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실

> 상동소식 > 역사자료실
제 20장 23대 박설봉 목사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984


           제20장 23대 박설봉 목사



1988년 3월 27일, 이날은 우리 교회에서 반평생을 보낸 박설봉 목사의 은퇴 예배로 드렸다. 온 교인은 박 목사가 펼친 눈부신 목회생활을 치하하며 그의 은퇴를 아쉬워했다.

박 목사는 1959년 3월 12일에 부임하였는데, 우리 교회는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교회는 6․25동란의 폐허에서 완전히 복구가 되지 못했고 복잡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교인 약 300여 명, 예산은 부족했고 교인들은 의욕은 있었으나 일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패기 있고 설교 잘하는 박 목사가 부임하게 된 것이다.



박설봉 목사는 1918년 생으로 고향은 경상북도 의성이고 아버지 박영하 씨와 어머니 김 선 씨의 사이에 3남 3녀 중 막내로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충청남도 예산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 목사는 어린 시절을 충남 예산에서 보냈다. 그래서 박 목사는 충청도 말씨를 쓰고 있는 충청도인으로 자랐고 성품마저 충청도 특성인 온화한 분이란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불의를 보면 때때로 불같이 성격이 과격해질 때가 있어 이런 성격은 경상도 기질이 바탕에 깔려 있어 그렇다고 주위에서 평하고 있다. 

예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구제)를 마친 그는 18세에 예산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된다. 박 목사가 예수를 믿게 된 과정이 초대 한국인 목사 전덕기와 비슷한 데가 있다. 



박 목사는 중학교 5년생일 때인 17세의 나이에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그는 그 때까지 예수교는 미국사람들이 가져온 서양종교로서 침략의 도구일 뿐 우리들에게 아무 관계없는 종교라고 믿었다. 그래서 기독교서적보다는 철학책과, 문학책을 탐독하며 사상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이런 행각은 세례를 받은 후에도 당분간 이어졌다. 어쨌든 그는 예수에 대한 반감이 컸었는데, 이상한 것은 반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교회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럴 때 교회에서 전도를 했으면 교회를 찾는 것이 쑥스럽지 않았겠으나, 자기 발로 찾아가려니까 퍽 쑥스러웠다.



그러나 17세 되던 해 여름 어느 주일에 박 목사는 용기를 냈다. 예산감리교회를 찾아 나섰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교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박 목사에게 쏠려와 박히는 것이었다. 한쪽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았다. 쑤군거리는 소리도 키득키득 웃는 웃음소리도 모두 박 목사 자신에 관한 얘기들이요 웃음소리로만 들려서 이날 목사님의 설교와 찬송과 기도의 내용들은 통 귀에 들리질 않았다. 그러나 예배가 파한 후 교인들은 그를 따뜻이 대해 주었다.



이들의 인간적인 따뜻함이 박 목사의 오늘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난생처음 교회를 찾은 그에게 보인 교인의 따뜻한 환영은 정말 눈물겹도록 감격적인 것이었다. 보수성이 강한 충청도 지방에서 어린(17세이지만 아직도 학생이었음) 청년에게 뜨거운 인간대접을 했으며, 성인으로서의 대접은 예민한 그를 사로잡고 말았다. 교회는 이렇게 사랑이 있는 곳이로구나, 인격적으로 사람을 대하는구나, 무척 인정이 있어 훈훈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첫날을 지났다. 그리고 그날부터 주일이 그리워지게 됐다. 

예산교회로서는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많은 젊은이가 교회의 문을 나섰거나 징용에 끌려가 젊은이가 귀한 터에 박 목사 같이 건강한 청년이 제 발로 찾아드니 반겼던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청년이 귀한 때에 박 목사가 교회에 출석하니 교회에서는 그를 교회학교 선생으로 임명하였고 청년학생회의 중심인물로 자리매김을 하였던 것이다. 목사님은 그가 18세가 되던 해에 세례를 주었고, 19세가 되던 해에는 당회에서 속장의 직분을 맡겼고 더욱 교회 일에 열심을 내니 20세가 되던 해에 당회에서는 권사로 명했던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그가 교회 일에 열심이었는지를 잘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륜을 쌓은 후에 권사의 직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젊은 나이에 권사가 되고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되지 못한 생각이 마음을 주장하기 시작하여 “봉사심보다는 오히려 교회를 비판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라고 그는 신앙백서에서 고백하고 있다.



“목사님의 설교가 좀 더 시대에 맞고 참신하며 멋있을 수 없을까? 또 목사님의 목회생활은 좀 더 혁신적이고 일제에 도전적이며 시대의 첨단을 걸어갈 수가 없을까?” 등등.

