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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6.25와 상동교회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063


         제19장 6․25와 상동교회



6․25가 터지던 날 정부는 서울을 끝까지 사수할 것이라고 방송하면서 서울 시민들이 진정하기를 설득하였다. 곧 반격을 시도할 것이니 안심하라는 무책임한 방송을 되풀이하였다. 27일에는 종로 중앙교회에서 시내 교역자들이 모여 교회사수 결의와 피난민 수용준비를 가결하였다. 우리 교회 교인들도 정부의 말만 믿고 있었으며 혹시나 하다가 28일에 인민군의 탱크를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이 돌발적인 사태에 대처할 기회 없이 박창현 목사 내외분은 진해로 내려가 피난하였고 우리 교회 교인들은 또 뿔뿔이 흩어지는 서러움을 맛보게 된 것이다. 교회를 다시 일으킨 지 불과 5년이 못 되어 또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 방황하게 되었다. 다만 윤덕주 전도사 가족이 남아서 교회를 지켰고 윤 전도사만이 새벽마다 제단에 나가서 이 민족과 흩어진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와서는 우리 교회 건물을 며칠간 쓰다가는 다시 나가버려서 큰 물질적 피해는 없었다. 인민군 치하 3개월간은 물론 인민군이 예배를 보게 할 리도 없었겠지만, 담임목사도 피신한 후여서 모여서 예배를 보지 못하였다. 



지루한 공포의 3개월이 가고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미군의 폭격과 포격이 점점 심하여 갔다. 그런데 9․28의 감격적 수복을 눈앞에 두고 그 때까지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던 우리 교회가 난데없는 엄청난 피해를 받게 된 것이다. 우리 교회 근처에 미군 비행기의 폭격과 피아간의 포격전이 있더니, 먼저 공옥학교 뒤에 있던 일본인들이 쓰던 교회가 불이 났다. 이 불은 곧 우리 공옥학교에 옮겨 붙었다. 평화시였더라면 이런 불은 미리 예방하거나 끌 수 있었겠지만 교인들이 다 피난간 후였고 교회 구내에는 윤 전도사와 그 가족 및 어린이들과 우리 교인 김구수 청년만이 있었다. 김구수는 그때 우리 교회 앞 상가에 있었다. 공옥학교 건물에 옮겨 붙은 불은 맹렬히 불꽃을 내뿜으면서 타기 시작하여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었다. 이 불은 곧 우리 교회를 삼키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청년 김구수는 교회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건져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앞장서서 윤 전도사, 그리고 윤 전도사의 아들 내외와 어린이들까지 약 7, 8명이 합심하여 결사적으로 교회에 옮겨 붙는 불을 끄기 시작했다. 불은 먼저 우리 교회의 함석 지붕에 붙기 시작하였다. 청년 김구수는 사다리를 놓고 지붕 위로 용감하게 올라가서 아래에서 날라주는 물을 받아서 지붕 위에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쪽의 불꽃을 끄면 또 다른 곳에서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물이 달렸다. 물이 떨어지면 만사가 끝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교회를 불타게 내어 둘 수도 없었다. 나중에는 혹시나 장독에 물이 있을지 몰라 장독의 뚜껑을 열어보았으나 물은 없고 간장만 있었다. 



우선 급한 대로 간장을 날라 지붕 위로 올려서 겨우 지붕의 불을 끄는데 성공한 것이다. 결국 간장이 우리 교회 건물을 살려낸 것이다. 장독의 간장은 다 없어졌으나 우리 교회를 위하여 요긴한 간장이었다. 마치 결사대처럼 헌신적으로 우리 교회를 화재에서 건져낸 이들은 윤 전도사를 비롯하여 김구수 청년과 윤 전도사 아들인 지윤영 부부와 정씨, 그리고 어린이 등이었는데 김구수, 지윤영 양씨의 증언.

이들의 수고는 높이 평가되어야 된다. 이들에 의하여 스크랜톤 이후의 역사적 건물이 보존된 셈이다. 만일 우리 교회건물까지 탔더라면 교회 동쪽에 있던 여자 공옥학교 건물과 앞의 상가도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전율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이때 공옥학교 안에 있던 모든 기구와 서류와 교재 등은 하나도 건지지 못하였다. 모든 것이 재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다만 황태자에게서 받았던 태극 우승기만은 미리 김노환 청년의 집에 보관해 두었는데, 교회 옆에 있던 이 집마저 불이 붙어 그 우승기도 재로 화하였으니 실로 원통한 일이다. 6․25는 이렇게 우리 민족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에도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수복 후 우리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인 교회와 여자 공옥학교 건물과 목사관과 부속건물, 그리고 상가 등은 건졌으니 이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역경 가운데서도 또 하나 감사할 일이 있다. 이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전쟁시 가끔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길이가 1미터나 되고 직경이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박격포탄으로 보이는 큰 포탄 두 개가 하나는 교회의 동쪽 지붕 위에 불발된 채로 누워있고, 하나는 교회 동쪽 마당에 거꾸로 꽂혀 있었다. 포탄을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어서 우선 새끼줄을 쳐서 사람의 접근을 막았고, 후에 군인들이 와서 이것을 안전하게 분해하여 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교회 지붕에 있는 포탄 만은 김구수가 위험을 무릅쓰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그 포탄에 밧줄을 매어 끌어내림으로서 이것도 안전하게 치워버렸다. 김구수 씨 증언.



만일 이것들이 폭발하였더라면 그 피해는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지켜주신 증거라고 보는 것이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흩어진 교우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고, 박창현 목사도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잿더미가 된 공옥학교를 보고 땅을 쳤다. 특히 김원영 교장의 슬픔은 매우 컸고, 이것이 그에게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김 교장은 공옥학교의 복구를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그루터기 하나 남지 않고 타버린 상황에서 재건한다는 것은 학교를 처음 시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러 유지들과 학부형 그리고 졸업생을 찾아 다니면서 지원을 호소하였으나, 전국이 이미 잿더미가 되었고 전에 재산이 있던 사람들도 그 재산이 없어진 마당에 그들인들 쉽사리 도울 리 없었다. 



그러나 수복의 감격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면서 전국(戰局)은 다시 불리해졌고, 1951년에 들어서면서 곧 우리 민족의 대이동을 초래한 1․4후퇴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는 모든 교인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공산당 치하의 어려움을 맛본 이들은 한참 추운 때인데도 불구하고 짐보따리를 이고 지고 나선 것이다. 윤 전도사의 가정까지 떠나게 되어 교회는 완전히 비었다. 다시 한번 서울은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봄이 되면 다시 수복하게 되리라던 기대를 뒤엎고 전황(戰況)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좀처럼 풀리지 아니 하였다. 고달픈 피난살이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우리 교회는 1․4후퇴 때 집단으로 떠난 것이 아니고 각자가 그들의 연고지를 찾아서 떠났기 때문에 피난 교회를 따로 세울 수가 없었다. 흩어진 곳에서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서 그렇지 않으면 가정에서 예배와 기도를 드리면서 조속한 서울 수복과 전쟁의 종결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조약이 성립되고 다음 달에 정부도 서울에 환도함으로써, 흩어졌던 우리 교인들도 한 가정 두 가정씩 모이기 시작하여 교회의 재건에 다시 박차를 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