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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1915년 이후의 상동교회와 공옥학교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4,924
          제13장 1915년 이후의 상동교회와 공옥학교 1. 일제의 사립학교 규제 1915년에 들어오면서 일본은 그들의 한반도 통치에 큰 장애물이 되는 교회와 교회가 경영하는 사립학교에 대한 엄한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일본은 한일합병 이전부터 한국에 있어서의 교육정책에 직접 간섭하면서 그들의 식민지 교육정책을 착착 펴나갔으나, 1915년에 와서는 노골적으로 이들 학교에 대한 탄압정책을 개시한 것이다. 1915년의 사립학교 규제법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그 이전에 일본이 우리 교육에 어떤 제한조치를 취하였는지를 잠깐 살펴봐야 한다. 1910년까지는 한국인을 위한 일본의 교육기관은 없었고, 대부분의 신교육기관은 교회에서 경영하는 사립학교들이어서 이 학교들은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런 교회 학교에서 민족 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하여 반일 애국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교들이 민족정신 고취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이런 배일 민족주의(背日民族主義)의 온상인 교회학교에 대하여 일본은 어떤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리하여 이들은 한일합병이 이루어지기 전인 1908년에 통감부를 통하여 사립학교령을 발표했고 이런 사립학교들의 반일사상을 탄압하기 위하여 악명 높은 교과서용 도서검정규정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1908년의 사립학교령은 전문 17조로 되어 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제2조) 사립학교를 설치하려는 자는 학부대신(문교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하며, 인가를 얻지 못한 학교는 그 설립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규제의 의하여 일본은 학부대신에게 압력을 넣어 그들이 원치 않는 학교는 일방적으로 폐지할 수 있었다. 우리 공옥학교도 이 법령에 따라 1909년에 학부의 인가를 받았다.) 金源榮 校長 手帖에서. 2. (제3조) 수업연한, 학년, 학과목, 학생정원, 입학자격 등에 대한 학칙을 설정한다.    (우리 공옥학교는 초기에는 4년제인 듯 하였고, 3․1운동 이후부터는 5년제가 되었다. 성경은 아직도 정식과목으로 가르칠 수 있었다.) 3. (제6조) 교과서에 특히 중점을 두고 학부편찬 또는 검정을 받은 것 외의 것은 학부의 인가를 받아 사용한다.    (이 조항으로 민족정신을 강조하며 배일사상이 농후한 교재는 사전에 제거해 버렸다. 그러나 학과목 담임선생의 강의와 배일사상까지 규제할 수는 없었다.) 4. (제10조) 사립학교의 설비, 수업, 기타 부적당한 사항은 학부대신이 그의 변경을 명할 수 있다. 崔永禧, ꡔ韓國現代史ꡕ Ⅵ, pp.300~301.    (일본은 이 조항을 이용하여 학교시설 미비라는 구실로 후에 실제로 많은 학교의 문을 닫았다.) 한편 일본은 이상과 같은 사립학교령과 병행하여 같은 해 9월에는 교과서용 도서 검정 및 인가 기준을 발표하였는데, 이 심사기준은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으로 고려하여 세운 엄격한 심사기준이었다. 그 중요한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정치적 기준         ① 한국과 일본의 관계 및 양국의 친교를 저해 또는 비하하는 일이 없는가         ② 기교(奇矯)하고 오류에 빠진 애국심을 고취하는 일이 없는가         ③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특히 한국인으로 하여금 일본인 및 기타 외국인에게 대한 악감정을 품게 하는 것 같은 기사와 어조는 없는가 2. 사회적 기준         ① 사회적 기타 사회의 평화를 해치는 것 같은 기사는 없는가         ② 정면으로 한국의 현 상태를 토론하는 책         ③ 과격한 문자로 자유 독립을 설하여 국권을 만회해야 함을 절언(切言)        하는 책         ④ 우어를 교묘히 베풀어 타국에 의뢰하는 것의 불가함을 풍자하는 책         ⑤ 일본 및 기타 외국과 관계 있는 사담(史談)을 과장해서 일본 및 기타         외국에 대한 적개심을 도발하는 책         ⑥ 비분한 문자로 최근의 국사를 서(敍)하면서 일한국교(日韓國交)를 저해하는 책         ⑦ 대언장어를 사용하여 막연히 오류된 애국심을 고취하는 책 高橋深吉, ꡔ朝鮮敎育史考ꡕ, 京城帝國 地方行政學會, 1927, pp.178~181. 