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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상동교회와 신민회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5,419
         제11장 상동교회와 신민회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신민회는 국내파의 민족독립운동 단체인 상동파를 중심으로 하여 1907년에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의 영도력을 받아들여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단체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이 신민회의 본부는 자연히 우리 상동교회가 되었고 李弼柱 牧師 略歷, 이 略歷은 李牧師의 長男 李東潤 氏가 작성한 것이다. 그 전에 있었던 중요한 민족운동도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계획되고 일어났기 때문에(을사보호조약 반대운동, 해아 밀사사건 등) 전덕기 목사가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민족운동의 중심지 구실을 하여왔다. 신민회가 언제 조직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안창호가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라면 분명히 1907년 이후가 된다. 이 신민회는 철저한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회원 자신도 두 명 이상은 서로 모르도록 되어 있었고, 따라서 회원 수도 정확하게 몇 명 정도였는지 알 수 없다. 박은식의 ꡔ獨立運動血史ꡕ에 보면 회원 수는 800여 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회의 조직은 치밀하고 정신이 확고하여 양기탁, 이 갑, 안태국, 전덕기, 최광옥 등이 모두 간부요인으로 발전에 힘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朴殷植, ꡔ韓國獨立運動之血史ꡕ 上, p.78. 이회영 약전의 저자는 신민회의 회원수를 더 줄여서 신민회라는 비밀 조직은 전덕기, 이동녕, 양기탁, 안창호, 김 구, 이 갑, 이 준, 이동휘, 김진호, 김 영, 이관직 씨 등과 조직하였는데 회원을 엄선한 결과 이상에 말한 인사들이 신민회 회원 전부라고 하였고 李恩淑, ꡔ民族運動家 아내의 手記ꡕ, p.155. 또한 운강(雲岡) 양기탁을 주필로 하는 당시 유일한 배일신문(背日新聞)인 ꡔ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ꡕ는 자연히 신민회의 기관지가 되고, 또한 우리 상동교회는 신민회의 본부처럼 되어서 항상 상동교회의 지하실에서 전덕기, 이회영, 이동녕, 양기탁 씨 등 4인이 조석으로 밀회를 거듭하였다고 한다. 상게서. 일본 경찰의 앞잡이들에게 탐지되어 경찰들이 문제의 이 지하실을 습격하면 다른 비밀문을 통하여서 독립운동가들이 도망치기 때문에 일본 경찰은 이 지하실을 강제로 폐쇄시켜 버렸다. 또 일본경찰들이 상동교회가 민족독립운동의 아성이라고 추궁하면서 민족운동가들이 모여드는 것을 금지하라고 경고를 받아도 그 때마다 항상 신앙토론을 위하여 가끔 모이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하기야 전덕기에게 있어서는 민족독립운동이 곧 그의 목회요 신앙생활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계획이 신앙토론의 제목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때마다 일본 통감부(후에 총독부)는 전 목사를 경찰서로 연행하면서 보복적인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는 내보내는 것이었다. 이런 고문의 되풀이로 전 목사의 건강이 점점 나빠져 간 것이다. 子婦의 증언.  자기가 친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음으로써 다른 친구들을 살리는 그런 대속적 고난을 감수했던 까닭으로 친구를 배신하거나 신민회의 비밀조직을 누설한 일이 없었다. 따라서 1905년 이후의 유일한 정치단체인 이 신민회 비밀조직은 1911년에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라는 조작된 사건을 연출할 때까지도 일본은 세계에 자랑하던 일본 경찰 정보망을 가지고도 이런 비밀조직이 있었던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신민회를 이런 비밀결사로 조직한 이유에 대하여서 안창호는 ꡔ예심조서(豫審調書)ꡕ에서 “당시 인민의 정도가 유치하여 이를 표면 단체로 하면 사회의 반감을 사서 방해를 받을 것이요. 또 입회 희망자를 전부 참가시키면 어떠한 인물이 섞일지도 모르고 따라서 동 회의 참 목적을 달성하기 불가능할지며, 또 동 회는 정치적이므로 대한민족의 자립 자존을 목적으로 함으로 통감부에 의해 해산을 당하여서는 안되겠는고로 실력이 생길 때까지는 비밀결사로 두는 것이 필요한 까닭이다” 주요한, ꡔ安島山傳ꡕ, pp.62~63. 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동지 중에서 혹시나 배신자나 밀고자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고, 만일 생길지도 모를 배신자에 대한 철저한 보안조치를 처음부터 취한 것이다. 