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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남북감리교 합동 이후의 상동교회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153


          제16장 남북감리교 합동 이후의 상동교회



1. 영혼 구원의 어부 김종우 목사의 목회



김종우 목사는 새로 탄생된 조선감리교회의 제2대 감독을 지낸 분으로 감리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사에 길이 남을 영혼 구원의 거성이기도 하다. 그의 당당한 체구, 인자한 모습, 그 유명한 가이젤 수염은 가히 당시의 한국교계를 휩쓸고도 남음이 있는 풍채였다. 특히 3․1운동 이후로 상처 입은 교회를 인자한 입김과 깊은 영적 은사로 감싸고 싸매주기에 넉넉한 인품을 가진 분이었다. 그가 우리 교회에 옴으로써 새로운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고 열심히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 



그는 강화 출신으로 1833년 9월 21일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良道面) 홍천에서 김철교(金喆敎)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김종우가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그의 부친인 김철교의 영향 때문이었는데 부친은 당시 강화도가 자랑하던 유명한 유학자로서 사군자(四君者)의 한 사람으로 소문난 분이었다. 

강화도가 일찍부터 개화가 되고 또 감리교의 아성이 된 것은, 실은 이런 이름 있는 가문이 한국선교 초기부터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전 강화가 복음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유수한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와 목사들을 배출하게 된 큰 이유가 된 것이다. 



그런 정평 있는 유학자 김철교가 그의 양반 체통을 돌봄이 없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된 동기나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강화는 19세기 말 감리교 선교부가 정책적으로 선교를 집중시킨 고장이다. 지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인천을 중심한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굳게 닫혔던 배타적인 홍천 마을에도 어김없이 선교사가 찾아왔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고 아낙네들은 문을 굳게 닫고 출입을 금하였고, 동네 젊은이들과 어른들만 모처럼 찾아온 ‘양 도깨비’ 구경을 위하여 선교사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과연 듣던대로 피부색깔이 희고 코는 오뚝하고 파란 빛깔의 눈이 움푹 들어간 양코쟁이였다. 가히 온 동네의 구경꺼리가 되기에 충분하였고 호기심을 만족시키기에 넉넉하였다. 유학자 김철교도 이 구경거리를 놓치지 아니 하였다. 호기심의 눈총을 의식하면서 그 ‘양도깨비’는 유유히 좌우를 돌아보면서 미소짓는 얼굴로 쪽복음을 돌렸다. 처음에는 그 이상의 대담한 전도 행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때 군자 김철교를 당황하게 했던 장면이 벌어졌다. 동네의 불량배들이 갑자기 그 선교사에게 침을 뱉기 시작했다. 그리고 욕지거리를 시작할 뿐 아니라 번갈아 가면서 그런 모욕을 주는 것이 아닌가. 동양의 예의지국에 찾아온 손님에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그의 의분심이 끊어 올랐다. 그런데 이때 김철교를 더욱 놀라게 한 장면을 그가 보게 된 것이다. 이런 지독한 모욕을 당하면 으레 피하지 아니하면 반격을 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천만 뜻밖에도 선교사는 눈살 한번 찌푸림이 없이 여전히 유유히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고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가끔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그 얼굴의 침을 닦으면서 쪽복음을 나눠주고 있었다.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럴 수가!



그의 평생에 처음으로 보고 느낀 경건하리만큼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말로서의 설교가 아닌 행동으로서의 이 선교사의 설교가 이 유학자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이다. 평생을 두고 공부하고 가르쳤던 공맹(孔孟)의 교훈에도 이런 행동 원리는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를 이와 같이 행동하게 했던 그의 근본원리가 무엇이었을까. 그는 집에 돌아와서도 그 장면을 뇌리 속에서 되새겨 보면서 자문자답했다. 그러면 그가 전하는 예수의 가르침이 분명히 그 ‘양도깨비’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게 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 그 예수의 가르침도 내가 들어보고 배워보아야 하겠다. 한번 이렇게 마음에 결론을 내린 그는 곧 이 결심을 행동에 옮기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상은 김종우의 목사의 자제, 金恩雨 박사의 증언.