일본은 이상과 같은 규제조치를 한일합병 이전부터 실시하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본의 한국통치는 한일합병 후부터 36년이 아니라 최소한 보호조약부터 따지면 40년이 넘는다. 그러나 일본이 아무리 물샐 틈 없는 규제를 하고 또 발매금지 압수라는 강압적 수단을 동원하였어도 교회계통의 사립학교에서의 민족운동을 정지시킬 수는 없었고, 더구나 친일적 교육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교회계통의 사립학교 학생들에게는 더욱 더 반일사상이 고조되었고 민족정신이 왕성하여졌다. 실제로 3․1운동이 일어나서 교회계통의 사립학교 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것을 목격한 일본경찰들과 군대는 체념 섞인 어조로 다음과 같이 당시의 형편을 그들의 상사에게 보고하였다. “학생 및 기독교인들과 같은 외래사상에 접촉한 자들은 그들의 머리 속에 독립사상이 너무 깊이 박혀 있으므로 평생 동안 그것을 빼어버릴 수는 없으며, 장차 이들을 동화시켜 선량한 신민으로 만드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朝鮮憲兵司令部, 大正八年 朝鮮騷擾事件狀況, p.259. 교육면에 있어서의 일본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일본은 한일합병 이후부터 본격적인 교육투자를 하기 시작하였다. 즉 왕성한 기독교 계통의 사립학교와 대항하고 경쟁할 수 있는 공립학교, 관립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시설과 선생의 질에 있어서 사립학교들을 넉넉히 능가할 수 있도록 국고 예산에서 계획적으로 학교를 세워갔고, 또 이들 학교의 졸업생들에게는 특권을 주어 관리의 길을 열어주며 빠른 진급도 보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일부 우수한 젊은이들도 그들의 앞길을 생각하여 이들 관 공립 학교를 지원하게 된 것이다. 이에 비하여 국가보조도 없고 선교부의 제한된 보조로 운영되는 교회계통의 사립학교에게는 국가의 강력한 후원을 받는 관 공립 학교의 출현이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사립학교 출신의 졸업생들에게 계획적인 차별 대우와 사회진출 기회를 방해했기 때문에 유능한 학생들을 관 공립 학교에 많이 빼앗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런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 하였다. 도대체 한국인의 교육을 일본인이 아닌 외국선교사들이 맡고 있다는데 그들의 근본적인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보다 더 강력한 나라인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손에 의하여 한국의 젊은이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것도 인도주의와 민주주의를 숭상하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손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과 상황 속에서 1915년에 전보다 더 강력하고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사립학교 규제법을 공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유명한 악법은 기독교 계통의 사립학교를 없애버리려는 근본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법은 한일합병 이후인 1911년에 발표한 교육법을 더 구체화하고 강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11년의 교육법에서는 한국에서의 일본의 교육의 목적을 분명히 제시해 주었다. 즉 한국에서의 일본의 교육목적은 일본제국의 교육칙어에 따라 한국인으로 하여금 일본제국의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민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분명한 규정을 내렸다. 이로부터 불과 4년 후에 발표된 1915년의 신교육법에는 두 가지 중요한 규제를 가하였는데, 실질적으로 교회학교들의 문을 닫아버리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 하나는 ‘사립학교는 정부가 제정한 교과과정을 따라야 하며 교사는 일본어를 잘 해야 하고 교사로서의 학문적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A. D. Clark, 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 C.L.S.K, 1971, p.191. 는 것이다. 