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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장-(2)발전의 발자취(상동111년사)(313~335)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333


      제22장 발전의 발자취 (2) (313~335P)



7. 선교 분야



1974년 3월 1일에 새 성전 건축 기공식을 마친 후부터는 우리 교회의 모든 역량을 성전건축에 기울이게 되니 이후부터 새 성전이 완성될 때까지 당분간 선교활동은 주춤하였다. 우선 구교회 건물과 목사관을 철거해야 했다. 1974년 10월 6일의 주일에 74년간이나 이 민족의 영광과 고난을 목격했던 우리 교회의 벽돌예배당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 11일부터는 이 역사적인 건물을 허는 작업이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앞으로 남대문 지역에 우뚝 솟을 새 성전을 생각하면서 기대와 소망에 가득 차 있었다.



(1) 귀중한 자료 발굴



그런데 1901년에 봉헌된 우리 교회의 구건물을 헐 때 그 머릿돌에서 대단히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나와서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전국 교회사가들을 흥분시켰다. 이 귀중한 자료 중에는 우리 교회의 초대 담임목사였던 스크랜톤이 영문으로 직접 쓴 우리 교회의 간단한 역사(4페이지)와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여기에다 1900년에 구교회 건물을 건축할 때의 우리 교회의 건축 헌금자들의 명단이 한글로 기록된 문서(부록 참조)가 나왔다. 또 1900년에 선교사들이 번역하고 출판한 우리 말 신구약 성경이 나왔는데 이것은 국내에서 출판된 최초의 성경으로서 국내에 몇 권되지 않는 귀중한 책이다. 그 외에 몇 가지 영문으로 된 편지와 당시 감리교에서 발행하던 교회신문이 있었다. 이 문서들은 비단 우리 교회의 초대 역사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사의 초기 시대를 비쳐 주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들은 지금 우리 교회의 금고 안에 소중히 보관되어 앞으로 이 방면의 권위자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2) 입당 예배



구건물을 철거하니 임시 예배처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새 성전이 완성될 때까지의 임시 예배처는 처음에는 남대문 근처에 있는 여성회관에서 약 1개월간(1974년 10월 20일~11월 24일) 예배를 보았다. 12월부터는 우리 교회의 뒤쪽 소방도로 남쪽에 있는 단층상가에 2, 3층을 더 올려서 예배를 보게 되었다. 이 장소는 우리 교회의 예배처소로는 협소하였지만 그래도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 곳에서 새 성전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 교회의 각 부별 예배와 각 기관 활동이 계속되었다. 

이때 우리 교회 교인들의 따뜻한 정은 예전에는 맛보지 못한 흐뭇한 정경 이였다. 예배가 끝나가기가 무섭게 돌아가던 교인들이 옥상에서 돌아갈 발길이 아쉬운 듯 마냥 서서 터뜨리는 친교의 웃음꽃은 지워질 수 없는 정경이며 추억이 될 것이다. 교인의 신앙도 자랐다. 이때 시작된 김광식 박사의 석양 신학강좌는 대학생과 청년회원에서부터 교인 전체가 참가하는 수준 높은 강의였다. 



그러나 입당예배를 몇 달 앞두고 슬픈 일도 있었다. 1976년 8월 15일에 예배를 마친 후 이기환 장로가 성전건축 현장을 두루 둘러보다가 오후 1시 40분경 추락사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평생을 우리 교회와 공옥학교를 위하여 수고한 이기환 장로가 새 성전입당 예배를 눈 앞에 두고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우리 교회는 이 장로의 장례를 3일 후에 상동 교회장으로 모셨다.



장례위원장에 박설봉 감독, 호상에 황호춘 장로, 상록원 담당 조형재 장로, 운영 담당 정남규 권사, 그리고 성가대와 청년회가 수고하여 장례식을 거행했다. 장례시 박설봉 감독은 고인의 아낌 없는 교회 사랑과 믿음을 상기시키고, “이 분은 상동교회의 모든 시기, 욕심, 죄를 짊어지고 피를 흘렸다. 앞으로 상동 교회는 주님의 사랑과 용서, 화해, 그리고 주님께만 충성하는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고 말씀했으며, 황호춘 장로는 “장로님이 한 모퉁이 흘리신 피 흔적을 봉사의 사표로 삼아 사랑과 희생 정신으로 단결하여 주님의 뜻을 선포하는 일에 매진키로 하자”고 추모했다.



이기환 장로는 1899년 회현동에서 태어나 상동교회에서 자라고 상동에서 일생을 보낸 상동인이다. 공옥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를 거쳐 세브란스의전 재학중 1920년 공옥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며 1946년에 공옥학교 부교장, 1948년 상동교회 장로 취임, 1957~1969년간 상동교회 전도사로 봉직했다. 일제와 6․25전쟁 혼란기에 교회를 지켰으며 전도, 교육, 심방, 속회, 교회사무, 궂은 일 마른일을 가리지 않았고 특히 교회의 젊은이들을 사랑하여 많은 일꾼을 길러냈다. 당시 상동교회 기관지(1976년 가을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제 누가 그 분만큼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가르칠 것인가, 누가 그분만큼 교회를 사랑할 것인가?”