이것이 한 유명한 유학자의 개종의 동기였다. 유태교의 열심분자였던 사울의 기독교에로의 회심이 초대교회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듯이, 강화의 권위 있고 열성 있는 한 유학자의 개종은 전 강화섬을 온통 변혁시켰고 그 결과 강화가 빠른 속도로 개화의 길에 들어 설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근대사에 큰 공헌을 끼쳤던 많은 유명한 민족적 지도자와 교회지도자들이 그의 뒤를 이어서 우후죽순격으로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유학자의 극적인 회심으로 바로 그 가정에서 조선감리교의 제 2대의 감독이 배출되었다는 것도 우연한 사실은 아니다.



이런 부친의 영향으로 소년 김종우는 일찍부터 교회에 다녔고, 1904년을 전후해서 그는 강화에서 배재로 유학을 나온 셈이다. 그는 배재학당에 와서 처음으로 신교육을 받으며 젊은 꿈을 가꾸었고, 넓은 세계에로의 비약을 꿈꾸었다. 그는 목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따라서 배재를 졸업한 그는  가족을 고향에 두고 친구 한 사람과 함께 넓은 중국대륙으로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난 것이다.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올챙이처럼 놀 것이 아니라 넓은 대륙에서 한 밑천을 만들어 가지고 금의환향해 보겠다는 야망에 끓어 있었던 것이다. 김은우 박사의 증언.



이리하여 이 둘은 약 일 년간 저 멀리 중국 땅 소주(蘇州)와 항주(抗州)까지 찾아가면서 그들의 무지개를 찾아 헤매었으나 그런 일곱색 무지개가 그들을 기다릴 리가 없었다. 이렇게 고생을 하던 중 어느 날 이들은 업친데 덥친 격으로 마적단의 습격을 받았다. 이 때의 습격에서 그의 친구는 마적들의 총에 맞아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자기는 다행히 숲 속에 엎드려 있어 목숨을 건졌다. 마적단이 지나간 후에 그는 친구의 시체를 부등켜 안고 한없이 울었다. 비로소 그가 이때에 그의 한계성을 알게 된 것이다. 또 그의 꿈이 얼마나 허무한 꿈이었던가를 늦게나마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인생의 한계에 부딪치게 되어서 사람은 비로소 본래의 자아로 되돌아 온것이다.



470여 년 전에 어느 무더운 여름 날 청년 루터는 그의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갑자기 벼락을 맞았다. 이때 그의 친구는 이 벼락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나, 루터는 얼마 후에 정신이 들었다. 그는 이 때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나는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라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곧장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어 위대한 종교개혁자가 되었던 것이다. 

청년 김종우는 마적의 습격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을 때 일어나면서 “하나님! 나는 영혼을 구원하는 어부가 되겠나이다” 라고 맹세하였다. 



그도 그의 부친의 성격을 닮아서 한번 결심한 것은 곧 실천에 옮겼다. 그 길로 그는 고향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곧장 신학교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것이 그의 30여 년에 걸친 목회생활의 시작인 것이다. 이 때가 1914년, 그의 나이 31세 때였다. 냉천동에 있는 협성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정동교회 현순 목사 밑에서 전도사 일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그의 신학생 시절과 정동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깊은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는 남산(南山)이 되었다. 그가 신학생으로서 정동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담임목사인 현순 목사를 따라서 4개월 동안 새벽마다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비와 이슬을 맞아가면서 은혜를 간절히 사모한 결과 성령의 놀라운 감동을 받게 된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이때 김종우 전도사에게 무서운 성령의 검으로 나타나서 그의 죄를 사정없이 때린 것이다.



此時에 傳道師 金鍾宇 씨는 이때까지 自己는 學者집 자손으로 肉身的 犯罪 가 全無하노라고 하다가 이 때에 主께서 나타나시어 책망하시기를 네가 罪가 없다고 하느냐? 네가 거룩한 者냐? 하시는 말씀을 듣고 비로소 痛悔하고 三晝夜를 禁食할 때에 聖神의 感化를 받아 精神이 이상해지면서 黙示를 받은 것을 다 기록하기에 어렵다 한다. ꡔ정동교회 1935년 약사ꡕ, pp.16~17.





