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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상동에 오기 전의 스크랜톤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111
          1. 스크랜톤가의 모자(母子)선교사가 오기까지           ⑴ 감리교 선교과정 오랜 쇄국정책으로 봉건사회 제도의 굴레 속에 여전히 매여서 살고 있던 우리 나라에 스크랜톤 일가(一家)가 찾아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115년 전의 일이다. 이들이 서울에 짐을 풀고 자리를 잡으면서 우리 민족을 위한 선교사업과 봉사사업을 시작하였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은 이들이 시작한 일을 그리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이 일이야말로 한국교회사와 한국근대사에 엄청난 공헌을 끼쳤으며 또 이 민족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 사건이 된 것이다. 스크랜톤 일가(一家)는 우리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왔지만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스크랜톤은 목사로서 또 의사로서 우리 나라의 가난하고 무지한 민중들의 병치료를 담당하였다. 그의 어머니인 스크랜톤 대부인(大夫人)은 오랜 전통과 무지한 미신의 질곡 속에 갇혀 있던 한국여성을 위한 교육을 처음으로 시작한 분으로서, 한국여성의 사회적 각종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그들의 지위향상을 위하여 반평생을 바친 한국여성교육의 어머니이다. 이들 모자가 상동(尙洞)과 정동(貞洞)을 왔다 갔다 하면서 벌인 이들의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은 당시 우리 민족의 소원이었던 근대화의 물결과 상응하면서 이 물결에 편승하여 근대화의 추진력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즉, 스크랜톤 의사는 상동교회와 상동병원을 중심으로 또 그의 어머니인 스크랜톤 대부인은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중심으로 각각 그들이 맡은 분야에서 한국의 복음화와 의료사업 및 여성교육사업에서 금자탑적 공헌을 쌓아 올린 분들이다. 특히 스크랜톤 목사가 세운 우리 상동교회는 한국의 최근세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겼으니 그것은 우리 상동교회가 ‘한국민족운동의 요람지’ 洪以燮, 「民族運動史에 나타난 新敎」, ꡔ기독교사상ꡕ, 1965년 4월호, p.103. 가 되게 했던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길러냈고, 또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그로 하여금 한국민족운동사상 특기할 인물’ 상게서. 이 되게 했던 것이다. 이들 스크랜톤 모자의 한국민족을 위한 수고와 헌신은 당시 고종황제로부터도 높은 평가와 칭송을 받게 되어 스크랜톤 의사가 세운 감리교병원에는 ‘시병원(施病院)’ Scranton의 이름은 한문으로 施蘭敦이었으므로 施氏의 병원이라하여 施病院이라 하였다. 영어로는 Universal Relief Hospital 이란 뜻도 가진다. 이란 이름을 하사(下賜)하고 그의 어머니의 학교에 민비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이름을 각각 내려서 한국 황실로부터의 총애와 그들의 사업에 대한 황실의 승인을 재확인 받은 것이다. 그러면 스크랜톤가(家)는 당시 어떤 시대적 배경 속에서 또 어떻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우리 나라에 오게 되었을까? 그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19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는 외국인이라면 무조건 목을 베어버리던 때였다. 특히 천주교 선교사들이 9명이나 대원군에 의하여 새남터에서 처형되던 때였다. 그러므로 스크랜톤 모자(母子)가 우리 나라에 들어왔을 때에도 아직 우리 나라는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과 의구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ㄱ) 한미우호조약(韓美友好條約) 천주교의 선교사들과는 달리 우리 감리교 선교사들은 우리 정부의 정식 비자(Visa)를 받고 입국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천주교 선교사들과는 달리 우리 나라에서 상복(喪服)에 깊은 갓을 쓰고 몸과 얼굴을 가리며 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스크랜톤이 이렇게 정정당당하게 한국정부의 입국비자를 받고 들어온 법적 근거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1885년에 서울에 들어오기 3년 전에 우리 나라와 미국 사이에 체결된 한미우호조약(韓美友好條約)이다. 1882년에 체결된 이 조약은 우리 나라가 구미각국(歐美各國)과 체결한 최초의 조약이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 나라는 그 전 1876년 2월에 일본의 무력시위 하에서 이미 일본과 굴욕적 불평등조약(不平等條約)인 병자우호조약(丙子友好條約) 일명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한 바 있다. 이 후로 우리 나라의 쇄국정책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미우호조약(韓美友好條約)은 1866년에 대동강 유역에서 일어났던 미국상선 셔만(Sherman)호사건 이후로 중국에 있던 미국인들에 의하여 그 체결의 필요성이 여론화하기 시작하였고, 文一平, ꡔ韓米五十年史ꡕ, 서울 明文印刷所, 1945, p.8. 1874년부터 1882년 사이에 캘리포니아주 출신의 상원위원인 싸젠트(Sargent) 의원에 의하여 이 조약체결이 추진되었다. W. E. Griffis, A Modern Pioneer in Korea:The Life Story of H. G. Appenzeller, New York:Flemin H. Revell Company, 1912, p.52, p.83. 이를 위하여 제1차로 1880년에 미국의 슈펠트(R. W. Shufeldt) 제독이 한미우호조약 체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제2차로 슈펠트가 이번에는 미국 전권대사의 자격으로 미군함을 이끌고 제물포에 나타난 것이다. 