이러는 동안에 교회건축도 예정대로 진행되어 구건물을 헐기 시작한 때부터 2년 2개월만에 새 성전도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게 되어 입당예배를 서두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1976년 12월 19일에 감격의 입당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담임목사를 비롯한 교회 중직자들과 교인들의 감회는 이때 어느 때보다도 컸다. 우리 교회의 성전 건축은 처음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쳤고 건축허가로부터 많은 장애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계획대로 밀고 나간 결과 오늘의 입당예배라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교인들의 감사와 감격은 컸고 사기는 어느 때보다도 드높았다. 더욱 더 열심히 모이기를 힘쓰며 교회사업에 참여하였다. 



(3) 6명의 장로 취임



1976년 12월 25일 당회에서는 우리 교회에 입당예배 못지 않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었다. 이 회의에서 대거 6명의 신천 장로를 선출한 것이다.



그것도 40대의 젊은 층에서 발탁하여 앞으로의 우리 교회의 중직을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 교회건축에 몰두하여 결원된 장로들을 보충할 기회가 없었으나, 이제 새 성전에 입당도 하게 되고 또 앞으로의 우리 교회의 정족수의 장로들을 세우는 일이 시급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이번 당회에서 선출된 신천 장로들은 박광희, 양봉순, 윤 달, 임광원, 한국명, 김용일 이상 6명이며 이들은 당회원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이들은 다음에 열렸던 구역회에서 인준을 받았고, 또 서울 남지방회에서도 통과되어 오늘날까지 우리 교회의 시무 장로로서 크게 봉사하고 있다. 우리 교회의 시무장로로는 그 동안 이명하여 온 장로들까지 합하여 16명에 이르고 있는데 황호춘, 배경렬, 구 실, 최재현, 조형재, 서성옥, 김영상, 박은용, 박기복, 서장석, 박광희, 양봉순, 윤 달, 임광원, 한국명, 김용일이며 이들의 직업은 교육가, 사업가, 공무원들이 대부분이다. 우리 교회가 많이 젊어졌다는 모습도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고 앞으로 많은 젊고 유능한 일꾼들이 우리 교회로 모여들 것이 기대된다.



(4) 교역자의 증원



한편 그 동안 교역자들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1968년부터 우리 교회의 부목으로 수고하던 유기종목사가 1970년에 사임하고 그의 후임으로 문산교회의 이창주 목사가 부임하여 5년간 시무하다가 1976년에 미국으로 이민, 로오드 아일랜드 주에서 우리 교회가 미국에 파송한 선교사의 자격으로 상동교회의 지교회를 개척하고 있다. 그 교회는 지금은 30명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고, 우리 교회에서는 개척 초기에 100만원의 지원을 해 주었다. 



또한 1976년 6월에는 1973년 3월부터 협동목사로 있던 김관련 목사가 교육목사로 시무했는데, 김 목사는 1978년 2월까지 약 2년간 활약하다가 지방내 성산 교회의 담임목사로 전임하였다. 이창주 목사 후임으로 1977년 8월에 이동학 목사(당시 봉일천교회 시무)가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김관련 목사 후임으로는 1978년 2월에 장순창 목사(당시 보문제일교회 시무)가 교육담당 부목사로 부임하였다. 



한편 홍윤분 전도사는 1966년 10월부터 시무하고 있었으나 점점 늘어나는 우리 교인들의 심방을 위하여서도 전도사의 증원이 불가피하였다. 이리하여 1977년 11월에 감리교 여선교회 전국연합회에서 근무하고 있던 최근숙 전도사가 부임하였고, 1979년 4월부터는 시내 문래동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던 강연태 전도사와 또 유신교회 사무엘 유치원 총무로 수고하던 채숙정 전도사도 동시에 부임하여, 우리 교회에는 담임목사 1명과 부목사 2명, 전도사 4명의 교역자들이 시무하게 되었다. 



우리 교회의 살림이 날로 커짐에 따라 장로들을 더 많이 세우게 되었다. 1982년 12월 26일, 당회에서 최홍기, 이광호, 이태호, 유제연, 임성택, 이봉임 장로 등 6명을 또 새롭게 추대했다. 이들은 교육자, 정치가, 사업가, 고위 군출신 등으로 우리 교회에서 잔뼈가 굵은 분들이 많이 선택되었다. 그후 1984년 12월 30일 당회에서는 함정희, 박세용, 정남규 세 장로를 신천하여 장로진을 보강하였고, 1986년 12월 27일에는 나인용, 백석기, 김민옥 장로 그리고 1987년에는 허동현, 유은옥, 이용직 장로 등이 신천되어 우리 교회의 장로진이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활동적인 인물들로 많이 보강되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했으며 신앙으로 교우들을 지도하던 박은용 장로, 최홍기 장로, 김용일 장로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 앞서 이민간 조형재 장로와 합해 모두 4명이 10여 년간에 이민을 갔다. 또 원로인 황호춘, 최재헌, 명예장로인 변민학 장로가 타계했으며, 배경열, 박기복, 구 실 장로가 은퇴하여 원로 장로로 추대되었다.