그는 마음에 불만이 가득 차 올라 날이 갈수록 회의와 현실에 대한 비타협, 반항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교회 행정에 대한 반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제에의 항거심과 죽어 가는 한국 민족의 슬픔이 겹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 그가 교회에 다니기 전부터 읽은 많은 사상 서적들이 그를 얽어매어 하나 둘 모두 교회생활에 대입하고 비판하게도 된 것이다. 



이때가 박 목사의 신앙의 갈림길이 되기도 한 때요, 고민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때이기도 하다. 그는 가끔 산에 올라가 밤새워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와 나라의 관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가? 왜 우리 조국은 약소국이며, 나는 왜 이 나라에 태어나 약소 민족의 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가? 많은 고민을 하였다. 산에 올라가 밤새 땅을 치고 통곡하기도 했으며, 고함을 치며 하늘을 우러러 원망도 했다. 여름에는 두터운 겨울옷을 입고, 반대로 겨울에는 얇은 여름옷을 걸쳐 남 보기에 마치 정신이상자처럼 방황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왜경들도 “저 사람은 정신이상자” 라고 요시찰인물에서 제쳐놓기까지 했다. 



그런데 박 목사는 이런 정신적인 방황과 갈등 속에서도 그를 돕는 손길이 늘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마음 속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것은 “내 양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소명이었다. “목회자가 되라”는 강한 명령이었다. 물론 신앙의 선배요 동지인 임시정부요인 신형상 지사와의 면담, 유중영 권사의 믿음의 기도와 권고가 큰 용기가 된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목회자가 되라는 소명을 느끼자 얼굴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회개의 눈물이요 기쁨의 눈물이었다. 배에서는 꿈틀 꿈틀 진리가 용솟음치는 고동을 느꼈다.

전덕기 목사가 감정으로 민족애의 목자가 되었다면, 박 목사는 나라사랑이 그를 목사로 부르심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1942년 신학교를 나와 처음 목회를 시작한 곳이 충청남도 홍성읍 교회였다. 두 번째로 시무한 곳이 만리현 교회이며 우리 상동은 세 번째로 부임한 곳이다. 우리 교회에 올 때 그의 나이가 41세로 한창 때였다. 우리 교단에서 명성을 날리던 젊은 목사 박설봉하면 모두 그의 기개와 정의감을 으뜸으로 여겨 칭찬하던 때이다.



그는 은퇴 예배시 다음과 같이 그의 목회철학을 말했다.

“나는 목회 생활을 오래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를 오래하면 직업적인 목사가 되기 쉽고, 무능한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목사가 되면 꼭 10년간만 해서 훌륭한 목회를 하고 물러나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다짐하였었는데 70 정년을 맞고서야 물러나게 됐군요”



박 목사는 신학교에서 잊을 수 없는 은인 세 분을 만나게 된다. 그분들은 당시 아현교회를 담임하고 계셨던 김희운 목사와 장세환, 매영숙 장로이다.  이들은 오늘의 박 목사가 있게 하는데 큰 영향을 주신 분들이며 장세환 장로는 박 목사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하여 돌보아주었고 김 목사는 목회생활의 실제를 자세히 일러준 실천신학의 산 교수이다.



박 목사는 일제가 말기 증상을 보이던 1942년 12월,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3월초 충청남도 홍성읍 서문밖교회로 파송되었다. 일제의 압박이 심하던 때여서 파송되어 보니 교인이 10여 명 뿐인데 여자 교인이 7, 8명 남자교인은 속장 한 사람 뿐이었다. 



박 목사는 낙심하지 않고 이 교회에서 열심히 일했다. 희망을 잃고 사는 주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알아들을 만한 쉬운 설교로 나라의 미래를 알렸다. 낮에는 논밭에 나가 논을 매고, 가을이면 농민들과 함께 추수를 했고, 길을 닦아주고, 변소를 치워 주었다. 주위의 눈길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내 형제요 내 동포이었으니까. 자포자기하고 있는 청년들을 규합하여 나라의 미래를 이야기했고, 한 달에 두 번씩 관솔을 딴다는 핑계를 대고 깊은 수덕사, 가야산 속으로 들어가서 밀회를 하곤 하였다. 그리고 이 나라 장래를 말하며 한국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할 일들을 세우기도 했다. 이들은 8․15해방이 되자 전 홍성군(全 洪成郡) 행정과 치안을 담당한 가야 비밀동지회원들이다. 박 목사가 홍성 교회에서 받은 월급은 월 5원이었다. 그러나 생활을 하는데 불편이 별로 없었다. 그것은 이들 동지들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박 목사의 목회생활을 돕기 위해서 일본인 보호자를 준비해 두셨다. 그는 니시무라라는 일본사람으로 이들 내외는 독실한 교인인데 홍성 우체국장 일을 보던 분이다. 이들은 박 목사가 일경에 잡혀 갈 때마다 끌어내주곤 했다. 결국 이 니시무라 씨도 일인들에 의해 파면되고 말았다. 