이 조항은 학교에서 선교사들과 일본말을 모르는 한국인 교사를 추방하겠다는 의도인데, 물론 일본말을 공부하면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조항이 크게 문제되고 교회를 치명적으로 괴롭혔던 것이다. 학교에서 정규과목에 성경을 넣을 수 없고 또 예배를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상게서. 이에 대한 일본의 변명은 일본제국 헌법은 정치와 종교, 교육과 종교는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어떤 특정 종교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등록된 공 사립학교에서는 어떤 종교의 특정 경전이나 교리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며, 앞으로 10년의 유예기간을 줄 터이니 그 때까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은 일본어를 잘 할 줄 아는 자격을 갖춘 교원과 시설을 확보하고 교과목에서 성경을 빼라는 것이다. 1925년까지 이상의 두 가지 조항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 학교는 자동적으로 폐쇄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규정이 그대로 적용되면 우선 우리 공옥학교부터 당장 걸려들게 된다. 먼저 교장인 김원영 선생부터 일본말을 전혀 할 줄 모르고 기타 선생님들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옥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예배를 볼 수 없게 된다면 교회학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교활하기 짝이 없는 일본의 수법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이런 일본의 가증스러운 기독교 탄압정책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동일 보조를 취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사립학교 학생들의 욕구불만이고, 다른 하나는 선교사들간의 의견 차이였다. 첫째,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당국은 사립학교의 번창을 억제하기 위하여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졸업생들의 사회진출에 차이를 두었다. 예를 들어 공립학교 졸업생들은 하급학교의 교사로 취직할 때는 그 학교의 졸업장만 있으면 되었으나, 사립학교 졸업생이 소학교 선생으로 취직하려면 졸업장 이외에 총독부에서 주는 교원자격 취득시험을 따로 보고 자격증을 따야만 했다. “A Communication to His Excellency, Baron Saita, Governor-General of Chosen, from the 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 in Korea Review, February 1920, p.8. 앞으로 이 문서의 이름을 communication이라고 줄여서 쓴다. 이 문서는 1919년 3․1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또오 총독에 대해 개신교 선교사들이 교육과 선교사업에 대한 여러 규제를 철폐 해달라고 요구한 청원서이다. 이것은 그 한 예에 지나지 않고 기타 여러 가지 제한을 사립학교 졸업생들에게 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관 공립 학교에서는 각종 장학금과 여러 특권을 베풀면서 좋은 학생들을 끌어갔다. 따라서 이런데서 오는 불만으로 가득 찬 사립학교학생들은 불만을 해소해 주도록 자주 동맹 휴학에 들어갔던 것이다. 둘째로 선교사들 사이에 이 규제조항을 놓고 분열이 일어났다. 먼저 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부의 돈으로 경영하는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면 학교를 지속할 필요가 없다고 Clark, 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 p.194.   결론을 내려 장로교 계통의 많은 학교들을 전부 폐교할 것을 선교회에서 결정해 버린 것이다. 일본 당국이 용의주도하게 파놓았던 함정에 스스로 빠져들어간 것이다. 바로 일본이 그렇게도 원하던 기독교 학교의 자진 폐교를 이룩하게 되고 거기에서 공부하던 많은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이 일본인들이 가르치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아직 10년이라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좀 더 형세를 기다려 보자고 결의하였다. 상게서, p.195. 여기에 비하여 감리교 선교사들은 달리 생각하였다. 