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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장-(1)발전의 발자취(상동111년사)(260-313)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4,919


            제22장 발전의 발자취 (1) (260~313P)



1. 진통

우리 교회의 발전을 위한 큰 진통의 징조가 1964년 12월 27일의 당회에서 나타났다. 이 당회에서 한모, 송모, 조모 장로가 정기적으로 2년에 한번씩 있는 장로 신임투표에서 재석 ⅔ 이상의 신임투표를 받지 못하여 불신임 당한 것이다. 이때의 재석 ⅔는 60표 이상이 되어야 하는데 이에 훨씬 미달되었다. 점포 문제와 기타 여러 가지 문제와 관련되어 이분들은 담임목사와 사사건건 대립되었고 따라서 교회 평화가 파괴되어 교회 분위기도 어지러워 이들에 대한 교인들의 불만이 컸으며,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한다 하여 당회에서 장로 불신임을 당했던 것이다.  

즉 이권에 개입되어 교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일부 장로 그룹과 새롭게 교회를 건설하려는 젊은층들과 대립이 표면화된 것이다. 교회행정 면에서도 교회 재산을 개인 이득을 위해서 사용하려는 그들에게 담임목사가 반대를 하니 담임목사도 모르게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여 이것을 목사로 하여금 “당회에서 발표를 하라”고 강요했으며, 이에 불응을 하자 담임목사를 연회에 고발까지 하면서 담임목사를 괴롭혀 온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교회를 새롭게 건설하려는 젊은층들은 “이럴 수가 있느냐?” 면서 분개하고 나섰다.

담임목사를 연회에서 고발한 이유로는 ⑴ 교회분열 조장, ⑵ 직권 남용, ⑶ 박사학위 수여 문제 등을 내세워 트집을 잡아 담임목사를 내 보내고 교회의 헤게모니를 잡아 마음대로 처리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교회를 바로 잡아 보려는 젊은층들을 비롯한 뜻 있는 다수의 교우들은 이런 때일수록 합심하여 교회를 섬기고 이들을 배격하자고 입을 모았다. 정의의 입장에서 관리하는 담임목사를 주축으로 하여 온 교우가 일심동체로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의 뜻 안에서 교회 평화와 새 성전 건설의 꿈을 키워 나가자고 다짐하였다.  

이 사건 후에 조모 장로는 다른 교회로 갔고 다른 두 장로는 계속 우리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러다가 3년 후인 1967년 12월 24일 당회에서 당회장인 박 목사가 당회원들에게 한모, 송모, 두 분의 장로 복직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회원들의 기립투표를 요청하였다. 이런 진지한 담임목사의 요구에 몇몇 회원을 빼고는 거의 기립하여 두 분의 장로복직을 승인하였고 장내는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 1967년 12월 24일 당회록.

이리하여 어느 정도 교회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는 듯 하였으나 불신임 당했던 두 장로는 계속하여 담임목사에게 괴로움을 주었다.



1967년에 상동교회는 교회 마크를 공모하여 그 당선작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교회 마크는 교인 가정마다 출입문에 부착하게 되어 있으며 승용차 유리창에도 부착된다. 당시 박설봉 목사는 예배시간에 현상공모 계획을 발표하면서, “상동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며 상동교회 교인된 사명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교회 마크가 필요하다”고 그 필요성을 설명했다.

여러 응모작 중에서 당시 성가대원이었던 청년 이재관의 작품이 당선되었고 상금 3천원이 수여되었다. 디자인 전문가의 작품이 아니므로 보다 현대 감각에 맞게 앞으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겠으나, 그 의미는 매우 깊고 중요하다. 마크의 모양과 의미하는 바는 아래와 같다.  





마크의 전반적 형상

펼쳐진 성경책 위에 ‘상동’의 ‘상’자가 그려져 있다. ‘상’이란 글자를 자세히 보면 이는 포도나무 가지요 또한 종(鍾)이다.



성경책

철저하게 성서에 토대를 두는 감리교 신앙을 상징하며, 펼쳐진 성경책은 열심히 읽고 배우자는 뜻을 나타낸다.



포도나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5)”라는 말씀대로, 그리스도와 교회를 나타내며 또한 포도덩굴처럼 상동교회 교인들은 서로 붙잡고 의지하는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아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하신 대로 열매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이 여기 담겨 있다.



종소리

종소리가 퍼져 나가는 모양의 윤곽선을 그려 넣었다. 종소리는 상동교회의 중요한 상징이다. 스크랜톤 목사 시절에 건축된 벽돌 예배당에는 잘 생긴 종탑이 있었는데 종이 얼마나 큰지 종 치는 사람이 밧줄에 매달리듯 붙잡고 오르내릴 정도였다. 그 우렁차고 낭랑한 소리가 서울 장안에 퍼져 많은 영혼을 구했던 것이다. 교회 마크의 종소리는 우리의 선교 사명과 함께 자유와 애국정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1970년 11월 15일의 구역회에서 박설봉 목사가 1970년 제11회 감리교 총회에서 총리원 선교국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문에 교회가 다시 한번 술렁이게 되었다. 박 목사를 선교국장으로 보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담임목사의 인사문제였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박 목사를 보내려는 측과 안 보내려는 측이 맞서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박 목사를 내보낼 때가 아니라는 결정이 내려졌고, 박 목사도 이 구역회의 결의에 순복하였다. 1970년 11월 15일 구역회록.



그러나 교회 분위기는 다시 극도로 악화되어 여러 가지 불미스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 박 목사도 대단히 난처하고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교회중직 일부에서 임의로 박 목사의 전출을 통고하는 등 무섭게 괴롭힌 것이다. 이러다가 1971년 10월 10일 임원회 석상에서 박 목사가 돌연 사의를 표하면서 미국 유학을 떠나겠다는 그의 뜻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 10월 조사위원회 보고서.

    

교회 직원들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더 이상 관망하고 있을 수만 없게 되었다. 이번 문제는 담임목사의 인사문제에 관한 문제인 만큼 이번 임원회에서 간단하게 결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 모든 임원들이 1주일간 여유를 두고 기도하고 난 다음에 결정하자고 모 장로가 제의하였다. 이 제의가 가납되어 이 임원회에서는 아무 결정사항이 없이 임원회가 1주일 연기되었다. 그러나 절대다수 임원들의 분위기는 전체 임원의 의견은 묻지 않고 소수의 교회 중직들이 그들 마음대로 목사를 이동시킬 수 있는가 라는 분노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이런 우리 교회의 타성을 완전히 시정해 보자는 결의가 넘쳤다.  



