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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상동병원 교회의 시작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185
  1. 상동지역 선택의 이유       정동에서의 스크랜톤의 의료사업은 한 마디로 대성공이었다. 그는 이미 정동에서 당시의 한국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스크랜톤은 이 정도의 성공으로 만족할 사람은 아니었다. 봉사를 하자면 더 크게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봉사하여 이 민족을 더 많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 되겠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야심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전부터 자기의 병원이 정동에 있는 것에 대하여 큰 불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었다. 첫째, 정동은 외국인들의 거주지역이어서 한국인들이 드나들기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미국 대사관을 비롯한 여러 나라 공관이 전부 정동에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상동(尙洞)은 남대문 시장을 중심한 한국 민중의 중심지요 또한 교통의 중심지이다. Annual Report, 1893, p.255. 따라서 그의 포부대로 자기의 병원이 참으로 한국 민중의 병원이요, 더 나아가서 한국 민중을 위한 병원이 되기 위하여는 한국 민중의 가운데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야지 외인지대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이었다. 둘째 이유는, 그는 처음부터 서울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병원(Good Samari- tan Hospital) Annual Report, 1887, p.316. 과 같은 병원 겸 수용소 같은 병원건설을 원했다. 한국인들의 병은 대부분 영양실조 때문에 오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한 번 병들면 가난한 집에서는 아예 죽기 전에 성밖으로 내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버림받은 어느 모녀의 경우에서 더욱 그렇게 느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만 미리 손을 쓰면 많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도 주고 또 무료로 또는 싼값으로 가난하고 버림받은 병자들을 따뜻하게 재워주고 입혀주고 먹여주는 수용소 시설을 갖춘 병원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자면 역시 정동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좋은 장소를 그는 상동지역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기회만 있으면 상동지역을 답사하며 상동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과연 그의 판단은 옳았고 정확했다. 가난한 자들의 영혼과 육신을 동시에 구하자면 가난한 자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곳으로 뚫고 들어가자는 것이 그의 상동지역 선택의 이유였다. 벌써 이때부터 우리 상동교회가 그의 머리 속에서 시작되고 준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오늘의 우리 대상동교회가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셋째는, 지금의 정동병원은 원래 한옥을 수리하여 세운 병원이지 처음부터 병원용으로 세운 건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어차피 새로 큰 병원을 병원답게 세울 바에는 지금 있는 건물을 헐고 짓는 것보다는 딴 곳에 새로 제대로 지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Annual Report, 1889, p.293. 한편 스크랜톤은 남에게 오해를 받을 정도로 의료선교의 기능과 효과를 지나치게 강조하며 의료 선교를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이라고 강조했었다. 즉 교육사업도 약과 청진기가 그 길을 열어 주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Annual Report, 1888, p.340. 이런 지나친 자부심 때문에 가끔 아펜젤러와도 긴장관계가 야기되곤 하였다. 스크랜톤은 자신하기를 의사는 교육 선교사와는 달리 세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의사의 기능, 선생의 기능, 전도자의 기능을 상게서, p.340, 344. 