이번 교섭은 당시 중국의 외교정책 수립자였던 이홍장(李鴻章)의 도움이 커서 드디어 이 해(1882년) 4월 6일에 구미 여러 나라와는 처음으로 한미간에 우호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전문 14조로 된 이 조약이 체결될 때 청(淸)나라 이홍장은 특별히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선교사업을 할 수 없도록 특별조항을 삽입하려고 하였으나 막상 이 조약이 서명될 때는 이러한 규정은 없어져 버렸다. 따라서 이 한미우호조약에는 종교의 자유에 관하여서는 가부간 하등의 언급이 없었다. 하여간 이 조약에 의하여 한미 두 나라는 국교를 정상화하였고 또 두 나라의 대사급 관리들을 서로 교환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미국의 초대 주한 공사로 후트(Lucius H. Foote)가 이듬해인 1883년 4월 10일에 서울에 들어와서 지금 미국의 공사관저가 있는 정동에 자리를 잡고 오늘까지 그 자리를 사용하고 있다. Allen D. Clark, History of the Korean Church, Seoul:The Christion Literature Society of Korea, 1961, p.53. ㄴ) 보빙 사절단과 가우쳐 박사 그러나 당시 우리 나라의 국력은 너무 빈약하여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보빙 사절(報聘使節)이란 사절단을 파견하고 미국의 성의에 보답하게 된 것이다. 즉 미국사회에 대한 보빙의 사명과 서양문화 시찰의 사명을 이들로 하여금 수행하게 한 것이다. 이 보빙 사절의 전권대사는 척족세도(戚族世道)의 거물인 민영익(閔泳翊)이 임명되고 부사로는 홍영식(洪英植), 그리고 부원으로는 서광범(徐光範) 등의 개화당 청년 정치인들이 선정,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이 일행은 1883년 7월에 미국의 후트 공사(公使)가 타고 온 미국 군함 모노카시(Monocacy)호의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이들은 제물포를 떠나서 일본 나가사끼에 들려 다른 배편으로 요꼬하마를 거쳐 태평양을 건너갔다. 이 일행이 미국 서부의 항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같은 해 9월 2일이었다. 민영익 일행은 여기서 기차로 록키산맥을 넘어 광활한 미대륙을 횡단하여 9월 12일에는 미국 중동부 교통의 중심지인 시카고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시카고에서 다시 9월 13일 밤차로 워싱톤을 향하여 떠났는데 당시 미국 제21대 대통령이던 아아더(Chester A. Arthur)를 접견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기차 속에서 역사적인 만남이 일어난 것이다. 이 워싱톤행 열차 속에는 한국의 보빙 사절단 외에 후일에 한국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운 가우쳐 박사(J. F. Goucher)도 타고 있었는데, 그는 이 때 볼티모어에 있는 가우쳐 여자대학(Goucher Woman’s College)의 학장으로 있었다. 가우쳐 박사는 이 차 안에서 생전 처음 보는 요란한 옷차림의 모습을 한 한국사절단에 자연히 호기심과 관심이 쏠렸고, 이들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통역을 통하여 말로만 듣던 동양의 은둔의 나라 한국의 국내사정을 처음으로 듣게 된 것이다. 가우쳐는 이때 한국의 형편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 나라에 생명의 복음을 반드시 전해야 되겠다는 사명감도 함께 갖게 되었고, 그는 이같은 결심을 곧 실천에 옮겼다. 그는 한국의 보빙 사절단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였고 G. H. Jones, 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New York:The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10), p.21. 집에 돌아와서는 뉴욕에 있는 감리교 선교부에 3000불을 기증하면서 Griffis, A Modern Pioneer in Korea, p.52. 한국에 대한 선교사업을 즉각적으로 착수하게 된 것이다. 가우쳐는 이것만으로는 미국 감리교회의 여론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감리교 기관지인 Christian Advocate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그는 당시 이 기관지의 편집장이었던 버클리(J. M. Buckley)박사를 움직여서 그로 하여금 15회 이상이나 계속적으로 한국선교 촉구에 관한 사설과 기사 등을 실어서 전 미국감리교회를 자극시켰다. 이 결과로 여러 곳에서 선교기금도 들어왔는데 그것이 2000불이나 되었다. 가우쳐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아니 하였다. 현지 답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당시 일본에서 선교사업을 하고 있던 맥클레이(R. S. Maclay) 박사로 하여금 이웃 나라 한국에 가서 직접 현지를 돌아보고 올 것을 부탁하였다. 한편 이렇게 한국에 대한 선교열이 무르익어 갈 때 감리교 선교회(Missionary Society)의 서기였던 화울러(Fowler) 감독도 맥클레이에게 한국에 대한 현지 답사를 촉구하였고 1883년의 감리교 총선교위원회(General Missionary Society)에서 한국선교를 정식으로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상게서, p.54. 이렇게 하여 일본에 있던 맥클레이 박사는 부인을 동반하고 말로만 듣던 이웃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는 1884년 6월 23일에 제물포에 상륙하여 다음 날에 서울에 들어와서 미국공사 후트의 환영을 받았다. W. B. Scranton, “Historical Sketch of the Korea Mission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 The Korean Repository, Vol, V, July 1898, p.256. 