(5) 개척교회 선교



① 송추상동교회

1964년 6월 우리 교회에서는 송추에 교회를 개척하기로 하고 담임전도사로 우리 교회 출신의 신학생 김제태를 파송했으며 송추 개척교회의 대지 구입과 건축을 추진하였다. 1965년 4월에 송추교회 대지로 630평을 구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송추교회의 건축을 위하여 36만원의 예산을 세워서 교회건축을 완성하였고, 드디어 1967년 10월 8일 우리 교회 창립기념일에 봉헌예배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그런데 이 교회가 두 번의 시험과 파동으로 지금은 3개의 교회로 교인이 갈라졌다. 그 후 조한전 목사가 부임하여 온 교우가 합심해서 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지금은 개척 당시의 교인은 한 분도 남지 않았다. 우리 교회에서는 1984년 5월 6일 예배용 피아노를 송추 상동교회 봉헌식에 증정한 바 있다.



② 신림상동교회

우리 교회의 교회 개척사업은 새 건물을 지은 후부터 다시 계속되었다. 그 첫째 경우가 시내 관악구 신림동에 개척교회를 시작한 일이다.

1977년 4월의 임원회에서 신림3동이 개척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이곳에 우리 교회의 지교회를 세우기로 가결하고 우리 교회의 황호춘 장로를 개척교회의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그리고 임시 예배처로 신림3동 598-158번지에 있는 지하실 30평을 250만원에 전세계약하였다. 그런데 이 때 이 지점에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2년 전부터 감리교회의 최덕순 목사가 신림중앙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모진 고생을 하면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여 이때는 이미 50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해있었다. 



원래 최목사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남부연회 공주지방 신광교회의 담임목사(당시 정회원 1년)로 있었으나 개척교회 설립에 뜻을 두었다. 그는 이미 잘 가꾸어 놓은 신광교회를 떠나서 1975년 5월 11일에 서울 관악구 신림3동 612-39호의 2층 건물에 예배처를 마련하였다. 15평을 80만 원에 전세 내어 12명으로 신림중앙감리교회를 시작하였는데 2년만에 평균 장년집회수가 50여 명에 이르도록 성공하였다. 그 동안 예배 처소도 더 넓혀 이웃 2층 건물인 30평 건물로 이사했고 또 목사주택도 별도로 독채를 전세로 얻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우리 교회가 이 곳에 개척교회를 세우려고 장소까지 계약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최 목사와 교우들은 같은 지역 내에 두 개의 감리교회가 공존할 수 없음을 알고 또 비록 두 교회가 공존할 수 있다해도 그 지역사회에 덕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두 교회가 연합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두 교회의 연합을 위한 협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결과 두 교회가 연합하는 것이 좋다고 결정되고 교회 이름은 신림상동교회로 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황호춘 장로를 이 교회의 전도사로 파송하고 전도사의 생활비(당시 돈으로 13만원)는 우리 교회가 부담하고 담임목사의 교통비도 매월 지불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합동한 이후로 이 교회는 새교회 건축을 위하여 이웃에 있는 대지 150평(신림3동 598-173번지)을 3,000만원에 구입하고 1978년 2월까지 그 잔금을 모두 지불하였다. 이 대금은 자체헌금 1200만원과 사채 1800만 원으로 충당하였고, 우리 교회에서의 지원은 없었다.



1979년에 가서는 이 자리에 연 건평 180평의 아담한 2층 교회 건물을 8천만원 예산으로 세울 계획이 준비되었다. 온 교인이 이를 위해 기도하여 1979년 8월 20일에 새 건축을 위한 기공예배가 최덕순 목사의 사회와 박설봉 감독의 설교로 1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건축현장에서 거행되었다. 이 때 우리 교회 중직은 물론 많은 직원들이 참석했다. 이 건축기금 조달은 자체헌금 6,500만원과 우리 교회 지원금 1,500만원으로 마련되었는데, 신림상동교회의 자체헌금 중에는 김모 장로, 이모 장로, 그리고 서모 집사가 1천만원 씩 헌금한 3천만원과 최 목사 및 직원들이 힘겹게 바친 헌금도 들어 있었다.



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 함께 일하던 김규권 장로는 전도사로 나갔고, 황호춘 장로도 아드님이 목회하는 교회로 나갔다. 그리고 1981년에 일부가 난곡 감리교회로 갈려 나갔으나 1988년 현재 등록교인 1500여 명(장년 600명)으로 이 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일은 이 교회 근처에 다른 교단들에서도 개척교회를 시작하였으나 우리 신림상동교회와 경쟁할 수 없게 되어 전부 철수해 버린 사실이다. 이곳은 평화장로교회가 1년 6개월간 견디다가 철수하고, 은광 장로교회는 3년만에 철수하고, 또 신림 제1 장로교회와 성일 장로교회도 결국 성공치 못하고 전부 철수해버린 어려운 개척지였다. 

신림상동교회의 1988년도 표어를 ‘구령열에 불타는 교회’로 정했으며 속회는 65개 속회가 되었다. 이렇게 자라게 되니까 지금의 교회가 비좁게 되어 성전 증축문제가 제기되었다. 교회 뒤에 있는 집을 구입해서 교회를 늘리느냐, 그렇지 않으면 버스길 옆으로 옮기느냐. 이왕에 교회를 증축할 때 옮겨야 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주위의 집들에 파묻혀 교회가 잘 보이지 않고 또 차를 세워놓을 자리도 모자라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이 불편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1988년도 여름학교에는 오백 명의 어린이가 몰려 큰 성황을 보였다. 직원은 240여 명(장로 3명 포함)이며, 88년도 예산은 1억 5천만원으로 1980년의 예산보다 6배의 성장을 보였다.

