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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출신 큰인물 요약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4,905


       상동출신 큰인물 요약사



  전덕기 목사



  전덕기(全德基) 목사는 1875년 12월 8일 경기도 이천에서 정선 전씨인 아버지 전한규와 어머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후일 조국광복의 큰 기둥으로 1900년대 초 우리 나라 독립운동사에 깊이 새겨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목회자인 그가 대한독립의 상징으로 만고에 드문 애국애족의 화신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거룩한 계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가난하고 무지했던 민중을 위하여 계몽운동을 펴면서 천한 사람들과 함께 기거하며 자신의 한 몸을 희생했던 전덕기 목사의 발자취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한한 감명과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 그는 민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과 자주독립의 참 정신을 몸소 실천에 옮겼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한말에 우리 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펴며 가난한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던 미국인 의사 스크랜톤이 우리 나라와의 각별한 인연으로 오늘의 상동교회를 탄생케 한 것은 조국광복을 위해서도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크나큰 은총인 것이다.

남대문거리에 자리잡은 상동교회가 독립운동의 요람과 민족갱생의 전당이 된 것은 모든 독립운동투사와 더불어 이곳에서 비밀활동을 하며 목숨을 건 전덕기 목사의 피맺힌 항일운동이 낳은 결실인 것이다.

근세 우리민족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민족수난시기에 전덕기 목사가 이룩한 공적이야말로 앞으로 무궁한 세월 모든 독립운동가 가운데 언제나 빛나는 불멸의 성좌(星座)에 기록될 것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이기 이전에 목회자로 많은 사람에게 회개와 믿음의 길을 인도하는 선교사업에도 크게 헌신하였다.

그의 그리스도정신은 우리 나라 국권회복 운동에도 음으로 양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전덕기 목사의 열성으로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된 신민회가 탄생되고 이어서 3․1운동의 민족적 거사가 이런데서 기인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는 상동교회의 담임 목사로 교회 청년학원을 지도하며 장차 교회 주인공이 될 청년들의 목회활동에도 크게 기여했다.

때로는 신도들이 소천했을 적에 그 시신에 일일이 손을 만져 장례를 치루니 그 이름이 하늘에 닿을 만큼 정성이 지극했다.

그는 자신에게 진실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참 인간의 형성을 위해 끝없는 수양을 쌓아 나간 목회자였다.

독립협회와 신민회, 네덜란드에의 황제 밀사사건, YMCA운동 등 항일독립운동사에 연루 안된 것이 없는 전덕기 목사의 행적은 곧바로 근세 독립운동사를 가름하는데 있어 건국의 산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전덕기 목사는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여환으로 1914년 3월 23일 젊은 나이인 39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유해는 1934년에 와서 화장하여 한강수에 뿌려 졌다. 지금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열사의 위패만이 외로이 서 있다.

그의 일생은 비록 짧았지만 다사다난했던 생애에서 그가 남긴 높은 애국충정은 저 높은 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후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전덕기 목사는 정의를 위해서는 나라를 구해야 하니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임을 깨달은 선지자였다.

찬란했던 민족사와 힘겨웠던 독립운동사가 함께 빛나는 역사 속에 기억해야할 선구자로서 참목회자이며 혁혁한 독립투사인 전덕기 목사를 어찌 잊을 것인가.



참고문헌

송길섭, ꡔ민족운동의 선구자 전덕기 목사ꡕ, 상동교회 역사편찬위원회, 1979.

서성옥․최문자, ꡔ민족운동에 앞장선 전덕기 목사님ꡕ, 상동교회 역사편찬위원회,                 1988.