이리하여 교회 내 소수의 횡포에 분개한 임원들 60여명이 10월 17일의 임원회에 대비하여 사흘 전에 교육관에 모여 교회의 심각한 사태의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지금은 담임 목사를 이동시킬 때가 아니라고 결론 내리고, 그 대신 임시당회를 소집하여 구역회의 결의도 거치지 않고 담임목사를 유임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리하여 즉석에서 임시 당회 소집 청원서를 작성하여 60명이 그 자리에서 서명하였다. 같은 마음은 통하기 마련이다. 또 한번 분노한 다수의 힘은 무섭고 과격하였다.  

10월 17일로 연기된 임원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 목사의 미국 유학 건은 부결되고, 그 대신 이번 기회에 이런 문제가 나오게 된 동기와 그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즉석에서 5인의 조사위원까지 선출하였다(위원장 박광희 권사, 서기 정남규 속장, 위원 양봉순 권사, 김정웅 속장, 임광원 속장).  

이 5인 조사위원회는 즉시 활동을 개시했고, 임시 당회는 11월 7일 주일예배 후에 모이도록 공고되었다. 역사에 남을 1971년 11월 7일의 임시당회 날이 왔다. 예배 후 12시 30분에 우리 교회에서 박 목사의 사회로 개회되었다.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169명의 당회원이 참석하였다. 당회 서기로부터 오희석 외 60명으로부터의 임시당회 소집 청원서가 낭독되었다. 그 청원서의 토의 내용은



1) 9월 30일까지 박설봉 목사를 사임하라는 통고서의 사실

2) 박설봉 목사를 총리원에 고소한 사실(박사학위 문제 등)

3) 박설봉 목사의 미국 유학 조건하에 목사사임 요구의 사실  



이상의 당회 소집 요청서 낭독에 이어 직원회 서기가 10월 17일의 임원회 회의록을 낭독하고 이때의 결의 사항을 소상하게 보고하였다. 그 보고 요지는 박 목사가 지금 사임할 시기는 아니며, 또 사의표명은 본의가 아닐 것이니 사의는 받아들이지 않기로 제청하였다. 아울러 당회를 소집하여 그 내용을 조사 처리하되 직원회에서 조사위원을 선출하여 당회에 그 진상을 조사 보고키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때 김 모 장로가 목사의 인사문제는 구역회에서 다루어야 하는데 당회가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느냐는 반론이 나왔다. 여기에 대하여, 이번 당회는 목사이동 문제를 직접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법과 질서 및 당회원의 요청대로, 목사를 사임하라고 통고한 통고문과 고소에 대한 사실을 밝히자는 것이므로 당회에서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여 당회는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순서에 따라 이어서 5인 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가 조사위원회 서기에 의하여 낭독되었다. 이 보고서에 대하여 통고문을 보낸 측에서는 이 보고서가 공정성이 없다고 반발하였으나 절대다수의 회원들은 이 보고서를 그대로 받기로 원한 것이다. 이리하여 이 보고서 접수를 위하여 가부를 물으니 표결 결과 113표로 접수되었다.  

다음으로 이번 문제의 조사결과에 대한 처리에 있어서 최 모 회원으로부터 ‘앞으로의 교회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몇몇 분 때문에 평화와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을 제거해야 된다’고 1971년 11월 7일.

전제하면서 담임목사의 사표를 강요한 14명의 제명을 동의하였다. 그런데 이런 과격한 제의에 대하여 반대의견이 없었다. 다만 이들을 일괄적으로 제명할 것이 아니라 구분하여 처리하자는 수정 동의안이 제기되었다. 그 수정 동의안의 내용은 이러하다.



1) 통고문을 낸 15인 중에서 의무금을 내지 아니한 분은 (교리 장정)65단  4항, 5항과 113단 4조 1항에 의거 당회원 명부에서 제명을 하고  

2) 그 이외의 분은 당회에서 선출했던 직분을 회수하고  

3) 장로들은 지방 심사위원회에 당회 결의를 보고한다. 상게서.





이 때 유사부 회계를 통하여 통고문을 낸 14인 중에 임시 당회 때까지 무고히 교회 의무금을 납부하지 아니한 이들을 조사 보고하니, 김 모 장로 외 6명이었고 나머지 7명은 3개월 이상 10개월 분을 월정 헌금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표결 과정만 남았다. 이 문제는 중대사항이니 무기명 비밀투표로 결정하도록 되었다. 이 때 14인 중에 몇 명은 이 표결이 불법이기 때문에 퇴장한다고 선언을 하고 퇴장하였다. 투표결과는 다음과 같다.



투표참가자 114명, 찬성 107명, 반대 3명, 기권 1명



상황은 이렇게 끝났다. 우리 손으로 우리의 팔을 자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픔은 매우 컸다. 실로 장로 5명, 권사 2명, 합계 7명이 제명되었고, 7명은 임원직을 회수했다. 대수술이 아닐 수 없다. 정 모 속장은 “우리의 오른 팔 하나를 자른 것 같은 이 아픔을 딛고 오히려 단결하여 목사님을 보좌하고 정의의 교회, 발전하는 교회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자” 상게서.

는 결의가 피력되어 장내를 더욱 숙연하게 하였다.

이제는 사후 수습만이 남았다. 14명의 중진들을 일시에 잃었으니 그 직책의 보선이 당장 급하였다. 이리하여 임시 당회는 이 보선 방법까지 논의한 끝에 법에 규정된 공천위원, 즉 현직장로와 원로 장로 및 우리 교회 교역자전원을 공천위원으로 선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당회에 공천하도록 하였다. 이들이 정한 공천 원칙은



1) 현직원의 직임 이동은 하지 않는다.  

2) 속장 보선은 각 속에서 열심히 수고하는 분 중 가급적 속별로 1명 정도씩 선출한다.  

3) 권사 보선은 이명해 오셨던 분만 선출한다.  

4) 유사와 탁사는 아주 적은 범위 내에서 공천하되 과거부터 후보로 논의되던 분들 중 천거한다.  



이 원칙에 의하여 공천된 새 임원들은 아래와 같다.



(속장) 강남속  김경환         효자속  조경녀  

         불광속  이완옥         성동속  유옥선

         서교속  홍광은         북부속  김규숙  

(권사) 이명해온 이 김민옥, 김경숙

(탁사) 최명기  

(유사) 이갑수, 김구수    



이상의 공천된 임원들을 당회에서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무려 세 시간에 걸친 대수술이 그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제명된 이들은 다시 이 문제를 일반 법원으로 끌고 가 서울 지방법원에 ‘1971년 11월 7일 당회 결의 무효 및 당회장직 박탈 가처분신청’을 제소하였으나 재판부에서는 이 문제를 심의한 결과 이유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제 비로소 긴 진통이 아주 가버린 것이다.  