그런데 니시무라는 파면된 후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역에서 박 목사의 손을 잡고 “일본은 머지 않아 꼭 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일본으로 보내주시니 오로지 감사 할 뿐입니다. 머지 않아서 꼭 만날 것입니다” 라 했는데 그의 예언대로 일본은 2년 후에 망하고 말았다.



1944년 일본이 망하기 1년 전 박 목사가 시무하던 홍성 교회에는 많은 청년들이 등록하게 된다. 그의 목회가 성공적이었던 것이다. 흩어졌던 젊은이들이 다시 찾아 드는가 하면 교회에 나오지 않던 젊은이들도 교회로 나와 함께 선교에 힘쓰는 한편 동지로서 뭉쳤던 것이다. 이들은 해방 후에 모두 조국건설에 역군이 되었는데, 건국준비 위원장에 유승준(兪昇濬 제1대 제2대 국회의원), 총무에 김영환(金英煥 제3대 국회의원), 그리고 박 목사는 군내 치안과 친일파 숙청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박 목사가 원하기만 하면 제4대 국회의원은 맡아놓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박 목사는 목회자다. 자기는 목회자라는 소명의식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끝없는 유혹을 물리칠 수가 있었다.



1947년 3월 강태희 감독과 장세환 장로의 주선으로 박 목사는 총리원 교육국의 간사직 겸 종교교회 부목사를 맡고 서울로 오게 되었다. 총리원에서 그는 많은 것을 보았다. 총리원에 몸 담은 지 6개월만에 그는 다시 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곳이 만리현 교회이다. 그는 만리현 교회에서 마음껏 목회생활을 했다. ‘불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여기였다. 입을 열면 열변이요 설교를 했다 하면 그의 사자후가 만리동 온 동네를 울렸다. 교인은 배가되었고 속회는 감리교회에서 제일이라는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6․25사변도 이곳에서 겪었다. 6․25사변 때는 미처 피난을 못 가서 공산도배에 잡혀 무진 고생을 다 겪었다. 지금도 가슴 아픈 것은 당시 함께 체포되었던 김유순 감독, 박만춘, 김희운, 조상문, 전효배, 서태원, 방 훈 목사 등이 함께 검거되었으나 박 목사만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이들의 생사를 오늘까지도 모르고 있어 가슴 아픈 일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1․4후퇴 때에는 선교사들이 준비해 준 차편으로 부산을 거쳐 가덕도로 피난하게 되었는데 목회자 가족 120세대가 가덕도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동안 박 목사는 모든 교인, 목회자들의 리더로 120세대를 자기 일처럼 돌보았다. 예배시간이 끝나면 모든 교인들은 박 목사의 광고를 듣고야 폐회를 했는데 그것은 박 목사가 신문과 방송을 듣고 정리한 한국전쟁의 전황을 정확하게 목사 가족들에게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박 목사가 거제도에 피난 가 있는 기간에 공백이 된 감리교 집행부를 구성하기 위한 피난총회가 1951년 11월 1일에 열리게 되었다. 이 총회는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즉 감리교 헌법이 비상 시국이므로 총회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조치였다(41조 관련 사항). 젊었을 때 보았던 비정한 교권 싸움에 박 목사는 다시금 환멸을 느끼게 된다. 



1954년 10월 7회 총회에서는 감리교회에서 수치스러운 암호 회람 방법으로 투표가 진행되었다. 불법을 과감하게 지적한 박 목사는 지금까지 감리교회가 저지른 각종 비리를 공개하고 “회개할 것”을 외쳤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감리교 지도자들을 보고 한탄하면서 박 목사는 1955년 3월 3일 천안에서 호헌연회와 총회를 조직하는데 앞장섰다. 이 때 박 목사와 소위 호헌파 교회가 당한 고초는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우리 감리교회의 치부가 되었다. 그러나 감리교회는 하나이다. 둘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박 목사는 감리교가 다시 하나가 돼야 한다는데 뜻을 두고 힘써왔다.



드디어 1958년 10월 2일 총회에서 갈라섰던 감리교회가 다시 하나로 뭉치게 되는데, 박 목사는 1959년 3월 10일 연회에서 우리 상동교회 제23대 담임목사로 부임케 된 것이며, 민족교회, 독립운동의 요람지 등의 이름만 있던 이 교회를 다시 부흥시켜 옛 이름을 되찾는데 그의 반평생을 바치었던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의 노고를 높이 치하하여 1987년 당회에서 명예 당회장으로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이 제도는 감리교회 안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는 제도이다. 박 목사는 은퇴 후에도 교인들의 신앙 향상을 위해서 늘 힘쓰는 한편 삼일학원(협성대학교 포함)의 발전과 새로나 백화점의 발전을 위해서도 불철주야로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