동시에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교육보다 의료 사업이 먼저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 때문에 때로는 선교부 안에서 예산 편성을 할 때 평지풍파가 없지 않았다. 하여튼 우리 교회는 이렇게 창설자의 성격과 그 관심에 따라 세워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의 성격의 특성은 철저성이였고, 이런 스크랜톤의 철저성과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그대로 전덕기 목사에게 전하여져서 우리 교회는 상류 사회인들의 교회가 아닌 일반인의 교회로 처음부터 그 성격을 뚜렷이 하면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2. 상동의 토지 구입        상동에서 일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땅을 확보해야만 했다. 원래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인 스크랜톤은 한번 마음먹은 것은 곧 실천에 옮기는 성미였다. 이리하여 선교부에서 예산이 오는 대로 사들인 것인데 이것이 1888년의 일이다. 국립중앙도서관 보관. 그리고 이 때에 사들인 땅 넓이는 약 2,200여 평(200feet×400feet)이었다. W. C. Barclay, 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Vol.6, part Ⅱ(New York;The Board of Missions of The Methodist Church), 1957, p.750. 스크랜톤은 이 땅을 사들일 때 박모와 김모를 내세워 사들였다. 한꺼번에 2천여 평을 구입한 것이 아니다. 선교부 일을 돕던 박모, 김모를 내세워 여러 필지를 사서 합했는데, 당시 토지매매서를 보면 12나무가 있는 상동 남쪽 언덕에 별채가 붙은 집 20칸 짜리와 은행나무 아래의 밭, 이틀갈이를 1888년 10월에 김씨가 사들였고, 서쪽에 있는 독립 가옥 초가집 열세 칸 반 짜리와 50칸의 땅을 11월에 박씨가 사들였으며, 이보다 앞서 1888년 9월에는 김씨가 상동의 땅들을 사들였다. 뒤에 이들은 상동교회를 열심히 섬긴 상동교인이 되었다. 이렇게 사들인 상동의 토지에는 벽돌 건물 한 채와 몇 채의 한옥이 있었다. 따라서 이런 건물들을 곧 수리 내지 개조하여 약국과 병원으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Annual Report, 1891, p.275. 이렇게 되어 스크랜톤의 오랜 그리고 간절한 소원이 드디어 성취되게 된 것이다. 스크랜톤의 기쁨은 이 때 무한히 컸다. 그가 원했던 일터에서 그가 마음 먹은 대로의 일을 이제부터는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이 땅에 있는 벽돌 건물과 한옥을 개조 내지 수리하는 작업을 하였고 다음에는 약국을 열어 간단한 병치료와 약을 지어주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상동에서의 그런 의료사업은 이 때는 주로 그 해(1889년) 8월 27일에 서울에 들어온 Annual Report, 1889, p.292. 맥길(William B. McGill, 1859~1918) 의사가 맡았다. 1900년 상동교회 약사. 맥길 의사는 평신도로서 이 해 여름에 펜실바니아 대학교의 의과대학을 졸업하면서 곧바로 우리 나라에 그의 부인과 함께 온 것이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890년 10월부터는 이 상동약국이 상동병원으로 개편되면서 맥길 의사가 정식으로 상동병원에 파송 받아 상동에서 본격적인 의료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Annual Report, 1891, p.275. 당시 상동병원의 구조는 붉은 벽돌집 한 채와 한옥 몇 채로 구성되어 있었고 벽돌건물에는 방이 두 개가 있어서 하나는 약국으로 하나는 환자의 대합실로, 몇 채의 한옥은 입원실로 사용하였다. 상게서, p.275. 상동병원에서는 의료사업과 동시에 병원전도도 병행하였는데, 이 때의 병원전도 방법은 복음에 대한 설교와 복음서의 판매였다. 즉 약과 더불어 쪽복음도 같이 팔며 전도하였던 것이다. 상게서, p.276. 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대합실에서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상대로 날마다 설교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주일에는 특별집회를 가져 처음에는 10명~30명 정도가 모였으나 상게서. 후에는 점점 많이 모여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활기 찬 출범을 시작한 것이다. 이 때 감리교에는 정동에 있는 스크랜톤의 병원도 개업하였고 또 상동병원도 개업하고 있어 실제로 병원이 둘이었다. 정동병원은 스크랜톤이 맡고 상동병원은 맥길이 맡았다. 