지 회부되지는 않았으나 고문으로 병을 얻어 불기수로 풀려난 것이다. 고문의 여독으로 늑막염과 폐결핵을 앓기 시작한 그는 이후 2년 동안의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 1912년부터 후배 현순목사가 부목사로 와서 그를 도왔으나 전덕기 목사가 강단 위에 서는 것은 좀처럼 보기가 힘들었다. 1913년에는 허리에 악성 종기까지 발병하였고 1914년 1월부터는 아예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한채 병고에 시달리다가 1914년 3월 23일 교인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39세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주여 주여 이 죄인을 구원하여 주소서"라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나는 천사와 더불어 돌아가노라"는 교인들을 향한 고백이었다.





2. 민중목회

'민중'을 어떻게 개념 규정하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도 신학계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이지만 일단 성서를 근거로 하여 예수의 선교 대상이 되었던 '가난한 자,포로된 자,눈 먼 자, 눌린 자(눅4:18)들로 본다면 전덕기의 목회는 바로 이들 민중을 위한 헌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전덕기 자신이 민중의 부류에 속한 사람이었다. 9세 때 고아가 되었고 숯장수하는 숙부의 양육을 받으면서 그는 당시 조선의 소외된 민중의 삶을 체험하였을 것이다. 특히 당시 장사아치들이 많이 모였던 남대문안 상동 거리는 그의 삶의 체험 무대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버려진 사람들, 양반보다는 상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고난과 슬픔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스크랜턴의 목회 신학이 맞아 떨어졌다. 스크랜턴은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서민적이고 조선 민중에 동정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전 의사로서 먼저 활동하였다. 그가 정동에서 상동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초기 상동교회는 이러한 민중들의 교회였다. 중인이하의 상민계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스크랜턴의 보고가 이것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 교회엔 과거 정부관리인으로 있던 자들도 있으나 그래도 우리 교인은 대체로 중인 계층입니다. 부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반대로 가난하고 나이 많은 이들이 상당히 많은데 지난겨울 그들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업무였습니다.



스크랜턴의 부재시 상동교회를 맡아 보았던 스웨어러(W.C.Swearer)도 같은 보고(1898)을 하고 있다.



"이 교회(상동교회) 교인은 대부분이 가난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할 것입니다. 겨울동안에도 이러한 목적으로 모금한 결과 30원이 걷혔습니다. 또한 우리 교인들 가운데 극빈자들이 죽는 경우 그 장례비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그 목적으로 쓸 돈 10-12원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소외받은 자, 병든 자들이 교인 대다수를 이루고 있고 그들의 구휼과 치료, 죽은 후의 장례까지 책임지는 교회 이것이야말로 민중교회인 것이다. 상동교회가 이같이 민중교회가 되기까지는 무엇보다 스크랜턴의 선교의지와 함께 민중 계층 출신의 전덕기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전덕기는 민중과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인 노방전도를 실시하여 큰 효과를 얻었다.



조선인 전봉윤(전덕기)과 최근 나(W.C. Swearer)에게 세례받은 박바울 두 사람은 한 동안 교회 앞에서 노방전도를 실시하였습니다. 어떤 때 보면 이 젊은 사람들이 열을 토하며 전하는 복음을 들으려 지나가던 행인들이 모여들어 수많은 군중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전도하면서 1천매 정도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고 많은 양의 쪽복음과 교리서들을 팔았습니다.(1902년 보고서)



전덕기는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바깥을 향해 들어오라고 손짓만 하는 그런 목회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먼저 바깥 민중들을 향해 나갔다. 길에서 민중을 만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의 삶을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현장인 길이 그의 목회현장이었다. 특히 가난한 백성, 질병으로 고생하는 민중이 그의 주된 목회대상이었다. 평소 동료나 후배 목회자들에게 목회자가 항상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장례를 위한 나막신, 마른 쑥, 의지를 갖추고 있으라고 권면한 것도 평소 부패한 시체를 많이 다루어 본 목회자의 생활체험에서 나온 교훈으로 풀이될 수 있다.



전덕기는 평범한 목회인이면서 또한 비범한 민족운동가였다. 그것은 민중목회를 통해 확인한 이 땅의 민족현실을 묵과하지 않고 그 치유와 게도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민족운동가적 활동은 민중목회를 통한 신앙체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는 민족정신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일을 자기 목회의 한 부분으로 삼았다.



그리고 교회 목회와 이와 같은 계몽, 교육 사이의 갈등이나 마찰을 느끼지 않으면서 훌륭히 처리해 나갈 수 있었다. 교회 안에 엡윗청년회,공옥학교,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제2세 교육을 추진한 것이라든지 독립협회,YMCA 신민회 등 민족운동단체에 가입하여 활약한 것 등은 민중 목회를 통해 확인한 민족의 현실을 치유하고자 하는 목회자적 양심에서 비롯된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상동청년학원 안에서 발생하던 '가 뎡 잡지'에 전덕기의 단편적인 글 몇편이 소개되고 있는데 주로 계몽적인 것들이다.'놀고 먹는 사람'이란 글의 일부를 읽어 보자.



대져 우리나라 집안을 의론하거딘 오날날 엇지 ㅎ여 이 자티빈악 ㅎ고 곤궁ㅎ한 디경을 당ㅎㄴ뇨 그 원인을 궁구 ㅎ면 여러가지 폐단이 만커니와 데일 큰 폐단은 집집마다 놀고 먹는 사람이라 유의유식ㅎ는 여러 형뎨들이여 누가당신을 기다릴 사람이 어디 잇소...쏘 남을 의지 ㅎ는 것이니 삼ㅅ촌,오륙간촌간에 벼섬이나 ㅎ든지 월급푼이나 밧든지 ㅎ면 말ㅎ기를 내가 굼는 것을 보면 필경 얼마 보내겠지 ㅎ며 기다리고 안젓으니 이 기다리는 마움가지고 다른디 쥬의 ㅎ엿으면 만ㅅ에 이루지 못할 것이 업을 것이어근 셰월을 이자티 놀고 보내니 엇지 가련코 앗갑지 안이ㅎ리요 우리가 날로 바라는 것은 젼국의 놀고 먹는 사람이 업서 ㅈ긔가뎡을 남에게 의지ㅎ여 바라지 말고 독립가뎡으로 살기를 간졀히 바라납나이다. (가뎡잡지,1권 3호,1906).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 가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전덕기는 가난한 민족현실을 타개하는 길은 자립과 독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라 위기에 처해있는 국가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였다. 재정이 고갈상태에 이른 정부,그 곤란한 형편을 타개하기 위해 외세에 의존하려는 정치지도자들간에 친일파,친로파,친청파 등으로 나뉘어 정쟁을 일삼는 우리 현실에 대한 경고이며 교훈이었다. 민족자존의 방법만이 민족 생존의 길임을 깨달았던 그는 학교, 학원을 통해 민족정신을 계몽,교육하는 한편 같은 의식을 가진 동료들을 규합,보다 적극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1905년)과 헤이그밀사 파견(1907년)및 신민회운동(1907-1911)년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덕기의 민족운동을 그의 민중목회의 연장으로 이해해야 하며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어린시절 체험했던 민중 체험에까지 소급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민중목회와 민족운동,이 둘은 전덕기에게서 하나로 연결되었고,찬란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덕주)   kcm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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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진호목사님의 유가족이 기증하신  * 목 사 전 덕 기 약 사( 牧 師 全 德 基 略 史) *