  우남 이승만 박사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대한 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으나 기독교와 근대 교육의 효시인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1885) 서구의 문물에 새로 접할 수 있었으며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영어 공부 등 새로운 학문을 배우며 서양을 동경하고 또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일찍이 미국에서 새로운 문물을 경험하고 돌아온 서재필이 배재학당에서 강의를 했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 구국의 방책이나 언론과 정치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이후 이승만 박사는 협성회 회보라는 주간 신문을 통해서 애국과 개화와 자주 독립을 주장하는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자 친일정권 반대시위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그러다가 독립협회의 만민 공동회에 참여하면서부터 정치 활동에 뛰어 들었다(1898). 그러나 독립협회가 해체되며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다가 황국협회의 무고로 이승만 박사도 체포 구금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게된다. 이로서 초기 정치 생애는 마감되고 옥중생활을 통해 신앙과 사상의 재정립 기회가 되었다. 즉 종신수로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 신앙의 깨달음을 통하여 나머지 생애의 영적 준비가 이루어진다. 5년 여의 옥중생활 후 석방이 되는데(1940) 감옥에서 신홍우, 이상재, 이 준, 이동녕 등과 동지적 친분을 맺게된다. 옥중에서도 40여 명을 개종시키는 등 그의 전도활동을 통하여 신앙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승만 박사는 출옥하면서 이미 민족운동의 요람지인 상동교회와 1903년 조직된 황성 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이승만 박사와 상동의 직접적인 인연은 출옥 후 신앙으로 구국의 길을 찾으려하는 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그해 말 도미하기 전까지 상동청년학원의 설립에 참여했으며 원장으로 있으면서 민족신앙교육의 산실로 키워갔다. 상동청년학원은 상동파로 불리는 평신도 민족주의자들의 자원 강의와 협력 등을 통해서 운영되었으며 이승만 박사는 학원의 방향설정과 학교체제 구축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는 바로 도미하게 된다.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는 학업을 계속하며 국제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으며 1910년 YMCA 학생부 간사직을 맡아 귀국하면서 다시 상동교회와 상동 학원지도자들과의 활동을 재개하였다. 또한 상동학원 인사들이 중심이 된 신민회에 재차 협력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때에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장남 무술 군을 데리고 갈 정도로 이승만과 전덕기의 우의는 매우 두터웠던 것이다.

그후에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에 체재하면서 해외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으며 기독학원 및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여 민족운동을 이어갔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으로 선임되고 미국과 상해를 연결하여 독립의 노력을 계속했다. 일본의 패방 후 독립국가 수립과정에서 많은 갈등을 거쳐 대한 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활동한 이승만 박사의 생애는 귀중한 애국의 삶이었다. 물론 그 기저는 기독교적 신앙으로부터 출발했으며 말기 정치에서의 오점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애국이라는 선상에서 일생을 바친 신앙의 선배인 것이다.



참고문헌

ꡔ나라와 교회를 빛낸 이들ꡕ, 상동교회, 1988.

ꡔ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브리태니커, ꡔ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ꡕ, 동아일보, 1993.







  석오 이동녕 선생



  석오 이동녕 (石吾 李東寧) 선생은 1869년 9월 2일(음) 충남 목천에서 경북 의성군수와 영해부사를 지낸 연안 이씨인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10세에 이미 四書三經을 통달할 만큼 신동으로 알려졌다. 24세에 국가 시험인 응제진사에 합격하였으나 기울어져 가는 망국의 현장을 목도하게 되자 일신상의 모든 영화로움을 버리고 항일 독립운동 일선에 투신하였다.

1900년대 초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로웠던 때에 선생은 독립운동의 본 고장인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를 만나게 된 사실을 일생동안 하나님의 큰 은혜로 생각하였었다.

이 무렵 상동교회를 부지런히 드나들던 선생은 전덕기 목사의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한 이래 생애를 마치는 순간까지 우리 주 하나님을 섬기며 오직 그리스도 정신에 일관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 투사였다.

선생은 나이 30대에 들어서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 동지들과 생사를 함께 하며 우리 나라 최초의 항일비밀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창건한 주역이 되었다.

선생은 상동교회에서 한때 청년회모임인 상동학원에 나가 교사로 활약하였었다. 선생은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수년간 제국신문에 논설을 부지런히 써나갔으며 또한 민권과 여성해방운동에 앞장섰던 한말의 선각자였다.

독립협회에 가담한 이후 선생은 개화와 구국운동일선에 섰다가 같은 한인관리에 의해 이승만, 이 준 등과 함께 옥살이를 치룬 쓰라린 경험도 하였다. 출옥 후엔 서울종로거리를 오가며 월남 이상재와 함께 YMCA운동에 열성을 다하였다.