이런 진통이 지나가므로 우리 교회는 완전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고, 그 만큼 젊어졌다. 또 교회의 문이 누구에게나 활짝 열렸다. 아무나 우리 교회에 들어와서 열심히 일하며 봉사할 수 있었다. 이번 진통은 구태의연한 기성지도층에 대한 젊은 권사 속장들의 거센 반발이라고 볼 수 있다. 기성지도층이 또 옛날 타성에 빠질 때 이런 진통은 또 올 것이다. 이번 일은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을 남겨 놓았다. 우리 교회에서는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후로 우리 교인들의 마음의 자세는 완전히 변하였다. 전부가 이번 진통을 좋은 교훈으로 삼아 더욱 열심으로 교회를 섬겨 속한 시일 내에 교회의 상처를 치료하고 대발전의 행렬에 참여하고자 굳게 결심하였던 것이다. 이후에 곧 시작되었던 새 성전 건축에 있어서 우리 교인들의 헌신적 노력은 실로 눈물겨운 바가 있었다. 밤잠을 자지 않고 교회건축에 그들의 시간과 재물을 전부 바친 것만 보아도 이들의 열성과 결심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진통 때의 쓰라림을 충성으로 보상하려고 한 것 같다. 이제 온 교우가 한 마음이 될 수 있고, 그 단결된 힘으로 우리 교회는 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 새 성전 건축

태풍이 지나간 다음에는 바쁘기 마련이다. 이해관계와 교단 정치 등 복잡하게 얽혀들었던 과거를 청산하고 상동교회는 새로운 혁신 바람이 불어왔다.  

관리 부장에 김용일 권사, 재무부장에 박광희 권사 등 권사급이 중책을 맡았으며, 관리부원들의 발의로 교회 자가용을 구입하는 등 목회 행정에도 전문화, 분업화를 꾀했으며, 교회행정 사무체제를 잡아 나갔다.

암흑의 1971년이 지나가고 1972년의 새해가 밝아오면서 그 동안 중단상태에 있었던 새 성전 건축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건축설계에 앞서서 우선 교회건축을 위한 기본조사부터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기초 연구조사는 거의 1년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전문적인 분야인 교회 신축건물의 효율적 활용을 위한 타당성 조사연구는 이 방면의 전문가들에게 속히 의뢰하여야만 했다. 이런 중요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하여 먼저 건축연구위원회를 조직했는데, 33인 민족대표를 상징하여 연구위원도 33인으로 정하였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축연구위원회의 부서와 명단은 다음과 같다(1972년 2월 20일 발표).



① 위원장 박설봉 목사, 부위원장 김용일 권사, 간사 정남규 속장  

② 건물조사 연구위원장 서성옥 장로, 서기 임규택 속장, 위원 박종국 권사,  이갑수 유사, 김정웅 속장  

③ 재정조사 연구위원장 박광희 권사, 서기 박우석 권사, 위원 구실 장로,    최상설 속장, 최명기 탁사  

④ 섭외조사 연구위원장 김영상 장로, 서기 이용직 권사, 위원 이덕호 속장, 최진호 속장, 홍정모 사장  

⑤ 성전조사 연구위원장 황호춘 장로, 서기 임광원 속장, 위원 이기환 장로, 이창주 목사, 홍윤분 전도사

⑥ 공익시설조사 연구위원장 배경렬 장로, 서기 윤병무권사, 위원 변민학권사, 최홍기속장, 이태호속장  

⑦ 데파트․아파트조사 연구위원장 조형재장로, 서기 양봉순권사,위원 함정희권사,이봉주유사,오희석유사



이상의 위원들이 이 연구위원회가 조직된 이후로 그 해 8월까지 분과별로 모여 활동하고 그 동안 모으고 연구한 재료들과 연구결과를 수시로 임원회에 보고하여 성전 건축계획에 박차를 가하였다. 드디어 다음 단계인 건축설계와 시공업자도 선택하고 결정할 단계에 이르렀다. 8월 20일에는 지금까지 활동해온 건축연구위원회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그 대신 성전건축 위원회를 조직하고 새 성전건축을 위한 구체적이고도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건축위원회도 33인으로 구성하였는데 그 건축위원과 부서는 다음과 같다(1972년 8월 20일 발족).  



박설봉 이창주 홍윤분 고명균 김광식 이기환 황호춘 배경렬 조형재 구  실 김영상 서성옥 변민학 김영락 박광희 함정희 이용직 윤병무 양봉순 김용일 박우석 최진호 이덕호 이봉주 이갑수 오희석 최명기 최홍기 임광원 이태호 김정웅 임규택 정남규 [고문] 김종필 이환신 정등운 윤창덕 조윤승  



그러나 교회건축의 실질적 추진기관은 건축위원회의 실행위원회였다. 이 실행위원회에서 모든 중요한 건축에 관계되는 결의사항이 의결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건물이 건축되었다.  

특히 건축연구위원회 조직의 기획조사부에서는 건축 비용의 소요액 판단을 하고 예상수입을 조사하여 건축규모를 확정, 실행부에 건의하는 일로부터 건축을 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기초조사가 기획 조사부장 서성옥 장로와 서기 김용일 권사 및 그 부원들에 의하여 세밀히 검토되고, 건축위원회 산하의 전문 자문위원으로 건축기사, 시장전문 연구가, 경험 있는 실무자 3인으로 구성하여 실수가 없도록 하자고 실행부 회의에 건의하는 등 실로 낮에는 각기의 직장에서, 밤에는 교회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매일같이 연구 검토하였다. ‘건축의 타당성 조사’라든가 업종 선정 등 건축 후의 건물 운영관리에 관한 문제들까지 예상하고 검토를 거듭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건축 규모를 어떻게 가져 갈 것이며, 그 건축공사비는 어떻게 조달할 것이며, 어떤 형태로 운영 관리해야 가장 투자 효율성이 높겠느냐는 등 기초 계획을 세우며 전문가들의 자문과 진단을 받아보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기획조사부가 건축위원회로 개편되면서부터는 ‘기획 소위원회’로 조직되어 실제 건축을 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설계업자, 건축공사 도급업자 선정 방법 등, 설계 및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기본기획 즉 계약서 작성, 공사진행, 자금계획 등을 수립하여 건축 실행부 회의에 보고하고 그 실행부 회의에서 토의 결정해 나갔으며, 위원장 및 부위원장, 간사들은 집행을 해 나갔던 것이다.  