< 이 자료는 원래 김진호목사(金鎭浩牧師)가 보관하다가 별세 후 세째아들인 김희영씨가 보관중 송길섭목사(전 감신대 교수)가 자택을 방문하여 이 자료를 보고 중요자료라하여 갖고 갔다가 상동교회에 기증. 1990년 11월 10일 상동교회 박물관에 현재보관 중 복사하여 옴. 김주황 >



   목사(牧師)의 성(姓)은 전(全)이요 휘(諱)는 덕기(德基)니 본(本) 정선인(旌善人)이라. 부휘(父諱)는 한규(漢奎)요, 모(母)는 임씨(林氏)니 일찍 경성(京城) 서부(西部)정동(貞洞)에 거(居)하였더라.



   1875년 12월 8일에 공(公)이 정동사저(貞洞私邸)에서 생(生)하니 천성(天性)이 관오(款晤)하여 유시(幼時)에도 부모(父母)를 순종(順從)함이 성인(成人)과 여(如)하더라. 후(後) 1884년 8월에 부한규(父漢奎)가 몰(沒)하고 동11월에 모임씨(母林氏)가 역몰(亦沒)하니 시(時)에 공년(公年)이 9세(歲)라.



   정세영고(情勢榮孤)하여 사고무의(四顧無依)하고 년차유약(年且幼弱)하여 고불능자 변생활(姑不能自辨生活)이라. 어시(於是)에 그 숙부(叔父) 성여가(成汝家)에 왕의(往依)하니 성여(成汝)가 그 고독무양(孤獨無養)함을 애(愛)하여 무휼(無恤)함이 기출(己出)과 무이(無異)하더라.



   그 후(後)에 선교사(宣敎師) 아펜셀라씨(雅扁薛羅氏)와 박사(博士)시란돈씨)施蘭敦氏)와 그 대부인(大夫人) 변돈시란돈(邊墩施亂敦)씨가 원(遠)히 미주(美洲)로부터 래(來)하여 정동(貞洞)에 교거(僑居)하여 주(主)의 진도(眞道)를 전파(傳播)할새 시(時)에 국인(國人)이 목지이이유(目之以異類)하고 양지이이단(壤之以異端)하여 신교자(信敎者)를 대지여이복(待之如夷복) 고(故)로 인개준순기피(人皆준巡忌避)하여 진교(進敎)를 불긍(不肯)하더라.



   공(公)이 또한 반시(反視)의 측(側)에 립(立)하여 선교사(宣敎師)를 종종무시(種種無視)하여 방해(妨害)하고자 하더니 일일(一日)은 그 주택(住宅)에 와력(瓦력)을 난척(亂擲)하여 유리창(琉璃窓)이 파쇄(破碎)한지라.



   일인(一人)교사(敎師)가 출(出)하여 먼저 소갈(소喝)을 용(用)치 아니하고 도리여 온언(溫言)을 가(加)하여 위무(慰撫)하여 주(主)를 신(信)하라 권(勸)하거늘 시(時)에공년(公年)이 17이라. 차(此)가 동기(動機)가 되여 그 교사(敎師)의 언(言)이 공(公)의 심흉(心胸)을 감동(感動)하였더라.



   이에 중노(衆怒)와 군정(群정)을 고(顧)치 아니하고 선교사(宣敎師) 시란돈(施蘭敦)씨를 종(從)하여 주(主)의 진도(眞道)를 학(學)할새 주(晝)에는 인(人)의 용역(傭役)을 작(作)하여 생활(生活)하고 야(夜)에는 성서(聖書)를 연구(硏究)하여 거의 식식(息食)을 망폐(忘廢)하더라.



   공(公)의 근독(勤篤)은 자못 천성(天性)이라. 비록 기한서우(祈寒署雨)가 유(有)할지라도 예배야(禮拜也) 기도야(祈禱也)에 일차(一次)도 결석(缺席)함이 무(無)하고 더욱 진리(眞理)의 각오(覺悟)가 심(深)할수록 공(公)의 영성(靈性)이 점점(漸漸) 발휘(發揮)하더라.



   1896년에 시란돈(施蘭敦)씨에게 세례(洗禮)를 수(受)하고 동(同) 18년(年)에 속장(屬長)의 직(職)을 수(受)하였고 1901년에 경지방회(京地方會)공천(公薦)으로 상동교회(尙洞敎會) 권사(勸師)를 피임(被任)하였고 동(同) 2년(年)에 전도사(傳道師)의 직첩(職帖)을 수(受)하였더라.



   자후(自後)로 천국(天國)사업(事業)에 헌신(獻身)하여 일호(一毫)라도 기사(己私)의 물루(物累)를 고(顧)치 아니하고 전(全)혀 주(主)를 수(受)함과 인(人)을 구(救함에 진심(盡心)진력(盡力)하는 고(故)로 평거(平居)에 용등(容등)의 일옥(一屋)이 무(無)하고 계곡(係穀)이 항상 부족(不足)하더라.



   인(人)의 애경(愛慶)과 우락(憂樂)을 항상 같이하는 고(故)로 교우(敎友) 중에 병자(病者)가 유(有)하면 의사(醫師)를 불청(不請)하고 먼저 목사(牧師)를 청(請)하며 손자(喪者)가 유(有)하면 난고(難苦)와 위험(危險)을 불고(不顧)하고 진력(盡力)고견(顧見)하더라.



   처음으로 주(主)의 교회(敎會)가 먼저 정동(貞洞)에 권여(權輿)하였으니 선교사(宣敎師)등의 내한(來韓)주거(住居)가 차(此)에 시(始)함일러라 . 어시(於是)에 경성(京城) 남문내(南門內)에 또 전도(傳道)구역(區域)을 특정(特定)하고 달성위궁내(達城尉宮內)에서 임시(臨時) 예배(禮拜)를 보았으니 차(此)는 곳 시란돈(施蘭敦)씨의 사옥(私屋)이러라.



   일시(一時) 권차(權借)에 불과(不過)한 고(故)로 선(先)히 시란돈가(施蘭敦家) 월편(越便) 상동(尙洞)에 수십간(數十間) 옥자(屋子)를 신축(新築)하고 전도(傳道)와 예배(禮拜)를 차(此)에 확정(確定)하였으니 자차(自此)로 상동교회(尙洞敎會)라 하는 기명(基名)이 종교계(宗敎界)에 현(現)하게 되었더라.



