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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3.1운동과 상동 출신의 활약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087


         제14장 3․1운동과 상동 출신의 활약



          3․1운동은 한국 근대 민족 운동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분수령을 이룬다. 즉 3․1운동으로 비로소 한국의 현대적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또 표현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3․1운동은 1884년에 있었던 갑신정변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이 정변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소수 소장개혁파 정치가들에 의하여 계획된 폭력에 의한 근대화 운동이었으나 이에 대한 민중의 지지는 거의 없었다. 즉 머리만 있고 몸이 없는 운동이었다. 이에 비하여 10년 후에 있었던 동학 혁명은 거의 전라지방에 국한된 농민 대중 운동으로서 그 목적과 명분은 정당하고 좋았으나, 전국적 민족운동은 되지 못하였고 지도력도 부족하였다. 따라서 이 운동은 몸은 있었으나 머리가 없는 운동이었다.



이런 운동에 비하여 3․1운동은 계급을 초월하고 지방을 초월한 그야말로 전국적이며 민족적인 운동이었다. 상류계급은 물론이거니와 아래로 농민대중과 근로 대중, 심지어는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이 운동에 가담하여 호응한 초계급적이며 지방색을 초월하고 종교를 초월한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다.

따라서 이 운동은 머리도 있고 몸도 있는 전국적이며 전민족적 반일 독립운동이며 근대적 한국 민족 운동의 표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운동의 머리역할을 하였던 민족 대표들 중에 전덕기 목사를 중심하여 우리 교회에서 그의 감화 밑에서 신앙생활과 민족 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이 운동을 처음부터 계획하고 또 집행하여 나갔던 것이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일본이 그 동안 한국의 합병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그렇게 계획적으로 떠들어대던 일본의 상투적 선전이 거짓되고 기만적이었다는 것을 보기 좋게 전 세계에 폭로한 것이다. 즉 그 동안 일본은 열심히 전 세계에 한국 민족은 용기도 없고 무능하며 단결할 줄도 모르고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능력도 없는 민족이라고 선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은 일본의 통치에 감사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전에 잘 계획된 독립운동이 세계에서 그 기민성과 치밀함을 자랑하던 일본 경찰의 정보망에도 사전 발각됨이 없이 계획되고 집행되었을 때 일본의 지배자들은 얼마나 놀랬을까. 당시의 하세가와 총독은 이 운동의 폭발 소식을 처음 보고 받고는 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고 한다. 釋尾純藏, ꡔ朝鮮倂欱ꡕ, 東京 岩波文庫, 1926, pp.876~877.



이 운동으로 우리 민족은 행동으로 일본의 거짓과 기만성을 보기 좋게 전세계에 폭로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이 얼마나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고 있으며 자주 독립의 욕망이 그 얼마나 강렬한가를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춘 민족임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던 것이다. 비록 이 운동으로 즉각적인 자주 독립은 쟁취하지 못하였으나 그 동안 근 10년 동안에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피맺힌 민족적 수모를 깨끗이 씻어 버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26년 후에 있었던 8․15해방의 보증 수표가 되었던 것이다.



만일 3․1운동 때 우리 민족이 거국적인 독립을 절규하지 아니 하였던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들이 일본이 패망하면 한국은 독립이 되어야 된다는 국제적 결정을 내렸을까. 해방 직전에 있었던 카이로 회담에서나 얄타 회담에서 우리 민족 대표가 참석하지 아니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이 항복하면 한국은 자동적으로 독립되어야 된다는 결정이 내려진 배경이 3․1운동이 아니었던가. 만일 3․1운동 때 우리 민족이 많은 희생을 내면서 독립을 외치지 아니 하였던들 이런 중대한 결정은 내려지지 아니 하였을 것이다.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3․1운동은 그 사상적 흐름의 근원을 우리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목회와 3․1운동 전에 있었던 그의 화려한 민족운동에서 찾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이와 같은 우리의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3․1운동의 기본정신을 선포한 독립선언서의 작성자가 평소 전덕기  목사의 강력한 영향하에 있었다는 사실(그의 고백을 들어서도 알 수 있다), 전택부, ꡔ한국기독교청년운동사ꡕ, 정음사, 1978, p.244.



둘째, 33인 민족대표 중 16명의 기독교인 가운데 9명이 감리교 대표인데 9명이 대표들이 거의가 우리 교회 전 목사의 영향 하에서 전부터 목회와 민족운동을 겸하여 하고 있던 분들이었다.

