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실

> 상동소식 > 역사자료실
제 18장 광복과 상동교회의 재건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155


         제18장 광복과 상동교회의 재건



우리 교회는 8․15광복을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죽었던 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이는 오직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뿐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부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연합군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에게 해방이 왔으나, 연합군의 승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승리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패망은 곧 우리 교회의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에 어느 교회보다도 우리 교회의 8․15광복에 대한 감사와 감격은 컸고 또 진하였다.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에 관한 방송이 흘러나오자 온 서울 장안과 전국은 그렇게도 부르고 싶었던 조선독립 만세의 함성으로 메아리쳤고, 또 36년간 감추어져 있었던 태극기가 어디에 숨겼다가 나왔는지 서울은 온통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였다.

그런데 이런 많은 태극기의 물결 가운데서 유독 낡은 태극 우승기가 서울시민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 태극 우승기가 바로 40년 전인 1906년 5월에 구한국 정부의 학부 주최로 전국 중소학교(中小學校) 체육대회를 성동구의 사범대학 자리(옛날 훈련원이 있던 곳)에서 당시 황태자로 있던 순종(純宗)의 임석 하에 개최하였을 때 우리 공옥학교가 소학교 부분에서 우승함으로써 황태자로부터 직접 받았던 태극 우승기였던 것이다. 이 때 중등학교부에 있어서는 보성학교(普成學校)가 우승을 차지하였었다. 김원영 교장 수첩.

 

김노환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 태극기가 1910년에 합병이 되면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빛을 보지 못하고 비밀리에 처음에는 지하실에 다음에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김원영 교장이 학교 사무실의 마루를 뜯고 그 밑에 감추어 두었다. 김노환 목사 증언.

일제 말기에는 굴뚝 밑을 파서 땅속에 파묻었다가 비로소 40년만에 무사히 되살아나서 8․15의 광복의 날에 세상에 다시 나타났으니 그 때의 감격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해방이 되던 날 이 역사적인 태극 우승기를 앞세우고 우리 교회 교인들과 공옥학교 학생들이 서울 시가를 누비며 행진할 때 이 태극우승기의 행진을 구경하고 있던 관중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것이다. 김목사 증언.



그러나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보관되었다가 빛을 보게 되었던 태극 우승기도 6․25의 동란 속에서 공옥학교가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을 때 타버린 것은 두고두고 애석하고 원통한 일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감격의 물결 속에서 취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흩어졌던 교인들이 사방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징병, 징용 등으로 끌려갔거나 피해있던 젊은이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근 1년 반 동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원상회복이 되자면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다른 교회와는 달리 담임목사도 없었다. 급한 대로 전에 우리 교회 직원으로 있던 분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 재건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주인 없는 교회였기에 해방이 됨과 동시에 국내, 국외에서 고향으로 찾아오는 많은 귀국 동포들을 우리 교회가 수용하였다. 따라서 처음에는 우리 교회는 귀국동포 수용소가 되었다.

9월에 들어오면서 8․15의 뜨거운 감격도 서서히 식어감과 동시에 우리 교회도 재건을 위한 모임과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8월 말과 9월 초에 걸쳐 우선 교회에 모여든 교인들을 중심하여 정식으로 상동교회 재건위원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재건위원회 위원장으로는 공옥학교 교감으로 있던 이기환 장로를 세웠고, 위원으로 윤덕주 전도사, 김노환, 원호연, 김원명, 김순남, 손메례, 윤재근, 이창근, 박윤명, 이봉양 등을 세워 처음에는 우리 교회를 쓰고 있던 귀환 동포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먼저 예배 분위기 조성을 위해 1년 반 동안 깔아 놓았던 다다미를 전부 치우고 해방 전에 중앙교회로 가져갔던 강대상과 의자를 다시 찾아와서 우리 교회에 도로 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김노환 목사 증언.

이때 교인 수가 거의 100명에 육박하였다. 그리고 담임목사의 초빙문제를 심각하게 토의한 결과 전에 우리 교회에 두 번씩 시무한 바 있는 홍순탁 목사를 다시 모시기로 위원회에서 결정하였다. 이 때 홍 목사는 서울 청파동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하고 계실 때였지만 우리 교회의 초빙에 기꺼이 응하였다. 이리하여 홍 목사의 제 3 차 목회가 시작된 것이다.



한편 공옥학교는 일제말기에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문을 닫지는 아니 하였다. 따라서 공옥학교는 해방과 더불어 계속 개교하였고, 교과목도 이제는 완전히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어서 공옥학교의 본래의 모습을 해방과 더불어 다시 찾게 되었다. 교사진도 대체로 큰 변동이 없어서 교장에 김원영, 교감에 이기환, 국어과에 정운정(鄭雲禎), 사회생활과와 이과(理科)에 전진항(전덕기 목사 차남), 미수과(美數科)에 이기환, 미술과에 송수헌(宋水憲), 음악과(音樂科)에 김순옥(金順玉), 가사과(家事科)에 이복만(李福萬), 수과(數科)에 이기환 등이 수고하고 있었다. 김원영 교장 수첩.



이렇게 교회가 재건되어 급속히 발전하게 되고 학교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어 해방 직후의 교단 분열과 정치적 무정부 상태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다가 담임목사인 홍 목사가 해방 후의 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다가 고령과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해방 된지 겨우 1년 반이 되던 1947년 3월 15일, 손메례 장로의 남편 추도식에 다녀오다가 피곤이 겹쳐 주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뇌일혈을 일으켜서 길에서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이때 고맙게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분이 길에 쓰러진 홍 목사를 발견하였다. 어떤 분이 성경책을 안고 길에 쓰러져 있는데, 그 성경책을 보니 상동교회라고 적혀 있었다. 이 고마운 분은 의식불명인 홍 목사를 등에 업고 청파동에서 상동교회까지 업어다 주었다.



홍 목사 가족과 교인들이 합심하여 홍 목사의 회복을 기원하면서 간호하였으나 그 보람도 없이 6시간만에 운명하신 것이다. 이 때가 향년 69세였다. 유해는 상동 교회장을 거쳐서 고양군 벽제면 성석리에 안장되었다. 좀 더 일할 수 있는 나이에 돌아가셔서 모든 교인은 다시 한번 슬픔에 빠졌고 홍 목사의 신앙과 인격을 흠모하였다. 홍해은 권사의 증언, 홍순탁 목사 약력.



목자 잃은 우리 교회는 다시 새로운 담임목사를 물색했고 우리 교회에 전에 한번 부임한 일이 있었던 임진국 목사를 모시게 되어 활기를 되찾았다. 그 때 임 목사는 서울 흑석동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우리 교회의 부름에 쾌히 응하고 1947년 4월 10일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임 목사의 제 2차 목회도 1년으로 끝나 버림으로써 체계 있는 목회계획을 세울 시간이 없었다. 임 목사는 다음 해 4월 연회에서 원주지방 감리사의 중임을 띠고 원주로 떠난 것이다. 임 목사의 후임으로 박창현 목사가 부임하고 우리 교회가 완전히 재건되기 전에 민족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전국교회와 민족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막대한 물질적 손해와 폐허를 초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