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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3.1운동 이후의 상동교회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511


         제15장 3․1운동 이후의 상동교회



1. 최성모 진사목사(進士牧師)의 목회 



3․1운동 이후 교회는 점점 대 사회적(對 社會的)활동과 민족운동이 크게 위축되고 개인 영혼의 구원과 타계적 신앙을 강조하는 경향에 빠지게 되는데, 우리 교회도 이런 형태의 신앙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유는 일제의 핍박과 선교사들의 충고, 그리고 사회주의와 물질주의의 도전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본다. 그렇다고 교회의 민족운동과 민족주의 사상이 아주 없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일제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고 또 강단에서 설파하였으나 공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은 할래야 할 수도 없는 형편에 있었던 것이다. 그 대신 교회 경영의 학교를 통하여서 민족 독립 사상은 계승되고 가르쳐졌다. 이런 점에서 우리 공옥학교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였다.

1922년 연회에서 우리 교회의 박용래 목사는 왕십리 교회로 파송받고 그의 후임으로 2년 이상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던 최성모 목사를 노블(W. A. Noble) 감리사가 우리 교회로 파송하였다. Offical Journal, 1922. p.193.



이런 인사는 대단히 중요한 뜻을 가진다. 비록 최 목사를 비롯한 9명의 3․1운동 감리교 민족대표들이 선교사들의 허락도 없이 민족독립운동에 가담하였으나 이들이 형을 마치고 출옥하자 이들을 곧 현직으로 복귀시키고 다시 교회에 파송함으로써 3․1운동에 대한 정당성을 과시하게 된 것이다. 목사가 정치운동에 가담하였다고 문책하거나 파면한 대신 이들을 민족의 영웅으로 교회가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최 목사의 우리 교회의 파송은 최 목사에게는 감개무량한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전덕기 목사의 감화 하에서 우리 교회에서 삼총사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고, 또 전덕기 목사의 뜻을 받들어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까지 치렀으므로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그는 재판석상에서도 떳떳하게 그의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 동기를 일본 재판관들에게 설파하였다.



“사람은 人道, 正義, 自由에서 생존하는 것인데 우리 조선사람은 자유가 없다. 그것은 물론 저작, 행동의 자유가 없음은 물론, 언론과 교육의 자유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고등보통학교가 있을 뿐 기타 중학도 없으며 대학은 물론 없다. 이러한 제도는 조선 사람을 완전히 예속적 존재로 만들려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은 일본 臣民이 아니므로 일본사람과 조선사람 사이에 차별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기타에도 열거할 점이 많지만은 일일이 진술하지 않겠다. 일본사람들은 우리 조선사람을 부르기를 ‘요보’ 라고 하며 아주 비열한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우리 조선사람의 감정을 해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이런 등등의 일로서 나는 물론 병합에 절대 반대하였으니까 기회가 있으면 독립할 의도는 평소부터 품어 왔었다.” 3․1運動秘史, 崔聖模 取調書, pp.567~8.





원래가 전 목사의 감화 아래서 목회에 나섰었고 이번 독립운동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여 참가하였으므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였다. 따라서 재판을 받을 때에도 여러 피고들 중에서 가장 쾌활하고 여유 있는 태도를 보여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최석주, ꡔ내가 본 人生百景ꡕ, p.324.

방청석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짓도 하고 인사도 하여 그의 마음의 평온과 의젓함을 과시하였다.

한편 그가 그렇게 존경하고 따르던 전덕기 목사가 목회하면서 민족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간 교회요 또 그의 모교회이기도 한 우리 교회에 파송을 받고 왔으니 남달리 감회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곳을 거룩한 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반 목사, 진사 목사를 모신 우리 교회도 그에게서 전 목사의 모습을 찾으면서 열심을 내기 시작하였다. 우선 교회건물 수리가 급하였다. 그 동안 공옥학교 확장과 학교 기본 재산 확보를 위한 점포 건축 등으로 교회 건물을 수리할 여유가 없어서 손질할 곳이 많았다. 1901년에 완공된 우리 예배당 건물은 20년이 지나는 동안 큰 수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페인트도 낡고 지붕과 천장도 헐어지고 입구 가까이의 마루도 많이 상하였다. 보기에도 초라하였다. 과거의 자랑스러운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이렇게 초라해진 것을 개탄하면서 최 목사는 교회 수리를 위한 헌금을 교회에 요청하였다. 그랬더니 860원이 나왔다. 



이것으로 우리 교회는 다시 말끔히 단장되었다. 최 목사는 부지런히 교인들을 돌보기 시작하였고, 특히 그의 여유 있고 해학이 있는 설교가 교인들의 인기를 끌게 되어 교회가 새롭게 활기를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교인들도 모이기를 힘쓰게 되어 재적수가 급증하였다. 물론 전 목사 때의 전성기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1650명에 이르렀다. Official Journal, 1924, p.80 .