맥클레이는 후트 공사 관저에 머무르면서 당시 개화당의 거물이며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로서 외아문 교섭사무(外衙門交涉事務)를 보고 있던 김옥균(金玉均)을 방문하여 그에게 자기가 한국에 온 목적을 이야기하고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에 대한 임금의 허락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맥클레이와 김옥균은 서로가 초면이 아니었다. 김옥균이 일본에 있었을 때 김옥균이 맥클레이 박사를 방문하여 서로 서양문물에 대하여 토론한 바 있는 사이였다. 김옥균은 맥클레이의 이 같은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잘 들어 주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김옥균도 한국의 개화를 위하여서는 기독교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던 처지였으므로 김옥균이 곧 입궐하여   고종황제에게 이 사실을 아뢰고 한국에서의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대한 윤허(允許)를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맥클레이가 7월 3일에 김씨를 다시 방문하여 그 결과를 알아보니 황제의 허락이 이미 내려져 있었다. 맥클레이는 이런 큰 기쁨을 안고 곧 서울을 떠나 일본에 가서 이 소식을 지체 없이 가우쳐 박사와 감리교 선교부의 화울러 감독에게 보고하였다. G. H. Jones, The Korea Mission of M E. Church, p.22. 이렇게 가우쳐 박사에 의하여 시작된 한국선교 개시에 대한 노력은 빠르게 결실을 맺게 되어 맥클레이가 선교사업에 대한 고종황제의 윤허를 받아가지고 돌아간지 불과 일 년도 못 되어 스크랜톤 목사가 정식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맥클레이는 한국선교의 “양아버지” Annual Report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85, p.235(앞으로는 이 文書의 이름을 Annual Report 라고 약하여 쓴다). 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⑵ 스크랜톤의 소명 한국의 황제로부터 선교사업에 대한 허락을 받는데 성공한 미국감리교선교부는 그 해 가을에 곧 한국에 나가서 일할 의료선교사를 정식으로 모집하였다. 이런 하나님의 부름에 곧 응답한 젊은이가 우리 교회의 창설자인 스크랜톤이었다.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은 1856년 5월 29일에 미국 코넥티컷 주의 뉴 헤이븐(New Haven)에서 아버지 스크랜톤(W. T. Scranton)과 어머니 메리(Mary F. Scranton)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 때 뉴 헤이븐에서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스크랜톤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저명한 미국 감리교회의 목사였다. 스크랜톤이 16세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의 아버지의 사망 이후로는 더욱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의 감화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중등교육까지 마치고 대학은 미국의 명문대학의 하나인 예일대학을 1878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의사가 되기 위하여 지금의 콜롬비아 대학의 전신인 뉴욕의 한 의과대학(The New York College of physicians Surgeons)에 입학하여 전문적인 의학 훈련을 받고 1882년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Official Minutes of 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7, p.16(앞으로는 이 문서의 이름을 Official Minutes로 약하여 쓰기로 한다). 이 해에 한미우호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그는 의과대학을 졸업하면서 곧 크리브랜드에서 개업을 하고 또 목사의 외손녀였던 암스(Miss Louise Arms) 양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스크랜톤은 경건한 어머니의 신앙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개업의사로 있으면서도 기회만 오면 의료선교사로 일해 보려는 그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모처럼 배운 의학공부인데 이 지식과 경험을 해외에 있는 가난하고 무지한 이방민족을 위하여 봉사하는데 쓰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병석에 눕게 되었다. 병 고치는 자가 병들게 된 것이다. 물론 의사라도 병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는 외로운 병상에서 병과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투병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에게 자기를 헌신한 것이다. “하나님! 내 병이 회복되는 대로 곧 의료선교사로 내 지혜와 경험을 하나님에게 바치겠나이다.” 그런 후 이상하게도 그의 병은 빨리 회복되어 그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그의 맹세를 실천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바로 이때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한국에서 일할 의료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고 또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그는 곧 뉴욕에 있는 감리교 선교부에 선교사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 스크랜톤 대부인(大夫人)도 이번 기회에 그가 소녀시절부터 꿈꾸던 해외선교사로서의 포부를 실현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스크랜톤 대부인(大夫人)은 1832년 12월 9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멜쳐타운(Melchertown)에서 출생하였다. 