지금까지 기독교 정신과 분위기 속에서 공부한 학생들의 교육을 무신론자 또는 다신론자인 일본인의 손에 내어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과목이 정규과목에 포함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과외활동으로 성경공부와 예배활동은 계속할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무리한 요구이지만 차선의 선택으로 이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선교사들 사이에 의견이 달랐으나 1925년이 되기 전에 3․1운동이 터짐으로, 이 교육시책을 주도했던 하세가와 총독이 물러나고 새로 사이또오 총독이 부임했고 그로 인해 사태가 변하였다. 사이또오는 하세가와와는 달리 표면상 문화정책을 표방하였다. 그는 여전히 일본 군국주의자였고 한국에 대한 기본정책에 근본적 변화는 없었지만, 다만 부드럽게 한국을 통치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자주독립이란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임자와 같은 강압적 수법으로 한국민족을 계속 억누를 수도 없게 되어 선교사들에게 그들의 요구조건이 무엇인지를 통고해 주기를 바랬다. 이런 요청에 따라서 작성한 문서가 “Communication”으로 나타났고, 여기에 나타난 요구 조건이 후에 대부분 교육 행정에 반영되었다. 교육부문에 관한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우리 교회학교의 학과목에서 성서를 가르치는 일과 종교행사를 하는 것이 포함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기독교 학교의 목적은 자유로운 기독교 교육을 하는 것이다…. 2. 한국말 사용에 관한 제한은 철폐되어야 한다…. 3. 우리는 우리 학교의 운영에 있어서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며 불필요한 관권의 간섭으로부터 해방을 원한다…. 4. 선생과 학생에게 양심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 5. 한국인들에게도 일본인들을 위하여 마련된 교육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교과서의 선택에 많은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 상게서, pp.194~5.   그리고 한국역사와 세계사 연구에 대한 여러 제한들을 철폐해야 한다. 6. 사립학교 졸업생들도 같은 수준의 관 공립 학교 졸업생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7. 정부는 사립학교에 과도한 재정적 요구를 하지 말아야 한다. Communication in Korea Review, p.8.    이상에 나타난 요구조건만 보더라도 당시 일본이 교회가 경영하는 학교를 얼마나 지독하게 괴롭히고 간섭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3, 4, 6항은 설명이 필요하다. 3항은 사립학교 운영에 있어서 자유를 요구한 것인데 1915년 이후로 총독부는 사립학교에 대하여 선생들의 봉급액수까지 규제하였고 심지어 사소한 교과목 변동에 대하여서까지 규제하고 보고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학교는 총독부와 사전 의논 없이 선생을 채용하거나 해임할 수 없었다. 이 조항은 또한 총독부가 교회 경영의 사립학교에 학생을 보내는 학부형들에게 총독부의 압력을 가하는 것을 시정하라는 요구한 것을 보면 일본이 얼마나 악랄하게 교회를 핍박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음성적으로 학부형들로 하여금 교회계통의 학교에 그들의 자녀를 못 보내도록 한 것이다. 제4항은 총독부가 학생들에게 일본 황제의 사진 앞에 절을 하라고 강요한 것인데, 절을 하지 않은 학생을 불충한 무리로 규정해 버렸던 것이다. 학생들은 이것은 우상숭배라고 단정하였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학생들의 양심에 자유로이 맡기라는 것이었다. 제6항은 우리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조항으로 사립학교 졸업생들에게 가한 특권 제한을 철폐하라는 것인데 이런 제한을 가함으로써 우수한 학생들이 사립학교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사이또오 총독은 이런 선교사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는 대신 선교사들이 일본의 통치에 협조하도록 요구함으로써 1920년 3월 이후부터 사립학교의 숨통을 조이던 규제들을 풀어주었다. 당분간은 학교에서 성경도 가르치고 예배도 볼 수 있게 되었으나 시설확충은 계속 요구하였다. 따라서 우리 공옥학교도 시설확충을 위하여 어떤 수단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 박용래 목사의 취임과 공옥학교의 확충 전덕기 목사가 남겨놓은 유업은 남녀 공옥학교 뿐이었다. 