건축공사를 하다보니 본래 설계대로 건축할 수 없는 문제들이 발생하여 설계변경을 해야 하는 문제라든가, 증축 설계변경을 결정해야 하는 문제 등을 7인 기획 소위원회에서 검토하고 실행부 회의에서 토의한 후 결정, 집행해 나갔다. 또한 건축공사 진행 도중 인근 주변 건물주들로부터 이해관계에 휘말려 갖은 훼방을 받고 심지어는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까지 받아 고통을 당할 때마다 건축위원장 박설봉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실행위원들은 기도하며 의논하여 온 교우들의 도움을 받고, 특히 신현주 변호사의 자문을 받는 등 실로 거 교회적으로 정성을 기울였다.

7인 기획소위원회 위원장 서성옥 장로와 김용일 권사, 양봉순 권사, 박광희 권사, 조형재 장로 이용직 권사, 안덕영 권사와 실무 기술간사 임규택 속장, 행정간사 정남규 속장 등이 거의 매일 같이 모여 진행사항을 협의하고 진단하였다. 건축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재단법인 기독교 대한 감리회 유지재단과의 관계, 문화공보부와의 관계, 건축 후의 백화점 개설허가를 위한 상법 법인체 설립 준비 관계 등 참으로 예상치 못했던 광범위한 문제들에 봉착하였으나, 얽힌 실오라기들을 하나 하나 풀어 나갔다. 성전이 완성될 수 있도록 온 교우들이 합심하여 기도하고 헌금하는 일까지 기획하고 결정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담임목사이자 건축위원장이었던 박설봉 목사의 눈물의 기도와 피나는 노력이다. 모여서 의논하는 일에는 서로 의견이 달라 옥신각신 하는 경우도 생기고 인간적인 온갖 문제들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럴 때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일깨워 주고 격려하며 조정하는 역할을 담임목사가 했기 때문에 오늘의 결실이 맺어졌다고 보아야 하겠다.  

중요한 모든 결정을 하고 집행해 나갔던 건축위원회 실행위원회 조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실행위원회]  위원장         박설봉

        부위원장         황호춘 배경렬 김용일

        총무부장         양봉순

        재정부장         박광희

        건축부장         조형재

        기획조사부장  서성옥

        섭외부장         이갑수  

[간 사]        김영상 정남규 임규택

[감 사]        이용직 임광원  



이리하여 9월 10일에는 신축교회 모형도를 공모하는 단계에 이른다. 이 신축교회 모형도에 25명의 건축가들이 응모하여 27점의 좋은 작품들을 보내왔다. 이 작품들은 투시도 심사위원회에 넘어가서 전문가들에 의하여 세밀한 심사를 받았다. 이 때 우리 교회가 위촉한 심사위원들은 다음과 같다(5명).



심사위원장  김형걸 교수(서울대)  

심사위원           이상순 과장 (철도청 건축과장)

심사위원        최덕휴 교수(경희대)

심사위원        조동진 목사(후암교회 교회건축연구)

심사위원        이경모 과장(코리아나 백화점 경영전문가)  



심사위원회의 심사결과, 입선작은 없고 가작 2점과 장려상 3점을 선정하여 주었다. 가작으로 뽑힌 작품에는 각각 20만원이 지불되었고, 장려상에는 10만원씩, 그리고 참가자들 전원에게는 1만원 씩 지급하였다. 11월 5일에는 이들에 대한 시상식까지 거행하였다.  

이 작품들은 교육관 옆에 있는 체육관에서 교인과 일반인들에게 전시하였다. 그러나 새 성전의 최종 설계는 이들 중에서 절충이 되어 설계업자 삼원사(三元社)에 의해 확정되었다.

그 동안 연구 수집한 자료와 신축교회 모형 도안을 기초로 전문 기관인 한국마케팅 개발센터로 하여금 ‘상동교회 신축 건물의 효율적 활용을 위한 타당성 조사연구’를 하도록 의뢰했고, 이것을 기초로 연구검토 한 후 설계업자에게 상동교회 기본 안을 참작 설계하도록 하자는 의견을 모아 설계업자 선정을 하게 되었다.  

12월 10일에는 이 투시도에 입각하여 건축설계업자 선정 응모를 공고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다음 해인 1973년 1월말까지 22명의 업자들이 설계도 모집에 응하였다. 이중에서 건축설계업자인 삼원사(三元社) 대표 이호진 씨의 설계가 채택이 되었다.

설계업자도 선정되었으니 서울시와 새 성전건축을 위한 건축허가를 위하여 1973년 5월부터 서울시와 교섭작업에 들어갔고 1973년 10월 7일 구역회에서는 새 성전구조는 건물 상층부를 교회로, 건물 하층부는 백화점과 임대용 사무실로 쓴다는 오늘과 같은 성전 기본구조가 결정 된 것이다.  

이제는 건축업자를 선정하여 설계도에 따라서 성전을 건축하는 일만 남았다. 건축비 조달은 우리 교인들의 건축 헌금과 그 동안 점포 수입금 등으로 적금한 것과 임대 보증금, 그리고 은행융자로서 처음에는 총 16억 원을 예상하였으나 실제로는 23억 원 이상의 건축비가 소요되었다.  

한편 우리 교회의 당면 목표도 새 성전 건축에 두게 되어 모든 교회의 역량을 성전건축에 집중시켰다. 1973년과 1974년의 우리 교회의 목표도 ‘성전건축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자’ 라는 표어로 집약되었고 모든 기도의 제목도 성전건축에 두게 되었다. 1973년 1월 31일 밤에는 청년회가 주최한 성전건축을 위한 철야기도회가 진행되었는데 이삼십 명의 회원이 참석하였다. 같은 해의 10월 하순에는 교회건축경험이 있는 조용기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하였고 이 부흥회를 계기로 헌금 목표액 2000만원을 초과 달성하는 성의를 교우들이 보여 주었다.  

대규모의 건물을 지으려면 최소한 2년이란 긴 세월이 걸리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 교회구내에 있는 예배당과 목사주택과 사무실 등을 헐어버려야 하므로 당장 예배를 볼 장소와 교역자들의 주택을 마련해야만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임대 중에 있는 단층으로 된 교회 후면 점포에 3층을 더 올려서 당분간 그 곳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이를 위한 예비 조사를 해 본 결과 후면 점포 증축공사비는 약 900만 원이면 될 수 있었는데 이 공사비도 점포 입주자들로부터 전세보증금으로 조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 교회는 부담 없이 곧 후면점포의 증축공사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점포 증축공사는 1973년 10월 말에 시작되어 다음 해 1월 말에 준공되었다. 그리고 박 목사의 주택은 300만원, 홍 전도사의 주택으로 80만원에 전세집을 장만하였다.  