또 신민회의 조직 목적으로 춘원 이광수는 다음 네 가지를 들고 있다. ①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할 것 ② 동지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국민운동의 역량을 축적할 것 ③ 교육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의 교육을 진행할 것 ④ 각종 상공업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을 증진할 것 이광수, ꡔ도산 안창호ꡕ. 안창호는 신민회의 목적을 대한민족의 자립 자존 정신을 보급시키는데 있다고 하였다. 주요한, ꡔ安島山傳ꡕ, p.62.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서 신민회는 한 마디로 우리의 국권회복을 목적한 비밀결사로서 무력투쟁의 방법보다 국민의 교육과 산업진흥에 역점을 둠으로써 점진적으로 국력을 양성하여 때가 이르면 축적된 우리 민족의 힘으로 이 땅에서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고 국권을 도로 찾자는 정치단체였다. 일찍이 전덕기 목사가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벌써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동일한 목적에 근거한 것이었다. 1908년에 와서야 안창호는 이런 신민회의 목적에 의하여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헌신할 인재를 양성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분투하였던 것이다. 신민회가 조직된 후에는 우리 교회의 상동청년학원과 남녀 공옥학교도 신민회의 교육기관이 되었는데, 우리 청년학원에는 주로 당시 민족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인사들의 아들들이 많이 몰려 왔다. 물론 그 당시 서울에는 중등교육기관으로 배재, 경신, 보성 등의 이름 있는 학교들이 있었으나 자기 아들이 후에 성장하여 민족운동을 계속해 주기를 바라는 가정에서는 전덕기 목사가 있는 상동청년학원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즉 상동청년학원은 하나의 중등교육기관이었다기보다는 순전히 애국자 양성소였던 것이다. 장석영 목사 증언.  따라서 당시 우리 교회의 주위에는 경향 각지의 애국지사들이 빈번히 찾아들고 주일에는 예배에 참석하곤 하였다. 1. 신민회의 조직 형태 그러면 이 신민회의 중앙조직은 어떻게 되어 있었던가? 이 극비의 중앙조직으로는 초창기에는 4명이 핵심을 이루었다. 중앙 총책에 양기탁, 총서기에 이동녕, 재무에 전덕기 목사, 또 신입회원의 가입을 다루는 집행원의 직책은 안창호가 맡았다. 주요한, ꡔ安島山傳ꡕ, p.63. 따라서 이 조직은 회장제도를 채택한 것이 아니라 집단 지도체제 형태를 취한 것 같다. 의결기관으로는 의사원(議事院)을 두어 각 도의 총감을 임명하고 도감 밑에 군감(郡監)을 두었다. 그러나 도감이나 군감은 수직적으로 알 수 있어도 군감 끼리 서로 알 수 없게 조직되었다. 즉 황해도의 도감과 그 도내의 군감은 서로 알 수 있어도 같은 도내의 군감 끼리는 알 수 없게 조직되었다. 따라서 서로 만나도 누가 누군지 모르기 마련이다. 이렇게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한 지방의 조직이 발각되어도 일망타진 되는 일은 없었다. 이런 철저한 비밀조직에다가 또 엄선된 회원들이 확고부동한 신념과 정열로 뭉친 민족독립운동가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그렇게 자랑하던 경찰 정보망으로도 이 조직을 적발할 수 없던 것이다. 이 때의 각 도의 책임자(道總監)인 서울(中央) 총감에 전덕기, 평북 총감에 이승훈, 평남 총감에 안창호, 황해 총감에 김 구, 함경도 및 그 이북(만주 포함)은 이동휘였다. 장석영, ꡔ승리의 비결ꡕ, p.51. 서울 이남은 그 세력이 약하였다고 한다. 우리 교회의 전덕기 목사는 이처럼 새로 조직된 유일한 비밀 독립운동단체의 중앙위원으로 또 서울의 총감과 이 조직의 재정까지 책임 맡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전국에서 제일 큰 우리 교회의 담임 목사의 직책까지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실제로 서너 사람의 몫을 하고 있었다. 전 목사가 이렇게 크고 중요한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밑에 유능한 젊은이들이 교회 안에 있어서 전 목사의 목회와 민족운동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 때에는 주로 다음의 세 사람이 전 목사를 도와 우리 교회에서 크게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이필주(李弼柱), 최성모(崔聖模), 김진호(金鎭浩)였다. 2. 삼총사 우리 교회의 삼총사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모두 전덕기 목사의 감화 밑에서 서로 출생 신분이 다르면서 우리 교회에 입교하여 모두 목사가 된 분들이고, 후에 3․1운동 계획과 그 참가에 앞장섰던 분들이다. 이 중에서 이필주 목사와 최성모 목사는 33인 민족대표로 서명하였고, 김진호 목사는 당시 배재학당 학생들의 동원책임을 맡아 맹활약을 하다가 체포되어 큰 옥고를 치루었던 분이다. 