   공(公)이 본교회(本敎會) 설립시(設立時)부터 회개(悔改)수세(受洗)하였고 1818부터(?) 시무(視務)하여 신혼(身魂)의 노취(勞취)와 생활(生活)의 고련(苦련)을 끽주(喫晝)하여 영적사업(靈的事業)에 도취무여(도취無餘)함으로 형제자매(兄弟姉妹)들이 다 애지경지(愛之敬之)하여 매양 연회시내(年會時內)이면 환체( 換遞)될까 예공(預恐)하더라.



   교우(敎友)가 점점 증가(增加)하여 현시(現時) 예배소(禮拜所)는 수용(收容)키 난(難)한 고(故)로 내외국인(內外國人)의 의연(義捐)을 구취(鳩聚)하여 교당(敎堂)을 다시 건축(建築)하니 근(近) 백간(百間)이오 가용(可容) 천여인(千餘人)이라. 차시(此時)에 다수(多數)의 교우(敎友)가 원흥좌(苑興左)하여 하나님을 찬송(讚頌)하더라.



   1903년(年)에 본감리회(本監理會) 규칙(規則)을 의(依)하여 엡웻청년회(靑年會)를 설립(設立)하니 회원(會員)이 무려(無慮) 수천(數千)이라. 공(公)이 회장(會長)으로 출석(出席)하여 매주(每週) 木曜 하오(下午) 7時에 통상(通常) 회(會)를 개(開)하고 주(主)의 말씀 전파(傳播)하기와 고통(苦痛)에 함익(陷溺)한 인민(人民)을 구원(救援)하는 일에 출력(出力)하고 그 중에 특색(特色)으로 칭(稱)할 자(者)는 아민(我民) 1014인(人)인 무뢰(無賴)의 유화(流話)를 인(因)하여 묵서가(墨西哥,멕시코)에 견매(見賣)하였더니 이족(異族)의 학대(虐待)와 난민(鸞民)의 악행(惡行)이 무소부지(無所不至)하여 태(殆)히 생명(生命)을 지(支)치 못하는 고(故)로 차(此)를 시찰(視察)코자 엡에 회(會)에서 발기(發起)하여 2인(人)을 파송(派送)하였고 또 청년학원(靑年學院)을 설립(設立)하여 교육(敎育)에 노력(努力)하였더라.



   그 후(後)에 시세(時勢)의 저애(沮碍)를 인(因)하여 엡웻회(會)는 정지(停止)하였고 그 후신(後身)되는 청년학원(靑年學院)은 계속(繼續) 유지(維支)하더라. 연(然)이나 경비(經費)가 군색( )하여 자기(自己)의 진금( 金)을 경주(傾晝)하고 사회(社會)의 의금(義金)을 청구(請求)하며 기어( 於)이 활동(活動) 하정(何 )의 이용(利用)으로 왕왕(往往) 보용(補用)하여 기어(其於) 7회(會) 졸업(卒業生)까지 수여(授與)하였으니 금일(今日) 그 교육(敎育)을 수(受)한 졸업생(卒業生)이 혹(或) 교육(敎育) 혹(或) 전도(傳道) 혹(或) 상업(商業)으로 족(足)히 공(公)의 지망(志望)을 부(副)할 자(者)가 다(多)하더라.



   또 1904년(年)에 상동교회내(尙洞敎會內)에 공옥학교(攻玉學校)를 설립(設立)할새 초(初)에는 전도실(傳道室)에서 아동(兒童) 6,7명을 모집(募集)하여 교수(敎授)하더니 그 후(後)에 점차(漸次) 증모(增募)되여 이백여명에 달(達)한지라. 공(公)이 차(此)에 분발(奮發)하여 오천여원의 의금(義金)을 우득(又得)하여 교우(敎友)를 건축(建築)하니 가용(可容) 삼백명 생도(生徒)라. 아(我) 감리회(監理會)의 일초안(一稍完)한 소학교(小學校)라 칭(稱)하더라.



   1907年에 매년(每年) 회장(會長) 하리스(河理스,해리스)씨의 안수(按手)로 목사(牧 師)성품(聖品)을 수(受)하고 동(同) 10년(年)에 장로사(長老師)의 성품(聖品)을 우수(又受)하였더라.



   자후(自後)로 신체(身體)의 건강(健康)을 고(顧)치 아니하고 더욱 사업(事業)에 노취(勞취)하더니 시년(是年) 춘(春)에 인천(仁川)교회(敎會)에 하왕(下往)하여 사경회(査經會)를 인도(引導)하고 회환(回還)하는 차상(車上)에서 구혈증(龜血症)이 생(生)하여 부병귀가(扶病歸家)한 후(後)에도 일(日)로 쇠약(衰弱)에 함하여 일년(一年) 2,3차(次)씩 발병(發病)하는 시(時)는 매매(每每) 기절복소(기絶復蔬)하더라.



   연(然)이나 병간(病間)이면 한번도 상석(床席)에 위(委)치 아니하고 반듯이 근무(勤務)하여 동년(同年) 추(秋)에 다시 신학교(神學校)에 상학(上學)하여 동년(同年) 12월(月)에 졸업(卒業)하였더라.



   또 상동교회(尙洞敎會)로 중심(中心)을 작(作)하고 전도(傳道)의 구역(區域)을 점차(漸次) 확장(擴張)함에 부속(附屬)한 지회(支會)가 범(凡) 6처(處)에 성라(星羅)하였더라. 교회(敎會)의 일어난 순서(順序)와 지명(地名)이 여좌(如左)하니 1907년 공덕리교회(孔德里敎會) 1907년 창의문교회(彰義門敎會) 1908년 연화봉교회(蓮花峯敎會) 1910년 북장동교회(北壯洞敎會) 1912년 사촌리교회(沙村里敎會) 1913년 녹번현교회(碌번峴敎會)



   병세(病勢)가 점점(漸漸) 침고(沈痼)하여 교무(敎務)를 친집(親執)키 난(難)한 고()故로 1913년도(年度) 매년회(每年會)에 지(至)하여 본교회(本敎會)에 부목사(副牧師)를 치(置)하여 보좌(補佐)하고 공(公)은 휴가정양(休暇靜養)케 하였더니 익년(翌年) 추(秋)에 腰部에 대종(大종)이 우발(又發)하여 부득기 의사(醫師)의 수술(手術)을 받게 되었더라.



   연(然)하나 공(公)이 병석(病席)에 와(臥)하여도 혹(或) 교우(敎友) 중에 오래 출석(出席)치 않은 자(者)가 유(有)하면 반듯이 송인권면(送人勸勉)하며 인()人을 대(對)하여도 자기(自己)의 병력(病力)을 출(出)하여 진리(眞理)를 경각(警覺)케 하며 죄인(罪人)을 위(爲)하여 기도(祈禱)하는 말이 태(殆)히 구부절성(口不絶聲)하더라.