감리교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이필주 목사는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교회의 삼총사의 한 분이었고, 또 한 분의 삼총사인 최진사 최성모 목사도 우리 교회 출신이다. 또한 오화영 목사도 그가 27세 되던 1907년에 세례를 받고 감리교인이 된 후에 전 목사의 영향 하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전 목사가 돌아가시던 해인 1914년에 남감리교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계속 민족운동을 겸한 목회를 하다가 3․1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3․1운동이 터졌을 때 그는 종교교회의 담임 목사로 있었다.

대쪽같은 선비 목사로 알려진 신석구 목사는 전덕기 목사와 동갑이면서도 그의 감화를 깊이 받은 분으로서 전 목사와 같은 유형의 목회를 하다가 3․1운동에 가담하였는데, 이 때 신 목사는 우리 교회에서 가까이 있는 수표감리교회의 목사로 있었다.



그 외에 민족 대표로서는 활약하지 아니 하였으나 이들과 같이 처음부터 3․1운동 거사계획에 참석하고 상해에 가서 본격적 독립운동을 했던 현순 목사 역시 전 목사 밑에서 우리 교회의 부목으로 활약했던 분이다. 또 3총사의 한 분인 김진호 목사는 배재학당에 있으면서 3․1운동의 학생 동원을 맡아서 투쟁했던 것이다.



3․1운동이 터졌을 때 우리 교회에서 성장하고 훈련된 이상의 민족 대표들과 목사들은 이미 우리 교회를 떠나서 전 목사의 유지를 받들어 감리교의 중견목사로서 목회와 민족운동을 겸한 교역 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다가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 이들은 가족과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이 운동에 처음부터 가담하고 추진해 나갔던 것이다. 즉 우리 교회가 평소에 이런 훌륭한 민족 지도자들을 길렀기에 일단 유사시에 유용하게 민족에게 공헌하게 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 교회의 자랑이요 우리 교회가 민족 운동사에 크게 공헌한 또 하나의 예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주로 이상의 네 명의 민족 대표와 현순 목사 등의 3․1운동 거사계획 참여와 활동 사항을 다루어 보려고 한다.

기독교에서의 3․1운동 계획은 처음에는 두 곳에서 따로 따로 구상되었다. 하나는 이승훈을 중심한 평안도 지방의 장로교 측의 움직임이었고, 또 하나는 서울을 중심한 감리교 계통의 움직임이었다. 한국역사편찬위원회, ꡔ한국독립운동사ꡕ, 제2권, p.140.



장로교의 움직임은 이승훈이 주도하였는데, 그는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전덕기 목사와 함께 오랫동안 민족운동을 해 오던 인물로서 나중에는 전 목사와 같이 신민회에서 중요 간부로서 활약하다가 소위 105인 사건, 즉 신민회 사건에 관련되어 4년 여의 감옥 생활을 체험한 분이었다. 그러나 기회가 왔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일어난 것이다.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작하여 3․1운동을 계획할 때 기독교 측의 연락 책임도 이승훈이 맡았던 것이다. 그리고 감리교 측의 3․1운동 준비, 조직 및 연락 책임은 박희도(朴熙道)가 맡았는데, 그는 이 때 31세의 한창 나이에 중앙 YMCA의 간사로 있으면서 감리교 중앙 교회의 전도사로 있었다.



감리교 측의 3․1운동 거사계획은 이 박희도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1운동 거사 계획에 있어서의 회계를 맡고 맹활약했던 박희도는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참가 동기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일합병 이후 조선인에 대한 대우가 일본 사람과 동등하지 않고 조선사람은 여러 가지 생활난으로 할 수 없이 외국으로 이주하여 가며, 교육제도는 일본과 동등이 아니고 또한 정신적 자유를 속박당하여 언론 출판도 뜻과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말을 점차로 폐지할 계획으로 교과서는 일본말을 국어라 하여 가르치고 있다. 또 일본사람은 조선사람을 어린아이처럼 취급하고 멸시 하는 것이었음으로 나는 조선이 독립할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계 대세에 변함이 와서 미국대통령이 하나님의 의사에 따라 강국은 약국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는 바 그 기사를 大阪每日新聞과 경성 매일신보에서 보았으며 이국의 신문에서도 그러한 의미를 기재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또 나는 布敎를 연구하여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의 의사라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금번 강화회의에서 월슨 씨가 민족자결이라는 것을 주장한 일을 신문을 보아서 알았고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에 참여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본년 1월 상순부터 독립운동을 생각하고 있었다. 李炳憲, ꡔ3․1運動秘史ꡕ, 時事時報社, 1959, 朴熙道取調書, pp.442~3.