이때의 그의 깊은 은혜의 체험이 이후의 그의 목회와 부흥운동의 샘이요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1917년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곧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받으면서 그의 본격적인 목회활동과 부흥사로서의 화려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박력 있고 은혜에 넘치는 설교는 교인들의 인기를 독점하게 되어 동대문교회를 거쳐서 신학교를 졸업한지 2년만에 정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될 정도로 선교사들과 선배 목사들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8년에 걸친 김종우 목사의 정동교회에서의 제일차 목회가 시작된다. 1927년~1929년까지는 경성지방 감리사직을 맡아 노블 감리사의 뒤를 이어 전임 감리사로 지방발전에 전임하다가 1929년부터 우리 상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이 때 홍순탁 목사는 인천 내리교회의 담임목사와 제물포 지방 감리사로 전임했다.



김종우 목사의 3년간 목회 기간 중 그를 도와 목회한 동역자로서는 첫 해인 1929년에는 김영율 목사가 파송받아 일하였고 다음 해인 1930년에는 우리 교회의 3총사의 한 분인 김진호 목사가, 그리고 1931년에는 김사목(金思牧) 목사가 부목으로 수고하였다. 1929~1931년 회록 참조.



전도부인으로는 박승호 전도사가 계속 시무하였다.



김종우 목사가 부임한 이후로 그의 독특한 체험에서 우러난 영적 설교가 단연 교우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어 다시 크게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김 목사는 청년들에게도 인기가 있어 젊은이들이 많이 모였다. 또 지방 감리사의 직책까지 겸직하였으므로 지방 행정 치리 및 지방, 구역회 주최의 부흥회까지 인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의 젊은이들의 신앙형태는 ‘일시적이며 기분적인 신앙을 버리고 의지적인 신앙’ Official Journal, 1932, p.139.  으로 변한 것이 특색이었다. 마침 이 시기는 이용도 목사의 전국을 휩쓴 부흥운동이 전개되던 때여서 그 동안 침체된 교회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으나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에 대하여서는 宋吉燮, 「韓國敎會의 改革者 李龍道」, ꡔ神學과  世界ꡕ, 1978, 참조.   이 운동은 기분에 휩쓸릴 위험은 있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이성적, 의지적인 건전한 신앙을 계속 유지한 것은 교회의 앞날을 위하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김 목사는 우리 교회에서 목회하면서도 감리사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지방 내의 40여 교회를 심방하며 또는 전도집회를 인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방사경회 및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지방 내의 큰 부흥의 불을 붙였고 많은 중생자와 새 신자를 획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활동으로 1931년 1년 동안만도 지방 내의 깊은 은혜의 체험을 한 중생자의 수가 무려 2000명, 새로 결심한 새신자 수는 300여 명에 이르렀다. Official Journal, 1932, p.139.



뿐만 아니라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는 큰 이적기사(異蹟奇事)도 나타나서 그의 이름은 전국에 알려졌다. 그의 연회 보고서에 보면,  또는 特別한 奇蹟이 나타난 것을 보았는데 全身不遂 그 동안 꼼짝 못 하던 者가 復與會의 靈的恩惠나 받고 고통스러운 世上을 떠난다고 하여 여러 사람이 몰려서 會堂으로 온 것인데, 心靈이 重生하여 慰安과 기쁨이 充滿하는 同時에 肉身까지 完全하게 되어 上帝께 큰 榮光을 돌렸으며, 또한 眼盲한 者가 完全히 보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靈의 不完全한 것을 完全케 하시는 主님의 能力이 肉身의 不完全한 것도 完全케 하시는 것을 볼 때에 더욱이 感謝와 榮光을 上帝께 돌리였나이다. 상게서, p.140.  이상의 보고와 같이 그는 가는 곳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병자가 벌떡 벌떡 일어나는 큰 기적까지 나타난 것이다. 김 목사의 이상과 같은 능력 있는 목회로 우리 교회는 다시 꽉꽉 차기 시작하였고 낮 예배 때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다. 박승호 전도사의 증언.