1974년에 들어오면서 성전건축에 박차를 가하였다. 아직 건축허가도 나오지 않고 또 건축을 직접 맡을 건축도급업자도 선정되지 아니 하였으나, 우선 성전 기공식부터 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1974년의 3․1절을 기하여 우리 교회 앞뜰에서 교계의 원로목사들을 모시고 성대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9월 1일에는 건축도급업자를 선정하기 위한 공개입찰에 9개 회사가 등록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 건설산업주식회사(대표 선우영빈)가 우리 교회건축의 도급을 맡게 되었다.

10월 7일에는 건설산업주식회사와 정식으로 도급계약을 체결하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10월 14일부터 구 교회건물 철거가 시작되었다. 건물이 전부 철거된 이후부터 본격적인 지하 굴착공사가 시작되었고, 20미터 깊이의 지하실 겸 기초공사가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공사는 처음부터 주위의 방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20미터나 깊이 기초를 파 내려가니 주위에 있는 건물주들이 혹시나 그들의 건물에 피해나 입게 되지 않을까 하여 불안해하기 시작하더니 우리 교회의 건축허가가 아직도 나오지 않는 것을 알고는 우리 공사를 진행하지 못 하도록 건축중지 가처분신청을 당국에 제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검찰청에서는 이 신청을 받고 박 목사를 호출하였고 무허가 건물건축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지하굴착공사 허가를 받아 땅을 팠고 재개발 사업법의 미확정으로 건축 허가가 지연되어 주변건물의 붕괴 우려로 건축 기초 공사를 한 것이므로 무혐의로 기각되었다.

기존법에 따르면 600평 정도의 무허가 건축에는 5,000만원 정도의 벌금형이나 또는 이에 상응되는 체형도 가할 수 있는 법이 엄존하고 있었다. 실로 일대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개인사업도 아닌 하나님의 성전 건축인데 하나님의 도움이 오리라고 소망했던 것이다. 우리가 바랐던 대로 도움은 어느 고마운 분을 통하여 왔고, 시당국으로부터의 건축허가도 해가 바뀐 1975년 6월 4일자에 드디어 나왔다(허가번호 463호).  

건축허가가 나오기 한 달 전에 건설부에서 우리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주변 일대를 ‘南大門路 3街 第2地區 再開發地區’로 지정하였다. 우리 교회가 이 지역의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건설부의 재개발 사업계획이 발표되어 5월 7일에 건설부 고시 제 67호로 ‘남대문로 3가 제2지구 재개발사업 실시계획인가’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재개발 사업은 건축허가 용도상에 제한이 없는 등 좋은 일이었으나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교회 앞에 있는 지대를 시경 앞 대로를 확장하기 위하여 서울시에 내어놓으라는 것이다. 더구나 앞에 금싸라기 땅인 본 교회 소유대지 60평과 본 재개발 사업지구내에 있는 타인 소유대지 66.8평 까지도 보상 철거하고 합계 126.8평(시가 약 1억 6천 만원 상당)을 서울시에 기부하면 그에 상당한 금액을 재개발사업 완료시까지 면세해 준다는 것이다. 결국 60평 정도의 땅은 내어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비싼 땅을 앞뒤로 잘리게 되었으니 남은 대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원래 우리 교회의 총대지 면적은 1117.6평이었다 그런데 1966년도에 후면소방도로가 뚫리면서 180.6평이 떨어져 나갔고 그 도로 남쪽 중구 남창동 1의 5번지에 또 103.1평의 땅이 고립되었으며, 이번에는 앞에 있는 또 60평 정도가 도로로 편입되어 이리 잘리고 저리 잘리고 하여 남은 땅은 겨우 773.9평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 교회의 건물이 이 나머지 대지 위에 세워졌고 이 큰 덩어리에서 떨어진 후면 소방도로 남쪽의 103.1평의 땅의 점포는 임대 중에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오늘의 우리교회는 총대지 773.9평, 건축면적 540.06평, 연건평 4,998.48평이 된 것이다.

교회건축은 이렇게 한 차례의 심한 진통을 겪은 후부터 급진전이 되었다. 골조공사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지하 굴착공사를 시작한지 만 2년만에 거의 교회건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1976년 11월 15일에는 건물 가사용(建物假使用) 승인 허가를 받고 11월 28일에는 급한대로 7층에서 감격적인 입당예배와 그 해 추수감사절예배를 겸하여 드렸고, 12월 19일에 8층의 대예배당에서 감사의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실로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을 극복하고 진통을 겪은 후의 입당예배였던 만큼 우리 교회의 감사와 감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특히 이런 웅장한 건물의 산파역을 맡았던 7인 기획소위원회 위원(서성옥, 김용일, 양봉순, 조형재, 박광희, 이용직, 안덕영, 그리고 기술감독(임규택), 간사(정남규)들의 노고는 눈물겨웠다. 이들은 각자 직장에서 퇴근하면 늘 교회에서 살았다. 그리고 날마다 밤 11시까지 구수회의를 거듭하면서 그 때마다 건축상 어려움이나 문제점, 개선할 점, 보충할 점들을 지적하고 또 해결해 나갔다.        

3. 박설봉 목사의 중부연회 감독 취임

교회 건축 준비가 한참 진행 중에 있을 때 감리교단은 대 혼란기로 들어갔다. 즉 1974년 10월 12회 정기총회에서 감독 선출을 하지 못하고 총회는 무기 연기되었다가 1975년 2월 특별 총회에서 오랜 혼란 끝에 김창희 목사가 12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총대 30여 명이 종교교회에 모여 갱신 총회를 조직하고 총회장에 마경일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로 인하여 감리교회는 또 한 차례의 혼란기로 접어 들어갔다. 이 논쟁으로 근 1년 감리교회는 마비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더욱이 오랫동안 한국 교회를 도왔던 선교사들도 중립을 선언하였다. 참으로 감리교회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에 빠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헌법개정과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정, 1976년 3월 16일 특별총회를 열고 지금까지의 단일감독제도를 다원감독제도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3부 연회의 행정 독립과 연회 감독제를 실시하기로 개헌을 하고 17일 연회감독을 선거하였다. 그 결과 동부연회는 박대선 목사 남부연회는 김순경 목사, 중부연회에서는 박설봉 목사가 피선되었다.  