기독교미감리회, 조선연회회록 제12회, 1919, pp.69~70. 특히 우리는 여기서 이필주 목사와 우리 교회와의 관계를 언급하고자 한다. 이필주는 전덕기 보다 6년이나 연장이다. 1869년에 서울 회현동에서 유생(儒生) 이윤영(李允永) 씨와 모친 조씨(趙氏)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가 8세 되던 때부터 5년간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했고 18세 되던 해에는 부친이 돌아가셨다. 그 이후 장남인 그는 호주로서 가정수공업인 제사공장(製絲工場)을 경영하면서 모친을 모시고 어린 동생들(二弟一妹)을 거느리고 자수성가하였다. 그는 소년시절에 이렇게 고생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가 21세 되던 해(1890년)에 큰 뜻을 품고 구한국 정부의 군대에 입대하여 장교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그는 이 때 교도대장(敎導隊長)으로 있었는데 혁명이 일어나자 이의 평정에 출동하게 되었고 전주 완산 전투에 참전하여 이를 평정한 공로로 부교(副校)로 승진되었다. 이렇게 그의 실력이 상사들에게 높이 인정받아 후에 시위대장(侍衛隊長)의 자리까지 승진하게 되었다. 이필주 목사 악력. 그 후에도 이필주는 계속 군무에 종사하면서 일본군과 러시아 군대식 훈련을 받으면서 우리 나라의 현대식 군대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저 한 많은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35세, 이로부터 2년 후에 구한국 군대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 해산을 당하면서 17년간이나 몸담아 일했고 충성을 다한 병영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뼈에 사무친 일본에 대한 원한이 이 때 그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여서 이런 국가적 비운을 통하여서 그로 하여금 우리 교회에 들어오게 하였고 드디어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만일 이때 군대가 해산되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을 군인으로 마쳤을 것이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서러움이 어떠한가를 그는 누구보다도 이 때 뼈저리게 느꼈다. 보통,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 법이다. 나라 사랑은 나라 사랑을 부르고 또 그런 사랑의 소유자들은 함께 모이기 마련이었다. 나라를 잃은 데다가 군복까지 잃고 나날을 울분과 통분 속에 지내던 우국지사 이필주가 찾아 온 곳이 바로 전국에 독립운동 목사로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우리 교회와 전덕기 목사였다. 이필주 목사 약력. 이필주가 우리 교회에 출석하면서 전덕기 목사의 감화 하에 깊은 믿음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 교회와의 관계와 그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생애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결단이었다. 반드시 어떤 위험을 각오하여야만 했다. 이필주도 우리 교회에 출석하게 되니 곧 동리 사람들의 공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동네에 예수쟁이가 생겼으니 이 동네에 우환이 덮칠 것이라고 공격하였고, 결국 사람들의 무지와 오해로 그가 오랫동안 살았던 그의 동네에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의 믿음도 더욱 깊은 자리에 들어갔다. 그는 부지런히 교회에 출석하였고, 전 목사의 지시와 지도를 받으면서 그의 소질과 재질을 살려 나갔다. 그는 이 때 우리 교회의 평신도로서 여러 가지 교회사업과 교육계몽사업에 참가하였다. 우선 우리 교회에 입교하면서 전 목사는 그가 군인출신인 것을 알고 그를 우리 교회의 상동청년학원과 공옥학교의 체육교사직을 맡겨서 청소년 지도훈련에 헌신케 하였다. 이필주 목사 약력. 뿐만 아니라 전목사의 소개로 YMCA의 체육교사직도 맡게 되어 이상재와 이필주와의 교우관계도 이 때부터 시작됐다. 신민회가 조직되면서 이필주도 신민회에 가입하여 회원으로서 활약하게 되나 주로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일하게 된다. 이 때에 이필주는 전덕기 목사를 도와서 상동청년학원의 일을 맡아서 했다. 장석영 목사 증언. 그는 후에 전 목사의 뒤를 따르려고 목회전선에 나섰고, 1913년에 연회에서 새로 개척한 왕십리 교회로 파송받는데 이 때 왕십리는 서울에서 가장 우매하고 미신숭배가 심한 고장이었다. 그는 이런 곳에서도 열심히 목회하여 성공하였다. 1918년에 정동교회 손정도 목사의 후임으로 파송받게 된 것을 볼 때 그의 목회실력이 선교사들에게서 얼마나 높이 평가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한편 삼총사의 한 사람인 최성모도 서울태생으로 전 목사보다 2년 연상이다. 원래가 양반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에 응시, 급제하는 영광을 안았고 진사(進士)의 벼슬까지 하게 된다. 