1905년 한․일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이 부당한 조약의 파기를 관철하기 위해 상동교회에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때 백범 김 구 등과 함께 지금의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리다 다시 영오의 몸이 되는 고초를 겪었다.

선생은 독립운동하는 동안 일제의 어떤 유혹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목숨 다하는 그날까지 겨레의 절개를 지켰으니 사람들은 그를 가르켜 불멸의 민족혼이라 했다.

선생은 민족사가 단절될 뻔했던 민족고난의 시절 만난을 무릅쓰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끝까지 사수한 민족운동의 선구자였다.

선생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내에서, 눈보라치는 만주에서, 강풍이 몰아치는 시베리아에서 그리고 중국대륙 등 수륙수만리를 뛰어 다녔다.

선생은 우리 나라 최초의 해외교육기관인 ‘신흥학교(후일 신흥무관학교)’ 초대교장이 되어 광복군의 초석을 이루었고 3․1운동 직전에 만주 길림성에서는 역사적인 ‘무오독립선언’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임시정부산파역을 맡았다. 선생은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통령권한대행, 주석 등을 역임하는 동안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영도했던 터줏대감이었다.

선생은 독립운동의 험한 가시밭길을 걷던 중 지병으로 1940년 3월 13일 중국기강에 있는 임시정부청사에서 애석하게도 조국광복을 앞두고 향년 72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국조(國朝)의 별이 지자, 임시정부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국장을 치루었다.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조국이 광복되던 해에 환국한 백범 김 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하니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김석영, ꡔ선구자 이동녕 일대기ꡕ, 을유문화사, 1979.

김석영․이현희, ꡔ석오 이동녕 연구ꡕ, 서문당, 1989.





  백범 김 구 선생



  백범 김 구(白凡 金九) 선생은 1876년 7월 11일(음) 황해도 해주에서 안동 김씨인 김공순영과 어머니 현풍 곽씨 낙원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 한문을 익히고 18세 되던 해에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어 교포 700명을 이끌고 나라의 탐관오리들을 상대로 싸웠던 의혈청년이었다.

선생이 20세 되던 해 8월 황실의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 의해 시해되자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이듬해 2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군중위 ‘토전양량’이란 자를 죽임으로써 국모를 죽인 원한을 풀었으나 이 때문에 체포되어 영오의 몸이 되었다.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선생은 23세 되던 3월 9일 마침내 탈옥에 성공하여 방랑하다가 미곡사라는 절에서 중이 되었다.

다음해 다시 속세로 돌아왔으나 아버지를 여의게 되면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이날부터 선생은 평생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30세 되던 해에 선생은 서울 상동거리에 우뚝 솟은 상동교회에서 항일독립운동이 비밀리에 진행됨을 알고 이곳을 찾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이동녕, 안창호 등과 동지의 인연을 맺고 신민회를 창건하는 구국운동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 준 열사 등과 함께 조약철회를 상소하기 위해 상동교회에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연좌데모에 앞장섰었다.

35세 때에 일본총독 ‘데라우찌’를 암살하려 했다는 세칭 ‘안명근사건’의 관련자로 낙인 받아 17년의 집행형을 언도받았다. 이때 선생은 항상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우리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였다고 한다.

44세 되던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분연히 고국을 떠나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청사의 문지기가 되게 해줄 것을 간청하는 겸허함을 보였다. 이때 선생은 경무국장이 됨으로써 조국광복을 위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생활이 시작되었다.

선생은 52세때 국무령에 올랐으며 곧이어 한인의열단을 조직하였다. 56세 되던 해인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로 하여금 일본천황을 일본동경에서 저격케 하였으나 폭탄불발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같은 해 4월 29일 일본 천장절에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중국침략의 원흉에 폭탄을 투적케 하여 백천대장 등 많은 일본인들을 폭살케 하는데 성공하였다.

선생은 중․일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임시정부가 더 한층 환난을 겪는 가운데 63세 되던 해에 임시정부 주석이라는 대임을 맡게 되었다. 이때 중국정부가 남하하여 수도를 중경으로까지 옮기게되자 임시정부도 이곳까지 옮기며 대망의 한국광복군을 조직함으로써 일본에 선전포고하였다.