그녀의 아버지 벤톤(Erastus Benton)은 미국 감리교회의 목사였는데 그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믿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선교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한 때 감리교 여선교회의 총무를 지낸 바도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커넥티컷 주 뉴 헤이븐의 제조업자인 스크랜톤(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고 바로 아들을 낳은 단란한 가정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스크랜톤 여사가 40세가 되던 해에 남편을 잃은 것이다. 이 때 아들의 나이는 16세였다. 남편 없이 아들을 키우는 동안 평소에 그녀가 꿈꾸던 선교사로 파송될 것을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아들이 한국 선교사로 지원한 바로 그 때에 한국에 가서 일할 교육선교사를 미국 감리교 여선교부에서도 모집하고 있었다. 이 때의 감리교선교부는 남․여 선교부가 서로 독립하여 사업계획을 집행하고 있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그녀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로 확신하고 아들과 함께 선교사로 지원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역사상 최초의 모자(母子)선교사 가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때 그녀의 나이 53세였다. 미국감리교회의 남․여 선교부에서도 이 모자(母子)의 청을 기쁘게 받아들여 이 모자(母子)를 곧 한국선교사로 발령하고 파송하게 된 것이다. 스크랜톤 의사는 선교부로부터 선교사 임명을 받고 곧 개업하던 때 사용했던 수술기구와 중요한 의료기구 및 약품들을 포장해서 한국에 배편으로 부쳤다. 이렇게 되니 선교부에서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선교사는 목사여야 했기 때문에 스크랜톤은 뉴욕에서 선교부의 화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주어야만 했다. 이리하여 뉴욕에서 선교부의 화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는데 이 때가 1884년 12월 4일이다. Official Minutes, 1907, p.16. 이 날 한국에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던 날인데, 스크랜톤은 이런 피 흘리고 병든 육신과 심령의 구원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뉴욕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스크랜톤 목사 일가는 드디어 1885년 1월 21일 뉴욕을 출발했는데 이 때 스크랜톤 가족 일행은 어머니 스크랜톤 여사와 스크랜톤 목사 부부, 그리고 그들의 어린 딸, 이렇게 4명이었다. 뉴욕을 떠나서 미대륙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여기서 이들은 한국에서 같이 일할 또 다른 일행인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합류하였다. 이 때 아펜젤러는 27세, 스크랜톤은 29세였다. 모두가 20대의 젊은이로서 자신에 넘치고 야심만만하고 진정한 사나이들이었다. 이들이 비로소 처음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인사를 하고 그들의 젊음을 불태울 한국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앞으로 이들은 17년간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면서 때로는 경쟁의식을 가지면서 한국을 위하여 일할 최초의 한국선교사였던 것이다. ⑶ 스크랜톤의 서울 도착 아펜젤러 가족과 스크랜톤 가족이 함께 한국으로의 역사적인 태평양 횡단항해를 시작한 것은 1885년 2월 3일이었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태평양 우편선(pacific Mail Steamship)인 아라빅(Arabic)호를 타고 지루한 항해 끝에 일본에 도착한 때는 1885년 2월 27일 아침이었다. Annual Report, 1885, p.235. 이 때 일본의 요꼬하마 항구도시에는 벌써 미국 감리교 선교부가 있었다. 이 요꼬하마 선교부의 하리스 목사가 이들 일행을 반갑게 영접하였다. 이들은 이 곳에서 여독을 풀면서 약 1주일간 머물러 있다가 곧 동경을 향하여 그들의 직속 상관격인 맥클레이 박사를 만나러 떠났다. 지난 해 6월에 서울에 와서 고종으로부터 선교사업에 대한 임금의 허락을 받는데 성공한 맥클레이 박사는 이 때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가꾸인(靑山學院)을 세워 일본사람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당분간 한국 선교부의 감리사 책임까지 맡고 있었다. 3월 5일에는 맥클레이 박사 서재에서 역사적인 제1회 한국 선교사 회의(The first meeting of the missionaries to Korea)가 열렸다. 이 회의의 참석자는 맥클레이 박사, 스크랜톤 목사 부부, 아펜젤러 목사 부부, 그리고 스크랜톤 대부인 이상 6명이었다. 예배 후에 사무처리에 들어가서 맥클레이 박사로부터 초대 한국 선교사들에 대한 따뜻한 환영사가 있었고, 다음에 그가 지난 해 서울에 가서 선교사업 시작을 위한 교섭 결과에 대한 경과 보고가 있었다. Minutes of the Korea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from its beginning to Dec. 29, 1891. 오후의 토의에서는 감리교 교리문답 제1호를 한국말로 번역 출판한다는 것이 결정되었고 이 출판을 위한 경비는 이미 배정된 교육사업 선교기금 중에서 250불을 떼어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 회의 이후로 최초의 한국 선교사 가족들은 약 한 달 가량 일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서로 합심하여 한국에 대한 선교 전략을 면밀히 검토하여 한국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수집과 역사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우선 우리 말 공부부터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국사람들에게 우리말 공부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젊은 선교사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는데 스크랜톤 대부인에게는 더욱 더 어려운 공부였다. 