   또 익년(翌年) 춘(春)에 지(至)하여는 더욱 침중(沈重)하여 와상불기(臥床不起)하는고(故)로 일반(一般) 형제(兄弟)자매(姉妹)가 기도회(祈禱會)를 개(開)하고 병유(病愈 )하기를 간절(懇切)기도(祈禱)하더라.



   동년(同年) 3월(月) 23일(日) 하오(下午) 1시(時)에 상동주택(尙洞住宅)에서 영혼(靈魂)이 이세(離世)하시니 본교회(本敎會) 임원(任員)등이 협의(協議)하고 동월(同月) 28일 상오(上午) 10시(時)에 본교회(本敎會)에서 노보을감리사(魯普乙監理司) 주례(主禮)로 장례(葬禮)를 강(講)하며 동일(同日)에 고양군(高陽郡) 두모면(豆毛面) 수철 리(水鐵里)에 안장(安葬)하니 시(時)는 1914년 3월 28일이요 공념(公年)은 39세(歲)러라.



   그 부인(夫人)은 조씨(曺氏)니 사자(四子)를 생(生)하니라. 장(長)은 진택(鎭宅)이니 배재중학(培材中學) 별과(別科)에 졸업(卒業)하고 차(次)는 진원(鎭垣)이니 배재(培材)에 재학(在學)하고 그 차(次)는 진수(鎭守)니 공옥학교(攻玉學校)에 재학(在學)하고 그 차(次)는 진국(鎭國)이니 상학어음유(尙學語飮乳)러라.

                                                                                          애산교회 김주황 목사     hp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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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진호목사님의 유가족이 제공하신     * 전 덕 기 목 사 소 전 1 9 4 9 년 5 월 기 록



   나는 전목사(全牧師)를 안다 할 수 있어도 그 가정(家庭)은 알지 못한다. 그는 일생(一生)에 자기를 숨기고 말하지 않음으로 상동교회(尙洞敎會)에 근(近) 이십년 주재(駐在)하여 있고 교우들이 부모(父母)와 같이 사랑하건만 전목사(全牧師)의 생일(生日)을 아는 사람이 없고 다만 그의 친지(親知)들에게 들으면 그는 병자생(丙子生)이고 그의 가정(家庭)은 정동(貞洞)에 있었는데 어려서 부모(父母)를 여의고 숙부(叔父) 전성여(全成汝)에게 양육(養育)을 받았다고 한다.



   전성녀씨는 枾炭商(시탄상:북창동-숯장사)으로 생활(生活)하는 중 너무 빈곤(貧困)하여 매양(每樣) 그 조카에게 교육(敎育)을 주지 못함을 유감(遺憾)으로 생각하였으나 전목사(全牧師)는 근본 총명(聰明)한 사람이라 이웃집 서당(書堂)에 가서 어깨너머로 배워 들은 것이 약간 한자(漢字)를 알게 되고 신학(神學)을 공부(工夫)한 후에는 이것 저것 섭렵(涉獵)하여 상당(相當)한 지식(知識)을 수입(收入)하였다.



  어릴 때에 몹시 불량(不良)하여 사람을 잘 때리고 서양인(西洋人)들이 처음으로 정 동(貞洞)에 들어와 있으며 무슨 교(敎)를 전파(傳播)하매 사람들이 모여 성경(聖經)을 공부(工夫)하는데 전목사(全牧師)는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기와 공부(工夫)하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모욕(侮辱)을 더하기를 마지 않았다.



   한번은 선교사(宣敎師) 스크랜톤의사가 조선(朝鮮)에 들어와 조선(朝鮮)정부(政府)의 지휘(指揮)로 전도(傳道)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교육(敎育)과 의료(醫療)만 허(許)하는 고로 스크랜톤의사는 개업(開業)하고 사무원(事務員)을 구하는지라. 전성녀씨는 그 조카를 병원(病院)에 소개(紹介)하여 일을 보게 되었다.



   스크랜톤 대부인(大夫人)이 전목사(全牧師)를 보고 끔찍이 사랑하여 범백(凡百)을가르쳐 주며 특히 가정예배(家庭禮拜)를 볼 때에는 일부러조선(朝鮮)말을 사용(使用)하여 전목사(全牧師)로 말을 알아 듣게 하였다. 전목사(全牧師)는 이에 감동(感動)을 받아 차차 진리(眞理)를 배우게 되였다. 전에 돌을 던지던 일과 사람을 모욕(侮辱)하던 일을 다 뉘우쳐 고치고 양순(良順)하고 부드러운 새사람이 되었다. 전에 같이 놀던 친구들도 보고서 놀라며 하는 말이 네가 어찌 이렇게 변(變)하였느냐 하였다.



    우리 감리교회(監理敎會)가 비로서 정부(政府)의 인가(認可)를 얻어 전도(傳道)하기 시작하여 정동(貞洞)에 제일예배당(弟一禮拜堂 )을 짓고 상동(尙洞)에 제이예배당(第二禮拜堂)을 세우고 스크랜톤목사가 주관(主管)하는 고로 전목사(全牧師)도 스크랜톤목사를 도와 상동(尙洞)에서 예배(禮拜)하며 그 교회(敎會)에서 권사(勸師)와 전도사(傳道師)가 되었었다.



   이 때의 한국(韓國)정부(政府)는 날로 부패(腐敗)하여졌다. 매관매작(賣官賣爵)하여 번군동상(煩君同上)하는 간세배(奸細輩)들이 朝權(조권:조정의 권리)을 잡고 있으며 따라서 일본공사(日本公使) 임권조(林權助)가 간세배를 이용(利用)하여 조정(朝政)을 어지럽게 하며 점차 한국(韓國)의 이권(利權)을 잠식(蠶食)하는 때라.



   민간유지(民間有志)의 발기(發起)로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만들어(참조;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 창립, 1898년 11월 4일 해산) 장소(場所)는 독립관(獨立館)으로 정하고 일주일(一週日)에 한번씩 회원(會員)들이 모여 시사(時事)를 토론(討論)하며 시정(時政)을 풍자(諷刺)하기 시작하였다.



   회원(會員)의 대부분은 기독교인(基督敎人)이 많았고 그 회(會)의 주관(主管)은 이상재(李尙在), 이승만(李承晩),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등이다. 백성들이 時政(시정)의 부패(腐敗)를 원망하던 중 이런 정치(政治)의 비평(批評)의 소리를 듣고 모두 박수갈채(拍手喝采)하며 회일(會日)이면 민중(民衆)들이 구름같이 모여 그 연설(演說)을 듣고 모두 통쾌(痛快)히 생각한다.