70세 되던 해인 1945년 8월 15일 군국주의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조국은 광복되었다. 선생이 그립던 고국에 환국하였으나 대한민국정부수립 이듬해인 1949년 6월 26일 정오에 흉한의 저격을 받아 향년 7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은 임시정부를 끝까지 사수한 몇몇 독립운동자의 한사람으로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였으니 그 높은 인품과 애국정신은 길이 겨레의 사표로 남게 될 것이다.

선생은 유언에서 “하나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나도 대한독립이요, 둘도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 셋도 우리 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 대답할 것이라.” 했다.



참고문헌

백범 김 구 선생 기념사업협회, ꡔ백범 김 구(생애와 사상)ꡕ, 교문사, 1982.

김 구, ꡔ백범일지(원본)ꡕ, 서문당, 1989.







   우당 이회영 선생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선생은 1867년 3월 17일(음) 서울에서 경주 이씨인 아버지 이유승과 어머니 동래 정씨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1896년 30세에 이르러 경기도 개성의 인근인 풍덕지방에서 삼포(인삼밭) 농장을 경영하다 항일의병을 보고 이에 자금을 조달하는 등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35세 되던 해에 일본인이 계획적으로 삼포농장을 훼손하자 선생은 이에 맞서 악랄한 일본인과 법적투쟁을 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도지부(度支部) 주사에 임명하였으나 선생은 이를 사양하였다.

1905년 39세 때 한․일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저지하는데 진력하였을 뿐 아니라, 망국의 조약을 맺게 한 매국노 5적을 암살모의 하는 등 우국충정을 다하였다.

그 이듬해 40세 되던 해에 선생은 이동녕, 이상설 등과 함께 해외에서의 독립운동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그 첫단계로 만주 용정촌에다 ‘서전서숙’을 설립함으로써 2세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07년에 소련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망명중인 이상설을 만나 무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협의함으로써 해외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 위한 본격적인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1907년에 선생은 우리 나라 독립운동의 발상지인 서울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를 비롯하여 이동녕, 양기탁 등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창건하는데 주역의 한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선생은 상동교회 권사직에 있으면서 상동청년학원의 학감을 맡아 전국적인 교육진흥에 헌신하였다.

선생은 당시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황제밀사로 상동교회 이 준 열사가 가게 되자 황실에서 황제의 신임장을 은밀히 휘대 하는데 중요한 막후역할을 하였다.

1910년 치욕의 한․일 합병이 체결되자 이동녕 등 동지들과 만주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먼저 선발대로 떠나니, 6형제 40여 명의 가족을 이끌고 해외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망명하였다.

그 이듬해인 45세에 선생은 중국 북경으로 가서 만주에서의 한인교포의 법적지위와 한인독립운동의 정당성을 협의하기 위해 중국의 원세개 총통과 면담하였다. 이후 만주 통화현 합리화에 독립군기지를 설치하였으며 이곳에 이동녕 등과 합심하여 남만주 한인교포의 생활터전인 ‘경학사’를 설치하였다.

1912년에 남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이석영, 이철영 형제 등과 학교를 운영함으로써 후일 우리 나라 광복군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1930년 선생은 망명 중 중국에서 무정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상촌을 설립하기 위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고 1927년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1931년에 중국에서 한인연맹을 조직하였으며 또한 한인구국연맹을 결성하여 의장에 취임함으로써 격렬한 항일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1932년에 더욱 한․중 연합 항일운동을 조직화하고 이를 독려하기 위해 만주로 향하던 중 만주 대련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는 불운을 맞았다.

선생은 일본경찰에 심한 고문을 받던 중 같은 해 1932년 11월 17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선생은 광복 후 대한민국 부통령을 역임한 성제 이시영 형제와 더불어 우리 나라 독립운동사에서 큰 귀감이 되었다.



참고문헌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사업회, ꡔ이회영 보기ꡕ, 1998.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사업회, ꡔ우당 이회영 약전ꡕ, 1998.







