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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장 정지 작업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4,903


         제21장 정지 작업



1. 구 공옥여학교 건물 회수

정부가 서울에 환도한 이후 각 분야에 걸쳐서 6․25때 입은 엄청난 피해의 복구작업이 시작되고, 서울의 재건도 막을 올리게 될 때 우리 감리교단도 6․25가 우리 교단에 몰고 온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과 상처를 회복하고 치료하는 일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6․25를 전후하여 혼란했던 시기에 우리 교회에서 시무하던 박창현 목사가 1955년 연회에서 정동교회로 파송되면서 우리 교회에는 수표교교회에서 시무하던 신흥철(申興哲) 목사가 부임하였다. 



신 목사는 1899년 4월 13일에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거곡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에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줄곧 교역에 투신하였다. 그는 개성중앙교회에서 1939년부터 1950년까지 시무하는 등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강화 지역에서 목회하다가 6․25 이후에는 서울 수표교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1955년 연회에서 우리 교회로 파송되어 부임했다.



신 목사가 부임하였을 때 우리 교회의 살림을 이끌어 나간 1955년대를 전후한 장로로는 李啓旭, 金源榮, 孫袂禮, 李基煥, 吳台泳, 吳世烈, 崔敬東, 曺任得, 延胤熙, 崔景煥 諸氏이고 韓光鎬, 黃好春, 具 實 장로는 1956년 7월 우리 교회에 이명하여 왔다. 그리고 각 기관장으로는 주일학교장에 연윤희 장로, 장년회장에 한광호 장로, 청년회장에 임성화, 여선교회 회장에 장기화 권사가 수고하였다. 1995년 12월 당회록.

그리고 성가대 지휘는 해방 직후에는 김성환 씨가 수고하고, 반주는 백낙선, 정준경 양이 맡았다. 그 후에는 변성엽(성악가) 씨와 김용선 씨가 성가대 지휘를 하였으며 대원은 35명 내지 40명 정도였고 당시에도 정동, 새문안 교회와 어깨를 겨루었다. 



이 때 공옥학교 교사는 잿더미가 되어 재건은 불가능한 형편에 있었다. 전국이 폐허 상태에 있었고 또 돈이 있는 유지도 없었다. 김원영 교장이 혼자서 동분서주하면서 유지나 동문들, 구호기관을 찾아다녔으나 좋은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런데 노령에다가 병까지 얻어 결국 1956년 12월에 별세함으로써 그나마도 공옥학교 재건의 꿈은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렇게 되니 다른 문제가 또 일어나서 교회가 소란하였다. 공옥 학교 운영재단으로 30여 년 전에 박용래 목사가 주선하여 교회 앞에 세웠던 상가건물의 수입금(임대료)의 사용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교회측에서는 학교도 없어졌으니 그 수입금은 교회로 들여놓아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김원영 교장과 이기환 교감은 이 건물은 원래가 공옥학교를 위하여 세운 것이니 비록 학교가 화재로 없어졌다 할지라도 공옥학교의 재건을 위하여 써야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다가 상가건물의 수입금은 교회로 들여놓되 이기환 장로는 1957년부터 우리 교회의 유급 전도사로 일하도록 하였다. 신홍철 목사 증언 .



이제 공옥학교 건물도 사라지고 그 유지재단도 교회로 환수되었으니, 그 화려한 전통을 자랑하던 공옥학교는 소생할 길이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이다.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57년 1월 당회에서 최경환 장로가 공옥학교 재건비로 해마다 1년에 50만원씩 적립하도록 교회 예산에 반영하자고 긴급 특청하였으나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렇게 교회로 환수된 상가건물 관리권은 불행히도 우리 교회에 분쟁과 불화의 회오리 바람을 몰고 온 씨가 되었다. 이 건물의 관리권을 둘러싸고 일부 임원들 사이에 이해와 의견이 엇갈려 교회 발전에 큰 지장을 초래하였으니 이후에 있었던 우리 교회의 전통과 침체는 거의가 이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교회 구내의 여자 공옥학교는 일제 말기부터 정용일 씨가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철수할 때 인수하여 계속 학교를 운영하다가 해방 후에는 우리 교회와의 인연을 끊고 이 학교를 운영해 나갔는데 그가 8․15와 6․25의 혼란을 틈타서 이 학교를 자기의 개인 소유로 만들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학교 주위를 가시철망까지 둘러 쳐놓고 우리 교회로부터 그 학교를 격리시켜 놓았다. 



