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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전덕기 목사의 순직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4,828


          제12장 전덕기 목사의 순직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직후인 1910년 말 선천(宣川)에서 안중근의 동생인 안명근(安明根)이 자기 형님의 원수를 갚는다고 데라우치 총독에 대한 암살을 계획하다가 미수에 그쳤다. 일본경찰은 이 사건도 독립운동가들이 계획한 사건이라 생각하면서 이번 기회에 모든 애국지사들을 검거할 것을 계획하였다.



1911년 1월부터 일본경찰은 김 구, 이승훈, 도인권에 ꡔ白凡逸志ꡕ, pp.176~8.  이어 계속하여 전국에서 이름 있는 애국지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2년까지 약 600명을 검거하여 모진 고문을 가하면서 허위자백을 강요하고 거짓증거를 만들어내어 이 중에서 백여 명을 기소하고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리고 조작한 증거로 105인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하여 형을 집행하였다. 이리하여 역사에서 이 사건을 105인 사건 또는 신민회 사건(거의가 신민회 회원들이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일본경찰은 평소에 상동교회를 민족운동가들의 소굴로 보고 있던 터이므로 전 목사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곧 전 목사를 체포하여 金厚卿, 申載洪 共著, ꡔ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ꡕ,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p.904.  그로부터 어떤 혐의나 이 암살사건에 관련된 증거를 얻어내기 위하여 보복적이며 발악적인 고문과 악형을 가하였다. 이 결과 전 목사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일본경찰은 아무리 악형을 가하여도 전 목사에게서 어떤 혐의나 증거를 찾을 수 없고 또 폐병과 늑막염 증세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할 수 없이 전 목사를 불기소 처분하고 석방하였다. 상게서,



그러나 이 때 일본경찰로부터 받은 야만적 악형이 전 목사의 건강에 치명상을 준 것이다. 비록 무혐의로 풀려나왔지만 석방 이후로는 목회가 불가능하여 1912년부터는 현 순(玄楯) 목사가 부목으로 파송을 받아 Official Journal, 1923, p.55.  우리 교회를 열심히 돕게 되는데, 이 두 민족 운동가가 이렇게 우리 교회에서 함께 일하다가 전 목사는 먼저 돌아가고 현 순 목사는 전 목사의 뜻을 받들어 3․1운동 때 맹활약을 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교회에서 일하거나 교회에 출입하던 사람들은 거의가 민족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덕기 목사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가 일경에게 매맞아 재기불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교우들은 더욱 열심을 내어 모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교회가 환란 속에 있으니까 전에 보지 못했던 열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 기도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어서 속히 전 목사의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강단에 서서 하나님 사랑과 민족 사랑을 들려 달라고, 이제 나라까지 잃었는데 전 목사까지 잃게 되면 그야말로 큰 일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교우들의 기도는 결사적이었다. 모이기에 더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이제는 전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할 수 없어도 전 목사가 목사관에 누워 계신 것만으로도 만족하게 생각하였고, 또 주일마다 목사관에 누워 있는 전 목사의 얼굴만 보아도 은혜가 되었다. 그의 생활이 곧 설교요 그의 설교가 곧 그의 생활이었기 때문에 설교가 따로 필요 없었다. 전 목사가 누워 있는 동안 교회 안에서는 기도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교인들의 발이 끊이지 아니 하였다. 이렇게 하여 비록 담임목사는 병상에 누워 있는 형편이었으나 교인들의 열심은 전 목사가 건강할 때보다 더하여 갔다. 이리하여 우리 교회는 이런 시련 속에서도 전국에서 최대의 교회로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즉 1910년 선교부 보고에 의하면 우리 교회는 전국적으로 가장 큰 교회가 되어 교인수가 1,739명에 이르렀다. Annual Report, 1910, p.192.  이 때 동대문 교회는 1,193명, 정동교회는 1,347명이었다. 그런데 전 목사가 목사관에 누워 계신 동안도 교세는 계속 상승하여 그가 돌아가기 전해인 1913년에는 교인수가 2,900여 명에 육박하여 여전히 전국에서 최대의 교회임을 자랑했다(이 때 정동교회는 2,700여 명) Official Journal, 1913, p.54.  . 아마 2천년 교회 역사에 있어서 병상에 누워서 이 같은 목회에 성공한 사람은 전덕기 목사 뿐이었을 것이다.