1929년에는 우리 교회에서 처음으로 영아부가 설치되어 갓난애기 어머니를 위주로 한 기독교 교육도 실시하게 되었다. 이 영아부는 노불 감리사 부인이 주도하여 한 달에 두 번 정도 노불 감리사의 집에 모여서 활동을 하였다. 모인 수는 평균 10 가정 정도여서, 모태와 요람으로부터의 기독교 교육이 착실하게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우리 교회의 주일 학교는 영아부로부터 장년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의 계층을 전부 포함하게 되어 교육하는 교회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 때에 안석기 씨와 그의 부인 김도라 씨는 함께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를 잘 받든 부부였는데 이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이들은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남겨놓을 기념품 같은 것을 해놓으려고 김 목사와 의논하였다. 김 목사의 제의로 안씨 부부는 초라한 교회 정문에 돌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장엄한 철문을 해 달기 위하여 그때 돈으로 200원이나 되는 적지 않은 금액을 쾌히 헌금함으로써 이 돈으로 일제말기까지 존재하였던 든든한 철문을 만들어 달았다. 이 안씨 부부는 후에 이 철문으로 장례행렬이 지나가게 되어 그들의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졌으나 이 기념할 만한 철문은 일제말기에 침략 전쟁수행을 위하여 일본당국이 강제헌납으로 떼어가서 지금은 없어졌으니 정말로 유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들이 세운 돌기둥은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었으나 새 교회를 지을 때 철거되었다.



김 목사의 부지런한 심방과 능력 있는 설교로 교인들은 대단히 기뻐하고 모이기에 힘썼다. 모이는 열성과 바치는 열의까지 있어서 다시 전덕기 목사 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듯 하였으나 김 목사의 인사이동이 왔다. 



1930년대의 교회가 대체로 대외적인 활동이 억압된 상황에서 그 교회의 신앙이 이 세상보다는 저 세상의 축복과 영광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던 때였다. 우리 교회의 신앙형태도 외부지향적인 것보다는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가는 신비적 경향이 강하였고 모든 민족적인 일제에 대한 악감정이 종교적으로 승화되어 가던 때였다. 이런 경향이 전국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남북감리교회가 합동을 하면서 조선 감리교회라는 하나의 자립, 자치하는 교회가 탄생하게 된다.



이 남북 감리교회의 합동으로 그 동안 서로 독립된 연회와 지방회를 가지고 있던 남북감리교회가 하나가 되면서 두 교회는 이제부터는 기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완전히 하나가 되어 한국 민족에게 큰 공헌을 하게 되며, 이 합동을 계기로 두 교회간의 목사 인사이동도 있게 되어 이런 인사이동이 우리 교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남북 감리교회의 합동



한국에 들어올 때 감리교회는 처음부터 갈라진 교회였다. 감리교회는 당시의 미국사회에서의 큰 사회문제였던 노예문제로 미국의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844년에 갈라졌다. 대체로 북쪽에 있던 미국 감리교회는 노예제도는 죄라고 하여 반대하였고, 남부에 있는 교회들은 노예제도는 하나님의 기관이라고 주장하며 이 제도의 존속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남북교회의 화해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아서 둘은 합의하에 갈라지게 되었다. 북감리교는 원래의 미국감리교회의 이름이었던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그대로 썼고, 남감리교회는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다른 독립된 교회로 나뉘어졌다. 우리 나라에는 미국 북감리교회가 1885년부터 서울에서 스크랜톤 목사에 의하여 한국선교를 먼저 시작하였다. 



한편 미국의 남감리회는 북감리회 보다는 10년 늦게 우리 나라에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남감리교의 한국선교는 순전히 한 청년의 간절한 청원에 의하여 시작된 선교였다. 이 청년이 바로 우리 나라 개화기에 있어서 근대화의 기수의 한 사람이었던 윤치호(尹致昊)였다. 



그는 1884년 12월에 있었던 갑신정변 직후에 김옥균과의 친분 때문에 젊은 나이로 중국에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국 상해에서 미국 남감리교회가 경영하고 있던 중서학원(中西學院, Anglo-Chinese College)에 입학하여 여기에서 공부하면서 세례까지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는데 이 때가 1887년 4월 3일의 일이다. 梁柱三, 조선 남감리회, 三十年紀念報(京城, 조선감리회 전도국, 1930), p.18.