  단채 신채호 선생



  단채 신채호 선생은 1880년 충남 대덕에서 출생하여 18세 때 전 학부대신 신기선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성균관에 입학하고 이후에 계몽운동, 신교육운동을 전개했다. 관직의 뜻을 버리고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다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 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었다. 이 신문을 통해 배일사상과 독립정신 고취의 논설논문을 쓰게 된다. 이렇게 언론계에 투신한 신채호 선생은 민족의 현실 앞에서 역시 고통스러워했다. 이때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모이게된 신채호 선생은 고통 속에 희망을 잉태한 상동인으로 국권 수호에 앞장서 대한 협회에 참여, 이끌어 나가게 된다.

신채호 선생은 기독교 신자임을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젊은 나날 상동교회를 드나들며 구국 계몽활동을 전개하는 등 기독교의 영향아래 있었고 민족 운명을 이끌어갈 새로운 종교로 기독교사상의 활력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은 구한말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를 비롯한 청년지사들과 의기가 상합하여 기독교정신이 근대 민주주의 국가를 회복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신민회 활동이 비밀리에 확산되어 감에 따라 신채호 선생의 논조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 국기민복의 사회추구에 있어서 기독교적 믿음과 행실을 실제 생활의 지표로 이해했다.

신채호 선생은 구국 언론활동을 전개하고 애국 논설과 국채보상운동의 파급을 위한 논설을 쓰면서 역사학자와 계몽사상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또한 청년학우회 등의 수양단체에 취지서 등을 집필하여 상동파가 청년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는 한글 전용잡지 발행에도 관여하여 1908년에 1907년 7월부터 유일선이 발행해 오다가 휴간되었던 가정잡지를 다시 속간했다. 유일선은 전덕기와 가까운 상동파 민족지사로 1908년부터 상동교회가 이 잡지를 맡아 신채호가 일곱 권 발간하게 된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상동교회 관련 활동 기간은 비록 길지 않지만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 신민회의 대변인 등 다양한 활동을 함으로 상동파로서 뿐 아니라 한국의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지성파라는 데 그의 가치는 더욱더 빛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평생 유생으로 또 무정부주의에도 젖어 지내면서 직접적인 종교성향과는 거리를 두었던 만큼 단순한 기독교인이라기 보다 독자적인 단채주의자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상동교회를 통하여 많은 감화를 받았고 이를 국민 구족 항쟁의 이념으로 제시하며 그의 문필활동 속에서 기독교만이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대안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ꡔ대한매일신보ꡕ의 논설위원으로 신민회의 대변인으로서의 신채호는 역시 주요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전덕기, 이동녕, 이희영, 양기탁 등 상동파와는 같은 사상과 동일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상동교회를 드나들던 신채호가 전덕기 목사를 통해 전해진 기독교의 불씨가 자유, 평등, 해방이라는 단채의 신앙노선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순교적 격정으로 민중혁명의 대열에 앞장섰다가 여순 감옥에 투옥되어 1936년 생애를 접게된다. 지행과 신행 그 합일의 외길을 선택한 신채호 선생은 젊었을 때 상동교회를 거쳐갔으나 그 이상과 신념은 역사 속 끝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ꡔ나라와 교회를 빛낸 이들ꡕ, 상동교회, 1988.

ꡔ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브리태니커, ꡔ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ꡕ, 동아일보, 1993.



   

  일성 이 준 열사



  일성 이 준(一醒 李儁) 열사는 1859년 12월 18일 함남 북청에서 전주 이씨인 아버지 이병관과 청주 이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열사는 어려서 한학을 독학하였으며 청년기에 들어서자 국가 시험인 함경도시에 응시하며 장원급제하니 이때 나이 26세였다.

열사는 30세에 교육에 깊은 관심을 쏟고 향리인 북청에 스스로 2천평의 토지를 희사하여 ‘경학원’을 설립하니 처음으로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열사는 청운의 꿈을 안고 36세에 순릉참판의 벼슬에 올랐으나 나라 안팎의 사정이 급박하였으며 청일전쟁으로 더욱 시국이 소란스러웠다.

열사는 1895년 37세에 우리 나라 최초의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였다. 38세 되던 해에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으나 평소 정의감에 불타있던 열사는 나라의 관리들이 연일 부패해 지자 이를 보다 못해 그들의 탄핵운동에 앞장섰다가 면관되는 비운을 겪었다.