이 때 이 선교사 일행은 우리말을 당시 일본으로 망명가 있던 박영효(朴泳孝)에게서 배웠다. 李浩雲, ꡔ韓國敎會初期史ꡕ, 서울 大韓基督敎書會, 1970, p.80. 그러나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 중에 배운 우리말이 그들에게는 유창하게 나올 리가 없었다. 한국에 와서 배우면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는 동안에 뉴욕에 있는 화울러 감독은 한국 선교부의 부서조직에 관한 공문을 이들에게 발송했는데 이 공문이 3월 30일에 맥클레이 박사에게 도착되었다. 그래서 한국에 상륙하기 전에 부서가 결정되고 책임을 서로 분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공문에 의하면 한국 선교부의 감리사에는 일본 주재 선교사인 맥클레이 박사가 겸임하고 부감리사(Assistant Superintendent)에 아펜젤러, 선교부 회계는 스크랜톤이 맡았다. 상게서. 그러나 이들은 오랫동안 일본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곧 한국으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부터의 지시는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조심스럽게 선교사업을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행여나 천주교에서와 같이 한국정부를 자극하거나 대중들에게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 행위는 절대로 삼가라는 지시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인천상륙작전은 처음부터 세밀히 계획되었다. 즉 5명이나 되는 선교사들이 한국에 한꺼번에 상륙하면 한국정부와 백성의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에서 Annual Report of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85, p.47(앞으로 이 문서의 이름을 Annual Report of W.F.M.S.라고 줄여서 쓴다). 5명을 분산시켜 상륙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선발대로 부감리사인 아펜젤러 부부가 우리 나라로 떠나고 나머지 세 사람은 당분간 일본에 더 머물러 있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아펜젤러 목사 부부가 3월 23일에 요꼬하마를 떠나 28일에는 나가사끼(長崎)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3일간 머물다가 3월 31일에 한국으로 떠난 아펜젤러는 드디어 4월 2일에 부산항에 들어왔고 4월 3일에 부산에서 다시 배로 출발하여 부활절 아침(4월 5일) 제물포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이 때 같은 배에 장로교의 초대 선교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도 함께 타고 있어 이들이 함께 한국 땅을 밟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감격적인 순간은 아펜젤러에게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들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 땅을 밟았을 때 우리 나라 정세는 갑신정변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아 아직도 불안한 때였다. 또 언제 서울에서 청․일 두 나라의 군대가 충돌할지 모르는 혼란스런 형편에 있었다. 이 때 서울에는 후트 공사의 후임으로 호크(G. C. Foulk) 공사가 미국의 주한 공사로 와 있었다. 아펜젤러는 곧 제물포에서 서울에 있는 호크 공사에게 전보를 쳐서 서울에 들어가도 좋을지를 문의하였다. 그러나 호크 공사의 회신은 너무나 그를 실망시켰다. 즉 지금 한국의 실정으로는 외국 여자가 들어와 살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니 부인을 잠시 일본으로 보내고 남자만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아펜젤러 부부는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제물포에 약 일 주일간 머물러 있다가 4월 13일에 일본으로 되돌아 가야만 했고, 그 때 총각이었던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만이 서울에 들어와서 당분간 알렌 의사의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결국 호크 공사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한 땅에서 아펜젤러 부인을 위험 속에 노출시킬 수 없다 Annual Report, 1885, p.235. 고 충고했던 것이다. 일본에 있던 맥클레이 박사는 한국의 이런 사정을 호크 공사의 전보를 통하여 알고 아펜젤러 부부가 일본으로 돌아오기 전에 스크랜톤 목사를 혼자 한국으로 보냈다. 즉 아펜젤러 부부는 제물포에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고 스크랜톤은 부인과 어머니, 그리고 그의 갓난 딸 아기를 일본에 둔 채 혼자 제물포로 향하는 장면이 벌어진 것이다. 스크랜톤은 드디어 5월 3일에 제물포에 상륙하여 서울에 안착하는데 성공하였다. 상게서, p.237. 이런 우여곡절 끝에 스크랜톤 목사가 결과적으로 서울에 먼저 들어와서 지금의 미대사관 관저 근처의 정동에 자리잡고 약 1개월 간 알렌 의사와 같이 정부병원(지금의 세브란스병원 전신)에서 일하면서 후에 들어올 아펜젤러 목사 부부의 거처와 그의 어머니 및 자기의 거처를 위한 토지매입에 나서는 한편 정동에 감리교 병원 개설 준비로 오자마자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원래가 부지런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후에 들어올 그의 동역자들을 위하여 열심히 선교사업의 기초작업을 하였다. 