 

③ 봉담상동교회

봉담상동교회는 우리 교회에서 시무하였던 윤덕주 전도사님의 유족들(임성택 장로가족)이 헌금을 내고 수원지방에 개척교회를 물색하던 80년 초에 싹트기 시작했다.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상리 13-6호에 대지 80여 평을 사들이고 초대 담임자로 서울신학교(협성신학전신) 제1회 졸업생인 최일곤 목사가 파송되어 80년 4월에 지금의 교회를 설계해서 6월에 착공을 했고, 같은 해 10월 말에 준공을 보았다. 본교회 교인 100여 명이 현장에 내려가 80년 11월 16일 윤덕주 전도사 추도예배를 시작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첫 해인 80년에 5, 6명의 교인이 합심해서 기도하고 전도해서 교인이 점점 늘어났는데, 83년에 50명, 86년에 70여 명, 그리고 88년에는 75 가정 110명에 이르며 15속의 교세로 확장되었다. 지난 88년 여름학교(88. 7. 18~20)에는 102명의 어린이가 모여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을 받은 바 있다. 



이 교회의 초대교인으로는 김도영, 황영순, 강신준 씨 등인데 많은 활동을 한 분들이다. 88년도 봉담상동교회의 표어는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자’인데, 교회가 부흥 할 뿐만 아니라 수원시가 팽창됨으로 앞으로 이곳이 크게 발달할 것을 예상하여 전 교인이 합심해서 8천만원을 들여 대지 130여 평을 더 사들여 앞으로 5년 목표로 교회를 4층으로 증축할 계획을 서두르고 있다.



④ 병점상동교회

경부선을 타고 경기도 병점역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교회가 바로 병점상동교회이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란 믿음을 갖고 서울신학교(협성신학전신) 1회 졸업생 김대일 목사는 부인 안귀호 씨와 1980년 1월 27일 단 두 분이 손을 마주잡고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병점에 교회를 개척하게 해주십시오. 이 지역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이 근처에 있는 근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해주십시오’ 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나서 김 목사는 서울신학교 교장 박설봉 목사를 찾고 봉담에 개척교회를 세울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이 때 우리 교회에서는 일년에 1교회 개척의 선교목표를 세우고 지역을 물색하던 중이어서 쉽게 김 목사의 제의를 검토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라우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도 있듯이 개척교회를 찾고자 하여 기도하는 상동교회와, 개척교회를 세우고자 하나님께 매달렸던 김목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본 교회에서 재정지원으로 180평의 3층 교회를 세우고 전도에 힘쓴 병점 상동교회는 교인이 1982년에 50명, 85년에 70여 명, 금년(88)에는 재적 350명, 장정만 200여 명인 큰 교회로 성장했다. 

병점상동교회의 성장요인으로 총 예산 10분의 1을 구제비로 사용하고 있고 젊은 청년을 상대로 전도했던 것이 성장의 큰 요인이 아닌가 분석하고 있다. 이제는 이들이 중요한 직책에서 교회를 돕고있다.

이 교회 김 목사의 목회방침은 지역사회를 위한 교회, 국가를 위한 교회, 세계를 위한 교회로 지금까지 변함없이 밀고 나가고 있다. 금년의 교회 표어는 ‘주님께서 일하시는 해’로 온 교인이 주님을 도와 일하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교회 발전에 매진하고 있다. 

금년 여름학교에 어린이 140여 명이 등록하여 성경을 배웠고, 바캉스를 못 가는 이웃 주민들을 위해 버스를 대절하여 독립기념관을 관광시키는 이웃사랑의 실천도 금년 7월에 했다.

 

⑤ 인천상동교회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 209-3번지에 대지 100평으로 이 지역 선교에 큰 몫을 하는 교회이다. 인천상동교회는 엄한갑 목사(당시 전도사)가 인천지역에 대지를 구입하고 우리 교회에 원조를 요청하여 관계를 맺게 된 교회이다. 81년 3월 15일에 개척교회로서 개척예배를 드릴 때 다섯 가정12명의 교인으로 시작했는데, 그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1988년에는 장년 60명 교회학교 학생 60여 명으로 늘어났다. 6속에 권사 김기옥 씨, 집사 12명으로, 부흥을 위해 최달호 목사(엄한갑 목사 남편)가 열심을 내고 있다.



⑥ 유천리 상동교회

유천리 상동교회는 우리 교회 최은혜 권사가 건축자금 2천만 원을 헌금함으로써 충청도 지방에 세운 최초의 상동교회이다. 유천리 상동교회는 1986년 2월 16일 박설봉 감독을 비롯해서 우리 교회 중직들과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척예배를 드렸다. 처음에는 이선희 집사 등 3, 4명의 교인으로 시작했는데, 불과 2년 후, 유천리 상동교회는 편종만 전도사의 눈물의 선교와 온 교우들의 총력을 기울인 전도 결과 집사 2명, 교우 40여 명, 교회학교 학생 70여 명 등 날로 자라는 교회가 되었다. 최은혜 권사의 헌금과 우리 교회의 특별회계에서 6백만 원을 들여 50여 평의 아담한 교회를 건축하고 봉헌했는데, 편종만 전도사는 우선은 이 교회를 채우고 더 큰 교회를 세워 농촌교회에 모범이 되는 교회로 위치를 굳혀가는 것이 꿈이라 한다.

