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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상동교회의 폐쇄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4,885


         제17장 상동교회의 폐쇄



1. 당시의 정세



1937년 7월의 중일전쟁을 마무리 짓지도 못하고 일본은 1941년 12월에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스스로 무덤을 파기 시작하였으니, 이 전쟁이 끝나기까지의 우리 민족과 교회가 당한 수난은 일일이 다 형용하기 어렵다. 특히 그 때까지 유일한 반일단체였던 교회에 대한 일본의 탄압과 회유 매수 작전으로 전국교회는 문자 그대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다. 

일본은 한국교회에 대해서 갖은 박해를 다했는데, 이 박해를 견디다 못한 일부 목사들은 매수를 당하기도 하고 자진 협조하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마지 못해 따라가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목사들은 이들에게 반항하다가 옥고를 치루었다.



우리 나라의 교회를 말살하려던 일본은 나약한 목사들과 교인들을 매수하였고, 이어서 매수되지 않는 교회들은 하나 둘씩 문을 닫게 하였으니, 우리 나라 독립운동의 본거지였고 독립투사들이 많이 드나든 우리 교회를 일본사람들이 그대로 둘 리가 없다. 모이기를 힘쓰고 우리 나라의 광복을 위하여 숨어서 기도하던 교회에 철퇴를 내린 것이다.  



일본의 패망이 짙어가던 1944년 3월, 일본은 마지막 발악을 하게 되는데 우리 교회의 문을 강제로 닫게 한 것이다. 당시 총 칼로 문을 닫게 한 전국의 교회는 무려 36개 교회에 달했다. 문을 닫고 교인을 모이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교회건물을 팔도록 명령하였다. 이들은 교회가 있으면 교인들의 마음이 한 곳으로 모이게 되고, 마음이 모이면 뜻이 모이게 되고, 뜻이 모이면 반일 사상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의 문을 닫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건물을 팔아 그 돈을 전쟁자금으로 빼앗아 갔던 것이다.





2. 임진국 목사의 목회



방훈 목사의 후임으로 임진국 목사가 춘천에서 우리 교회로 부임했다. 임 목사의 우리 교회에서의 목회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3월부터 1943년 3월까지의 만 일 년간이었다. 

임 목사는 1884년 7월 16일에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 고향에서 한학과 의학 등을 수학하고 1910년 7월에 해주사범학교 강습과(講習科)를 수료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외생(校外生)으로 와세다 대학 문과를 수료하였다. 



그러나 임 목사는 일본에서 돌아와서는 곧 목회에 뜻을 두어 경성성경학교에 입학하였다. 1913년 3월에 졸업과 동시에 연안지방으로 파송받으므로 그의 42년에 걸친 긴 목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후 그는 다시 감리교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5월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평북 박천읍교회, 평남 신창교회, 충남 강경, 홍성, 공주교회, 경기도 이천, 인천 내리, 강원도의 춘천읍 교회 등을 시무하다가 우리 교회에 온 것이다. 



그는 우리 교회에 와서 청년 신앙지도에 크게 힘썼다. 주일 저녁예배와 수요일 밤 예배를 제외하고는 날마다 밤에 모여 10명 정도의 청년 성경연구반을 조직하여서 성경과 웨슬레의 생애와 사상을 가르쳤다. 김노환 목사와 임환익(임진국 목사의 삼남) 선생의 증언.

  

일제의 무서운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성탄절이 오면 새벽송과 성극은 계속되었고, 종각 위에 높이 달아맨 ‘축 성탄’은 믿는 가정은 물론이거니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민족운동의 요람지로서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였다. 특히 이 때는 윤재근 속장이 우리 교회 근처에서 빵 제조업을 하고 있었던 관계로 크리스마스 때에는 해마다 어김없이 빵을 대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전 교인들에게까지 봉사하였다. 이 빵은 또한 교회에 불화가 있을 때마다 공급되어 화해의 매개체 역할까지 하여 우리 교회의 평화 유지와 성도의 교제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한편 지하자원이 빈약한 일본이 막강한 미국을 상대로 싸울 때 초기에는 진주만 기습공격 등으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물자가 달리고 국민의 사기도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초조해지기 시작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 나라의 물자와 인력을 무자비하게 탈취하며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수탈에서 교회라고 제외될 리는 없었다.  



1942년 2월 16일에 일본이 기습공격으로 영국의 극동군사 작전의 요충지대였던 싱가포르를 점령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것을 계기로 전국 교회에 싱가포르 함락 축하예배를 강요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국방헌금까지 강요하기에 이른 것이다. 吳允台, ꡔ日韓 キリスト敎 交流史ꡕ, 新敎出版社, 1968, p.270.

이에 따라 교단본부에서도 철붙이에 속하는 교회의 기물은 전부 총독부에 헌납하도록 명령하였다. 우리 교회의 중요한 철제 기물은 당시 전국에서 제일 큰 종이었던 교회의 종과 김종우 목사 시절 안석기 씨 부부가 헌납한 철문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이것을 그대로 남겨 둘 리가 없었다. 징발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철문은 쉽게 뗄 수 있어서 떼어 갔는데 막상 높은 종탑 위에 있는 종은 쉽게 떼어 갈 수가 없었다. 종탑 위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을 통하여서 그 큰 종을 끌어내릴 수가 없었다. 이 종을 떼 내려면 바깥으로 든든한 발판을 높이 만들어서 내려야만 했다. 이 공사를 하자면 당시 돈으로 800원이 소요된다는 견적이 나왔다. 일본당국은 그런 큰돈을 들여서 그 종을 내려놓을 형편이 못되어 덕분으로 우리 교회의 큰 종이 오늘까지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김노환 목사, 원호연 장로 증언.