   그 때에 산림천택(山林川澤)을 일인(日人)에게 매긱(賣긱)하려는 운동(運動)이 있었다. 본회(本會)에서는 이 소문을 듣고 각부(各部) 대신(大臣)을 청하여 질문(質問)하여 그런 매국(賣國)행위(行爲)를 곧 정지(停止)하라고 권고(勸告)하여 계약(契約)을 해제(解除)한 일이 있었고 그 외에 제반(諸般) 행정(行政)에 긍(亘)하여 협회(協會)에서 아는대로 간섭(干涉)하여 그들의 비행(非行)을 규탄(糾彈)하니 이것이 시제(時霽)들이 가장 미워하는 바이요 협회(協會)를 해산(解散)하려고 고심(苦心)중이다.



   그 때 전목사(全牧師)의 연설요지(演說要旨) 일부(一部)를 들면 '항해학(航海學)을 알지 못하는 자가 함장(艦長)이 되여 배를 몰고 험(險)한 바다를 건너가 배가 암초(暗礁)에 걸려 깨여지면 배 안의 사람은 그 함장(艦長)으로 인하여 다 죽고 말지라. 그와 같이 지금 대관(大官)들이 국가(國家)가 무언지 민족(民族)이 무언지 정치가(政治家) 무언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정부(政府)요로(要路)에 있으며 나라를 지도하니 이 나라는 필경 암초(暗礁)에 걸린 배와 같이 깨어질지라. 이 나라의 목숨을 담은 우리 민족(民族)은 다 멸망(滅亡)코 말지니 이 일이 답답하지 않으냐'고 외치니 장내(場內)는 우뢰가 움직이는 것처럼 박수갈채(拍手喝采)하였다.



   그 후에 협회(協會)는 필경 정부(政府)고관(高官)들의 시기로 부상패장(負商牌長장사꾼) 길영수(吉泳洙)를 시켜 협회(協會)를 습격(襲擊)하여 다시 모이지 못하게 되고 이상재(李商在), 이승만(李承晩) 양씨(兩氏)는 피검(被檢)되고 이여(爾餘나머지 사람) 는 도외(逃外)하고 이여(爾餘)는 전목사(全牧師)를 따라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로 옮겨 들어왔다.



   우리나라 독립(獨立)이란 말이 독립협회(獨立協會)로부터 생겼고 그 정신(精神)은 상동(尙洞)에서 함양(涵養)되었다. 이 때에 전목사(全牧師)는 비로서 목사안수(牧師按手)를 받고(1907년 33살 때) 상동교회(尙洞敎會)를 담임(擔任)하였고 동시(同時)에 청년회장(靑年會長)이 되었다.



   청년회(靑年會)에는 매주(每週) 목요일 하오 7시에 집회(集會)하여 잠깐 예배(禮拜)와 기도(祈禱)를 드리고 시사(時事)논평(論評)이 있었다. 독립협회(獨立協會) 때와 다름없이 가장 격렬(激烈)한 풍자(諷刺)와 비평(批評)이 있었다.



   그 때에 시사(時事)가 점점 글러지고(잘못되고) 대관(大官)들의 비행(非行)은 모두 매국행위(賣國行爲)에 지나지 못함으로 도처(到處)에 민심(民心)이 분사(憤査)하여 수습(收拾)이 어려울 때라. 회(會)의 간부(幹部) 몇 사람이 상동교회(尙洞敎會)의 지하실(地下室)에 따로 모여 결사구국(決死救國)을 목적하고 무형(無形)한 회(會)를 조직(組織)하니 곧 신민회(新民會)이다.



   간부(幹部)로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양기탁(梁起鐸)씨 등이고 신민(新民)은 비밀(秘密)에 속(屬)하고 회(會)로는 청년회(靑年會)가 있고 기관지(機關紙)로는 매일신보(每日申報)가 있고 교육(敎育)으로는 청년학원(靑年學院)이 있었다. 신민(新民)이 비록 무형(無形) 무명(無名)에 속(屬)하였으나 그 정신(精神)은 해내(海內), 해외(海外)로 파급(波及)이 민속(敏速)하여 신민(新民)의 말을 한번 들은 사람은 죽음을 아끼지 않고 달겨들어 부탕(赴湯뜨거운물)염화(焰火)라고 사양치 않을 만큼 석화전광적(石火電光的)으로 신속(迅速)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큰 역할(役割)을 하였고 그 회(會)에는 안창호(安昌浩)선생의 열렬(熱烈)한 변설(辯說)과 기타(其他) 회원(會員)들의 선전(扇傳)으로 불같이 일어났다. 모두 지하(地下)로 되었고 표면(表面)으로는 죽은 듯이 아무 힘이 없었다.



   그러나 눈치빠른 일인(日人)들이 상동(尙洞)을 주목(注目)하여 청년회(靑年會)를 없이 하려고 백방(百方)으로 운동(運動)하였고 선교사(宣敎師)들을 보고 청년회(靑年會)를 해산(解散)하라고 권(勸)하여도 듣지 않으니 직접(直接) 고종황제(高宗皇帝)께 아뢰어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가 나라에 불온(不穩)한 단체(團體)라 하여 해산(解散)을 청(請)하였다.



   그 때에 시제(時宰)들은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미워하던 마음이 또 청년회(靑年會)를 미워하여 칙령(勅令)으로 해산(解散)을 명(命)하였다. 망국근성(亡國根性)을 가진 소위(所謂) 대관(大官)들은 한 사람도 이를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일인순사(日人巡査)가 교회(敎會)안에 함부로 들어와 검거(檢擧)에 착수(着手)하니 교회(敎會)를 의지(依支)하고 있던 이동녕(李東寧)은 만주(滿洲)로 들어가고 이회영(李會榮)도 같이 입만(入滿)하였다.



   전목사(全牧師)도 병(病)으로 오랫동안 신음(呻吟)하는 고로 지방(地方)의 연락사무(聯絡事務)를 나에게 위임(委任)하여 나는 힘있는 대로 출력(出力)하여 도와주었고 병중(病中)이라고 기동(起動)할 수만 있으면 회원(會員)들을 격려(激勵)하는 것과 활동(活動)하는 방법(方法)을 친(親)히 지도(指導)하였고 어느 때는 병상(病床) 옆에 있는 나를 부르며 형(兄)님 어찌하면 좋으오 동지(同志)들이 다 흩어졌으니 이 곳에 남은 자는 우리 둘뿐이니 우리는 사력(死力)을 다하여 신민정신(新民精神)을 지켜야지요 한다.



   그러자 마침 어느 시골목사가 와서 하는 말이 '오늘 배재광장(培材廣長)에서 일본목사(日本牧師) 평암(平岩)의 연설(演說)이 있었는데 조선교회(朝鮮敎會)와 일본교회(日本敎會)가 합동연회(合同年會)를 보자 하니 종교(宗敎)에 어디 원수(寃讐)가 있오. 형님 생각은 어떠시요.'하니 전목사(全牧師)는 별안간 소리를 높여 대답(對答)하되 '여보 목사양심(牧師良心)에서 나온 소리요. 양심(良心)이 허락(許諾)하거든 행하시요'라고 말하였다. 그 후로는 그 목사(牧師)는다시 전목사(全牧師) 앞에 오지 못하였다.