한참 건축이 진행되어 가고 있는 도중이라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본 교회 중직들의 권고와 총회원들의 권유로 “감리교회의 통합에 가교가 되겠다”고 천명하고 박 목사는 동년 3월 18일 중부연회감독에 취임하였다.

본 교회 전 교우들은 4월 1일 중부연회 감독 취임 축하식을 약 500명의 축하객과 함께 성대히 거행하였다. 박 목사는 1978년 12월까지 2년 10개월간 감리교회 통합 운동의 기수로서, 5,000교회 100만 신도 운동과 중부연회 발전에 큰 공을 세우고 무사히 임기를 마치었다.

4. 성전 봉헌식

도합 23억 원 이상의 건축비에 2년 2개월(1974년 10월 7일~1976년 12월 31일)의 긴 공사가 마무리되고 다음 해인 1977년 3월 29일에 건물 준공검사도 끝나게 되니 이후부터는 건축공사에 대한 정리 및 청산 단계에 들어갔다. 1978년 6월 30일 현재로 공사비 미지급 액이 165,565,653원이 되고, 또 건물공사의 하자 미비사항도 엄밀하게 검토되어야만 했다.  

이러는 가운데 공사비의 내역도 정확하게 파악되고 또 막대한 건축비 내역도 공개되었다. 건물시설공사비 총액이 23억 5500만원으로 나타난 것이다. 실로 전국에서 단일 교회 건축비로는 최고의 금액이었고 또 건축 규모로도 전국 최대의 건물이었다. 지하 2층, 지상 9층, 종탑 12층, 건축 연건평 5,000평에 엘리베이터 3대, 에스컬레이터 6대, 자동차 전용 승강기, 중앙집중식 냉․난방시설, 자동 화재경보기, 나선형 계단 등의 현대식 시설과 장비를 갖춘 맘모스 건물이었다. 그 공사비 내용(단위 천원)을 보면 다음과 같다.



건축공사비 1,694,000

설계감리비 24,000

ES, EL 공사비 218,000

철거보상금 86,000

장치장식비 117,000

건축부대비용 23,000

기타부대시설 88,000

건설자금이자 105,000

합계   2,355,000



이 중에서 우리 교회 건물 건축공사를 도급 맡았던 건설산업주식회사와의 공사 도급 확정액이 1978년 6월 30일 현재 16억 9380만원으로 확정되었는데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1) 도급계약금                  1,358,000,000원(1974. 10. 10. 확정)

2) 물가 상승률 적용 추가          185,800,000원(1976. 4. 합의각서)

3) 추가공사비                     150,000,000원(1976. 12. 합의각서)



이 추가공사비는 새 건물 뒷부분을 한층 더 올려 4층으로 한 공사비와 기타 여러 곳의 구조를 변경한데 소요된 경비와 물가상승으로 인한 인상분이였다. 또 공사비 미지급액도 분할 지불하기로 합의하였다.

외부의 원조 없이 우리의 피땀으로 세운 새 성전을 1901년에 이어 두 번째로 하나님께 봉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외부의 도움이 없이 어떻게 이런 엄청난 공사비를 마련할 수 있었을까. 그 재원조달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자체자금조달           290,000,000(1978. 6. 30. 현재)  

임대 보증금            1,400,000,000

단기 차입금              500,000,000(한일은행)  

공사비미지급액           165,000,000

합계            2,355,000,000원  



우리는 만사에 감사할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 교우들의 피나는 노력과 기도가 있었으나, 하나님의 축복 없이는 이 방대한 공사가 마무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공사의 시작과 도중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험이 있었으나 이 모든 난관을 하나님이 그때그때 뚫고 나가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봉헌식의 날짜를 정하는 일이 남았다. 마침 다음 해(1979년)가 기미년이어서 3․1운동 60주년이 되는 해이고, 또 박설봉 목사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지 20주년이 되는 해가 되므로 1979년 3월 1일에 새 성전 봉헌식과 박목사 근속 20주년 찬하식을 아울러 거행키로 하였다. 어려운 시기에 우리 교회에 와서 많은 고생을 하였고, 그런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우리 교회를 이 정도로 발전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기에 찬하식을 하기로 한 것이다.

새 성전봉헌식은 예정대로 3월 1일 오후 2시에 새 성전 8층 대예배실에서 1,700명의 축하객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모인 가운데 박 목사의 사회와 김지길 감독의 주례로 진행되었다. 설교를 대신해서 일본에서 목회하며 교회사에 조예가 깊은 오윤태(吳允台) 목사와,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총무 김관석 목사의 봉헌축사가 청중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축사 후에 교회건축을 위하여 수고한 세 분에 대한 감사패 증정이 있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삼원사설계사무소 소장  이 호 진, 건설산업주식회사 대표  선우영빈, 건축공사현장감독 권사  임 규 택  



그러나 봉헌식의 절정은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의 장로들이 기립한 가운데 담임목사와 함께 낭독한 우리 교회의 선교결의문 낭독순서였다. 이런 웅장한 성전을 지어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 교회의 선교원칙과 방향을 내외에 재 천명하는 엄숙한 순간이기도 했다. 섬기며 전도하는 교회, 애국하는 교회, 교육하는 교회라는 우리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힘찬 결의였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선교결의(宣敎決議)

상동교인은 3․1절 60주년과 성전봉헌의 뜻깊은 날을 맞이하여 80년대를 향한 선교좌표를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하루 속히 건설되도록 전력을 다하는 교회가 될 것을 다짐한다.



1. 선교 기본 정신

          성경 위에 세워진 상동의 역사적 맥박 속에 흐르는 선교적 전통의 뿌리를 찾아 이 일을 개발하고 의식화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를 실천하는 행동정신을 선교정신으로 삼는다.



2. 일반 선교 분야

1) 지역사회의 복음화를 위하여 상업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운동을 전개한다.

2) 기독교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교육지도자 양성 및 프로그램 개발에 전력한다.

3) 5천 교회 백만 신도를 향한 교단적 선교사업에 총력을 경주한다.

4) 은퇴 및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교역자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경제적 지원사업을 추진한다.



3. 특수 선교 분야

1) 해외 및 북한 선교사업을 연구 추진한다.

2) 상동의 교육전통의 얼을 계승해나가기 위하여 각급 교육기관 설치 및 지원을 계속한다.

3) 소비자 보호운동을 위한 기구를 지원 육성한다.

4) 기독교적 정신을 가진 사회 각 분야 전문지도자들의 육성을 위하여 장학제도를 설치한다.