당시 그렇게 유명했던 상동청년학원은 전 목사의 죽음으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또 이 학원을 인계 받아 계속 발전시킬 유지도 나타나지 아니 하였다. 교회도 전 목사의 죽음 이후부터는 전과 같이 우리 교회를 중심한 활발한 민족운동도 없었고, 또 민족운동가들도 모여들지 아니 하였다. 또한 전 목사의 신앙과 인품에 끌려 온 많은 교인들도 교회출석이 뜸해지면서 교회 출석률과 재적수도 줄게 되었다. 전 목사 뒤에 이익모, 홍순탁 목사가 파송받았고 그 뒤를 이어 제9대도 전 목사의 신학교 동창인 박용래  목사가 우리 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되어 왔다. 박 목사는 전 목사가 돌아가기 전 해인 1913년에 우리 교회의 부목으로 파송받아 전 목사가 병상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실질적으로 우리 교회를 치리하고 있었다. 이익모 목사는 1914년부터 1916년까지 2년간 전 목사의 죽음 이후 우리 교회에 담임목사로 파송받아 와서 사후 수습에 온 힘을 기울였다. 우선 낙심 중에 있는 교인들에게 신앙의 새 용기를 불어넣어야 했다. 동시에 전 목사의 유지를 이어받아 비록 상동청년학원은 운영할 수 없었으나 남녀 공옥학교는 계속할 수 있었고, 이 학교를 통한 청소년들의 신앙훈련과 민족 정신 앙양도 지속할 수 있었다. 이익모 목사의 후임으로 우리 교회에서 세 번씩이나 담임목사를 맡은 바 있는 홍순탁 목사가 부임했다. 홍 목사의 제1차 목회는 1916년부터 1918년의 2년간이었고, 1918년부터는 박용래 목사가 부임하여 그의 3년간의 목회가 시작된 것이다. 1914년~1922년까지의 年會派送記. 박 목사로서는 전 목사 사후의 교회수습이 그가 당면한 큰 문제였다. 우선 슬픔 중에 있는 교인들에게 신앙의 새 용기를 불어 넣어야만 했다. 슬픔을 넘어서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지도해야만 했다. 동시에 전 목사의 유지를 이어 받아 상동청년학원은 운영할 수 없었으나 남녀 공옥학교는 계속할 수 있었다. 전 목사가 돌아간 이후에도 공옥학교의 교장직은 담임목사가 겸직하였으나 담임목사가 자주 바뀌는 바람에 학교의 꾸준하고 계획적인 발전에도 지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빈번한 교장의 인사이동 가운데서도 공옥학교를 꾸준히 발전시킨 분은 누구보다도 우리 교회의 김원영(金源榮) 장로이다. 그는 일제의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과 해방 후의 혼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계속 교장직을 맡아서 학교를 이끌어 왔다. 김 장로는 전덕기 목사의 총애를 받았던 제자로서 장석영 목사 증언.  우리 교회 초기의 열심 있는 교우였던 김명철(金明哲) 씨의 아들이었다. 그의 숙부는 남감리교회의 초대 목사인 김흥순(金興順) 목사이고 그의 고모는 김커틀러 전도부인으로서, 우리 교회 초기에 전덕기 목사를 도와 주로 심방과 속회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분이었다. 그는 은퇴한 이후에도 계속 우리 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력이 닿는 한도 안에서 계속 교회봉사에 힘쓴 교회의 공로자의 한 분이다. 박승호 전도사의 증언.  이렇게 김 장로의 가문은 초기 한국감리교회에서 크게 활약했던 집안이다. 1888년에 출생한 그는 이런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5세 때 세례를 받고 19세가 되던 1907년에 전덕기 목사에 의하여 우리 교회에 입교하였다. 또한 전 목사가 교장으로 있던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여 전 목사의 영향하에서 공부하다가 1909년에 상동청년학원을 졸업하면서 곧 우리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는데, 이것이 공옥학교와의 오랜 관계의 시작이다. 전 목사가 돌아가신 후로는 1916년부터 공옥학교의 교감직을 맡으면서 공옥학교의 실질적인 행정책임자가 된다. 그러다가 1924년에 김원영 교감이 교장이 되면서부터 담임목사는 목회에만 전념하고 학교는 교장의 책임 하에 운영하도록하여 학교의 운영방법과 기구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교회와 학교를 완전히 분리한 것이다. 이 후로 공옥학교는 담임목사의 이동에 관계없이 꾸준히 발전하게 된다. 공옥학교는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19세기 말에 선교사들에 의하여 시작한 교회학교여서 처음에는 주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다. 