후에 그가 벼슬을 버리고 전 목사의 영향으로 입교하여 목사가 된 뒤에도 그 부인과 가족들은 그를 최 목사라고 부르기보다는 최 진사 양반이라고 계속 불렀다는 것이다. 崔錫柱 목사 증언. 최성모와 우리 교회와의 관계는 그의 부인과 전덕기 목사를 통하여 시작되었다. 최성모 목사의 부인 김씨는 일찍부터 우리 교회에 출석하여 열심히 그리스도를 섬겨 자기 이름까지도 김주신(金主信)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유교의 배경에서 훈련받고 자란 최 진사는 이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그의 외아들인 경환에 대하여는 “너의 어머니는 어리석은 아녀자이니까 교회에 나가나, 너는 사내 대장부이니 교회에 나가서는 아니 된다”고 엄히 경고하였다(이하는 최 목사의 손자인 崔明基 선생의 증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가정을 부인만 나오는 가정으로 그대로 두지는 아니하였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또 1907년에 이 준 열사의 헤아 밀사사건이 일어나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 당하게 되었다. 서울 장안이 이런 비통한 분위기에 싸여 있던 어느 날 최성모는 그의 가장 가까운 동갑친구인 이필주와 함께 우연히 상동교회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 이들의 눈에 상동교회 입구에 크게 걸려 있던 ‘시국 대강연회’라는 현판이 비쳤다. ‘시국 대강연회’, 참으로 시의적절한 모임이었다. 더욱이 교회가 이런 모임을 개최하는 것은 그들의 놀라움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두 사람은 우선 교회에 들어가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기로 하였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복을 입은 어떤 사람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연사가 유명한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전 목사의 설교는 이 때 이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 때부터 최성모의 마음속에서 심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최성모는 이 강연을 듣고 곧 집으로 돌아와서 그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당시 배재학당에 다니던 아들을 자기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가위와 종이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리고는 가위로 손수 그의 소중한 상투를 자르고 아들에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내가 그 동안 한학(漢學), 즉 구학(舊學)만 공부해서 깨우침이 늦었다. 내가 개화를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 날로 아들과 함께 상동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1908년에는 정식 입교를 함으로써 그와 우리 교회와의 오랜 관계가 시작되고, 목사로서 또 독립투사로서 그의 화려한 생애가 열리게 된 것이다. 한편 우리 교회의 삼총사의 한 사람인 김진호 목사와 우리 교회와의 관계도 전덕기 목사를 통하여 시작된다. 전 목사 보다 2년 위인 김진호는 1873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출생하고 고향에서 줄곧 한문공부를 하여 한학에 통달하고 있었다. 그가 27세 되던 1899년에 큰 뜻을 품고 서울에 와서 안국동에 있던 당시 세도가인 이용태 판서댁의 문객으로 있었다. 그러면서 말죽거리와 남대문 밖에서 훈장일을 보았다. 그러던 중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민영환이 이에 분개하여 자결하였다. 전국이 온통 분노와 비통에 잠긴 때였다. 이런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김진호는 상동교회를 찾아가서 그 교회의 유명한 모 장로를 만나서 그에게 민영환의 자살에 대하여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당돌하게 물었다. 이 때 그 장로는 그에게 민영환은 애국자라고 칭찬하기는커녕 오히려 나쁜 사람이라고 정죄하였다. 하나님이 준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끊었기 때문에 이미 죄인이라는 것이다. 화가 난 김진호는 이번에는 다음 주일에 당시 이미 애국자요 목사로 이름이 나있던 전덕기를 상동교회로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상동교회의 그 장로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랬더니 전덕기는 그에게 “그 장로의 말이 옳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민영환의 죽음에 한하여 만은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이상은 金鎭浩 牧師의 三男인 金喜永 氏의 증언이다).” 