정 씨는 해방 전까지는 아사희(旭)여학교라고 이름을 제정했고 해방 후에는 학교이름을 또 바꾸어 ‘京南女子高等公民學校’라 하여 주야간으로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쳤고, 또 영어강습소까지 차려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 교회의 오랜 소유였던 이 공옥여학교가 우리도 모르게 우리 교회와 관계도 없는 개인에게 넘어갈 수가 있는가. 더구나 전덕기 목사의 유업이 어느 개인의 영리목적으로 이용되다니, 이런 모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한 우리 교회의 분노는 대단하였다. 우리의 학교를 도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일치된 우리 교회의 강력한 여론이었다. 이리하여 우리 교회 이름으로 법원에 경남여자 고등공민학교 건물 명도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1959년 1월 직원회의록.



이렇게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1959년 4월 연회에서 신흥철 목사는 필동교회로 파송되었고, 그 후임으로 만리현 교회에서 시무하던 박설봉 목사가 우리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박 목사가 옴으로써 경남 학교 명도소송 사건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박 목사는 우리 교회에 부임하면서 교우들의 영적 지도에 진력하는 한편 어지러워진 교회질서를 바로잡고 선교를 가로막는 제반 요소를 파악하여 상동교회 부흥의 기틀을 마련해야겠다는 목회방향과 치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선 계류 중에 있던 학교건물 명도 소송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이 소송은 그리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따라서 빠른 시일에 이 사건이 마무리 될 수는 없었다.



경남학교측에서는 1922년까지 서울지방 감리사로 있었던 최병헌 목사가 정씨에게 여자 공옥 학교 건물을 넘겨주었다고 주장하고 나섰으나,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맞섰다. 교회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당시의 지방회 회의록과 기타 증거문서들을 찾아서 법원에 제출하였고, 때마침 미국에서 일시 귀국하였던 최병헌 감리사의 자부였던 최환란 여사가 법정에 와서 우리 교회를 위해 유리한 증언까지 하여 주었다. 박설봉 목사 증언.



즉 자기의 시아버지인 최병헌 감리사가 아무런 이유 없이 교회재산을 개인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재판부도 우리 교회가 제출한 증거서류와 또 증인들의 증언을 채택하여 드디어 우리 교회의 승소를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소식은 곧 1961년 12월의 임원회에 보고되었고 우리 교회에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감사하였다. 이 때 교우들은 이제야 교회가 선교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한편 신앙의 열기도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 씨 측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고등 법원에 상소하였으나 또 패소 당하고 말았다. 그 후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 제시에 자신이 없었는지 대법원 상소를 취하함으로써 공옥여학교 건물명도 소송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르게 해결된 것이다. 약 삼십 년간 우리 건물을 불법적으로 사용한 그 사용료까지도 청구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으나 그러나 조속한 시일 내에 학교건물을 아무 손상 없이 내어주는 조건으로 사용료 청구는 하지 아니 하였다. 



이리하여 다음 해인 1962년 8월 13일에는 경남여자고등공민학교 교사를 완전히 명도하여서 본격적인 수리를 하여 이 건물을 종교교육관으로 사용하도록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1962년 7월, 9월 임원회의록.

공옥여학교의 대지는 380명, 건평은 23평으로 이층 건물이다.