 

⑦ 문산상동교회

문산상동교회는 다른 개척교회와는 좀 다르게 세워졌다. 우리 교회 명예장로로 열심히 교회를 봉사하던 강사녀 장로가 그가 경영하던 고아원(영생원)에 고아들을 위해 세운 예배당이 일반교회로 성장한 경우다. 동부신학교를 졸업한 이연상 전도사가 시무하는 문산 상동교회는 87년 6월말쯤에 교인들인 고아들이 모두 이웃 평화원으로 옮겨가서 지금은 일반교인 상대의 개척교회가 되어 버렸다. 80평 대지의 이 교회에 장년이 35명 정도 모이고 있고, 88년에 어린이 성경학교에 80명 정도가 등록하여 앞으로 이 교회 잠재 교인으로 키워나갈 것이다.



(6) 2부 예배와 이원용 목사 부임



1980년대에 우리 교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 교회에서 드리고 있는 9시 30분의 1부 예배를 성격을 뚜렷이 해서 개성 있는 예배를 드리자는 것이었다. 1부 예배는 학생을 중심해서 드려야 하는 것인지, 젊은 청년을 주축으로 드리는 것인지 뚜렷하지 않았다. 1980년 12월 21일 14명의 기획위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1부 예배의 성격을 뚜렷이 하여 예배를 드리되, 좀더 선교적인 면을 강조하고 교회 이웃에 널리 산재해 있는 직업인들에게 주일에도 교회를 찾는 자리를 마련해 주기로 하였다. 그래서 1981년 1월 25일부터 1부 예배를 직장인을 위한 예배로 방향을 정하고, 시간도 9시 30분에서 8시 30분으로 옮겨 왔다. 

상동교회에서 경영하는 새로나가 주축이지만, 이웃 신세계, 미도파, 롯데 등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이들에게 주일을 지키게 하기 위한 예배로 문을 열게된 것이다. 그래서 사회와 헌금위원, 안내 위원들은 이 여러 곳의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이들로 봉사케 하고, 성가대는 합동하여 조직케 하였다. 처음에는 1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100여 명이 넘는데, 설교는 이동학 목사와 이원용 목사가 돌아가며 맡고 있다. 



1981년 1월 25일에 이원용 목사가 삼일학교 교목에서 우리 교회 부목사(교육담당)로 부임하여 왔다. 이원용(李元龍) 목사는 충청북도 음성군 태생으로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보냈다. 음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가 되는 신학공부를 마치게 되는데 6․25사변으로 교과서도 변변히 없을 때 이 목사는 도서관에서 열심을 다해 공부했다. 학생시절 수재란 별명이 붙었으나 그의 성적은 남들이 잘 때도 전등불 아래서 열심히 이룩한 것으로, 노력을 쏟는 천재란 또 하나의 별명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57년도 졸업 때에는 우등상을 수상하여 학우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8년 3월에 교역자로 시무했으나 준회원 가입은 1961년에 하게 된다. 1958년에 태안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한 것을 시발로 두리교회, 효교교회, 춘천중앙교회(부담임), 남춘천교회, 삼일중 실업고등학교 교목을 역임하다가 우리 교회 교육담담 목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한편, 1980년 4월 6일 우리 교회에서 젊은이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고 신앙적으로 훌륭히 교육을 시키던 최근숙 전도사가 목포에 있는 자매선교회 책임자로 영전하게 됨으로, 같은 해 6월 22일에 그 해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한 전규일 씨를 전도사로 초빙하게 되었다. 전 전도사는 군입대로 곧 그만 두었으며, 전규일 전도사 후임으로 1983년 12월 29일에 최임선 전도사가 본 교회로 초빙되어 와서 협성신학교 강사로 갈 때까지 봉직하였다. 그 후 조지영 전도사와 오일영 전도사가 젊은이를 위해 봉직했다. 그리고 1982년에는 원로목사로 모시고 있던 임기봉 목사가 하늘 나라로 가셨다.           



(7) 대형버스 구입



1979년 7월에는 교회의 기동력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우리 교회도 여러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45인승 대형 버스를 1400만원에 구입하여 교회행사와 대민봉사에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대도시의 교회가 그러하듯이 우리 교회도 교회 근처에 우리 교인들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거의가 교회에서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교회출석이 어려운 가운데 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열심히 모이는 교회의 전통을 살려 교회 출석률이 꾸준히 상승되어 지금은 평균 교회 집회율이 850명(1부 150명, 2부 700명)이며 1988년 교회재정의 순결산액은 1억원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계속 우리 교회의 전통인 봉사, 애국, 교육, 선교의 귀한 유산을 발전시켜 겸손한 자세로 이 민족에게 우리 교회가 맡은 사명을 다하여 나갈 것이다.