5) 의료선교로 시작한 본 교회의 정신을 살려 무의촌 의료선교를 지원한다.



1979年 3月 1日  

기독교대한감리회 상동교회   목사 박설봉    중직일동



한편, 우리 교회의 새롭게 꾸며진 제단 중앙 벽에 있는 십자가상에 대한 설명은 청중들에게 우리 교회가 역사 깊은 민족운동의 중심지였음을 다시 일깨워주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① 백 바탕은 백의 민족을 상징하며, 푸른색 조명은 일제의 압박에 멍든 우리 민족과 상동교인의 가슴을 표현한다.  

② 십자가의 가로부분-지나간 110년의 시련기의 남대문 거리를 지켜보던 상동교회 돌 정문의 일부  

③ 십자가의 세로부분-1901년부터 1974년까지 신앙의 선조들이 밟고 출입하던 구 교회의 출입문 문지방의 일부  

④ 33개의 벽돌은 3․1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구교회 강당 밑의 지하실 벽 중에 일부로 33인의 독립운동가를 상징.  

⑤ 4개의 네모돌은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 본 교회 출신인 최성모, 이필주, 신석구, 오화영의 네 목사를 상징.  

⑥ 2개의 네모돌 중 하나는 상동 교회 제2대 목사며 초대 한국인 목사인 전덕기 목사를 상징.  

⑦ 2개의 네모돌 중 하나는 당시 우리 교회에서 청년회 회장으로 일하다가 1907년에 헤이그(海牙)의 만국평화회담에 밀사로 파견되어 그 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분사한 이 준 열사를 상징.  

⑧ 둥근돌은 1889년에 스크랜톤의 사가 병원 겸 기도처로 건축한 건물의 태극마크 주춧돌.

  

이번 뜻깊은 우리 교회의 봉헌식에 참석한 분들에게는 세 가지 좋은 선물이 기다리고 있어 더욱 이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우리 교회 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하고 감리교 신학대학 송길섭 교수가 집필한 ꡔ민족 운동의 선구자 전덕기 목사ꡕ(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 전덕기 목사 전기로서는 최초로 나온 책이어서 그 뜻이 깊다)이고, 다른 하나는 박설봉 목사의 설교집인 ꡔ현실과 이상의 갈등ꡕ과 우리 교회의 모형이 들어있는 문진(文鎭)이었다. 이것들은 우리 교회가 정성껏 장만한 선물들로 많은 사람에게 요긴한 책이요 물품이었다.  

봉헌식이 끝난 후에는 7층 소강당과 부속 사무실에서 다과회가 있어 축제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이 날은 우리 교회로서는 잊을 수 없는 감격의 날이었고 보람과 은혜로 충만한 날이었다. 앞으로의 우리 교회의 일은, 점점 다원화되고 전문화되어 가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선포한 선교결의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나가느냐의 문제이다. 이제부터 우리 교회는 전국 교회가 주시하는 교회가 되고 큰 기대를 걸머진 교회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내에서 우선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곁눈질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일인 섬기며 전도하고 교육하며 애국하는 교회의 이미지를 심어나가는 일에만 전념해야 할 것이다.





5. 기업 분야

  (생략, 추후 정리예정)



6. 교육 분야

우리 교회의 전통의 하나인 교육선교는 교회건축이라는 지상과업을 앞에 두고도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전개되었다.



(1) 삼일학원 인수



수원에 있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감리교 학교인 삼일실업 중고등학교(교장 장기홍)가 1973년에 이르러 경영난에 빠져 문을 닫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70여 년의 역사(1903년 창립)를 자랑하는 삼일학원은 학생이 3,000명에 이르고 많은 유능한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다. 그러나 학교재단이 든든하지 못하여 재단에서 학교에 재정적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의 운영 경상비 중에서 학교시설 확장비에 충당하게 되었는데, 학교 경상비의 학교법인 투자는 현행 교육법에 위반되는 것이었다. 결국 문교부 감사에서 당시 금액으로 3,000만원의 학교 운영비가 재단법인의 예산 관할인 학교시설 확장비에 전용된 것이 적발되어 문교부로부터 단시일 내에 위의 금액의 회수를 학교측에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만일 문교부가 지정한 기한 내에 위의 금액을 회수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법에 따라서 조치하겠다는 것이었다.  



사태는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였다. 이런 삼일학원의 운영난을 알고 불교재단의 모 대학에서 삼일학원의 인수를 제의하여 왔다. 만일 삼일학원의 운영권이 불교재단에 넘어가면 하루 아침에 3,000여 명의 학생이 기독교의 영향하에서 불교 문화권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장교장은 이런 긴급한 상황 속에서 우리 교회에 학교 운영을 맡아줄 것을 제의해왔다. 박 목사는 사태의 중대성을 인정하고 이 문제를 우리 교회의 임원회에 내 놓았다. 그러나 1973년 당시 성전 건축비 조달이라는 난제를 안고 있던 우리 교회로서는 3,000만원의 거액을 내어놓을 돈이 없었다. 있었다면 건축을 앞두고 그 동안 비축하여 둔 건축비가 있었는데 이 건축비에서 떼어주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상황이 급하여 우선 임원회에 내어놓았으나 그 결과는 뻔하였다. 건축을 눈앞에 놓고 그런 많은 금액을 학교에 투자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또 이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 감리교단도 보고만 있을 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박 목사는 새 교회를 건축하여 새 신자를 얻는 것도 중요하나 이미 감리교 기관에서 교육을 받는 중에 있는 3,000여 명의 심령들을 다른 종교의 영향권으로 내어준다는 것도 우리의 선교 전략에 큰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임원들에 대한 선교 신학적인 설득이 진행되었고, 이것이 열매를 거두게 되어 드디어 1973년 9월 9일의 임원회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본교회가 건축이란 대과제를 놓고 절대부족인 건축비 염출을 위하여 은행대출까지도 받아서 지어야 될 입장이지만 삼일학원 운영비조로 일금 3천만원을 지원키로 하며 건축기금은 타목적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전용금지결의를 번복결의한다.’