이러는 동안 한국의 정치정세와 서울의 분위기도 차차 안정되기 시작하여 아펜젤러 부부는 스크랜톤 목사 부인과 그의 어머니를 모시고 갓난아기까지 합하여 일행 5명이 6월 20일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스크랜톤 가족은 곧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으나 아펜젤러 부부는 당분간 제물포에 남아서 서울에 그들의 집이 마련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아펜젤러는 7월 19일에야 그렇게도 고대하던 서울 땅을 밟게 된다. 그리고 스크랜톤이 자리잡은 곳 가까이에 땅과 집을 구입하여 이들은 나란히 그들의 맡은 바 분야에서 일하게 되었다.           2. 스크랜톤과 정동병원           ⑴ 정동병원 설립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스크랜톤이 제일 먼저 혼자서 서울에 들어와 동료선교사의 집과 선교사업을 위한 땅과 건물을 구입하면서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그가 입국하기 석달 전에 개원한 정부병원격인 광혜원(廣惠院, 후에 濟衆院이라고 이름을 고쳤다)에서 알렌(Allen)의사를 도와서 같이 일하였다. 약 한 달 동안(1885년 5월 22일~6월 24일) Annual Report, 1886, p.268. 이 병원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하루 평균 40명~70명의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이 병원은 스크랜톤이 입국하기 전 해인 1884년 9월에 서울에 들어온 장로교의 알렌 의사가 그 해 12월에 있었던 갑신정변을 계기로 한국정부의 보조를 받으면서 세운 최초의 현대식 병원으로서 스크랜톤이 들어오던 해인 1885년 2월에 제동(濟洞)에 있던 홍영식(洪英植)의 집을 개조하고 개원한 병원이었다. 이 광혜원에서 스크랜톤이 한 달 가량 일하다가 장로교의 혜론 의사가 또 입국하여 광혜원에서 알렌과 함께 일하게 됨으로써 스크랜톤도 빨리 감리교 병원을 시작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는 곧 광혜원에서 손을 떼고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서라도 병원을 시작할 것을 결심하고 개원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스크랜톤이 한국으로 떠날 때 미국에서 배로 부친 그의 의료기구(수술기구, 약 등)와 풍금도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Annual Report, 1885, p.238. 우선 자기 집을 급한대로 병원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 날이 1885년 9월 10일이다. Annual Report, 1886, p.268. 스크랜톤이 새로 정동에서 병원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서울 장안에 퍼졌고 환자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스크랜톤의 병원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상게서. 광혜원은 정부가 보조하는 병원이어서 정부관리들과 양반계급이 많이 몰려서 이 두 병원은 처음부터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스크랜톤은 이런 가난한 환자들을 한 사람도 물리치지 아니하고 정성껏 치료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서울장안에서 가난한 자의 친구로서 알려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드니 그들에게 치료비를 받아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무료치료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리하여 생각해낸 것이 돈 있는 환자들에게서 치료비를 받아 그것으로 가난한 환자들의 약값을 보충해 나갔다. 이렇게 스크랜톤은 좁은 자기 집에서 약 8개월 동안 무려 522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상게서. ⑵ 정동병원 확장 그러나 계속 몰려드는 환자를 더 많이, 또 더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인력과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스크랜톤은 병원확장사업에 착수하였다. 우선 이웃에 있는 땅과 집을 더 사들여서 먼저 그의 병원부터 확장하고 또 미국에 있는 감리교 선교부에는 의료선교사를 더 보내 줄 것을 청원한 것이다. 이웃에서 사들인 건물을 개조하여 1886년 6월 15일까지 넓힌 병원의 구조는 당시로서는 최대규모의 병원이었다. 우선 환자 대기실이 있고, 사무실, 약국 그리고 다섯 개의 입원실(남자용)까지 준비되었다. 또한 곁에 있는 건물을 사서 수리하여 따로 세 개의 병실을 만들었다. 이것은 여자 환자용으로 썼다. 이렇게 되니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이 정도의 큰 규모의 병원이 생기게 되었고 이런 큰 병원은 나라 어디에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스크랜톤의 감리교병원은 한국에서 최대 그리고 최신의 병원이 된 것이다. 정부가 보조해 주고 있던 광혜원도 스크랜톤의 병원보다 못했다. 상게서, p.271. 이 병원은 스크랜톤의 큰 자랑이요 보람이 아닐 수 없었다. 스크랜톤의 병원이 더 크게 확장되고 이제는 큰 수술까지 한다는 소문이 서울 장안에 퍼졌다. 환자들이 계속 전보다 더 많이 몰려들어 그의 병원 앞은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들로 날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스크랜톤은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빠졌다. 이제는 서울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까지 몰려들었다. 일손도 모자라고 환자를 치료할 의약품은 물론 의약품을 담을 약병까지 동이 났다. 스크랜톤은 생각다 못하여 병원 앞에 다음과 같은 역사적 명물이 된 큰 광고문을 써 붙였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병이 있는 사람은 어떤 병이라도, 또 어떤 날이라도 아침 열 시에 오시오. 