우리 교회는 전국에서 최대의 교회였을 뿐 아니라, 서울시내의 선교 전략적인 요충지에 지교회를 계속 세워주는 교회, 섬기며 봉사하는 교회의 이미지를 확립해 주었다. 전 목사가 돌아갈 때까지 우리 교회가 세운 지교회는 지금도 크게 성장하고 있는 자하문밖교회(세검정교회), 공덕동교회, 도화동교회(마포중앙교회), 청파교회 및 녹번현과 북장동교회이다.



한편 그는 병상에 있으면서도 목회의 한 부분인 민족운동도 등한시하지 아니 하였다. 그는 계속 신민회 동지들의 소식과 정보를 들으면서 신민회의 영수(領首)가 되어 이동녕과 같이 일경의 눈을 피해 가면서 국권회복에 심혈을 기울였다. ꡔ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ꡕ, p.904.  왜냐하면 이 때 김 구와 이승훈은 체포되어 석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에는 이 두 사람의 신민회 간부만 남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 목사의 병세는 시간이 흘러도 호전되지 아니 하였다. 교인들은 더욱 안타까워했다. 심한 매질과 고문으로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들의 목자를 볼 때 그 모습에서 옛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심한 매를 맞고 가지고 있었던 것을 다 빼앗기고 길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과 같이 된 한국민족을 보는 듯 하였다. 이 기막힌 현장을 보고 그들은 주먹으로 땅을 쳤다. 하나님은 너무나 무심하다는 것이다. 나라 사랑이 죄가 된다는 말인가. 이들은 하박국 선지자의 원망을 토로하였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 하시니 어느 때까지이니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구원치 아니 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나이다.”



그러나 전 목사는 위문 오는 교우들에게나 민족운동가들에게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하여 주었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결단코 버리시지 아니 하신다’며 병상에 찾아온 이들을 권면하고 교훈하였다. 이런 병상에서의 권면이 그들에게 더욱 큰 감명을 주기도 하였다. 승리의 생활, p.53.



결국 그는 병상에 누워서도 훌륭하게 애국운동과 목회를 소신껏 잘 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병상목회(病床牧會)와 민족운동도 1913년 여름에 들어오면서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늑막염이 심해지더니 옆구리에서 고름이 나오게 되었다. 수술까지 해 보았지만 웬일인지 병세는 악화되기만 했다. 해가 바뀌면서 1914년 1월부터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게 되었다. 어떤 때는 인사불성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상게서.



교우들은 철야기도를 하면서 전 목사의 병 낫기를 간구하였다. 옆구리에서는 진물 같은 것이 계속 흘러내렸다. 할 수 없이 버드나무 잎을 말아서 그 환부 구멍에 넣어 흘러내리는 진물을 빼어냈는데 이 일은 주로 둘째 아들인 순경(順敬) 군이 맡아서 했다. 子婦의 증언.



그 때마다 전 목사는 아파서 신음하였으나 그래도 십자가 상에서 예수가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흘리면서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당하신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잘 참았다. 과연 그의 민족운동은 이렇게 종교적 차원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 교회 교우들의 간곡한 기도와 간호에도 불구하고 전 목사의 병은 점점 악화일로에 있더니, 드디어 1914년 3월 28일, 그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임종은 가족들과 교인들이 지켜보았다. 그와 함께 일했던 독립운동가들은 거의가 해외로 망명했거나 감옥에 있었고, 그의 장남인 무술(武述) 군은 2년 전에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로 망명갈 때 데리고 가서 없었다. 그는 몽롱한 의식 가운데서도 주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주여 주여 이 죄인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한 후 “나는 천사로 더불어 돌아가노라” 승리의 생활, p.53.   라는 그의 마지막 신앙고백을 선언하였다. 그는 이렇게 독립운동가로 죽기 전에 기독교인으로 또 목사로 죽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참 애국자는 참 신앙가이어야 하는 것을 배웠다. 이 때 그의 나이 39세. 한참 일할 나이였다. 한국민족운동사에서 영원히 빛날 거성(巨星)은 이렇게 땅에 떨어졌다. 이 민족의 별 하나가 서울 상동에서 떨어지니 주위는 더욱 어두워졌다. 그가 죽으니 신민회도 죽었다. 영구히 죽었다. 다시 재생하지 못하였다. 우리 상동청년학원도 갔다. 당장 운영난에 허덕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학원도 영원히 재생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를 잃은 우리 교회도 그 충격이 컸다. 교인들이 줄기 시작했고 그 때 누리던 전국 최대의 교회의 영광도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가 죽으니 민족독립운동도 1919년까지 죽었다. 모든 것이 죽은 것 같았다.