그는 4년만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된다. 그는 미국에 가서는 먼저 테네시 주의 내쉬빌(Nashville)에 도착하여 밴더빌트(Vanderbilt)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1890년 9월에는 죠지아 주 애트랜타(Atlanta)에 있는 에모리(Emory)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국만리 타향에 가 있어도 그의 마음은 항상 그의 조국에 있었고, 또 그의 젊은이들을 한시라고 잊을 수 없었다. 유독 자기만이 이런 좋은 기회에 고등교육까지 받고 있으니 황공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였다. 이런 공부할 기회는 누구에게도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에모리대학을 졸업하면서 1893년 3월 당시 에모리대학의 학장이었던 캔들러(Candler) 박사에게 그 동안 푼푼이 모은 돈 200불을 주면서 다음과 같은 한국 선교를 부탁하였던 것이다. “내가 공부하면서 모은 돈 200불을 당신께 맡기오니 이 돈을 기금으로 한국에 기독학교를 설립하여 내가 받은 것과 같은 교육을 우리 동포들도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게서, p.74.



이 때 윤치호는 에모리대학을 졸업하면서 한국으로 나오고 싶었으나 당시 국내사정이 그렇지 못하였다. 아직도 보수적인 수구당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여서 그는 상해의 자기 모교로 돌아와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한국조정에서 청나라 세력이 물러가고 개화파가 득세하면서 윤치호의 귀국길이 비로소 열리게 되어 그가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금의환향하게 된 것이다. 이 때가 1895년 2월의 일로서 그가 조국을 떠난지 만 10년이 되던 해였다. 



그는 서울에 도착하면서 곧 그의 은사이며 모교인 중서학원의 원장이었던 임낙지(林樂知)에게 몇 번 편지를 보내어 미국 남감리회도 북감리회와 같이 우리 나라에 선교사업을 시작해 줄 것을 거듭 촉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임낙지는 이 호소를 곧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에 전달하였고, 선교부는 1895년 10월에 선교지 현지 시찰차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과 중국에서 일하고 있던 선교사 리이드(C. F. Reid) 목사를 한국에 보내게 된 것이다.



이들은 약 일 주일간 서울에 머물러서 한국 실정을 살피고 돌아갔다가 이듬해인 1896년 10월에 리이드 목사가 그의 가족과 함께 다시 서울에 와서 자리를 잡음으로써 남감리교회의 본격적 선교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상게서, p.20.



이들보다 10년 먼저 서울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은 스크랜톤, 아펜젤러도 나중에 들어온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들을 따뜻하게 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생활할 숙소와 선교기지, 한국인 비서 등도 마련하여 주었다. 이들 두 교파는 이렇게 서로 처음부터 도와주며 때로는 연합하여 여러 가지 선교사업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미국 땅에서는 같은 감리교인 후손들이지만 갈라진 후 합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으나, 이들이 한국 땅에 와서는 경쟁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서로 손을 잡고 일하면서 적극적인 합동 선교작전을 펴나갔던 것이다. 



이런 선교정책은 한국인들에게도 좋았다. 같은 웨슬레의 신앙 전통을 전하는 두 교회가 서로를 중상모략하며 복음을 전할 때 누가 그 복음을 들으려 하겠는가. 또 미국에서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노예제도는 우리 나라에는 없기 때문에 구태여 우리 나라에까지 와서 두 감리교회가 갈라져야 할 합당한 이유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남감리회가 10년 늦게 들어왔을 때 연회의 반응은 한국에까지 와서 두 교회가 갈라져서 독립적으로 선교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언젠가는 합하여야 하는 교회라고 생각했고, 또 두 선교부의 선교사들도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처음부터 협동하여 선교를 진행시킨 것이다. 



우선 1902년부터 두 교회는 교육사업을 공동활동으로 시작하였다. 즉 사경회와 신학강습회를 우선 시험적으로 시도하여 보았는데 대성공을 보았다. 1902년 봄에는 북감리회 지역인 제물포에서 두 교회가 연합하여 신학 강습회를 시작하였고, 그 해 가을에는 남감리회 지역 개성(松都)에서 합동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물론 강사진도 남북감리교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사들로 구성하였고, 수강생도 모두 150명이나 등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Official Journal, 1903, p.27.



1905년 5월에 와서는 이 합동교육사업을 제도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합동교육위원회(Joint Educational Commission)을 조직하였다. Official Journal, 1905, p.16.