(8) 연세대학교 법률상담소



우리 교회 내에 있는 이 법률 상담소는 1974년 10월 20일에 우리 교회의 뒤에 지은 임시 가건물 3층에서 문을 열었고, 교회의 새 건물이 완성된 후에는 1976년 10월부터 5층에 자리잡고 있다. 이 법률상담소는 소장인 신현주 교수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신 박사는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새로나 백화점 고문변호사로 있는데, 우리 교회와 새로나 백화점과 종업원 및 업주들의 법률상담을 지도하고 있다. 이 법률상담소의 목적은 ‘재정적 능력과 법적 지식의 무지로 인하여 법이 부여하는 제반 보장의 충분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료 법률상담 및 무료 변론을 통하여 사회적 법적 정의의 창달과 사회봉사를 통한 실천적 구현을 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로 되어 있다. 상담 내용은 법률상담 및 변호이고 상담 대상자는 ①극빈자에 한하되 그 판단은 본 상담소 규칙에 따라 재량의 의하며, ②민사, 형사, 행정, 병역, 기타 모든 법률 문제이다.

법률상담소의 상담원은 연세대학교 법과 교수 및 현직 변호사로 되어 있고 현재는 매주 2회(수, 금) 오후 2시부터 시작된다. 상담절차는 ①적어도 3일전에 연락하여 상담시간 배정을 받아야 하며, ②서신 또는 전화상담은 일체 받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가난한 서민층을 위하여 시작된 이 법률 상담소는 우리 교회 내에 자리를 잡고 개소한 이래 6년간 계속 서민층의 편에 서서 억울한 그들의 사정을 해결해 주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상담소가 목적한 바와 같이 주로 서민층이 이 상담소를 이용하여 1974년에는 100건의 법률문제를 상담하여 주었고, 1975년에는 130건을 처리하고, 76년에도 100건, 또 77~79년까지 300건, 합계 600여 건을 해결하여 주었다. 앞으로도 이 상담소를 이용하는 서민들이 많이 몰려와서 도움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9) 숫자상으로 본 우리 교회의 성장



통계나 숫자의 대소로 어느 교회의 실력이나 저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리 공평한 평가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객관적이며 상대적인 평가는 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교회의 교인 등록 통계나 교회 예산통계를 보면 새 성전을 건축하기 전과 그 후가 엄청나게 다르게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교인 증가율과 교회 수입액이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을 볼 때 우리 교회는 정상적이며 꾸준한 성장을 한 흔적을 넉넉히 볼 수 있다. 먼저 우리 교회의 교인 등록통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연 도

1955

1960

1965

1970

1975

1976

1977

1978

1979

교인수

470

487

906

908

1,070

1,190

1,302

1,430

1,700





특히 교인 증가율은 이상의 통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새 성전을 건축한 이후부터 해마다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따라서 예배 출석인원도 지금은 그 넓은 대예배당을 주일마다 꽉 메우고 있다. 교회를 크게 지으면 그만큼 넓은 공간도 채워지기 마련이라는 진리를 다시 체득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 교회의 예산도 해마다 증가되고 있다. 1974년~1979년까지의 6년간의 우리 교회의 헌금 상황은 다음과 같다.



                                                     

(단위 1000원)   

연  도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예산)

헌금액

9,329

11,643

26,540

38,725

52,347

84,163

115,162

증가율



25%

128%

47%

34%

62%





특히 놀라운 일은 1976년도 결산이 전년도에 비하여 무려 2배 반이나 되는 128%의 증가를 보인 것이다. 이 해는 우리 교회가 새로 입당예배를 드리던 해였던 해인 만큼 우리 교인들의 감사의 마음과 헌금이 답지한 까닭이라고 본다. 우리 교회 90년 역사에서 정말로 찾아볼 수 없었던 비약적 성장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추수감사절 헌금이 1978년에는 7,641,750원이었던 것이 1979년도의 추수감사절에는 16,757,400원이나 되어 감사헌금 비율도 두 배 이상이나 증가된 것이다. 흔히들 신앙의 척도를 감사의 척도로 잴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 교회의 신앙의 질적 향상 역시 이런 것으로도 측정할 수 있다. 물론 이상의 통계에는 새로나 백화점의 수입은 일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물론 우리는 통계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교인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겸손하게 우리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섬기며 애국하며 가르치며 선교하다 보니 이상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기록하고 지나가려는 것 뿐이다. 또 이런 숫자가 우리 교회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려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자랑보다는 섬기는 자라는 우리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재확인하고 앞으로의 100주년을 맞이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섬기면서 주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심으려고 한다.

8. 교회 증축

우리 교회가 신축되던 1977년부터 증축 문제가 대두되었다. 교회학교 교실이 부족하고 청년회실, 여선교회실, 남선교회실, 교회 행정기관이 들어가야 할 공간 등 엄청나게 필요한 방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증축 문제는 신축해서 입주하던 날부터 계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교회는 신축할 당시부터 20층을 지을 수 있도록 기초공사를 해 놓았다.그러나 돈이 없어 4층까지 백화점을 지었고, 5층에서 9층까지는 적은 평수로 올려서 5~6층은 백화점에서 사용하게 하고, 7층에서 9층 종탑의 11층까지는 교회에서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배가 파하면 좁은 공간에 인파가 몰리게 되고 또 교회 기능에 큰 몫을 하고 있는 대화의 광장들이 모자라는 형편이었다. 5층 프라자를 8층까지 올려 지어 교회기능도 효율적으로 삼을 수 있게 하고, 모자라는 교실과 사무실을 충당하고 또 도심지에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주차장 시설의 확장도 해결해야 됨으로 증축을 서둘렀던 것이다. 몇 년에 걸쳐 증축을 계획하고 추진해 왔으나 허가가 나지 않고 있다가 주차장 건설이란 당위성이 인정되어 허가(1987. 12. 31)가 나옴에 따라 1988년 1월 3일 우리 교회는 즉각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증축에 박차를 가했다.