열사는 서울 상동교회 집사로 있으면서 교회 청년회장으로 전덕기 목사를 받들며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섰다.

이 때 주변열강들의 한반도 진입과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은 날로 쇠퇴하여 나라가 이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1898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 등과 협성회를 조직한 열사는 독립협회에 가담하고 이 조직이 만민공동회로 발전하자 동지들과 서울 종로 노상에서 나라의 비정을 규탄하다가 이승만, 이동녕 등과 함께 체포되어 수개월간의 옥고를 치루었다.

1904년 열사는 대한보안회를 조직하여 일본인에게 부당하게 대부한 황무지불하취소운동을 전개하고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되어 있으면서 일본공사로부터 문제의 황지문권을 탈취하여 황제에 진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같은 해 어용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여 공진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탐관오리를 탄핵하는 운동을 펴다가 다시 6개월 간 황주 철도 섬에 유배당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한․일간에 체결되자 중국에서 귀국한 열사는 이듬해 만국청년회장이 되어 국제친선운동을 펴나갔다. 열사는 국민교육회장으로 국민교육운동에도 진력하였다. 이에 보광학교와 오성학교를 설립하니 이는 지금의 건국대학교의 전신이다. 또한 헌정연구회를 개선하는데 노력함으로써 인재등용과 정부의 국정쇄신에도 힘썼다.

열사는 자강회 주최인 청년회 대회에서 ‘생존경쟁’이라는 명연설을 하여 많은 청중을 경탄케 하였다. 이 뿐 아니라 ꡔ한국혼부활론ꡕ을 저술함으로써 국민의 일대각성을 촉구하는 선각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드디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열사는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마지막 기도를 받으면서 고종황제의 미사로서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멀리 장도에 올랐다.

이윽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민족정기를 선양하며 대한제국의 억울한 사정과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호서하려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비통비분한 끝에 자결순국하였으니 열사는 향년 49세를 일기로 나라와 겨레 앞에 천추의렬로 고귀한 일생을 마쳤다.

대한민국은 순국한지 55년 만인 1962년 중장인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이듬해인 1963년 마침내 열사의 유해는 고국으로 봉환되어 지금의 서울 성북구 수유동 묘지에 안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이선준, ꡔ일성 이 준 열사ꡕ, 을지서적, 1994.





  한서 남궁억 선생



  한서 남궁억 선생은 1863년 한성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 속에서 자라났다. 20세가 되던 해에 관립영어학원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1886년 고종황제의 어전 통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정부의 통역기관으로 영, 독, 러 등 외교 순방에 참여했으며 궁내부 별근직,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등으로 국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6년에는 서재필 박사가 이끄는 독립협회의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을 겸임하며 자주독립을 위한 토론회 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자유사상, 민주주의사상의 주입에 힘을 기울였다. 독립신문으로 개혁사상, 호국운동, 민권보장운동 등 획기적인 혁신운동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국제정치에 무지했던 정부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그 간부들은 투옥되었다. 고종황제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뒤 남궁억 선생은 윤치호, 장지연, 이상재, 나수연 등과 손을 잡고 황성신문사를 설립, 창간호를 발간하기에 이른다. 남궁억 사장은 이 신문을 통하여 사회계몽을 통한 독립정신과 애국사상 고취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던 가운데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며 선생은 생애의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며 항일 투쟁의 선봉적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단순했던 구국운동에서 기독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참된 신앙운동을 통해 한국민족의 정신운동을 일으키려는 결심을 하게된다. 그 뒤 배화학당의 교사로 초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고 밤으로는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와 상동 청년학원을 설립, 초대원장으로 청년들에게 신 지식교육과 정신계몽에 전력을 다했다.