   정의(正義)에 대(對)하여 절대성(絶對性)을 가진 전목사(全牧師)는 그런 간세배(奸細輩)를 일절(一切) 용납(容納)치 않았고 또 한번은 어느 선생(先生)이 찾아와서 말하되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물질(物質)이 필요(必要)하니 내가 수만(數萬)여원을 변통(變通)할 터이니 사용(使用)하시요 '한다. 전목사(全牧師)는 묻되 '선생(先生)이 무슨 돈이 있오. 필경 어느 곳에서 얻어 오려는지 자세히 말씀하시요'하자 그는 답(答)하되 '송병준(宋秉晙)이라'한다. 전목사(全牧師)는 손을 흔들며 역적(逆賊)의 돈을 얻어 나라를 구원한다는 일은 할 수 없오.



   지방(地方)에 있는 동지(同志) 연락(聯絡)과 내왕(來往)에 물질(物質)이 있어야 할 때는 자기가 동대서취(東貸西取)하여 사용하느라고 그 숙부(叔父)의 소유(所有)인 가옥(家屋)까지 전집차용(典집借用)하였다. 그 가옥(家屋)을 잡힐 때 돈 삼백원을 차용(借用)하였는데 집에 와서 돈을 헤어보니 돈이 삼백오십원이다. 그 즉시(卽時)로 돈 오십원을 가지고 전포주(典鋪主)에게 주고 이유(理由)를 설명(說明)하니 전주(典主)는 너무 감사(感謝)하였다.



   상동(尙洞)를 중심(中心)하고 각처(各處)에 지교회(支敎會)를 설립(設立)하고 전도(傳道)하였는데 공덕리(孔德里), 새남터, 궁정동(宮井洞), 창의문외(彰義門外) 등지이다.



   그의 설교(說敎)는 평범(平凡)하여 알아듣기 쉽고도 격려(激勵)가 심(甚)하였다. 주를 믿으면 참으로 믿고 나라를 사랑하거든 참으로 사랑하라 하니 그의 설교(說敎)에 정신(精神)이다. 일측(日側)의 정탐(偵探)으로 다니던 자(者)들도 와서 그 설교(說敎)를 듣고 자기 실정(實情)을 자복(自伏)하고 용서(容恕)를 청(請)하는 자(者)도 있었다.



   자기 손으로 설립(設立)한 학교(學校) 곧 청년학원(靑年學院)과 공옥학교(攻玉學校)에 일어(日語)를 한과목 넣어 가르치라고 권(勸하는 자(者)가 있어도 전목사(全牧師)는 듣지 않았다. 전목사(全牧師)와 운명(運命)을 같이하던 청년학원(靑年學院)은 근본 청년회(靑年會)에 발기(發起)로 된 것이요 독립정신(獨立精神)을 양성(養成)하던 최초(最初)의 기관(機關)이다.



   미국(美國)에 사는 하와이 동포 강천명(姜天明)이란 청년(靑年)이 미화(美貨) 4원을 보내어 조선청년(朝鮮靑年)을 교육(敎育)하여 달라는 부탁(付託)을 받은 청년회(靑年會)에서 이 학원(學院)을 설립(設立)하고 조선청년(朝鮮靑年)들에게 독립 정신(獨立精神)을 함양(涵養)하던 유일(唯一)의 기관(機關)이다. 교원(敎員)들은 무보수(無報酬)로 교수(敎授)하였고 주시경(周時俓)씨는 조선말을 중심(中心)하고, 유일선(柳一宣)씨는 수학(數學)을 중심(中心)하여 4회의 졸업생(卒業生)을 내게 되었다.



   고종황제(高宗皇帝)는 들으시고 학원(學院)의 건물(建物)이 없음을 통촉(通燭)하시고 단성사(團成社) 건물(建物)을 하사(下賜)하시겠다는 처분(處分)이 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청년회(靑年會)에서 생각하기는 황송(惶悚)하지만 우리가 상동(尙洞)을 떠날 수가 없고 하사(下賜)를 받을 것이 없이 우리 힘으로 유지하여 보자하고 하사(下賜)를 받지 않았다그 때 시제(時帝)들이 우리 청년회(靑年會)를 방해(妨害)하던 중 만일에 하사(下賜)를 받으면 다소 그 간섭을 받지 않을까 하는 그런 의심도 있어 받지 않았다.



   이 때에 조선(朝鮮)에 개발회사(開發會社)라는 것이 있어 이들의 소개로 조선동포 1014인이 멕시코에 들어가 노동하는 중 그 고생(苦生)은 말할 수 없이 비참(悲慘)하였다. 소위(所謂) 집정자(執政者)는 개발회사(開發會社)가 무엇하는 곳인지 자기 민족이 외국으로 팔려가도 심상시 하고 있으며 민족을 구원하자는 무슨 토의(討議)가 있으면 이것을 곧 박멸(撲滅)하는 자들이다.



   전목사(全牧師)는 회(會)에 발론(發論)하기를 우리가 멕시코에 사람을 파송(派送)하여 우리동포 1014인을 데려오자고 발론(發論)하였더니 만장일치(滿場一致)로 가결(可決)되어 즉석(卽席)에서 수금(收金)하여 여비(旅費)를 만들고 그 이튿날 박용만(朴容萬) 외에 삼인을 위원(委員)으로 정(定)하여 출발(出發)하게 하였다.



   전목사(全牧師)가 남대문 안에 볼 일이 있어 나아갔더니 어느 청년(靑年)들이 따라오며 '멕시코 여비를 드립니다'하고 금품(金品)을 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인격(人格)과 덕격(德格)이 사람을 감화(感化)하여 애국(愛國)의 길로 인도함은 오직 조선목사(朝鮮牧師)중 한사람이다. 그는 물루(物累돈을 걷는데)에 뛰어나고 정의(正義)를 목표(目標)하는 위인(偉人)이다.



   그의 가장 좋아하는 글은 성경(聖經)과 역사(歷史)이다. 그의 서재(書齋)에서 혼자 있거나 사람과 같이 있을 적에 가끔 음읍(飮泣울음)을 금(禁)치 못함은 어찌하면 이 민족(民族)을 구원할까 함이다. 학원경비(學院經費)를 염출(염出)하기와 교사(敎師) 연용(延用채용)이 심히 어려웠으나 모두 다 그 성의(誠意)에 감화(感化)하여 도와주었고 특(特)히 우당(友堂) 이회영선생(李會榮先生)이 직접간접(直接間接) 노력(努力)이 많았고 또 학원생도(學院生徒)들이 무슨 웅변집(雄辯集)을 인쇄판매(印刷販賣)하니 일경(日警)에 탐지(探知)되여(나누워준것이) 수다학생(數多學生)이 검거(檢擧)되었다.