건축위원으로는 관리부 전체위원이 되고, 위원장에 관리부장 서성옥 장로, 서기에 정남규 장로가 맡고, 박설봉 담임목사와 신담임(이동학) 목사를 당연직 위원으로 하였다. 그리고 건축 실행위원을 위촉하고 모든 권한은 실행부에 위임할 것을 결의했는데, 실행위원으로는 위원장 서성옥 장로, 서기 정남규 장로가 그대로 맡고 당연직 위원으로 박설봉 담임목사 신담임 목사(이동학 목사) 그리고 87년도 각부 부장, 즉 선교부장 서장석 장로, 교육부장 이광호 장로, 사회봉사부장 임광원 장로, 재무부장 양봉순 장로, 관리부장 서성옥 장로, 선교회 대표로 임성택 장로, (주)새로나 대표 박세용 장로, 유경험자 김영상 장로, 윤달 장로, 정남규 장로, 그리고 권사 중에 김성환 권사와 임완순 권사로 조직되었다. 



이들 위원들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교회 증축을 빠른 시일 내에 그리고 완벽한 건물로 짓기 위해 숙의를 거듭한 끝에 (주)유정공영건설에 증축을 맡기기로 하고 1988년 3월 2일 계약과 함께 착공을 했다.

821.7(2,711.92㎡)평에 대한 건축을 하는데 외장 공사는 비교적 빨리 되었으나 내장 공사와 주차장 시설(카 리프트 등)을 갖추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1988년 10월 9일 깨끗하게 완공되어 입주하게 된 것이다.

증축 비용은 약 6억의 예산이 소요되었는데 그 동안 교회에서 증축을 위해서 비축해 두었던 자금과 특별회계에서 적립한 돈, 그리고 6월 5일 온 교인이 헌금한 61,551,000원으로 짓게 된 것이다.



증축된 부분에는 주차장과 남선교회실, 여선교회실, 성가대실, 유년부실, 유․초등부실, 6개 식당, 관리집사실 등이 더 늘게 되었고, 8층 프라자는 대예배 후 온 교우들이 대화의 장소로 쓰이게 될 것이다. 

양주군 입석에 있는 교사는 수려한 산 속이어서 수양에는 최적지이겠으나 대학의 발전 조건으로는 부족한 점이 없지 않아 학교재단은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교회와 협의하여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상리 8-1번지에 2만 천평(3억원)의 땅을 구입하고(87년 4월 17일), 3,546평의 새 교사를 건축하였다. 

지난 87년 11월 9일 재단측(교회 온 직원들), 학생, 교수들이 삽을 들고 건축기공을 시작하여 근 1년만인 88년 9월말에는 완공을 보게 되는데, 교실이 40여개, 강당(297평), 도서관(285평), 그리고 기숙사(275평) 등이 들어섰으며 건축비는 22억 6천7백만원이 소요됐다. 건축업체는 유정종합건설주식회사가 맡았다.



정문 기념 동판

우리 교회에 들어오다 보면 양쪽에 동판이 부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1984년 1월 29일 중직회의 결의에 의해서 제작한 것인데, 우리 교회는 민족 교회요 독립운동의 요람지로서 오늘날 현대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변천되어 옛 모습의 교회가 없어지고 자리도 흔적을 잃게 되자 독립운동의 요람지, 민족교회의 발자취를 남기자는 뜻이 합쳐져 결정을 보게 된 것이다. 

교회에 들어오면 오른쪽 벽에 독립운동을 표시하는 동판이 새겨져 있다. 스크랜톤이 의사로서 이 땅에 들어와 인술을 펴는 상징도 있다. 이것은 최덕휴 권사(경희대 미대 학장 역임)의 지도로 최희수 교수(장안대)가 제작한 것이요, 왼편에 보이는 시는 우리 교회의 서성옥 장로가 지었고, 김유겸 씨(장학사)가 글을 쓴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영원한 상동

칠흙 같은 밤을 이겨 낸 새벽

여기 상동이 우뚝 섰다.

국운이 쇠잔해 숨 소리 여리어 갈 때

1885년 이 땅에 보냄 받은 이 선교사가 스크랜톤

1888년 이 터를 닦고 복음의 문을 열었다.

종로 인경이 자고 남대문이 닫혀도

여기 상동의 종소리는 깨어 온 땅에 울렸다.

선교하며 애국하던 이 땅의 교회

큰 자를 내고 지도자를 기른 상동

청년학원을 열고, 공옥학교를 세우고

을사조약 반대 상소문을 올리며

청년회장 이 준을 헤이그 밀사로

3․1독립 선언 33인 중에 상동출신 목사가 네 분

눈물과 기도로 항거한 최성모, 오화영, 이필주, 신석구 

민족지도자의 본거지도 되었으니

주시경, 남궁억, 이동녕, 이회영, 이승만, 김 구……

1900년 예배당 크게 짓고

서울 장안 구석 구석 복음의 씨를 심었으니

상동은 한국 으뜸의 교회 1913년의 교인수가 2900,

한국인 초대목사 전덕기는 민족과 교계의 거목이었다.