나라 잃은 슬픔에 겨워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낙향하고 그곳에서 예배당을 건축하고 모곡학교를 세워 신앙과 교육에의 정열을 이어나갔다. 그는 생활 속에서 기독교 정신을 실제로 나타내려고 애썼으며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민족관을 세워주려 했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날마다 새벽마다 간절한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지금 찬송가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작사하게 되었다. 이 찬송을 통하여 신자들의 마음속에는 애국하고 애족하는 정열이 타올랐던 것이다. 또한 남궁억 선생은 역사를 저술하고 무궁화묘목을 길러 전국을 무궁화 동산 만들기에 힘썼으며 독립운동 비밀단체 무궁화 십자단을 조직 확대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1933년 남궁억 선생은 체포되고 옥고 중 건강을 잃어 1939년 일생을 마감한다.

이와 같이 남궁억 선생은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독립된 민족이 아니고는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특히 철저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주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평등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중되어야한다는 것이 바로 그의 생활이자 신념이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43092;나라와 교회를 빛낸 이들&#43093;, 상동교회, 1988.

&#43092;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4309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브리태니커, &#43092;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43093;, 동아일보, 1993.







  우강 양기탁 선생



  기독교에 사상적 원천을 두고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던 개화기 대표적인 민족 운동가 중의 한사람인 우강 양기탁은 1871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전통적인 유교집안에서 자라났다. 조선말 혼란한 나라의 모습을 보며 나름대로 구국의 길을 찾아가던 중 북장로회 소속의 게일을 만나서 아버지와 한영사전의 편집을 도우며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다. 즉 이때 기독교적 세계관과 서양 개화문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게 된다. 1900년에 일본에 유학하고 미국으로 가서 견문을 넓힌 뒤 1902년에 귀국하여 민족운동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다.

양기탁 선생은 영국인 언론인 베델과 협력하여 민족대변지 대한매일신보를 창립하고 민족사적 격동기의 항일논설을 이끌어 나갔다. 이 신문에서는 양기탁 선생 이외에 안태국, 박은식, 신채호 등이 경영이나 논설 집필에 참여하였다. 이미 일본과 미국에서 서구문명과 신사상을 접한 양기탁 선생과 전덕기 목사 주축의 기독교계 독립운동가들과의 접촉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은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1903년경 전덕기 목사와 교분을 나누었으며 이어서 상동청년학원의 설립과 여러 가지 활동에 계속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전후해서 상동파 동지들과의 관계가 더욱 공고해지게 되었다. 이때의 상동파 인사로는 전덕기 이외에 김 구, 이동휘, 이동녕, 이 준, 노백린, 남궁억, 안태국, 신채호, 최광옥, 이승훈, 이상설, 최남선, 이상재, 최재학, 김진호, 주시경, 윤치호, 이희영, 유실선, 이필주, 이승만, 차병수, 이용태 등이며 미국에서 귀국 신민회의 창설을 주도한 주요한, 안창호와 협력하게 된다.

그 후 양기탁 선생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과 신민회조직 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된다. 언론인으로서 내외의 정보제공과 가능성의 분석 등을 통한 실질적 공로자였던 것이다.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는 선생을 만나 신민회의 창립을 상의했고 국내기반을 갖고 있는 상동파의 기반 위에서 신민회는 조직될 수 있었다. 그것은 안창호를 제외한 신민회의 발기인이 모두 상동인이었고 신민회가 의도한 목표는 이미 상동파가 지향해온 목적과 일치했다는 것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신민회는 상동파가 보다 발전된 조직이었던 것으로 기독교적인 면에서보다 정치적 성향을 띤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었다. 이런 신민회에서 양기탁 선생은 총감독의 역할을 맡았고 1911년 만주에 무관학교 및 독립군 기지를 세우려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후 석방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되는데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1938년 생을 마감한다. 말년에 선생은 기독교에 회의를 느낀 듯 민족종교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양기탁 선생은 철저한 독립운동가로 일찍이 수용한 신문명과 기독교정신으로 민족구원을 통한 독립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그의 구국 신념과 희생, 지도자적 자질은 기독교 민족 운동사에서도 한 획을 그은 것이다.



참고문헌

&#43092;나라와 교회를 빛낸 이들&#43093;, 상동교회, 1988.

&#43092;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4309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브리태니커, &#43092;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43093;, 동아일보, 1993.









        전덕기 / 이승만 / 이동녕

        김  구 / 이회영 / 신채호

        양기탁 / 이  준 / 남궁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