3․1운동 거사 계획은 감리교 측에 있어서는 1월 초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박희도는 1월 20일 경에 감리교 이천지방 사경회에 갔다가 거기에서 남양교회 목사로 있던 동석기(董錫磯)를 만나서 민족자결과 독립운동에 관하여 의견을 서로 교환하였으나 아직 구체적인 운동계획은 세우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교계인사들이나 민족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 운동을 서두르게 된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고종 황제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1907년에 해아 밀사 사건으로 일본이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켜 그 이후로 고종은 덕수궁에서 갇혀 있는 생활을 하다가 1919년 1월 22일에 급서하였다. 그 전날에 병에 걸렸다는데 그 다음 날에 돌아간 것이다.



따라서 국민들 사이에 고종의 사인에 대하여 짙은 의문을 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일제가 어떤 역적을 시켜서 고종을 독살시켰다는 소문이 전국에 삽시간에 퍼지게 되었다. 갑작스런 고종의 죽음은 전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고종에 대한 동정심과 나라 잃은 슬픔, 그리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합하게 되어 민심이 크게 동요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민족자결론 소식으로 민심이 크게 흥분되고 있는 판국에 고종의 독살설이나 자살설로 그 동안에 쌓이고 쌓였던 적개심과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게 되니 3․1운동 거사의 조건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그 동안 감리교, 장로교, 천도교에서 따로따로 구상하고 있던 독립운동이 구체적 단계에 들어가면서 각 교파에서 통합된 운동을 모색하게 된다. 평소부터 기독교의 강력한 전국적 조직력과 우리 교회를 중심했던 민족운동, 그리고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활발한 활동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천도교의 최 린(崔麟)에게 전덕기 목사의 감화하에 있었던 최남선이 기독교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전해 주었다. 최 린은 최남선의 이런 정보를 전해 듣고 곧 기독교측의 이승훈과 접촉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기독교측과 천도교측의 접촉의 시작이다.



최 린은 이승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승훈이 서울에 올라와서 최남선을 만나보라고 연락한 것이다. 이승훈은 때가 때였던 만큼 만사를 제쳐놓고 2월 11일경에 서울로 직행했다. 그가 서울에 와 보니 이승훈을 맞이한 사람은 최남선이 아니고 송진우(宋鎭禹)였다. 이 때 이승훈은 최 린이나 최남선을 직접 만나보지 못하였으나 송진우를 통하여 천도교 측에서도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승훈도 동지 규합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승훈은 그 다음날(12일) 우선 장로교의 중심지의 하나인 선천(宣川)으로 내려와서 그 곳에서 장로교의 중진급 인사인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목사 등과 이명룡 장로와 더불어 독립운동에 대하여 논의하고 이 운동에 전원 가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승훈은 이틀 후인 2월 14일에는 선천에서 평양으로 가서 동지들을 규합하였는데, 그가 평양에 와서는 거처를 감리교 병원인 기홀(記笏)병원에 입원하면서 평양의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는 요시찰 인물이었기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병원이 3․1운동 계획에 있어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이 병원에서 이승훈은 그 전부터 잘 알고 있던 감리교의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이던 신홍식 목사의 문병을 받게 된다.



신 목사의 문병을 받은 이승훈은 이 자리에서 신 목사에게 그 동안 서울과 선천에서 진행된 일들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신 목사도 즉각 이 독립운동 계획에 가담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이승훈과 감리교와의 연락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의 감리교 측에서는 박희도가 개별적으로 1월 초순부터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을 때 정동교회의 장로이면서 기독신보사(基督申報社)의 서기로 있던 박동완(朴東完)도 신문을 통하여 윌슨의 민족자결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고, 이 계획에 동지를 규합하여 어떤 종류의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박동완도 박희도를 1월 초에 만나서 독립운동 문제를 서로 의논하고 있던 때였다. 이럴 때에 평양의 신홍식 목사가 평양에서 이승훈과 접촉한 후 곧장 서울로 올라와서 박희도와 접촉하게 된다. 이때가 2월 18일 경이다. 박희도는 신 목사에게서 장로교측 이승훈의 계획을 듣고 그 날 밤으로 그 전날에 서울에 온 이승훈을 만난다. 이때 이승훈은 17일 평양에서 서울로 와서 천도교측의 정확한 계획과 결의를 타진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송진우를 만나 보았더니 그의 태도는 그 전과는 아주 달랐고 또 최남선을 만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천도교의 태도에 의심을 품고 고민하고 있던 때에 감리교의 박희도가 18일에 그의 숙소로 찾아온 것이다. 상게서, pp.430~1.