이 경남학교 건물 명도소송의 조속한 해결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우리 교회 70년대의 비약적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기초가 된 것이다. 이제 교회발전을 위한 정지 작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2. 새 성전 건축 정지 작업



경남여자고등공민학교 건물명도 사건이 해결됨과 때를 같이 하여 이 역사적인 터에 현대적인 웅대한 새 성전 건축 문제가 교회 내에서 활발하게 토론되고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1901년에 스크랜톤에 의하여 낙성 봉헌된 우리 상동교회의 건물은 구한말과 일제 36년의 통치 하에서 우리 민족의 마음의 고향이 되어 왔었다. 당시의 민족독립 운동가들은 그들 사이에서 서울에 가면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를 만나보라는 말을 그의 동료들에게 항상 입버릇처럼 했다 한다. 



그러나 우리 교회 건물도 오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모습도 초라해지고 건물도 노후하여 손댈 곳이 많았다. 또 해방된 조국에서, 특히 최근에 급성장하는 우리 사회 속에서 우리 교회가 그 맡은 바 시대적 선교적 사명을 완수하려면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건물과 기구와 조직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우리 교회는 옛날의 건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에도 교회의 어려운 문제는 일부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었고 질서 회복이 미흡한 때였다. 점포 관리문제를 둘러싸고 교회 내에서 이해(利害)에 관련된 몇 사람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 가끔 교회 내의 평화가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점포문제는 지금까지 탁사부에서 관리하여 왔는데 그 임대료를 몇 사람이 임의로 정하여 그 일부만 교회에 들여놓고 있었다. 



이런 부조리를 박 목사가 시정하기 시작하니 자연히 이들로부터 극심한 반발이 일어났으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박 목사의 결단성 있는 처리에 적극적인 후원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교회에도 교회에 재산이 있게 될 때 거기에는 이권 싸움과 분쟁이 있어 교회가 침체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도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미 이권을 장악한 측은 이것을 쉽게 내어놓으려 하지 아니 하고, 교회의 발전을 생각하는 절대 다수의 교인들은 교회의 재산이 어느 개인의 이윤 추구의 대상이 될 때 마땅히 그 시정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젠가는 한 차례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우리 교회에도 이 진통은 시간 문제였다.



경남여자고등공민학교 건물을 인수한 후부터 새 성전 건축을 위한 토의가 구체화 되면서 1962년 12월 임원회에서 지금 이 자리에 웅장한 새 교회 건물을 건축하되 교회 점포가 철거된 후에 건축하자는 보고서를 탁사부가 제출하였는데 이 탁사부의 보고서를 임원회가 채택하였다. 이렇게 되면 건축위원회를 구성하여야 하였는데, 그 구성도 탁사부에 위임하기에 이르렀다. 1962년 12월 9일 임원회의록.



1963년에 들어오면서 박 목사는 새해의 목회 계획서를 발표하였다. 1963년의 새해는 ‘기도의 생활을 하는 해’로 정하고, 또한 ‘새 성전 건축 준비의 해’로 선포하여 성전건축을 위한 기초작업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서울시에서는 도시계획 사업이 추진 중에 있었는데, 이 계획에는 우리 교회의 후면을 가로질러 넓이 10미터의 소방도로가 뚫리게 되었다. 따라서 천여 평의 우리 교회의 대지를 전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소방도로가 뚫린 남쪽에는 103.1평의 대지가 남아있게 되어 동서로 뚫린 소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우리 교회 땅이 180평 정도가 나가게 되니 손해도 컸다. 금싸라기 땅이 도로에 편입되게 된 것이다. 

계획 중에 있었던 새 성전 건축도 소방도로가 완전히 뚫리고 또 그 도로주변이 완전히 정비된 다음에 새로 결정된 도로와 그 지형에 다라서 교회의 모양도 결정하고 따라야만 했다. 따라서 새 성전 건축계획은 당분간 보류되었다. 그리하여 1965년 12월 당회에서 박 목사는 새해 사업계획에서 새 성전건축계획을 빼고 그 대신, ①교회 묘지 구입, ②송추(松湫)교회 개척, ③교회 외부수리 ④3개년 계획으로 장학금 기금적금을 계획하였다. 