   그 후로 학원(學院)이 주목(注目)이 욱심(旭甚)하고 또 전목사(全牧師)는 병세(病勢)가 위중(危重)하여 학원(學院)에 출력(出力)이 곤란(困難)하게 되었다(경비를 댈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학원(學院)은 한 옆으로 핍박(逼迫)이 심(甚)하고 한 옆으로 유지 곤란(困難)으로 폐지(廢止)가 되었다.



   오호(嗚呼)라! 학원(學院)이 없어지는 것이 곧 나라 없어지는 것이라 하여 교사(敎師) 생도(生徒)들은 모두 통곡(痛哭)해산(解散)하였고 그 후 일년이 지난 1914년 3월 23일에 전목사(全牧師)는 필경(畢竟) 상동목사관(尙洞牧師館)에서 별세(別世)하시니 원근(遠近)에서 듣고 다 통석(痛惜)하여 마지 않으며 중국신문(中國新聞)에는 종교위인(宗敎偉人) 서거(逝去)라 제(題)하고 그의 약사(略史)를 기록(記錄)하였다.



   전목사(全牧師)가 떠난 후라도 나는 오히려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남어 있으며 잔무(殘務)를 처리(處理)하고 후임목사(後任牧師)를 도와주었다. 사람이 떠난 후에는 결점(缺點)을 발견(發見)할 수 있는데 전목사(全牧師)에 대하여서는 갈수록 유애(遺愛)가 깊었다.



   여러 해 중병(重病)에 있으므로 교회(敎會)일을 살피지 못한 고로 병석(病席)을 타처(他處)로 옮기려 할 때 직원(職員)과 교우(敎友)들이 한사코 우리 목사(牧師)님은 타처(他處)로 옮기지 못합니다. 시체(屍體)라도 우리가 모시겠는데 하물며 살아서 어디고 가신단 말이요 하고 막는 고로 떠나실 때까지 생활비(生活費)를 지불(支拂)하고 또 치료비(治療費)까지도 담당(擔當)한 적이 있었고 목사관(牧師館)을 떠나게 되었으니 교우(敎友)들이 모두 통곡(痛哭)하느니라. 이렇듯 유애(遺愛)가 깊었다. 임종시(臨終時)에는 교우(敎友)들이 밤을 새워 가며 구명기도(救命祈禱)를 올렸다.



   그의 두 가지 절대성(絶對性)을 고칠 수 없다(성격). 하나는 반종교자(叛宗敎者)요 둘째는 반민족사(叛民族者)니 이 종류(種類)의 사람은 용서(容恕)없이 질책(叱責)을 가(加)하여 회개(悔改)를 촉(促)하고 불능(不能)이면 거절(拒絶)하였다. 고로 전목사(全牧師) 생존(生存)하여 있는 동안에 그런 불의(不義)한 도배(徒輩)가 상동(尙洞) 에 오지 못하였다.



   그의 부인 조(趙)위늬씨에게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長)은 전진택(全鎭宅), 차(次)는 전진원(全鎭垣)이요, 삼(參)은 전진수(全鎭洙)인데 다 배재중학(培材中學)을 졸업(卒業)하였고 전진택(全鎭宅)은 전목사(全牧師) 별세(別世) 후에 감독(監督) 헤리스씨를 따라 미국(美國)으로 유학(留學)의 길을 떠났다.



   미령(美領미국영토) 포화도(布화島하와이)에 상륙(上陸)하니 전목사(全牧師)의 친구들이 진택군을 환영(歡迎)하고 조선총독(朝鮮總督)의 악랄(惡辣)한 정치(政治)를 장문논설(長文論說)로 신문(新聞)에 게재(揭載)하여 일경(日警)들이 진택군의 경성본가(京城本家)에 와서 가택(家宅)을 수색(搜索)하였고 해리스씨는 진택을 돌아보지 않았다. 진원(鎭垣)군은 지금 공옥학교(功玉學校) 교원(敎員)으로 있고 진수(鎭洙)군은 수년 전에 사망(死亡)하였다.



  전목사(全牧師)가 병자생(丙子生)이라면 계유생(癸酉生)인 나에 비(比)하여 삼년이 적다. 전목사(全牧師)와 같이 고생(苦生)하던 이승만박사(李承晩博士), 김구선생(金九先生)이 다시 돌아와 나라를 건설(建設)하였는데 전목사(全牧師)는 어찌하여 오지 못하고 먼저 세상(世上)을 떠났는고.



   이실난감(理實難감) 1949년 5월 11일 죽지 않고 살아있는 쓸데없는 친구 김진호 기록 77노물(老物)



   김 진호목사의 '병중쇄록'중에서 김희영(金喜永)씨의 고증 (김진호목사의 세째아들) '세째아들 진수는 나와 같이 배재에서 공부하였고, 전목사는 처음에 고문에 병이 들었으나 나중에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진수군도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부는 전목사가 병환중에 있을 때 전목사와 침식을 같이하며 내내 병간호를 하였다. 그리고 전목사 부인 조씨는 전목사 사망후 다른 곳으로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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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민일보 자료



  25. 구국일념 올곧은 신앙 한평생-민족운동가 전덕기목사



       얼마전 서울대 규장각측에 의해 1905년 한-일간의 을사보호조약은 통치권자인 고종의 국새 가 찍히지 않는 등 국제법상 효력이 없는 문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 조 약이 공포됨으로써 실제적으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 외무성에 넘어가고 서울에 통감 부(총독부 전신)가 설치돼 일제의 통감정치가 시작되는 등 조선의 식민지화는 급속도로 진 척됐다.



독립협회 창립회원 활약



일본군대가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강압적으로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민족 지사 장지연은 '이날을 목놓아 운다'(是日也放聲大哭)라는 제목의 황성신문 사설을 통해 민 족의 울분을 토로했고 전국적으로 납세거부, 상가철시, 동맹휴학, 군중시위 등 범민족적인 반대운동이 연일 끊이지 않았다. 민영환을 비롯한 십수 명의 지사는 죽음으로 이를 항의했 으며 최익현 등은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민족주의 세력의 최대 구심점이었던 교회도 당연히 이에 가담해 반대상소, 구국기도회, 심지어 무력행사 기도 등으로 조약 반대운동에 적극 나섰는데, 그 중심인물이 상동교회 전 덕기(全德基;1875-1914) 목사(당시 전도사)이다.



그의 민족애는 일찍부터 싹터 △독립협회 창립회원(21세) △상동교회 속장으로 교회 내에 에벳청년회 조직(23세) △공옥학교 교장(24세) △전도사 임직 이듬해 상동청년학원 설립(28 세) △을사조약 무효투쟁(30세) △목사 안수 받고 헤이그 밀사사건 모의(32세) 등에 그는 항 상 앞장섰다.



상동교회의 모태 상동병원을 찾은 환자들. 전덕기 목사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구제활동에 앞장 섰다. 