이 학교가 어느 정도 현대적 시설과 프로그램을 가진 학교가 된 것은 1905년에 전 목사가 이 학교교장이 되면서 그가 유지들을 찾아다니면서 자금을 얻어 시설을 확장하고 다양한 교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이렇게 새롭게 다시 시작한 공옥학교는 1909년에 구한국 정부의 학부로부터 정식 학교인가를 받았고, 다음 해(1910년) 10월에는 전목사의 노력으로 교회 서쪽편에 3층벽돌교사를 완공 낙성하면서 급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공옥학교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유지 재단은 없었다. 전 목사 때는 그럭저럭 학교 유지에 어려움이 없었으나 전 목사 이후로는 경영난에 부딪치게 되어 학교사업을 지속하려면 이 문제에 대한 항구적인 어떤 해결책이 있어야만 했다. 즉 학교기본재산 형성이 시급했던 것이다. 이런 기본 문제의 영구적 해결에 눈을 돌린 박용래 목사는 우리 교회의 지역적 특성에 착안하기 시작하였다. 남대문 시장이라는 유리한 지세(地勢)를 이용해 보자는 것이었다. 즉 교회 앞에 있는 터에 가건물을 지어서 그것들을 상인들에게 임대함으로써 학교운영의 기본재산을 형성하자는 생각이었다. 직원회의 결의를 얻은 박 목사는 동분서주 건축기금 모금에 나섰다. 우선 땅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했다. 교회 앞, 도로 옆에 있는 땅은 아직도 선교부의 명의로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부를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공옥학교의 독립적 운영을 위하여서는 이 땅의 사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설명하여 드디어 선교부로부터 우리 교회와 선교부 사이에 이 땅에 대한‘무상 영구 대여’ 라는 계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김원영 교장 수첩. 이렇게 하여 우리 교회는 교회 앞의 비싼 땅을 무상으로 영원히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지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이제는 건축비만 마련하면 된다. 이 문제도 박 목사의 피나는 수고와 부지런함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학부형을 찾아다니며 또는 사회유지들에게 취지를 설명하면서 그들로부터 찬조금을 얻는데 성공하여 교회 앞의 큰 도로를 따라서 2층으로 된 벽돌 상가건물 다섯 동을 완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건물은 현재의 교회 건물을 짓기 전까지 존재했던 그 건물이다. 이 때에 든 건축비는 그 당시 돈으로 4,000원이나 되었다. Official Journal, 1921, p.122. 이 때가 1919년 3․1운동이 터진 이후의 일이다. 이리하여 공옥학교는 그 이후로 급속히 발전을 하게 되었고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에 대한 구실(시설미비)도 피할 수 있었다. 교원확보와 시설확장에도 힘을 기울일 수 있게 되어 물리, 화학의 실험기구 및 비싼 운동기구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게 되어 김 교장 수첩. 당시 국내의 사립학교 중에서 손꼽히는 학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재학생수만 해도 1925년에는 500여 명에 도달하였고, 여자 공옥학교는 150명에 이르렀다. ꡔ승리의 생활ꡕ, p.52. 특히 구기 종목에서의 학생들이 소질은 대단하였다. 상동청년학원 이후로 체육시간은 곧 군사훈련 시간이요 심신단련의 기회였다. 이 시간은 일제에 억눌린 몸과 마음이 운동을 통하여 그 억압된 감정이 해소되고 승화되는 시간이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시간이었고 더욱이 새로 구입한 운동기구를 사용하면서 운동을 하게 되어 학생들의 사기는 충전하였다. 체육 중에서도 모든 운동의 기초가 되는 육상경기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어 당시 보통학교 급에서는 전국대회를 휩쓸었다. 김 교장 수첩. 애국하는 교회가 이제는 동시에 운동도 잘하는 교회로 알려졌다. 수첩. 특히 한국의 초기 야구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오윤환, 나주화, 이명복 등은 모두 공옥학교 출신들로서 공옥학교 시절부터 그 소질을 잘 연마하였던 분들이다. 우리 교회의 배경렬 장로도 공옥학교 때 육상선수이며 후에 배재에 진학하여 그 소질을 더욱 발전시켜 럭비선수로 활약하며 유도 8단의 유단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공옥학교는 초기 우리 나라 체육 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와 아울러 소년합창과 아동극, 그리고 오늘날의 남자무용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학생무용 등도 공옥학교에서 특별활동으로 크게 장려하였다. 