같은 해인 1905년 연회에서는 북감리교회에서 먼저 교역자 양성기관으로 현 감리교 신학대학의 전신인 일반 신학교(General Theological School)를 개교하였는데, 2년 후인 1907년 6월에는 이런 교역자 양성사업도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여 설립 운영하는데 합의를 보게 되어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 Union Theological School)의 출범이 시작된 것이다. Official Journal, 1907, p.21.



이 학교의 설립은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뜻을 지닌다. 우리는 남북감리교의 합동의 기본작업이 이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즉 남북감리교회가 그들의 목사양성기관을 따로 따로 세우고 운영하였더라면 아마 두 교회의 합동은 더 늦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선교부가 단독으로 그들의 신학교를 세우고 운영할 만한 자금이나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다행히 두 선교부가 한국의 목사양성 사업은 함께 투자를 함으로써 장차 올 두 교회의 합동의 기초를 놓게 된 것이다. 앞으로 한국감리교회를 이끌어나갈 목사 후보생들은 서로 다른 교수와 과정에 의하여 가르치고 훈련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교수 밑에서 또 같은 교실과 교정, 기숙사에서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공부하게 되었기 때문에 후보생들은 처음부터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협성신학교는 1910년까지는 일정한 교사가 없이 떠돌아다니며 교육하다가 지금의 서대문 냉천동 기지를 두 선교부가 공동으로 구입함으로써 본격적인 신학교육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부터 학교 이름을 감리교회 협성신학교(監理敎會協成神學校)로 부르게 되었고 ꡔ神學世界ꡕ, 1922, 第7卷 第1号, p.98.

1911년 12월 20일에는 38명을 제1회 졸업생으로 배출하여 두 교회에 내보내게 된 것이다. 이들 졸업생들은 졸업 후에는 각자 그들이 속한 교파로 파송되어 일하였다. 그러나 모일 때는 언제나 한 식구처럼 지내며 일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하나의 감리교회로의 합동의지와 소원이 그 동안 실제로 많은 대화를 통하여 연구되고 또 구체화되다가 드디어 1927년부터 합동작업의 구체화 단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 두 敎會 사이에 漸漸 濃厚하게 調和的 精神과 友誼的 態度가 두 年會로 하여금 聯合하여 各自의 總會에 朝鮮에 있는 두 年會를 合同시켜 自治하는 朝鮮監理敎會를 組織할 것과 全權委員을 派遣하여 그 任에 當케하여 주기를 請願” 基督敎朝鮮監理會, 第一回 總會會議錄, pp.61~62.

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에 있는 남북감리교회에서의 이런 합동청원이 미국에 있는 그들의 감리교 총회에서도 접수되고 또 허락되었다. 이때 미국에서는 두 감리교회가 아직도 합동되기 전이었다. 미국의 두 총회는 한국교회 합동청원의 실현을 위하여 합동전권위원까지 5명씩 선출하고 또 이들을 한국에 파송하였다.

드디어 1930년 12월 2일에 서대문 냉천동에 있는 감리교회협성신학교 강당에서 100명의 두 교회 대표들이 모여 역사적인 기독교 조선감리회(基督敎 朝鮮監理會)의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南北監理會合同全權委員會에서 代表로 선출된 임시회장 허버트 웰치 監督(Bishop Hervert Welch)’ 상게서, p.22.

의 사회로 시작된 이 통합총회는 연 11일간 계속되어 12월 12일에 그 역사적 막을 내린 것이다. 두 교회는 하나의 독립된 자치기구인 조선감리교회로 발전하였으며, 또한 한국인 감독(당시에는 총리사, general Superintendent)으로 양주삼(梁柱三) 목사를 선출하여 명실공히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감리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도 양 총리사의 관할 하에 있게 되었고, 그의 인사행정에 의하여 각 연회와 임지에 파송되어 일하게 되었다. 또한 두 교회의 목사들의 인사교류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이런 인사교류 정책에 따라 우리 교회에 와서 3년간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김종우 목사도 이웃에 있는 남감리교회 소속이었던 수표교교회로 가게 되고, 또 수표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오화영 목사가 우리 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이것이 1932년의 연회에서 이루어진 인사였다.