박희도는 이 자리에서 이승훈에게 독립운동의 계획 사실을 확인하고 그날 밤 박희도의 집에 감리교측의 동지들을 모으니 이승훈도 자기 집으로 오도록 초청했다. 이것이 감리교측의 공식회합이 된 것이다.

이 회합에는 평양의 신홍식 목사, 원산의 정춘수 목사, 서울 종교교회의 오화영 목사와 박희도, 이승훈이 모여서 감리교와 장로교가 합동하여 이 기회에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태도가 애매한 천도교와의 합작은 일단 보류한다고 결정하였다. 송길섭, ꡔ3․1運動 擧事計劃에 있어서의 天道敎와 基督敎側의 合同科程ꡕ, 神學과 世界, 1977, p.111

따라서 이 결정은 중요한 것이었다. 감리교와 장로교 대표회합이 다음 날인 19일 밤에 세브란스 병원안에 있던 이갑성의 집에서 있었다.



이 합동회의에서는 감리교측에서 오화영과 현순, 그리고 박희도, 신홍식 4명, 장로교측에서는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항의 4명, 도합 8명이 참석하여 통합된 독립운동의 거사를 결의했다. 그리고 천도교와의 연락 책임은 이승훈에게 위임했다.



이런 기독교의 통합운동 거사 결정은 곧 천도교측에 전달되고 그 이튿날 장․감 양측 대표가 다시 이갑성 집에 모여 독립운동의 구체적 전략을 짜게 되는데, 아직 거사 날짜는 결정되지 않았고 다만 독립선언서의 작성 발표와 독립 청원서의 발송이란 형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이 문서들의 작성과 인쇄는 천도교에서 맡고, 독립선언서의 배부는 양측에서 분담하고, 청원서의 우송 및 전달(윌슨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



그리고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 및 국회의원 각국, 대사관 등)은 기독교측에서 맡도록 분담하였다.

파리 평화회의와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는 영어를 잘 하는 현순 목사가 맡아 미리 상해에 보내도록 하고, 일본에는 일본어를 잘 하는 장로교의 안세항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들은 곧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현순은 목회에서 손을 떼고 그 길로 상해로 이 중요한 사명을 띠고 떠났다. 이 후로 그는 상해임시 정부에서 외무부의 일을 보면서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한편 이렇게 3․1운동 거사 계획이 서울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우리 교회의 3총사의 한 분인 최성모 목사는 지방교회인 해주 남본정교회(南本町敎會)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이 때 최성모는 서울에서 이런 독립운동 계획이 있는 줄을 모르고 2월 25일 밤에 해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며 3총사의 한 분이었던 이필주 목사 집에 묵고 있었다. 상게서, 최성모취조서, pp.563~4.

이 목사는 이 때 정동교회 담임 목사로 있었다.



최성모는 이때 그의 장남이 배재학교를 졸업하게 될 때였으므로 아들의 상급 학교 지도를 위하여 올라 왔는데, 그 밤으로 박희도를 찾아간 것이다. 박희도는 이 독립운동가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지금 기독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독립운동 계획을 그에게 이야기 하였더니 그는 즉석에서 이 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그는 원래 독립에 뜻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인 만큼 조금의 주저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돌아와서 이필주에게 이 사실을 말했더니 이필주도 선뜻 이 운동에 가담하게 되어 우리 교회 출신들의 3․1운동 가담이 구체화된 것이다.



한편 우리 교회의 출신인 신석구 목사에게는 오화영 목사가 독립운동 계획을 알려 주었다. 이 때가 2월 19일 경이었다. 상게서, 신석구취조서, p.496.



신석구는 이때 수표교교회의 담임목사로 있던 때다. 모두가 감리교회의 중견 지도자로서 큰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때였다. 그는 이 일이 중요한 일인 만큼 하나님에게 기도한 후 그의 응답을 받고 가담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어디까지나 목회자다운 대답이었다. 그는 실제로 산에 가서 간절히 기도했고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나라의 독립은 ‘하나님의 마음’ 상게서, p.494.