이 말에 김진호는 크게 감명을 받았고 그 날로 그는 전덕기를 따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과연 소문에 듣던 대로의 전덕기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곧 그 해 성탄절에 상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전덕기 및 우리 교회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후로 그는 1909년 9월부터는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11년 1월부터는 우리 교회의 속장으로 그리고 12월부터는 권사로 시무하면서 이필주, 최성모와 더불어 전덕기 목사의 오른 팔이 되어 활약하게 된다. 전 목사는 최 진사에게 우리 교회의 기도회 인도, 교회와 청년학원 및 공옥학교의 대외교섭 문제를, 김진호에게는 교인가정 심방과 우리 교회 청년회의 지도를 맡겼다. 장석영 목사 증언. 전덕기 목사가 우리 상동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며 동시에 그가 우리 교회로 하여금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게 한 뒤에는 이런 우리 교회 삼총사의 숨은 공로가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결국 이들과 전 목사의 협동 목회시대였다고 보여진다. 이 삼총사는 후에 전부 목사가 되어 목회의 일선에 나서서 목회와 민족운동을 하나로 연결시키면서 활약했던 바, 우리 교회의 자랑할 만한 인물들이다. 3. 신민회의 지도노선 신민회의 지도노선은 대체로 두 노선이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군인 출신인 이동휘, 이 갑, 노백린 등을 중심한 과격파이고, 하나는 전덕기, 안창호 등을 중심한 온건파라고 볼 수 있다. 과격파들은 ‘국가의 존망이 목전에 달린 이 때에 국력, 민력의 배양을 말하는 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을 기다리는 것’ 이광수, ꡔ도산 안창호ꡕ, p.19. 이라고 주장하면서 당장에 일본과 싸워서 정권을 손에 넣어 모든 정치를 혁신하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서 즉각 국가의 독립을 성취하자는 것이며, 앞뒤를 가릴 것 없이 당장 싸우다가 죽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온건파들은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반대투쟁에서 본 바와 같이 도끼를 메고 상소하거나 의병을 일으켜 무력투쟁을 해보거나 자살을 함으로써 항거해 보았으나 무참히 진압 당하고 그들은 눈썹하나 까딱 아니 하지 않던가. 그러므로 아무 준비 없이 또 아무 힘없이 일본과 지금 당장 결판을 낸다는 것은 민족의 자살행위라고 역설하였다. 결국 신민회의 지도노선은 이런 경험을 통해 얻은 온건파의 지도노선이 주도하게 되었다. 따라서 좀 더딘 것 같으나 교육을 통한 국력배양에 전념하게 되고 안창호는 이 지도노선에 따라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 목사는 신민회가 조직되기 전부터 상동청년학원, 남여 공옥학교를 통하여 민족운동을 위한 인재양성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신민회가 조직된 후부터는 우리 교회건물도 그리고 학교들도 신민회의 프로그램으로 사용되거나 그 집행기관이 되었다. 이런 신민회의 지도노선에 따라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가 탄생했다. 서울에 있는 YMCA는 선교사들과 함께 설립된 청년운동단체이고 민족독립운동을 목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 조직된 이 청년학우회는 신민회의 산하단체로 탄생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신민회는 철저한 비밀조직이었으므로 표면에 나타나서 신민회의 지도노선을 대외적으로 선포하고 가르칠 단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요청에 따라 이 청년학우회가 공개적인 단체로서 청년학생들을 상대로 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앞으로 구국운동에 몸 바칠 정신과 소질을 길러주기 위해 결성된 것이다. 이런 취지에 따라 이 학우회의 창설자도 개방적으로 구성되었다. 즉 신민회의 회원이건 아니건 간에 당시 학교의 교장 또는 교사의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1909년 8월 17일자에 보면 攻玉學校長 全德基를 비롯하여 韓英書院長 尹致昊, 그리고 崔南善, 張應雲, 崔光玉, 車利錫, 安泰國, 蔡弼根, 李承薰, 李東寧, 金道熙, 朴重華 諸氏였다. 이렇게 조직된 청년학우회의 목적은 학생들의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생활의 훈련에 힘쓰며, 동시에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이나 전문학술을 반드시 학습하여 직업인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하며, 매일 덕․체․지육에 관한 수양행사를 한 가지씩 행하여 자기 수련에 힘쓰도록 하였다. 주요한, ꡔ安島山傳ꡕ. 