하여튼 종이 컸던 탓에 스스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3. 상동교회의 폐쇄



우리 교회에 대한 폐쇄명령은 심명섭(沈明燮) 목사 때에 왔다. 임진국 목사가 우리 교회에 온지 일 년 만인 1943년 3월 16일에 광희문 교회로 파송 받아 갔고, 그 후임인 심 목사는 교회가 팔리게 되던 1944년 3월까지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었다. 이 때는 일본의 단말마적인 발악이 그 극에 달하던 때였기에 교회에 대한 탄압은 말로다 형용할 수 없었다. 이제 기울어져 가는 전세(戰勢)를 만회할 길은 전혀 없었다. 전쟁물자도 이미 바닥이 난지 오래고 가미가제(神風) 특공대라는 인간폭탄을 만들어 시시각각으로 일본본토로 다가오는 미군의 진격을 막아보려고 하던 때였다.



전쟁에는 막대한 물자가 들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물자가 바닥이 났다. 그래서 이들은 전국에 다니며 교각에 붙은 철물, 건물 밖에 나와 있는 모든 쇠붙이, 심지어 가정에서 쓰는 쇠붙이 그릇까지 모두 걷어 갔다. 그래도 물자가 모자랐다. 그들은 우리 나라 사람에게 전쟁비용을 헌납하도록 요구하였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교회들을 팔아서 그 돈을 일본에 바치라고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교회를 팔라는 일본통치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전국교회가 당할 시련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 두 교회를 살리기 위해 반항하다가 전쟁귀신으로 악이 오를 때로 오른 일본인의 총 칼이 전교인들에게 어떻게 보복할 것인가는 35년의 통치하에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제 조금만 버티면 이들은 망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슬기롭게 이들의 총칼을 피할 것인가. 일본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명령 제 1호에 올려놓았다. 일본인 나까무라(中村)라는 자가 뻔질나게 드나들며 우리 교회를 살폈다. 일본은 한국교회를 한국인에게 넘기지 말고 저희 일본인에게 팔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 나까무라가 우리 교회를 살 사람으로 결정이 됐다. 이렇게 일본 사람은 철저한 작전까지 폈던 것이다. 한국 사람에게 팔면 그것이 명색적인 판매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본 사람에게 팔아 버리라는 것이다.



아무리 양 같은 교인이라도 더 이상 참을 수는 없었다. 문을 닫으면 언젠가는 다시 열린다는 희망이 있으나 이제 팔아 버린다는 것은 영영 우리 교회를 다시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전덕기 목사 이후로 이 나라 민족운동의 요람지인 상동교회, 민족운동가들의 마음의 고향인 우리 교회를 일본인에게 팔아넘기려 하다니, 이런 난국에서 교인들은 기도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한 것이 아니다. 마음과 마음이 합하여 교인들이 모두 나와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느 입에서든지 처절한 음성으로 하나님을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런 기도를 드린 교인들은 힘을 얻었다.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온 교우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



투쟁을 벌이는데 우선 교계 지도자들에게 우리 교회가 일본 사람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 달라는 호소부터 하기로 작정했다. 당시 우리 감리교단의 대표는 정춘수 목사였다.



우리 교회 청년 원호연, 김노환, 연윤희 등을 비롯한 10여 명이 정 목사를 찾아가서 항의를 하였다. 정 목사는 우리 교회가 일본사람들이 폐쇄 할 것을 명령한 폐쇄명령 제1호인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일본인이 이미 자기에게 명령한 것이 아닌가.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보고 그도 답답하였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전체 감리교회를 살릴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지혜롭게 하지 않으면 우리 나라 전체 교회와 교인이 당할 희생은 엄청나다. 일본인들이 이 나라 민족운동의 요람지 상동교회를 제일 먼저 팔아버릴 것을 명령하고 실천할 것을 정 목사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 목사는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의 항의를 받자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인 심명섭 목사와 이 문제에 대하여 의논했다.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도 뾰족한 수가 나올 리 없다. 며칠을 두고 궁리하다가 결론을 얻은 것은 팔아버리면 영원히 죽어버리게 됨으로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으로 개칭하여 두었다가 뒤를 기약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일본인들과 협상을 벌였다. 상동교회를 팔아버리는 대신 문화관으로 개조해서 교육장으로 쓰자는 협상이었다. 처음에는 막무가내로 듣지 않던 일본인들이 나중에는 그렇게 하라고 해서 황도문화관으로 바꾸고 갈흥기 목사를 관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나라가 없으면 힘이 없다. 힘이 없으면 내 집이 없고 만일 있다고 해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 우리 교회는 1944년 3월에 문을 닫고 중앙교회와 합치게 되었다. 이때 중앙교회 목사는 교구장이었던 김수철 목사였다. 우리 교회 담임목사였던 심명섭 목사는 우리 교회를 황도문화관으로 만든 뒤 총리원직원으로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



교회가 없으니 강대상도 의자도 필요 없게 되었다. 이것들을 대부분 중앙교회로 운반해 갔다. 교회 집기를 운반하는 교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종로 거리에 눈물을 뿌리었다. 교인들은 이리 저리 흩어졌고, 중앙교회와 합류한 교인수는 불과 20~30명 내외였다. 이렇게 해서 1년이 넘는 지루한 흑암의 장막이 우리 교회를 덮었고, 목자 없이 방황하는 우리 교인들은 파수꾼이 광명의 새벽을 기다리듯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