이 때는 새 성전 건축 기공식을 거행하기 전이고 또 그 동안 저축한 건축비는 1억 2천만원 뿐이었다. 이 중에서 3,000만원을 삼일학원에 보조하게 되면 6개월 후에 새 성전을 건축하게 될 때는 결국 9천만원의 현금으로 공사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큰 희생 없이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었다. 다른 종교 단체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학교를 구원하기 위하여서는 건축이 늦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맡을 수밖에 없었다. 또 이것이 곧 선교사업의 일환이었기에 어느 교회인가가 마땅히 하여야만 할 일이었다. 교단이 하지 못하는 것을 개체 교회가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삼일학원과 우리 교회와의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한번의 도움으로 이 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후에도 이 학교의 확장과 발전을 위하여 계속 도와주어야 하는 형편이어서 3,000만원 이외에 2,250만 원을 후에 더 도와주고, 또 화공과의 증설을 위하여 독일에서 도와주는 2억  4천만원의 원조금액에 대한 재단 부담액 8,050만원도 우리 교회에서 마련해야만 했다.



한편 그 동안 삼일학원의 이웃에 있는 매향여자실업중․고등학교의 땅이  삼일학원 내에 1,305평이 있었다. 이 땅을 둘러싸고 그 동안 두 학교 사이에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어서 수원 사회에 덕이 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매향학원 측에서 이 땅을 삼일학원 측에 평당 6만6천원에 매각하기로 합의가 되었으므로 우리 교회가 지불하였다. 이 땅의 대금만도 8,613만원이나 된다.  



이제 삼일학원은 우리 교회가 경영하는 학교가 되었고, 또 이 학교는 앞으로 우리 나라의 상업 역군과 중견 기술자를 양성하는 막중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위기 하에 있었던 삼일학원을 우리의 새 성전건축을 눈앞에 두고 과감히 도운 결과 삼일학원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건축도 이루어졌다.

(5행 삭제, 추후 정리  예정)



주는 자의 복이 결국 이와 같다는 것을 다시 체험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계속 삼일학원을 잘 가꾸어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능 인력을 많이 배출해냄으로써 이 민족에게 크게 이바지하게 해야 할 것이다.



(2) 장학사업



우리 교회의 장학사업은 새 성전 건축 전에도 계획된 바 있다. 즉 1965년 12월 12일의 임원회에서 150만원을 목표로 장학회를 조직하고 장학기금 모금 3개년 계획을 세워 장학사업을 추진하여 왔으나 그 동안 건축 등의 일로 잘 진행되지 아니 하였다. 그러다가 성전건축이 끝난 후부터 장학사업도 활발히 추진되어 1977년도부터 장학금을 지불할 수 있게 되었다.  



장학생 선발은 교육 장학위원회를 거쳐 중직회의의 결의로써 확정되는데, 1979년도의 교육 장학위원회 위원으로는 임광원(위원장), 박기복, 박은용, 서성옥, 서장석, 박종희, 신상옥, 이광호, 이봉임, 이재희, 장기붕, 조병운, 허동현, 홍해은, 최덕휴 제씨들과 본교회의 교역자들로 구성된 바 있다. 장학기금은 1979년 현재 6,696,013원인데 이 기금은 주로 우리 교회의 은행 예금시에 생기는 잡수입에서 나왔다. 우리 교회의 장학금 혜택을 받은 학생들은 다음과 같다.  



1977년:성영철(신학) 군에게 158,640원

1978년 1기분:성영철 군에게 175,500원

1978년 2기분:7명(성영철, 은희곤, 최정심, 장보혁, 김일동, 나희찬, 박기      훈)에게 780,000원



1979년에 들어와서는 1기분으로 6명(은희곤, 최정심, 김일동, 서영석, 나희찬, 이석원)에게 766,000원이 지급되고, 2기분으로는 10명(서영석, 김일동, 장보혁, 이석원, 이종선, 정추자, 문준하, 박용희, 김화경, 최정심)에게 990,000원이 지급되어 지난 3년간 지불된 장학금의 총액수는 총 24명에게 1,870,140원이 지급되었다. 앞으로 이 장학사업은 더 많은 학생들에게 혜택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3) 서울 감리교 신학교의 설립



웅장한 새 성전을 건축한 후 우리 교회의 관심사는 숙원인 교육사업을 어떤 형태로든지 계속 추진하자는 일이었다. 이런 관심의 집약이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교단이 벌이고 있는 5천 교회 백만 신도운동을 위한 교역자 및 지도자 양성이었다. 물론 우리 교단에는 교단이 운영하고 있는 정규 신학대학이 이미 서울과 대전에 둘이나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 두 대학은 문교부가 해마다 시행하는 대학입시 예비고사에 합격한 학생만을 뽑도록 문교부가 관할하고 있는 정규대학이므로 학력이 좀 미흡하여도 소명감이 투철한 학생들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고, 기성 대학은 정원에 발이 묶여 증원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우리 교회에서 신학교를 설립하여 앞으로 교역에 몸바칠 신학생을 양성해 보자는 구상이 우리 교회 일각에서 활발하게 토론되어 오다가 1977년 1월 26일 하오 7시에 우리 교회 5층에서 6명의 신학교 분과위원(서성옥, 임광원, 박은용, 김영상, 장종철, 김관련)들이 모여서 신학교 설립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인 토의를 하였다. 이 모임에서는 신학교 분과위원회 위원장에 서성옥 장로, 서기에 임광원 장로를 선출하였다. 그리고 신학교를 우리 교회가 독자적으로 설립할 것인가 아니면 감리교단적으로 추진할 것인가를 토론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고 이 문제는 담임목사와 더 의논하여 결정하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신학교위원회 회의록, p.2.

  

1월 30일에 신학교위원회가 다시 모여 신학교 설립문제를 위하여 토의하다가 1997년 2월 12일에는 이 위원회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① 본교회가 내용적으로 주도하는 가칭 감리교 서울신학교를 설립한다.

② 본 신학교설립에 따른 제반 추진일정표 작성 및 시급한 학생모집광고 문안작성과 광고의뢰 등 또한 총리원을 비롯한 유관기관과의 연락 등을 추진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박설봉, 김관련, 장종철 세 목사가 담당하도록 한다.  

③ 신학교 운영체제와 방침  

   ㄱ) 이사진 구성 -  현감독 4명, 신학대학장 2명, 총리원 교육국장, 선교국장, 선교사 1명, 본 교회측

        이사 4명, 합계 13명으로 구성하기로 한다.  

   ㄴ) 행정 및 운영 - 본 상동교회에서 주도하기로 한다.

   ㄷ) 학사운영 - 본 교단에 속한 각 신학대학의 저명교수를 초청 담당하도록 한다.  



이상과 같은 결의에 따라 우리 교회는 그 동안 총리원 및 관계기관과 절충한 결과, 교단측은 우리 교회의 주장을 약간 수정하여 우리 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신학교 운영방침을 받아들이고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교로 확정하고 학생모집에 나서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