당시 서울지방 감리사였던 노블 목사도 최 목사의 성공적인 목회에 만족하면서 1924년의 연희석상에서 최 목사를 치하하였다. 상게서, p.54.



그러나 최 목사의 우리 교회에서의 목회는 길지 않았다. 우리 교회에 부임한지 2년만에 교인들의 아쉬움 속에서 만주의 목단 지방으로 파송받음으로 끝난다.





2. 시청각 부흥사 홍순탁 목사의 목회



최 목사의 후임으로 홍순탁(洪淳倬) 목사가 두번째로 우리 교회에 부임하였다. 홍 목사는 제 1차로 우리 교회에서 1916년~1918년까지 2년간 목회한 바 있으므로 우리 교회에서는 낯설지 아니 하였다. 제 2차 목회는 1924년~1929년까지 5년간으로 비교적 오래 계속되었다.

홍 목사는 1878년 9월 28일에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오암촌(오동바위)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의 아호도 ‘오암’이라고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고향에서 10수년 간 한문을 수업하였으므로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22세에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까지 서당에서 훈장까지 하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받아들인 것은 22세 되던 해인 1900년인데 당시 황해도 연안지역을 순회 전도하던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당시 황해도 일대는 감리교 지역이어서 감리교 선교사들과 전도인들이 순회 전도를 하고 있었다.



일단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그는 처음부터 열심이었다. 동포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로 결심하고 서당 훈장직도 버리고 1901년에 해주로 이사와서 해주 남본정 교회의 창설 멤버로 활동하게 된다.



오암 홍순탁 목사 약력.



그는 1903년부터는 서지방 해주구역에 파송받은 크리체트(Carl Critchett)선교사와 함께 순회전도에 나섰다. 1906년부터는 해주 남본정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1911년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정회원 목사 안수를 받고 황해도 배천교회 목사로 파송받았다. 여기에서 그는 4년간 목회하다가 1913년부터는 그가 전에 전도사로 시무하고 그 교회 창립 멤버였던 해주 남본정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하고 교회까지 신축하였다.



그러다가 1916년에 해주에서 우리 교회에 부임하여 제 1차로 2년간 목회하다가 1918년에 서강교회로 파송받고 다음에 동대문 교회를 거쳐서 1924년에 두 번째로 다시 부임한 것이다. 

그의 심오한 회심의 체험은 그가 29세 되던 해인 1907년 2월 18일에 왔다. 상게서.

이때가 바로 한국교회 역사에 있어서 유명했던 대부흥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던 때로 그는 이 때 해주 남본정교회의 전도사로 있던 때였다. ‘죄의 회개와 간증’이 그 특색인 이때의 대부흥의 영향이 그의 신앙의 본질을 형성하였고, 또 그의 40여 년간의 목회도 이런 체험적 신앙노선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 때의 은혜가 그로 하여금 만년에 길가에 쓰러질 때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했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평생의 좌우명이던 로마서 14장 8절인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나니’에 따라



그는 생활을 통하여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한 분이다.

그는 깊은 은혜의 체험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성서를 깊이 파고 연구한 분이어서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가졌다. 그의 이런 성서에 관한 실력이 선교사들에게도 인정받아 그는 이종우, 전영택 목사 등과 함께 충정로에 있던 여자 협성신학교에 출강하면서 성서를 가르쳤던 것이다. 朴承浩 전도사의 증언.



이런 그의 깊은 은혜의 체험과 해박한 성경지식은 그로 하여금 전국적인 부흥강사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부흥회의 강사로 초빙되어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전국교회에 큰 은혜를 끼쳤다. 홍 목사가 한번은 개성에 있는 호스돈 여자 고등학교에서 학생집회를 인도하였는데, 그의 설교가 학생들과 교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이때 이 학교의 교사로 있던 모윤숙 선생이 예수의 가야바 뜰에서의 재판광경에 큰 감명을 받았다.  후에 모 선생은 이 감격을 그의 능숙한 글로써 시로 지어 이 시에 곡까지 부쳐서 <가야바의 뜰>이라는 성가까지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朴承浩 전도사의 증언.



그의 부흥회의 특징은 <예수행적도>라는 성화를 만들어서 그 성화를 보여주면서 설교하는 ‘시청각 부흥사’였다. 말로만 하는 설교나 성경강의가 아니라 눈을 통하여 성지의 지리나 그 때의 풍속 의상 등을 실제로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그 호소력과 이해력이 더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물론 오늘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그 재료가 세련되지 못한 점도 있겠지만, 그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선교자료였다는데 그 의의는 자못 크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에 이런 시청각 교육을 통한 전도활동을 하였다는 사실은 한국기독교 교육사에 길이 남아야 할 업적이라고 본다.