교인들은 전 목사의 유해 곁에서라도 좀 더 머물러 있어 보려고 6일장을 계획하고 상동교회장으로 모셨다. 전 목사의 죽음의 소식이 삽시간에 서울 장안에 퍼졌다. 초상꾼들이 교회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관을 붙들고 대성통곡하였다. 우리를 두고 먼저 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누구를 믿고 살아가야 하느냐는 애절한 울부짖음이었다. 특히 생전에 전 목사의 신세를 많이 진 가난한 사람들은 달려와서 땅을 치며 통곡을 하였다. 심지어 남대문 일대의 거지 불량배들까지 와서 우리 선생님이 죽었다고 슬퍼하였다. 그의 상여행렬은 10리에 뻗었고 그 행렬 속에는 소복을 한 기생, 백정, 상두꾼들이 많이 끼어 장례광경을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



상동교회에서 전 목사의 절대적인 감화 아래 진사 벼슬을 버리고 우리 교회 목회를 돕고 있던 최성모에게 전 목사의 죽음이 그의 꿈에 전달되었다. 그 때 최성모 전도사는 전 목사의 뜻에 따라 지방에 나가서 순회전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그의 꿈에 전 목사가 굴건제복(屈巾祭服)을 입고 상동교회 앞에 나섰는데 그의 주위에는 많은 교인들이 둘러서 있었다. 깜짝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는 전 목사의 죽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날이 밝으니 전 목사의 죽음의 부음이 왔다는 것이다. ꡔ내가 본 人生 百景ꡕ, p.324.



최성모는 후에 전 목사의 정신을 이어 받아 목회와 민족운동을 함께 수행하여 3․1운동 때는 33인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투쟁하였고 석방된 후에는 계속 목회를 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는 한 때(1922년~1924년)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기도 하였다.



전 목사의 유해는 경기도 고향군 두모면(豆毛面) 수철리(水鐵里)에 모셨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20년 후인 1934년 경에 일본당국은 이 묘지의 이장을 명령하였다. 할 수 없이 차남인 전순경 씨가 그의 부친의 유해를 화장하여 그 재를 한강에 뿌렸다. 따라서 전 목사의 무덤은 이 세상에는 없다. 다만 그의 위패만이



지금 동작동 국립묘지에 김규식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쓸쓸히 있을 뿐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였으나 그 자신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멀리서 그 곳을 바라보고 죽었다. 전덕기 목사는 비록 해방된 조국땅을 밟아보지는 못하였으나 그 날이 올 것을 내다 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저 한강이 마르지 않는 한 그는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살아 있으며 날로 번영해 가는 조국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1922년 4월에 전 목사의 제자들인 공옥학교 동창회에서는 전 목사의 신앙과 그 덕을 추모하며 그가 이 민족에게 남긴 업적을 길이 기념하는 ‘故 牧師全公德基 紀念碑’ 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이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비문은 전 목사의 가장 가까운 제자이며 최성모, 이필주와 더불어 우리 교회의 삼총사의 한 분이었던 김진호 목사가 지었다. 그리고 이 비석이 바로 김 구 선생이 해방된 조국 땅에서 껴안고 울었던 그 비석이다.



神佑東方    畏心鐵血    黙悟天酌    敎育泰斗

公乃挻生    其身犧牲    牧半盡忠    宗敎棟樑



干干我民    居常痛懷    再臨何日    衆心感泣

何法拯救    臨命哀禱    復觀面目    以堅片石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도우시사

선생이 낳시었네



두려운 마음과 쇠같은 피

그 몸을 희생하시고



하늘이 내리신 뜻 묵묵히 깨닫고

충성으로 양떼를 먹이셨네



임께선, 교육에는 태두시며

교회에는 동량이시어라



오! 우리 우매한 백성을

어떻게 구원할꼬



평소에 아픔 속에 계시다가

하늘에 오르실 때 애도로 보내려니



재림이 어느 땔까

다시 그리운 님 뵈올 날이



여러 마음 느껴 울며

뜻 기려 돌에 세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