이렇게 하던 중 1966년 11월에 교회 뒤의 소방도로가 개통되고 또 도로주변대지가 정리되었다. 그런데 소방도로 남쪽에 따로 떨어져 있는 우리 교회의 땅은 103평이 되나 도로에 따라서 길게 뻗어 있으므로 상가로 쓰기에 적합하였다. 그리고 소방도로 북쪽에 있는 길가의 대지에도 도로를 따라 상가를 지을 수 있으므로 임시로 길 양쪽에 임대용 상가를 짓도록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점포에서 나오는 수입은 전액을 새 성전 건축기금으로만 적립할 것을 가결하였다. 1966년 11월 13일 임원회의록.

동시에 새로 짓는 점포관리에 관한 규정도 탁사부에서 그 해 말까지 작성하도록 위임하고 상가건축을 위한 건축위원회 위원장으로 연윤희 장로를 선출하였다.



상가건축 설계는 길 양쪽에 단층으로 27개 점포를 짓도록 하였고 건축 허가도 그 해(1966년 12월 27일부)에 나왔다. 27개 점포 건축 공사비가 229만원으로 낙찰되고, 준공은 1967년 2월 20일 경으로 계획되었으나 공사비가 초과되어 300만원 정도 들었다. 따라서 공사비는 평당 29,470원 꼴이 되었다(118.2평). 1967년 2월 5일 임원회의록.



이 점포 건축비는 입주금을 미리 받아서 충당할 수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이 점포의 입주자 비율은 우리 교인들에게 60%(16점포), 타 교회 교인들에게 30%(8점포), 일반인에게 10%(3점포)로 임대하기로 하였다. 물론 여기에서 나온 수입금이 후에 새 성전 건축에 큰 몫을 한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었다. 



이 때에 소방도로 남쪽에 지은 점포들은 아직도 남아 있어서 임대 중에 있다. 웅장한 새 성전을 위한 정지작업은 이렇게 착착 진행되어 1969년 7월 13일 임원회 때에는 새 성전건축을 위한 연구위원을 위촉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연구위원은 우리 교회의 교역자와 장로 전원, 탁사부원 전원으로 구성토록 하였다. 그러나 건축을 위한 구체적인 연구가 이 위원회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우리 교회에 큰 진통이 다가와서 당분간 연구결과가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3. 선교활동



(1) 지교회 설립과 각 교회 보조



한편 새 성전 건축을 위한 정지 작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도 섬기며 전도하는 교회, 주는 교회로서의 우리 교회의 전통은 계속되었다. 1959년 9월 13일의 임원회의 결정에 의해 시내에 있는 한강교회를 우리 교회의 지교회로 정하고 매월 5000환씩의 재정지원을 해 준 결과 이 교회는 오늘까지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다. 



1964년 6월에는 송추교회를 개척하기로 하고 담임 전도사로는 우리 교회 출신 신학생인 김제태(金濟泰)를 파송하였다. 이 후로 우리 교회는 송추개척교회의 대지구입과 교회건축을 전담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5년 4월에 송추교회 대지로 630평을 구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송추교회의 건축을 위하여 36만원의 예산을 세워서 교회건축을 완성하여 드디어 1967년 10월 8일에 송추교회의 봉헌예배를 성대히 거행하게 되었다. 