홍 목사의 목회를 도와서 이때 장명희(張明姬) 전도사가 전도부인으로 파송받아 왔다. 장 전도사는 우리 교회에 1925년~1927년의 2년간 봉직하였다. 장 전도사가 파송되기 전에는 박정신 전도사가 잠깐 일하다가 갔다. 장명희  전도사는 경기도 부천출신으로 1925년에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하면서 곧 우리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였는데 실은 장 전도사는 홍 목사의 제자격이었다. 즉 장 전도사가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을 때 홍 목사가 상동교회에 있으면서 신학교에 출강하여 요한계시록을 가르쳤다. 따라서 홍 목사는 장 전도사에 대하여 평소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여겨 두었다가 졸업과 동시에 우리 교회로 초빙한 것이다. 



장 전도사의 우리 교회에서의 활동은 길지 아니 하였다. 1927년에 장 전도사가 수원지방 천곡구역으로 파송되어 그 후임으로 지방에서 일하고 있던 박승호(朴承浩) 전도사를 초빙하게 되었다. 박 전도사는 비교적 오래 우리 교회에서 일하였다. 1928년~1936년의 8년간 활동하였고 홍순탁, 김종우, 오화영, 강태희. 네 목사님들과 동역(同役)하였다. 박 전도사는 1918년에 협성여자신학교 예비과에 입학하여 본과를 거쳐서 1923년에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5년간 황해도 등지에서 계속 교역에 종사하다가 우리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후로 8년간 박 전도사는 교인가정심방, 병자문병, 개인전도, 축호전도, 속회인도, 여선교회 지도 등 교회의 각 부문의 활동에 적극 가담하면서 쉴 사이가 없었다. 특히 우리 교회에서 개척한 지교회 교인가정의 심방까지 맡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시내 교통수단이 신통치 않는 때여서 많이 걸어서 다녀야만 했다. 이때 박 전도사가 심방하면서 돌보았던 우리 교회의 지교회로서는 이미 언급한 후암교회 이외에 이태원 교회와 신영리 교회(지금의 세검정 교회) 그리고 멀리 성동구 옥수동 쪽의 두무께 교회였다. 朴承浩 전도사의 증언.



이때 교역자들을 도와서 평신도로서 교회를 열심히 섬겼던 분들로서는 함명희 속장, 윤덕주 속장, 김성진 속장, 김엔나 속장, 김커틀러 전도사, 이경숙 전도사, 손메례 전도사, 박동은 유사, 김원영 교장 등이다. 



함명희 속장은 대단히 부지런한 분이어서 속회인도와 교인심방에 힘썼고 윤덕주 속장은 열심히 일하면서 피어슨 성경학교에 입학하여 전도부인의 훈련을 받았다. 후에 전도사가 되어 인천, 강화, 홍성 등지에서 교역하다가 1939년부터는 우리 교회에 파송받고 일하다가 은퇴하고 평생을 우리 교회에서 보냈다. 

김성진 속장은 독신으로 있으면서 열심히 봉사하다가 여전도사로 교역에 나선 분인데 우리 교회에서 키워낸 전도부인이다. 



또 이경숙 전도사는 충청도 출신이라 하여 ‘손님 부인’이라는 애칭을 가진 분으로서 스크랜톤 대부인의 뒤를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초대의 전도부인이 된 분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오직 우리 교회만을 섬기다가 은퇴한 후에도 출석하면서 여선교회 사업과 후배 전도부인을 잘 지도하였다. 그러다가 김종우 목사 때(1929~1932)에 우리 교회에서 돌아가셨다. 



김커틀러 전도사는 우리 교회 김원영 공옥학교 교장의 고모되는 분으로서 이경숙 전도사의 뒤를 이어 우리 교회를 받들면서 전도 부인으로 오래 수고하신 분이며 은퇴 후에도 계속 출석하면서 후진들의 신앙지도에 힘썼다.



손메례 전도사도 1914년 이후 우리 교회를 받들면서 전도 부인으로 활동하여 은퇴 후에도 계속 교회를 섬기다가 우리 교회에서 그의 생을 마쳤다.



남자 직원 중에서는 박동은 유사가 제일 어려운 일들을 싫다 하지 않고 잘 감당해 낸 분이다. 교회 유사로서 교회재정 처리와 살림은 물론이거니와 교인 중에 작정하고도 내지 않는 각종 헌금이 미납이 생기면 그 때마다 박 유사가 직접 그 가정까지 찾아가서 그들을 잘 설득하여 교회의 재정 확보에 크게 노력하였다. 



김원영 장로는 예배 때 풍금반주도 하며 주일 학교 교장으로 계속 수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 직원들 사이에 분쟁이 있을 때마다 중재 역할을 감당하여 교회 평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상은, 장명희, 박승호 전도사의 증언.



1920년대는 전국에 있는 교회들이 침체한 가운데 있었으나 우리 교회는 이와 같은 열심 있는 일꾼들로 인하여 그런대로 명맥을 이어가는 형편에 있었다. 그 전과 같은 눈부신 발전은 없었고 현상유지 정도에 그쳤고, 또 홍순탁 목사의 목회도 그가 1929년 연회에서 인천지방 감리사 및 내리교회의 담임목사로 파송 받으면서 끝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