또 스크랜톤은 상동에 땅을 사서 병원사업을 시작할 때 이 병원은 곧 예배당이 되어야 한다는 Annual Report, 1889, p.293. 그의 기본적 선교전략 때문에 우리 상동교회는 처음부터 병원교회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맥길 의사는 우리 나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말이 서툴렀기 때문에 병원전도는 노병일 전도사가 주로 맡아 하였다. 1900년 상동교회 약사. 노 전도사는 스크랜톤이 선택한 인물로서 처음부터 상동교회에서 열심히 전도하다가 5년 후인 1895년에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Annual Report, 1895, p.244.  그의 빠른 죽음은 참으로 우리 교회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노 전도사의 뒤를 이어서 강훈식 전도사가 그 배턴을 이어 받았다. 그는 스크랜톤의 신앙을 한 몸에 지닌 젊은이로서 성격이 청렴결백하고 진실하며 솔직한 사람으로 열심 있는 전도자였다. 상게서. 강 전도사는 생활로서 전도하는 사람으로서 회개하기 전의 모든 나쁜 습관을 깨끗이 끊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면서 전도하였으나 피로가 겹친데다가 그만 콜레라에 감염되어 몇 달 일을 하지 못하고 역시 쓰러지고 말았다. 상게서. 우리는 오늘의 화려한 역사 뒤에 이와 같은 헌신적인 전도인들이 흘린 피와 땀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교회는 시작부터 이런 헌신적인 전도인들의 수고로 그 기초가 든든히 놓여지면서 꾸준히 발전하여 온 것이다. 이렇게 병원교회로 시작한 우리 교회는 해마다 전통적으로 10월 9일을 창립기념일로 지키며 내려왔다. 또 금년은 스크랜톤이 상동에 땅을 사서 그 안에 있는 건물들을 수리 또는 개조하고 약국을 시작하면서 교회부지를 사들이고 전도하던 1888년을 기준으로 하여 1백 11년이 되는 해이다.    3. 스크랜톤의 제1차 안식년 귀국       한국 감리교의 선교 초기에는 한국 선교사업이 총책임을 맡은 감리사의 직책을 아펜젤러 목사가 맡았고 스크랜톤은 한국 선교부의 의료 책임자로 있었다. 따라서 그는 정동병원에서 주로 일하고 있었으나 상동병원까지도 책임을 지고 있었기에 항상 정동과 상동을 왔다 갔다 하면서 활동하였다. 또한 스크랜톤은 성서 번역위원까지 겸하고 있어서 우선 우리말로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을 번역하였고, Annual Report, 1890, p.273. 때로는 아펜젤러와 함께 지방 선교지역을 선정하기 위한 지방순회 전도여행도 같이 다녔다. 이 때 아펜젤러는 성경책을 배포하고 스크랜톤은 약을 나누어주었다. 이렇게 스크랜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어느새 그의 안식년이 왔다. 그가 우리 나라에 온지 벌써 7년이 된 것이다. 그의 공식 휴가가 온 것이다. 스크랜톤 일가는 피곤한 몸과 마음을 쉴 겸 그의 어머니를 포함한 일가족이 1891년부터 1892년 5월까지 약 1년 반 동안 미국에서 지내게 되었다. 스크랜톤이 없는 동안 정동병원과 상동병원은 맥길과 와일즈(Wiles)가 맡았다. 그리고 한국인 전도사로는 노병일 전도사가 맥길 의사와 함께 일하였다. 스크랜톤은 미국에 가서도 선교부를 찾아가서 한국에서의 의료선교의 효율성을 역설하면서 더 많은 예산 배정과 의료 선교사의 파송을 거듭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감리교 선교부의 예산 부족으로 그의 요청이 수락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평양에서 일하게 될 홀(William J. Hall) 의사를 스카웃하는데 성공하였다.    4. 상동 구역으로의 승격       스크랜톤이 없는 동안에도 우리 상동병원교회는 계속 발전하였다. 이리하여 스크랜톤이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지 1년만에 비로소 병원교회라는 이름을 벗어버리고 하나의 독립된 교회, 특별히 당회와 구역회가 조직된 정식 교회로 발전되는 동시에 담임목사로 스크랜톤이 와렌(Warren) 감독의 파송을 받고 부임하였다. 그리고 한국 선교부의 감리사직도 스크랜톤이 겸직하게 되어 Official Journal of 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93, p.18.     앞으로는 이 文書의 이름을 Official Journal 이라고 줄여서 쓴다. 이 중요한 두 가지 요직(감리사 및 상동교회 담임목사)을 그가 1907년에 자원 은퇴할 때까지 같이 맡았다. 그 이후로는 전덕기 목사가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담임 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우리 교회 초창기부터 활약하던 맥길 의사는 새로운 개척지인 원산으로 가서 그 곳에서 맹활약을 하게 되었고 그 대신 바스티드(J. B. Busteed) 의사가 스크랜톤 감리사를 도와서 상동구역에 파송받아 주로 병원사업에 헌신하였다. 상게서, p.19.     (상동교회가 구역으로 승격된 날자는 1893년 9월 8일) 바스티드 의사는 그 해(1893년) 6월에 그 부인과 함께 입국하여 약 4년간 상동에서 일하다가 건강을 잃어 부득이 귀국하게 되었다. Barclay, 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Vol.6, Part Ⅱ, p.753. 이 때 스크랜톤 목사의 주택은 정동에 있고 또 정동병원의 일도 보아야 하면서도 파송은 상동교회로 받았기 때문에 스크랜톤으로서는 대단히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상동과 정동을 왔다갔다할 수밖에 없었다. 정동병원을 상동으로 몽땅 옮겨야 하겠다는 계획을 본격화하여 드디어 2년 후에 이 계획을 스크랜톤이 실천하였다. 그 때까지는 스크랜톤은 감리사의 직분도 수행해야 되고 지방순찰도 떠나야 했기에 당분간은 병원교회의 목회는 한용겸 전도사가 맡았다. Annual Report, 1894, p.248. 상동병원에서는 날마다 예배를 보고 날마다 환자들에 대한 전도가 진행되었다. 즉 아침 8시부터 9시까지는 약국에서 환자들과 조수들이 모여서 성경봉독, 기도, 다음에 십계명과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그런 예배 행위가 있었고, 9시부터는 수술실에서 수술환자들을 위한 간단한 설교가 있었다. 오후에도 1시~4시 사이에 병실에서 환자들을 진찰할 때 기회 있는 대로 전도를 하였으며, 때로는 붕대를 감아주면서 전도를 하곤 했다. 상게서. 이렇게 우리 병원교회에서 전도를 받은 환자들이 그들의 병이 나으면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 오지는 않았으나 가끔 선교사들이 지방으로 나가서 전도할 때 이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착한 생활을 하면서 교회가 세워지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주일에는 주일 특별예배가 있어서 아침과 저녁에 각각 한 번씩 예배가 있고 수요일에도 저녁에 예배를 보았는데, 이 때의 집회 인원은 평균 20명에서 30명 정도였고 때로는 40명씩 모이기도 했다. 상게서, p.250. 이 때의 우리 교회의 큰 약점이나 문제라고나 할까, 하나의 큰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가귀도(引家歸道)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즉 남편이 믿으면 부인이 믿지 않고, 부인이 믿으면 남편이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부인들이 잘 믿지 않고 교회에 나오지 않아 상게서, p.245. 교회발전에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스크랜톤이나 전도사들로서도 해결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도움이 왔다. 스크랜톤 목사의 어머니인 스크랜톤 대부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자기가 우리 교회의 전도부인이 될 것을 자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자기 숙소를 정동에 있는 이화학당 구내에서 상동으로 옮겨버렸다. 상동으로 이사하여 들어온 것이다. 이 때에 이화학당에는 미국에서 여자 선교사들이 더 도착하여 스크랜톤 대부인을 돕고 있던 때였으므로 그녀도 그가 원하던 전도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때 이화학당에는 로드와일러(L. C. Rothweiler) 양과 페인(J. O. Paine) 양, 프라이(L. E. Frey) 양 등이 와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어 일은 그들에게 맡길 수 있었다. 스크랜톤 대부인은 우리 교회의 전도부인 역을 훌륭히 해냈다. 말하자면 모자가 상동교회에서 크게 역사했던 것이다. 아들은 담임목사, 어머니는 전도부인이 되었다. 이 결과로 부인석이 크게 부흥하게 되어 2년만에 거의 인가귀도가 되고 교인수도 급증하게 되었다. 상동병원교회가 구역으로 승격됨에 따라서 장소가 대단히 비좁게 되었다. 1893년만 하더라도 교인수가 17명이었는데 2년 후인 1895년에는 131명으로 거의 8배로 뛰었다. Annual Report, 1895, p.244. 1894년~1895년의 1년 사이에 무려 97명의 증가를 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목회자는 교회에서 떨어져 있어서는 교회가 부흥되기 어렵다는 초보적인 교훈을 얻게 된다. 스크랜톤 대부인이 직접 상동에 자리잡고 일하게 되니 이런 놀라운 교회성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고정된 교인수가 130여 명을 넘으니 병원과 교회를 동시에 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의 신축이나 교회 이전 문제가 심각하게 토의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달성궁 안으로의 교회 이동 계획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