1964년 11월에는 남부 연회의 양화리 교회의 신축을 위하여 대지를 구입하여 주었는데, 이것이 동기가 되어 어린이 주일학교 학생이 머리를 깎아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는 등 열심을 내어 오늘에 와서는 완전자립 교회가 되었고, 미신 많은 신도안 계룡산 기슭에서 활발히 선교하고 있다. 이 교회 초대 전도사는 박우동 장로였다. 1966년 5월에는 봉천동교회의 신축을 위하여 대지 평당 삼만원 씩 30평을 구입비로 보조하였고, 이것이 동기가 되어 오늘의 봉천동 제일교회(초대목사 김오봉 목사)가 되었는데, 우리 교회 장로로 있던 이동백 장로가 개척을 시작한 곳이다. 1966년 5월 임원회의록.

그 후 우리 교회 조순학 권사도 50만원을 보조하여 주었고, 본 교회 여선교회원들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해 12월에는 만리현교회가 불의의 화재를 당하였으므로 그 교회에도 재정적 지원(5만원)을 하였고, 1967년 10월에는 장위동교회에 재정적 후원을 하였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대로 우리 교회가 넉넉지 않은 가운데도 이렇게 주는데 힘써 오더니 후에 큰 성전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최은혜 권사는 부군 강창규 집사의 기념 예배당으로 수원지방 궁평 교회를 신축하고 우리 교회 30여 명이 참석하여 봉헌식을 올리기도 했다. 이 교회 담임목사는 한두원 목사였다. 



우리 교회가 주며 베푸는 교회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교인들도 주며 바치는 교우들이었다. 앞으로 지을 성전을 위하여 온 교우들이 기도로 열심히 하나로 합하여지는 가운데 특히 박온유(朴溫柔) 권사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새 성전 건축을 위하여 교회에 바쳤던 것이다. 박 권사는 원래가 우리 교회의 토박이 교인으로서 전덕기 목사에게서 세례 받고 우리 교회에 입교한 이후로 줄곧 우리 교회에 나온 분인데 새 성전 건축 계획이 있는 것을 안 후로는 노쇠한 자기가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고 또 후사도 없이 지내고 있었으므로 생전에 미리 자기 집과 금비녀를 교회에 바치고 교회재산으로 등록하도록 등기를 내게 한 것이다. 우리 교회도 박 권사의 이런 갸륵한 뜻을 받아들여 1966년 1월 구역회 때 박 권사의 주택과 대지를 감리교 총리원 재단에 등록하도록 결의하였고 1966년 1월 구역회의록.

후에 이 재산을 매각하여 새 성전 건축기금으로 요긴하게 썼다.



(2) 새 장로의 취임과 이명 장로



1961년 12월 당회에서는 배경열, 송명율 두 권사를 신천 장로로 세워서 우리 교회의 기둥으로 활약하게 하였고, 1963년에는 최재헌 장로가 수표교교회에서 이명하여 왔다. 그리고 1965년 12월 당회에서 신천 장로로 조형재, 김영상, 이인학, 김숙현, 김용삼 씨가 추대되었다.



1966년 11월에는 서성옥 장로, 그리고 그 해 12월에는 김광열 장로가 우리 교회로 이명하여 옴으로써 장로의 진용이 대폭 증원이 되어 앞으로의 우리 교회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또 1966년 10월에는 홍윤분 전도사가 인천 율목교회에서 부임하여 왔다. 홍 전도사는 인천 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신학교를 수료한 후 인천 화도교회와 율목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 것이다. 그리고 1968년 12월 당회에서는 유기종 목사를 교육담당 부목사로 모시도록 결정하였다.



(3) 목사관 신축



1965년 5월에는 이미 낡고 협소한 구 목사관을 헐고 새로 건축하여 봉헌하였다. 26평 이층건물로 공사비는 약 100만 원이 들었다. 이 때 구 목사관을 헐 때 나온 재목으로 송추교회 목사관을 지었고, 우리 목사관 신축 후 남은 건축재료도 송추교회에 보내었다.