그가 이끌었거나 몸담았던 몇몇 기관을 보자. 우선 에벳청년회는 오늘날 감리교청년회의 전 신(에벳은 감리교 창설자 요한 웨슬리의 고향)으로 한국에서는 1897년 정동교회를 필두로 개교회 단위로 조직된 단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덕기는 조약 무효투쟁을 위해 에벳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소집했다. 독립협회와 황성기독청년회(YMCA전신) 활동을 통해 그는 이미 민족운동가로 부각되어 있 던 때였다.



평안도 진남포 청년회 총무 김구(전덕기와 백범 김구와의 동지애는 이때부터 맺어졌다), 후 일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이동녕 조성환 등 청년지사들이 전국 각 지에서 상동교회로 모였다.



<백범 김구, 이준 등과 교우>



이들은 조약무효 상소운동을 벌이기로 결의, 1차로 김구 이준 등이 덕수궁 정문 대한문에 나가 일본경찰의 총격에 맞서 투석전을 벌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수천명의 군중을 모으는 등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운동으로 에벳청년회는 친일성 향의 감리교 해리스(M C Harris) 감독에 의해 한때 해산 당하기도 했다.



상소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상동교회에서는 연일 구국 금식기도회가 진행됐다. 수천 명 의 교인과 군중이 모여들어 기울어진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그는 또 평안도 장사들을 비밀리에 모아 박제순 등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했으나 이 일도 일 경의 사전 감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사실 상동교회가 본격적인 민족운동 중심지가 된 것은 이런 일련의 투쟁 이후부터다.





스크랜턴 만남 계기 입교



상동교회 내 초등교육기관인 공옥학교(6.25때 폐교)와 중등학교인 상동청년학원(전덕기의 죽 음과 더불어 폐교)을 통해 민족운동에 헌신할 인재양성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정신 앙양을 도모하던 당시 젊은 엘리트 교사들이 이 투쟁을 계기로 굳게 뭉쳐 지속적인 항일운 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청년학원의 강의내용이 △그와 죽마고우였던 주시경이 주도한 한글운동 △'발해조선사'를 저 술한 장도빈과 최남선이 이끈 국사 △현순 남궁억이 가르친 영어 △구한국군 출신 이필주가 맡았던 체육군사교육 △전덕기가 직접 지도한 성경 등 신앙교육인 것을 보면 당시 선각들이 그 아들들을 대거 배재학당 같은 명문보다 이 학원에 보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언급한 이들 외에도 이승만 이동휘 이회영 신채호 이상설 최광옥 이상재 양기탁 최성 모 이승훈 등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그와 더불어 구국의 뜻을 모았는데 후대 사가들은 이들 을 상동파(尙洞派)라 불렀다.



을사조약의 허구성을 세계에 알리려고 고종의 밀명으로 파견된 헤이그밀사(1907)도 교회 지 하실에서 상동파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모의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전목사를 '구국의 염에 불타던 정치 성향의 인물'로만 이해하 면 큰 오산이다. 그의 민족운동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될 수 없었던 구한말 격동의 역사현장 에서 '가난한 자, 억눌린 자'인 민족의 고난을 복음으로 구원하려는 신앙 양심의 발로였을 뿐이다.



아홉 살에 고아가 돼 가난한 숯장수 숙부의 손에 자라면서 삶의 질고를 몸소 겪고 열일곱 살에 상동교회 설립자며 서민지향적인 스크랜턴 선교사를 만나 그 신앙인격에 감화를 받아 입교한 청년 전덕기가 당시 서울의 대표격인 상민들의 생활터였던 상동거리를 오가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후 스크랜턴을 도와 전도에 나서서도 고난받는 이웃을 직접 찾아 노방전도를 우선했고 민 족의 현실에 점차 눈을 뜨자 구국운동에 직접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중목회와 민족운동. 이 둘은 그에게 있어 동전의 양면이었다.



"당시는 장티푸스로 죽는 이들이 많았는데 가족도 손을 못대고 있을 때 전덕기 전도사는 직 접 염을 하고 장례까지 치러주었다. 특히 가난한 집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그의 손이 미쳤 다. 남대문시장 부근에 사는 가난한 집에서 초상이 나면 으레 그를 찾았다"(송길섭, '민족운 동의 선구자 전덕기 목사')



그는 늘 부패한 시체에서 흐르는 물을 피하기 위한 나막신과 악취제거용 쑥가루, 약식 관 등을 준비하고 있었고 동료나 후배 목사들에게도 이를 권했다.



헌신적인 삶에서 나온 그의 설교는 감화력이 강했다. 주제는 항상 '철저한 신앙생활, 철저한 민족사랑'이었다고 해방후 그의 추도예배에서 김구선생은 회고했다. ('상동교회 90년사')



청년학원에서도 종교교육은 필수였고 주2회 정도 종교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애국지사들에 게도 주일예배 참석을 적극 권장했다. 그가 상동파의 중추가 된 것도 이런 면모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민족운동이나 교계활동의 전면에 나선 적은 없다. 사료에서 이름을 찾 아보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단편적으로 알려진 그의 활약상도 광복후 후배들에 의 해 간접 조명된 것이다.



'철저한 신앙인' 전덕기는 생명마저 민족의 제단에 바쳤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 의 주도하에 상동파를 근간으로 민족진영이 재집결, 신민회라는 항일 비밀결사가 조직됐다.





장례행렬 10리 이어져

신민회는 일제가 꾸민 105인사건으로 조직이 노출, 해체되는데 전목사도 이에 연루돼 혹독 한 고문을 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나서도 폐결핵 늑막염으로 2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결국 임 종했다. 향년 39세.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조객들이 상동교회로 구름같이 모였다. 국내외 애국동지들의 충격도 컸지만 "특히 생전에 많은 신세를 진 사람들,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 남대문시장의 상인들, 심지어 천대받던 기생 백정 거지들까지 모여들어 슬피 울었다"(전택부 '토박이 신앙산맥') 10리가 넘는 장례행렬은 치열했던 그의 일생을 여실히 반영하는 것이었다.



묘소는 당시 경기도 고양군 두모면 수철리에 마련됐으나 1934년 일제의 이장명령으로 유골 을 화장, 한강에 뿌렸다. 그후 위패만이 국립묘지 무후선열(無後先烈) 제단에 모셔졌다.



8주기때 제자들이 상동교회에 그의 기념비를 세웠다. 후손으로는 20세 때 결혼한 5세 연하 의 부인 조정식(曺貞植)과의 사이에 4형제를 두었는데, 끝의 둘은 총각으로 죽었고, 장남 무 술(武述)은 1912년 이승만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길에 데려가 후사없이 세상을 떠났다. 지금 은 차남 순경(順敬)의 며느리 이소화(李小花)여사 모녀만이 국내에 살고 있다.



                                                                         전인철 1992년 5월2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