올 때는 빈 약병을 가지고 와서 미국의사를 만나시오.” 상게서, p.272. 이 때에 우리 나라에 유행되거나 흔히 있던 병은 주로 학질, 피부병, 영양부족증, 연주창, 퇴행성질환, 매독, 천연두, 콜레라, 눈병, 폐병, 회충, 가슴앓이 상게서, p.273. 등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때 장질부사와 디프테리아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는 서울의 우물이 불결하여 여름에는 각종 전염병이 많이 유행되었다는 것이다. 이 병원에서 스크랜톤이 1886년 7월 1일부터 1887년 7월 1일까지 1년 동안 무려 2,000명의 환자를 혼자서 치료한 것이다. 상게서, 1886, p.315. 뿐만 아니라 급한 중환자를 위하여 왕진까지 나갔다. 이렇게 스크랜톤은 일약 서울의 영웅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런 스크랜톤의 활동 때문에 당시의 한국인들은 서양사람만 보면 서양사람 모두가 의사라고 생각하고 Annual Report, 1889, p.293. 붙잡고 약을 달라거나 병을 고쳐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스크랜톤의 이같은 눈부신 의료활동 때문에 우리 나라 일반 민중의 서양사람들에 대한 의구심과 공포감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또 선교사들도 한국인에 대한 경계심이 없어졌다. 이 땅의 병든 자들을 고쳐주고 무지를 깨우치고 이들의 위생환경을 개량하여 보다 나은 생활향상을 도모하고 봉사하기 위하여 온 고마운 분이라는 인상을 서서히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이런 서양인에 대한 태도 변화는 근대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 현대사에 있어서 스크랜톤의 업적과 공헌은 어느 누구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특히 한국인의 근대적 의식구조의 변천에 있어서 스크랜톤의 공헌은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하다. 우선 그의 청진기를 통한 대민활동(對民活動)으로 서양인에 대한 오랜 적개심과 의구심을 깨뜨리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수용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또한 그가 가난한 계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일하고 봉사함으로써 일본과는 달리 기독교 복음의 대중화의 길을 처음부터 열어 놓은 것은 한국교회사에 길이 남을 그의 공헌인 것이다. 즉 그를 통하여 한국교회의 대중성이 처음부터 싹텄으며, 한국의 기독교는 처음부터 가난한 자들의 종교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들의 친구라는 진리를 스크랜톤이 실제로 그의 생활과 그의 사업으로 보여 줌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이 확신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⑶ 고종의 병원명 하사와 영아 소동 스크랜톤의 병원이 크게 확장되고 또 많은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스크랜톤의 활동상황이 당시의 정부와 고종황제에게 자연히 전달되었고 고종으로서도 외국인의 이런 봉사활동을 칭찬하고 이에 대한 황제의 호의를 전달하고 그의 사업을 계속 격려해 줄 필요를 느꼈다. 이리하여 이미 아펜젤러의 배제학당에 그 이름을 하사한 것과 같이 스크랜톤의 병원에도 1887년에‘施병원’이라는 이름을 내림으로써 그에 대한 사업승인과 그 지지를 표명하게 된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그가 거하면서 일하는 나라의 주권자로부터 이런 총애를 받는 일은 특별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 황제의 이름으로 불란서의 천주교 선교사들이 많이 처형당하지 아니 하였던가. 이런 황제로부터 병원명을 하사 받은 스크랜톤은 더욱 감격하여 계속 부지런히 뛰었다. 그러나 어디에나 호사다마(好事多魔)는 있는 법이다. 소위 영아 소동(嬰兒騷動, Baby riot)이 1888년 여름에 터진 것이다. 이 소동은 그 당시 서울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의 아기들을 잡아다가 그 눈을 뽑아서는 사진기의 재료로 쓰고 간을 빼어서는 그들의 병원에서 약으로 쓴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집이나 창고가 이 아기들의 시체가 감추어져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무지한 대중들은 이 소문을 믿었고 크게 흥분하였다. ‘당장 선교사들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아이들을 구출하고 이들을 때려죽이자’ 하며 흥분한 대중들은 손에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들고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학교나 그들의 주택을 습격하려 하였고 또 일부는 이화학당에 까지 몰려가서 학교로 못 들어가게 하는 한국인 수위에게 집단폭행까지 가하였다. 심지어 어떤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업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일부 군중들이 생각하기를 ‘이 여자가 누구 집의 아이를 훔쳐다가 서양선교사들에게 팔려고 한다’고 판단하고 이 여자를 붙들어서는 그 자리에서 다짜고짜 때려 죽인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난동 때문에 한국에서의 모든 선교사업은 일단 중지되었고, 또 선교사들의 신변에는 일대 위협이 닥쳐와서 모든 선교사들의 외출이 일체 금지되고 집안에 갇혀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되었다. 한국정부는 이런 근거 없는 소문을 진압시키느라고 진땀을 뺐고 그래도 서양 사람들을 보호할 수 없게 되자 제물포에 정박하고 있던 외국군함에서 군인들을 급히 서울로 불러들여 겨우 이 소동을 진압시켰던 것이다. 물론 이 소문은 날로 번창하는 선교사들의 사업을 싫어하는 사회계층의 일각에서 일부러 조작한 것이었음이 후에 판명되었고 그 후로 대중의 오해도 풀리고 감정도 가라앉았다. 이 소동 때문에 모든 선교사업이 2~3개월 동안 중지되었다. 