(4) 상록원(常綠園)



1965년 12월 12일의 임원회에서는 우리 교회창립 8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교회 묘지를 구입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위하여 50만원 정도의 예산으로 약 3만평 내지 5만평의 임야를 매입하도록 결정하였다. 그 후로 이 사업을 계속 추진한 결과 1967년 5월에 당국으로부터 교회묘지 설치 허가를 받았고, 또 묘지 관리위원회도 구성하였다. 이에 앞서 1966년 10월에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 산 1의 4에 있는 임야 14,400평을 72만원에 매입하였으며, 1967년 4월 5일 식목일에는 교회묘지에 3,500주의 나무까지 심어서 주위를 잘 단장하였다. 이 일에는 당시의 묘지관리위원장이었던 조형재 장로의 노고가 컸다. 후에 이웃에 있는 밭 393평을 더 매입하여 지금의 상록원의 넓이는 14,793평에 달하고 있다. 지금은 여기에 합계 200여 명의 우리 교회 교우들이 묻혀 있다. 



한편 1968년 5월에는 교육관 옆에 있는 체육관 겸 식당 24평을 건축하여 중, 고등부 및 청년들의 탁구실과 회의실로 사용했다. 1967년 3월에는 대예배실의 의자가 너무 오래되었고 낡아서 임원회에서 새 의자를 마련하기로 결의하고 의자 하나에 3,600원씩 50개를 헌납하도록 하였다. 이 중에서 김영락 권사는 혼자서 의자 열 개를 바치는 열성을 보였다.



(5) 대천 수양관



여름철 수양관의 필요성은 절실하였다. 해변가에 감리교단 소유의 수양관이 없어서 여름철이 되면 교회의 청소년들과 교우들이 여름 수련회를 위하여 다른 일반 기관이 소유하고 있는 수양관을 이용하는 불편을 늘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계절적인 불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 교회가 단독으로 여름 수양관 건립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는 이 수양관이 건립되면 우리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많은 교회들도 이 수양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니 감리교회에도 큰 도움을 주는 셈이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간은 교회에서 대형 군용천막을 구입하여 이를 둘러메고 당시의 중․고등부 부장이었던 서성옥 장로와 조형재 장로가 중고교생 6, 70명씩 해마다 대천 해수욕장으로 인솔하여 어렵게 수련회를 진행하던 때여서 수양관을 설립하여야겠다는 생각은 교회임원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런 필요성에 따라 1971년 6월에 대천해수욕장 해변가에 경치와 모래가 좋은 자리를 물색한 결과 지금의 감리교 선교사들의 별장이 있는 근처에 대지180평을 평당 6,000원에 매입하였다. 그러다가 후에 더 좋은 대지 120평을 평당 9,000원에 매입하고 먼저 대지와 교환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건평 47평의 수양관을 평당 39,000원의 공사비로 1971년 7월 15일까지 준공하도록 하였으나 지연되다가 후에 지금의 72평의 수양관이 총 공사비 370만원으로 9월에 와서야 완공되었다.