이런 활동이 교회의 특별한 절기인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 때에 일반에게 공개되며 또는 가을에 정기적으로 있는 학예회나 운동회의 중요하고도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공연되기도 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장안에 극장이나 기타 오락시설이 많지 않은 때에 이런 구경거리는 시민들의 주위를 끌며 그들의 찬사를 받기에 넉넉했던 것이다. 실제로 공옥학교 출신으로 해방 후까지 한국 연예계에서 크게 활동한 인사들 중 유명한 분들로 이예춘, 김동원, 이보라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일제 하에서 ꡔ벙어리 삼룡이ꡕ ꡔ물레방아ꡕ 기타 많은 작품을 내놓은 나도향도 그의 천재적인 문학적 소질은 이미 공옥학교 시절부터 개발되어 배재에 진학하여서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에 종사한 것이다. 특히 이 나씨 가족은 공옥가족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도향 6형제가 전부 공옥학교 출신이다. 큰 누님인 나정옥(羅貞玉)이 1905년에 공옥여학교를 졸업했고 이 책에 있는 사진 참조하라. 전덕기 목사와 같이 찍은 5명의 졸업생 중에 오른쪽으로 두 번째 여학생이 貞玉 양이다. 이 사진은 羅明植氏가 제공하다. 둘째 도향(稻香), 세째 조화(朝華), 네째 양신(良臣), 다섯째 명식(明植), 여섯째 영식(永植) 이상 여섯 동기가 전부 공옥출신인데 이 형제가 우리 공옥학교의 가족이 된 것은 전 목사와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했던 이들의 조부인 나병규(羅炳奎) 씨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羅明植씨의 증언. 이들 형제 뿐만 아니고 당시 민족운동에 종사하고 있던 가정에서나 반일사상이 강한 가문의 자제들은 대부분 우리 공옥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김종우 목사의 자제들인 김용우, 김은우 형제도 공옥학교의 출신들이다. 이런 많은 인물들을 길러낸 우리의 공옥학교가 없어진 것은 참으로 유감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나명식 씨를 중심한 공옥학교 동창회의 모임이 동심회(同心會)란 이름으로 아직도 모이고 있는데 20명 정도의 집회로서 옛날의 화려했던 공옥시절을 되새기면서 공옥학교의 재건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섬기며 전도하는 교회로서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있어서 공옥학교 운영이라는 어려움을 안고 있으면서도 개척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지금의 후암동은 지형은 좋으나 교회가 없어 이곳에 지교회를 세울 것을 결의하고 우선 후암동 개척교회를 위한 대지구입부터 나서게 되었다. 이 일은 순전히 전도를 위한 기금이기 때문에 교인들에게만 호소하여 헌금을 한 결과 드디어 1920년에 기금이 마련되었다. 이 해에 한옥이 있는 땅을 구입하여 Official Journal, 1921, p.122. 예배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후암교회의 시작이다. 이 때 후암교회의 예배는 선교사들과 순회 전도사가 있었는데 이들에 의하여 예배와 심방이 이루어졌다. 이 때 우리 교회에서는 손메례 전도부인이 전덕기 목사 사망 이후부터 파송되어 여러 담임 목사님을 도와 수고하였다. 손메례 전도 부인은 우리 교회에서 은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은퇴 후에도 우리 교회에 출석하면서 계속 교회에 봉사한 일꾼이었다. 그는 1914년부터 약 27년간 교회를 잘 섬기고 받든 분이다. 1915년 이후의 우리 교회는 주로 말씀의 선포와 성도의 교제에 힘을 썼고 민족운동과 교육사업은 공옥학교를 중심으로 계속 진행되었다. 따라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때 화려했던 우리 교회의 민족 운동은 교인들의 머리에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일제말기에 와서는 젊은 층에서 전덕기 목사의 기억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공옥학교를 통하여서 졸업생들에게 옛날 상동 교회의 민족운동과 전덕기 목사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민족정신이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때의 공옥 학교의 교훈은 우리 교회와 전덕기 목사의 정신을 그대로 표현한 적절한 교훈으로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 기본 정신은 계속하여 보존하여야 될 줄 안다. 가지자 바른 정신  힘쓰자 남을 위해  합치자 힘과 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