그러나 9월부터는 사태가 호전되어 선교사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런 난동 속에서도 스크랜톤의 병원만은 무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소동기간 동안에 하루도 병원문을 닫은 일도 없었다. 단지 이 난동 중에 3일간만 찾아오는 환자의 수가 평일보다 절반 정도 줄었을 뿐 3일 후부터는 여전히 병원이 초만원을 이루었다. 상게서. (4) 배재․이화 학당의 산파 이렇게 분주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스크랜톤은 다른 분야의 선교사업을 돕는 일도 게을리하지 아니 하였다. 우선 한국 신교육의 효시가 되는 배재학당을 낳게 하는 산파역을 훌륭히 해냈다. 오늘날 한국 신교육의 효시인 배재학당이 시작되던 1885년 8월 3일, 최초의 학생 두 명을 아펜젤러 목사에게 소개한 사람이 바로 스크랜톤이었기 때문이다. 이겸나(李謙羅), 고영필(高永弼)이라는 최초의 배재학당 학생들은 처음에 스크랜톤이 입국하여 약 한 달 동안 광혜원에서 일하고 있을 때 만난 사람들로서, 이들은 광혜원에서 일하면서 자기들도 스크랜톤과 같은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스크랜톤에게 의사가 되기 위하여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문의하였을 때 의학공부를 해야 하며 그러자면 우선 영어를 공부해야 될 것이라고 대답해 준 것이다. 그리고 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아펜젤러 목사를 그들에게 소개하였고 이 두 학생은 아펜젤러 집으로 찾아가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함으로써 한국의 신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아펜젤러의 일기를 보면 이 때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지난 월요일, 8월 3일 나의 학교사업을 두 한국 사람으로 시작하였는데 그들의 이름은 이겸나(Yi Kium Na)와 고영필(Ko Yung Pil)이다. 스크랜톤 의사가 그들을 정부병원에서 만났는데, 그들은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이 때문에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 어제는 세 번째 학생인 이순나(Yi Sun Na)가 두 학생과 함께 왔다. 그는 정부 학교에서 영국인 해리핵스(Hallifax)에게서 배웠는데, 해리핵스가 그들을 모욕하였다 하여, 이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 다시 가기를 거절했다. 그는 나에게서 영어 배우기를 원했고 그 대신 그는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예정이었다. H. D. Appenzeller, “Fifty Years of Educational Work”, Journal of H. G. Appenzeller, 1885, C. A. Sauer(ed.), Within the Gate, p.8. 이런 일이 있은 후에 다음 해인 1886년의 어느 날 오후에 스크랜톤이 서대문의 정동 근처 성벽 위를 걷고 있었다. 그 때 그 성벽 위에서 가마니 하나는 깔고 또 한 개의 가마니는 덮고 고열로 신음하고 있는 어떤 초라한 모녀를 보았다. 그는 이 모녀는 아마 남편이 버린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까이 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대충 들어 보았다. 그 남편이 자기들을 어느 시골에서 서울로 데리고 왔는데 이 불쌍한 모녀를 돌보아 줄 어느 동정심 많은 사람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한가닥 소망을 가지고 이 곳에 버리고 간 듯 하다는 것이다. 아마 시골에서 스크랜톤의 소식을 듣고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강도 만난 사람같이 땅에 쓰러져 있는 모녀를 보고 부자도 지나가고, 양반도 가난한 자도 못 본 체하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스크랜톤의 차례가 온 것이다. 그는 이런 일을 위하여 온 사람이었기에 그대로 이 모녀를 못 본체하고 지나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인부들을 불러 이 모녀를 자기 집으로 옮겨 놓게 하였다. 그리고 인부들에게 모녀를 운반한 삯을 주었다. 그랬더니 이 착한 인부들은 그 삯을 받지 아니 하였다. 스크랜톤이 그들의 불쌍한 동족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데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대가로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스크랜톤은 고마웠다. 한국인의 마음을 알 듯 하였다. 그렇다, 이 착한 민족을 가난과 무지에서 그리고 병고와 미신에서 속히 해방시키자, 이들을 육신의 병과 영혼의 병에서 속히 구원하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병든 자에게 건강을! 고통받는 자에게 편안을! 이것이 그의 사명이요 또 그의 복음의 내용이었다. 또 그렇게 살려고 애썼다. 그는 이렇게 버림받은 모녀를 그의 집에서 정성껏 돌보며 치료하였더니 약 3주일만에 건강을 회복하였다. Annual Report, 1886, p.275~276. 이 때의 아기 어머니의 병은 당시 한국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열병의 일종이었다. 모녀의 병은 완전히 나았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영영 나타나지 아니 하였다. 스크랜톤은 할 수 없이 의지할 데 없는 이 모녀를 돌봐주기로 하였다. 그녀의 어린 딸은 자기의 어머니인  스크랜톤 대부인에게 맡겼고 대부인은 이 어린 딸을 맡아서 기르며 가르쳤는데 이 소녀야말로 이화학당의 최초의 정규학생이 된 것이다. 물론 그 해(1886년) 5월 30일에 김씨부인이라고 하는 어느 관리의 첩이 스트랜톤 대부인을 찾아와서 영어를 배우겠다고 밤에 왔으나 얼마 후에는 아주 공부를 그만 두어 버렸다. 따라서 이 소녀가 오늘의 대이화학당의 최초의 정규학생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스크랜톤 목사는 자기 일에도 열심을 내면서 오늘 우리 나라의 신교육의 산파역까지 잘 감당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