(6) 손메례 장로와 절제회 운동



슬픈 일도 있었다. 우리 교회의 가장 오랜 교우, 즉 스크랜톤 목사에게서 1906년 4월에 세례 받고 우리 교회에 입교한 손메례 장로(본명 이정규)가 1963년 10월 5일에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우리 교회의 산 역사라고 볼 수 있는 분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잠깐 손메례 장로의 우리 교회와의 관계와 그녀의 업적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손메례라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정규는 스크랜톤이 서울에 들어오던 해인 1885년 11월 19일에 서울 계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녀가 17세 되던 해에 서울의 손봉순(孫奉順)과 결혼 후 개화된 남편의 주선으로 진명 여학교에 입학하여 당시로서는 드물게 신학문을 받아들여 일찍부터 개화사상의 영향하에 있었다. 조카 孫完植氏의 증언.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신학공부에 뜻을 두고 지금의 감리교 신학대학 전신인 감리교 여학당(監理敎 女學堂)에 입학하고, 1913년에 졸업하였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손메례는 1906년에 우리 상동교회의 스크랜톤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우리 교회에 입교한 후 줄곧 우리 교회에 적을 두고 교육사업과 여성 운동에 헌신하여 왔다. 그녀가 입교한 다음 해에 스크랜톤이 은퇴했고, 이후 전덕기 목사의 감화 하에서 민족운동에 뜻을 두면서 한 동안 교육사업에 종사한다. 그래서 1915년부터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성경과 가정과를 맡아서 가르쳤다. 이때부터 그는 감리교 선교사들과 사회유지들과의 사귐이 본격화되면서 사회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전국적인 것으로 된 것은 그녀가 1930년에 조선여자 절제회를 조직하고 그 총무에 취임하면서부터이다. 그녀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순회강연을 통하여 금주 금연을 외쳤다. 1930년대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계속적인 압박에 지쳐 있어 거의 자포자기하고 있던 때였다. 3․1운동도 실패로 돌아간 듯 하였고 돌파구를 찾지 못한 우리 민족은 답답한 현실을 술과 담배로 잊어보려고 스스로를 마비시키고 있던 때였다. 또 교회의 신앙도 현실 참여보다는 내세적이며 신비적인 방향으로 나가 현실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당시의 우리 나라 형편을 개탄하면서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다. 당시는 일본이 우리 민족의 민족의식 말살과 우리 청년들의 정기를 흐리기 위하여 술 소비를 장려하며 때로는 아편 밀매하는 것을 묵인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손메례는 술과 담배로 자기 몸을 해치는 것을 일종의 민족적 자살행위로서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나며 죄가 된다고 외치며 전국을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이 때 그녀의 나이는 45세인 한창 때였다. 



이 운동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빈정대는 측도 있었으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밀고 나가 자포자기한 당시의 우리의 청장년들에게 상당한 자극을 주며 자각을 촉구한 것이다. 즉 술과 담배로 민족정신을 흐려서는 인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광복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된다고 역설한 것이다. 



한편 손 장로는 절제운동에만 그치지 않고 여성교육기관 설립에도 힘을 기울여 1943년에는 사재를 드려서 흥아가정여학원(興亞家政女學院)을 설립하고 원장에 취임하면서 여성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해방을 맞이했는데, 이 때 나이 60세였다. 그러나 그녀는 해방된 조국 땅에서 전에 이루지 못한 뜻을 계속 펴나가려고 결심한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에 궁정동에 정명여자중학교(貞明女子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궁정동에 사재를 들여 학교 대지 541평과 교실 건평 130평을 확보하고 梨花九十年史, p.209.

약 350명의 학생을 가르치다가 6․25동란을 만나게 되었다. 6․25동란 3년 동안에 학교도 문을 닫게 되고 그녀의 건강도 쇠약하여진 데다가 마루에서 낙상까지 하여 신체의 자유까지 잃게 되니 더 이상 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에 그녀가 교편을 잡은 바 있던 이화여자고등학교 신봉조 교장이 와서 정명여중을 이화로 흡수할 것을 간청하여 왔으므로 이 학교 재단을 전부 이화에 넘겨주었다. 이화에서는 이 학교건물을 기본으로 하여 지금의 예원중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때 이 재단을 우리 공옥학교 육성재단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또한 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손 장로는 몸의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이후로는 궁정동에서 우리 교회로 매 주일 출석할 수 없었고 가까운 궁정동교회에 출석하다가 후에 병세가 악화되어 적십자병원에서 투병 중에 1963년 10월 5일에 별세하였다.

향년 78세, 1947년에 부군인 손봉순 씨는 먼저 별세하였고, 그녀의 외아들은 어려서 돌아갔으므로 그녀의 조카인 손완혁(孫完赫)을 양자로 입양하였고 또 두 양녀도 다 출가시켰다. 손 장로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화학원의 명예이사, 서울예술고등학교 명예교장으로 있다가 돌아간 후에는 이화학원의 학교장으로 모셨다. 우리는 우리 교회가 길러낸 이런 훌륭한 인물을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