으로 확신한 이상 아무 것도 두려울 것 없었고 과감하게 이 운동에 가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3․1운동 때 독립운동이 가장 치열하였던 창녕(昌寧)지방 영산(靈山)의 24인 독립 결사대까지 조직 지도하였다. 이 결사대 중에는 후에 제헌 국회의원이된 구중회(具中會), 장진수(張振秀), 김추은(金秋銀) 등이 있다. 이 24인의 결사대는 창녕군의 전 국민을 궐기시켜 창녕 경찰서와 영산 주재소를 습격하여 경찰과의 육박전 등의 무장투쟁까지 하였던 것이다. 盧大錫, ꡔ鄕土文化ꡕ, p.95, p.99, 每日新聞連載 鄕土史 洛東江 87回.



신석구의 독립 정신은 그의 신앙에 근거했던 종교적 차원에 있었던 것이지 정치적 야심이나 권력에의 의지는 전혀 없었다. 이번에 독립운동을 일으킨다고 한국이 곧 독립될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지 아니 하였다. 그렇다고 가망이 없다고 이 운동을 미리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 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의 교훈을 따라 자기는 이 민족의 독립을 위한 밑거름이 되고자 이 운동에 가담하고 활동했던 것이다. “금일 조선독립은 성립되지 않고 있으나, 씨를 심을 때에는 추수가 있을 것을 판단하는 것과 같이 청원한다는 것은 실은 청원이 아니고 독립한다는 것을 통지하는 것이다.” 3․1運動秘史 신석구취조서, p.500.



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은 비단 한국만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을 위하여도 긴요하다는 사실을 일본검사 앞에서도 그는 서슴없이 설파하였던 것이다. 상게서, p.494.

앞으로도 계속 독립운동을 하겠느냐는 건방진 검사의 심문에 대하여 신석구는 노한 음성으로 당당하게 “나는 한일 합병에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는 할 생각이다.” 상게서, p.497.



그는 2년 6개월의 징역언도를 받고 1921년 11월 4일에 서대문 감옥에서 만기 출옥한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드디어 이북에서 그렇게 고대하던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산당의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6․25동란 때 공산당에 의하여 총살당함으로써 그의 대쪽같은 민족 정신과 고결한 생애를 끝까지 과시하였던 것이다.



거사 직전인 2월 27일 정오에 정동교회의 이필주 목사 사무실에 기독교 측 대표들이 최종적으로 모여 16명의 기독교측 민족 대표들을 확정하게 되었는데 장로교에서는 길선주, 이승훈, 양전백, 이명용, 이갑성, 유여대, 김병조 등의 7명이 확정되고, 감리교측에 있어서는 이필주, 오화영, 최성모, 신홍식, 박희도, 정춘수, 김창준, 박동완, 신석구의 9명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33인 민족대표의 서명 순서로는 원칙적으로 가나다 순으로 하되 천도교 대표인 손병희가 먼저하고 두 번째로 장로교 대표 길선주, 세 번째로 감리교 대표 이필주가 서명하고, 네 번째로 불교대표인 백용성이 서명한 다음에 가나다 순으로 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서명 날인은 목숨을 걸고 하는 서명이었다. 이 서명의 결과가 어떤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본인의 목숨은 말할 것 없이 그들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닥쳐올 가공할 보복적 핍박도 각오해야만 했다. 특히 감리교의 대표로 서명한 우리 교회 출신의 이필주 목사의 각오는 더욱 비장하였다. 그는 거사 전날 밤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가족 예배를 보았다. 그는 이 가족예배에서 특별히 찬송가 498장을 가족들과 함께 힘차게 불렀다.



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 후

광명한 그 땅에 편히 쉴 때

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이라

영광이라 영광이라

내가 누릴 영광이라

은혜로 주 얼굴 뵈옵나니

지극한 영광 내 영광이라



우리는 이 찬송가 속에서 이 운동에 가담했던 이필주 목사의 비장한 각오를 엿보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이때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필주 목사 약력.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심정들이 오직 이필주에게만 있었겠는가 마는 이들의 영광은 곧 우리 민족의 영원한 영광이요 또 우리 교회의 영광이기도 했으며, 이들이 당한 고난과 치욕은 또한 우리들의 당한 고난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독립운동이 사전에 그 정보가 누설됨이 없이 전국적이고 거족적인 운동으로 시작되고 확대되어 나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