일제탄압 속에서 상동은 울었다.

1944년 예배당에 빗장이 걸리던 날은

교인도 시민도 함께 울었다.

하지만 정의의 물결 타고 해방은 왔고

상동은 주의 이름으로 굳굳하게 소생했다.

상동은 6.25동란의 쓰라림도 이겨냈다.

불탄 성전을 고치고 상처난 가슴을 달래고

십자가 높이 들고 뜨거운 불을 붙였다.

상동의 중흥을 가져온 이 박설봉 목사  

1973년 삼일학원을 인수 운영

1976년 웅장한 새 성전 봉헌하고 같은 해 백화점 새로나 열고

1977년 협성신학교를 설립 교역자 양성

국․내외 상동 지교회 늘려가니  

이제는 대 상동 영원한 상동

세계를 향해 크게 외친다.

선교하는 교회, 교육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

그리고 영원히 주께 영광 돌리는 교회

                                     1984년 10월 9일



9. 24대 이동학 목사 취임

우리 교회의 제24대 담임목사로 그 동안 우리 교회에서 선교담당 부목사로 수고했던 이동학 목사가 취임했다. 



1988년 3월 27일 주일에 박설봉 감독이 정년퇴직을 함에 따라 우리 교회에서는 1988년 1월 25일 박목사 후임 담임목사 인선을 위하여 김광식 목사, 서장석 장로, 서성옥 장로, 양봉순 장로, 이광호 장로 그리고 함정희 장로 등 일곱 명에게 인선 업무를 맡도록 인사위원회에서 전권을 위임했다.

이들은 위임 즉시 1월 31일에 첫 모임을 갖고 인선을 위한 조직을 했는데, 위원장에 김광식 목사, 서기에 서성옥 장로를 선임하였다. 이들은 1988년 1월 31일, 2월 7일, 2월 14일, 2월 21일 등 네 번의 위원회를 열고 우리 교회 담임목사로서 적절한 인물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협의하고 인선을 한 바 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2,000년대에 도시 교회로서의 선교를 펼쳐야 하며, 대 공산권 선교에도 눈을 돌려 책임 있는 선교를 펼쳐야 하기 때문에 24대 담임목사를 모신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었다. 또 한편으로 2,000명이 넘는 우리 교회 교인들을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알고 살필 수 있는 분을 모셔야 하기 때문에 인선에 어려움이 있었다. 위원들은 담임 목사의 인선의 기준을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그 기준을 보면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한 분으로서 대학원을 졸업한 분이면 더욱 좋을 것이며, 40대 후반으로부터 50대에 이르는 연령이 적절하고, 목회에 성공한 목사로서 좋은 목회자의 성품을 지닌 분이어야 하고 우리 상동교회의 위치로 보아 행정과 치리 및 경영과 지휘 능력을 갖춘 분이어야 될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많은 훌륭한 후보자들이 추천되었는데, 이분들 모두 한결같이 성공적인 목회자들이었으며 우리 교회에 모셨을 때 적절할 분들이라 평가됐다. 본 교회 담임목사인 박설봉 목사도 이분들의 명단을 보고 이미 추천된 본교회 이동학 목사 등 후보로 추천된 분들(다섯 분) 중에서 어느 분을 결정해도 좋을 것이니 기도하며 논의하여 합의하라고 인선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선위원들에게 권고한 바 있다.



이에 위원들은 88년 2월 21일, 위원 전원이 모여 진지한 협의를 한 결과 최종적으로 우리 교회 부목사인 이동학 목사를 새 담임목사로 인선하여 인사위원회에 제청하기로 전원일치 합의를 보았다. 

이동학 목사를 전원이 합의하게 된 것은 이 목사는 우리 교회에 십여 년간 봉직하였기 때문에 우리 교회의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요구와 미래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고 계획할 수 있으며, 안정과 발전에 크게 기여 할 분으로 마음을 모은 것이다. 또 명예담임목사와 변함없이 호흡을 같이 하며 목회에 전념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또 이동학 목사는 평소에 깊은 신앙생활, 기도생활로 살 뿐만 아니라 과묵한 성품으로 온 교우들의 신앙 성장과 기독교 교육에 정성을 다하며 교회의 화평과 사랑의 교제에 헌신할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동학 목사는 1934년 12월 13일에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아세아 연합신학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일찍이 대학 재학 중에 학보병으로 군의 의무를 끝마쳤고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삼성교회 담임 전도사로 목회생활을 시작해서 후안교회 담임으로 1967년에 감리교단의 정회원으로 허입되기에 이르렀다. 1968년에는 봉일천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크게 신축하였고 교회를 부흥시켰다. 



그는 봉일천교회 목사로 시무하는 동안 웨슬리유치원 원장(1968년), 파주경찰서 경목(1971년), 경서지역 기독교 연합회 회장(1973)등 사회봉사에도 앞장섰으며 교단적으로는 서울 북지방 사회부 총무로서 우리 교회 선교담당 부목사로 부임 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본 이동학 목사는 본 교회 담임목사 취임이후 1988년 12월 삼일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재직중이며, 1991년 3월부터는 2년간 중구용산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고, 1997년 1월 23일 미국 미시시피주 러스트(RUST)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