이 청년학우회는 서울 분회를 비롯하여 개성, 안악, 평양, 선천, 곽산, 용천, 의주 등에 분회를 두고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 학우회 중앙위원장에는 윤치호, 중앙 총무에는 최남선이 수고하였으나, 1911년에 신민회 간부들이 체포됨으로써 자연히 해산되었다. 활발한 민족운동을 벌이고 있던 신민회에도 서서히 비운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1909년 10월에 안중근(安重根)이 하루빈 역에서 보호조약의 장본인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한 것이다. 일본정부는 이 암살은 안중근의 단독범행은 아니라고 단정하였다. 분명히 그의 배후에는 국내에 어떤 비밀조직이 있어서 이 조직이 안중근에게 이러한 범행을 저지르게 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그들의 일방적인 결론에 따라 서울에 있는 통감부는 곧 행동을 개시하였다. 우선 독립운동가로 지목된 자는 무조건 체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리하여 과격파인 이동휘와 이 갑이 체포되어, 전자는 서울의 경무총감부(警務總監府)에 후자는 개성 헌병대에 구금되고, 안창호는 평양 대성학교에서 체포되어 용산헌병대에 수감되었다. 안창호는 사태의 심각성을 예감하였는지 체포되기 전날에 자기 숙소에서 신민회에 관련된 문서 뭉치를 불살라 버렸다. 상게서, p.93. 덕분에 다른 동지들에 대한 일제 검거는 없었다. 아직까지도 이들은 신민회의 조직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동휘가 일본헌병들에게 체포되어 그들을 쏘아 보면서 “너희 일본이 같은 동양인으로서 한국에서 이렇게 불법 무도를 행하니 너희들이 서양인에게 채찍을 맞아 그 자리에서 구더기를 파내는 꼴을 내 눈으로 보리라”고 호통을 친 유명한 일화가 바로 이 때에 나왔다. 상게서.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큰 채찍을 맞아서 그 상처가 아직도 낫지 않고 있다. 이들은 약 1개월 반 동안 취조를 받았으나 안중근과 공모하였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어서 1909년 12월에 전부 석방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기회에 안창호를 비롯한 국내 유명지사들로 구성된 그들의 괴뢰내각을 수립하여 그들의 합병 정책에 이용해 보려던 소위 안창호 내각공작을 시도하면서 민족운동가들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상게서, pp.94~95. 여기에 대하여 과격파들은 한 번 해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안창호가 이 제의를 거절하였다. 십중팔구 그들의 이용물이 된다는 판단에서 였다. 옳은 판단이었다. 4. 간부들의 망명 계획 그러나 국내에 있으면서 일제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반일분자의 낙인이 찍혀 탄압을 받게 되는 형편이 되었다. 이리하여 이 문제를 놓고 신민회는 간부회의를 열고 장시간 토의한 끝에 서로 흩어져서 투쟁하기로 결의하게 된다. 즉 망명할 사람은 해외로 나가서 계속 투쟁하고, 국내에서 투쟁할 사람은 남아서 투쟁한다는 중대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사건은 신민회에 이런 중대한 투쟁방법상 변동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다음과 같은 부서분담과 지역분담 결정을 내리고 훗날을 기약하면서 서로가 눈물의 석별의 정을 나누게 되는데 이 이별이 해외의 민족독립투사들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전덕기도 몰랐다. 동지들의 망명을 앞두고 결정된 지역분담은 국내에 네 명의 책임자가 남고 나머지는 망명하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호랑이 굴에 남아있을 동지는 서울에 전덕기, 황해도에 김 구, 평남에 안태국, 평북에 이승훈. 이렇게 네 사람이 국내 운동을 분담하게 되고, 북경에서는 조성환(曺成煥), 신채호(申采浩)가 가서 활동하고, 서간도(만주)에는 최석하, 이회영, 이시영, 북간도에는 이동휘, 연해주(沿海州, 露領)에는 이동녕, 미국에는 안창호, 이 갑이 자리를 잡고 독립운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주요한, 安島山傳, p.96. 이런 계획에 따라 먼저 안창호, 신채호 등이 한일합병이 이루어지기 직전인 1910년 4월 7일에 탈출, 망명의 길에 올랐고 이에 앞서 2월에는 이 갑, 이종호, 이종만 등이 만주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 이후로 다른 동지들도 거의 계획대로 망명의 길에 올라 각자의 자리를 잡은 다음부터 국내조직책들에게 비밀리에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그 치욕의 한일합병이 일본의 각본대로 이루어지고 또 일본의 우리 민족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착취, 우리 민족문화의 말살에 광분하게 되니 신민회의 마지막 날도 서서히 다가오고, 전덕기 목사의 순직도 한 걸음씩 가까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