3. 제자리걸음 10년



1932년 연회에서 남북감리회 합동 이후의 인사교류 정책에 따라서 우리 교회의 김종우 목사와 이웃 수표교교회의 오화영(吳華英) 목사가 서로 맞바꾸게 되었다. 김 목사가 3년 전에 우리 교회에 와서 크게 부흥되어가고 있는 마당이었는데, 이런 인사이동은 교회에서 원치 않는 인사였으나 연회에서의 결정이었으므로 아쉬움 속에서 김 목사를 수표교교회로 보내고 대신 수표교교회의 오화영 목사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오 목사는 1880년 4월 5일에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금암면(金岩面) 대촌리(垈村里)에서 출생하였다. 29세에 남감리교인이 되면서 전덕기 목사의 영향하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며, 목회에 뜻을 두어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로서의 모든 수양과 훈련을 쌓았다. 1918년에 졸업하면서 종교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던 중 3․1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이 때문에 2년 여의 옥고를 치루고 다시 수표교교회에 파송받고 목회생활을 계속하다가 우리 교회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박승호 전도사 증언.



오 목사의 목회는 2년만에 끝난다. 감옥에서의 고생 때문에 건강도 여의치 않아 심방은 주로 박승호 전도사가 전담하게 되니 자연히 교인들의 불만이 나오게 되고 집회 인원수도 줄어들었다. 자연히 전임 김 목사와 비교하게 되니 북감리회 목사는 심방을 잘 하고 남감리회 목사는 심방을 잘 못한다는 말까지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박승호 전도사 증언.



이제는 전덕기 목사가 살았던 목사관이 많이 낡아서 큰 수리를 하여야만 했다. 그럴 바에는 아주 헐어버리고 새로 목사관을 짓는 것이 좋겠다는 여론이 있어서 교회 동북쪽에 있는 땅에 행랑을 헐고 20평 정도의 새 주택을 지어 봉헌하였다. 박승호 전도사 증언.



1934년의 연회에서 오 목사는 다시 수표교교회로 파송되고 우리 교회에는 강태희(姜泰熙) 목사가 부임했다. 강 목사도 부흥사의 소질이 있어 부흥회 강사로서 순회전도를 한 경험이 많았다. 강 목사는 우리 교회에서 새로운 예배형식을 채택해 보려고 예배시에 나팔과 북을 이용하여 찬송가 합창시에 합주 형식으로 불고 치고 하였는데, 이런 갑작스러운 예배분위기 변경에 교인들이 어리둥절하여 이에 대한 반발까지 있어 교회 안에 일시적인 혼란까지 야기되기도 하였다. 박승호 전도사 증언.



1934년에 들어오면서 서울지방(당시는 京城地方)이 비대해져서 분지방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동안 교회 자체 내의 성장과 지교회 설립도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남북감리교회가 합하였으므로 서울 시내만 해도 24구역이나 되고 교역자 수는 84명이나 되는 큰 지방이어서 第五回 中部年會議錄, 1935, p.117.

한 사람의 감리사로서는 도저히 이 큰 지방을 관할할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1934년 10월 제 2회 총회에서 분지방이 결정되고 11월의 중부연회 감리사회의에서 서울동부지역의 8구역은 동부연회에 떼어주고 나머지 서울 시내의 교회는 종로 4가를 기준으로 하여 마포까지 행하는 전차길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의 8개 구역은 경성 북지방에 속하고 그 남쪽에 있는 교회는 경성 남지방에 속하게 나눈 것이다. 상게서, p.119.  이 분할 원칙에 따라 우리 상동교회도 정동교회와 함께 경성 남지방에 속하게 되고 남지방 감리사는 김종우 목사, 북지방 감리사는 김영섭 목사가 각각 임명되었다. 



1937년 연회에서 강태희 목사가 장사교회로 파송되고 그 대신 방훈(方薰) 목사가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 겸 경성 남지방 감리사로 파송되었다. 1937년부터 1942년까지의 방 목사의 목회도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 때문에 발전은 고사하고 점점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이 시기가 바로 일본이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이 본격화 되던 때로 1941년 12월에는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인한 태평양전쟁을 도발함으로서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던 때였다.



비단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교회들이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있던 고난의 시대요 암흑의 시대였다. 이 때부터 서서히 우리 상동교회에 대한 일본사람들의 압박이 닥쳐오는데 이 때 상황은 다음에 기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