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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상동청년학원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6,204


          제10장 상동청년학원



          상동청년학원은 전덕기에 의하여 시작된 중등교육기관이다. 우리 교회가 초창기에 경영한 교육기관으로 세 학교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한말시대(韓末時代)와 일제의 통치시기에 우리 민족에게 민족 독립정신과 신지식을 이 땅에 보급하는데 실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세 교육기관을 설립된 순서대로 쓰면 ①공옥여학교(攻玉女學校) ②공옥학교 ③상동청년학원이다. 이들 학교 이외에도 야간 국어학교가 있었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공옥여학교와 공옥학교는 초등교육기관이고 상동청년학원은 중등교육을 하였는데, 특히 상동청년학원은 민족운동 과정에서 큰 명성을 떨쳤다.

공옥여학교는 남학교보다 2년 먼저 스크랜톤 목사의 어머니인 스크랜톤 대부인에 의하여 1897년에 설립되었고, 초창기에는 해리스(Miss Harris) 양에 의하여 주로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는 기관이었다. ꡔ승리의 생활ꡕ, p.52, Annual Report, 1897, p.241.    이 여학교도 전덕기의 노력에 의하여 그의 목회 때부터 활기를 띠게 되어 전덕기와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새 교사도 짓고 계속 발전하였다. 1925년 경에는 재적 학생수가 150명에 이르렀다. ꡔ승리의 생활ꡕ, p.52.



공옥학교는 남자학교로서 여학교보다 2년 늦게 1899년 벡(S. A. Beck)  선교사가 그의 큰아들의 죽음을 기념하여 상동교회 내에 세운 학교였다. 그 후 전덕기가 이 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이 학교를 민족운동의 중심으로 만들었고 학생들에게 다양한 교과목을 통하여 민족독립사상을 집중적으로 고취시킨 것이다. 그 후 이런 학교의 소식과 명성이 전국에 널리 알려져 학생들이 계속 밀려와서 교실이 협소하게 되었다. 따라서 학교 확장을 위하여 전 목사가 선교부와 사회 저명인사들에게 모금을 요청하여 천여 원을 확보하였다. 이 돈으로 전 목사는 1910년에 우리 교회 서쪽 편에 3층 서양식으로 도합 60여 간의 아담한 교사를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꾸준히 발전한 공옥학교는 1925년에는 재학생이 500여 명이나 되어 Ibid.  사립학교로서 전국에서 손꼽는 학교가 되었다. 그 후 공옥학교는 계속하여 각 방면에서 유능한 민족지도자들을 길러 냈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의 교육진흥과 인재양성에 많은 공을 세운 이 공옥학교가 1950년의 9․28 수복시 폭격으로 전파되어 없어지게 된 일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번째로 세워진 상동청년학원은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진 학교가 아니라 전덕기 목사가 어떤 뜻을 가지고 세운 학교이다. 이 상동청년학원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유명한 학교로서, 한국민족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기관이었다.



이 청년학원은 1904년 10월에 미국에 있는 교포청년 강천명(姜天命)이라는 분이 전덕기에게 금 5원을 보내면서 이 돈을 교육사업을 위하여 써달라고 부탁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崔錫柱, ꡔ내가 본 人生百景ꡕ, 大韓基督敎書會, 1974, p.262.   그러나 노불 선교사의 부인에 의하면 이 청년학원은 1905년에 전덕기가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을사보호조약 무효를 위한 상소운동을 하다가 스크랜톤 감리사에 의하여 엡웟 청년회가 해산되니까 그 대신으로 전덕기의 손에 의하여 세워진 학교라고 말하고 있다. ꡔ승리의 생활ꡕ, p.51. 



1904년에 미국에서 보내 온 그 돈으로 학교, 특히 중등학교를 시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의 생활비도 털어서 학교운영비에 넣었고 그래도 부족하여 사회유지들을 찾아다니며 모금을 하여서 이 학원을 설립하였다고 하니, 청년학원은 전덕기에 의하여 1904년을 전후해서 개교된 것 같다. 따라서 상동청년학원은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보다 먼저 설립된 학교였다.

전덕기는 이 학원을 통하여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할 인재양성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정신 앙양을 목적으로 다양한 교과목을 편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유명했던 인사들과 독립지사들을 강사, 교사로 또는 특별강사로 초빙함으로써 이 청년학원을 명실공히 한국의 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면 당시 유명했던 이 청년학원의 교육프로그램은 어떤 것이었는가, 또 어떤 인사들이 가르쳤는가를 알아보자. 청년학원의 학생들은 중등교육기관이었으므로 공옥학교 학생들보다는 크고 또 성숙하였다. 따라서 공옥학교의 교과목보다 더 화려하고 다채로웠다. 그 교과목과 활동은 대략 다음과 같은 대여섯 가지 분야의 활동이었다.



1. 한글 보급운동



우리 교회를 중심한 민족운동 중에 이 국학운동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운동의 하나이고 또 특이할 만한 사건이었다.

한 민족의 기본 구성요소의 하나가 그 민족의 언어와 글인 만큼 우리말과 한글이 없는 한국민족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와 우리 민족을 다스리고 일본민족과 동화시키려고 시도하던 때에, 특히 한국민족의 문화전통을 말살하고 그 대신 일본의 문화와 일본어를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강요하던 때에 우리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발전, 보존시킨 일이야말로 우리의 민족 운동사에 영원히 빛날 공헌이었음은 아무도 부인 못할 것이다.

이런 큰 민족적 사명을 유독 상동교회와 그 청년학원을 통하여 수행하게 된 것은 주시경(周時經) 선생이 우리 교회 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시경이 왜 이런 일을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하였을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한글 체계화의 개척자요 대가인 주시경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대답을 하였다. ꡔ周時經傳ꡕ, p.91.



① 상동교회 담임목사인 전덕기와 주시경 선생과는 아주 친밀한 사이라는 점이다. 주시경은 일찍이 전 목사의 신앙과 인격적 감화를 받아서 그와 온 가족들이 우리 교회에 출석함으로써 이들은 아주 친한 사이였다. 따라서 주시경이 하는 일이라면 전 목사는 무조건 도와주고 뒷받침하여 주었다. 주시경은 전 목사보다는 한 살 아래였으나 이들은 너무 친하여 그런지 이들의 죽음도 같은 해(1914년)에 맞았다. 전 목사가 돌아가신 지 넉달 후에 주 선생도 돌아가신 것이다.



② 주시경 자신이 상동교회 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전 목사와 허물없이 지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교인들과도 가까이 지내왔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그의 생활권의 한 부분이었다. 따라서 우리 상동교회가 그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또한 그의 짧은 생애(38세)에서 그의 상동시대가 그의 국어운동의 일대 황금기였다. 이 시절은 그가 국어학을 대중에게 보급하면서 동시에 한글을 과학화하던 시대 상게서, p.162.

였기 때문에 우리 상동청년학원이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인물이요 또한 업적이다.



③ 당시 국어운동에 이해심이 있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층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한글은 여전히 여자들이나 쓰고 읽는 글로 생각하던 때요 한문만이 학문하는 사람들과 지식인들의 글이라고 생각하던 때에 교회가 앞장서서 우리말을 찾고 연구하고 또 읽고 쓰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기독교의 정경(正經)인 성서를 한문이 아닌 한글로 번역하고 읽고 썼기 때문에 주시경은 그의 동지나 친구들을 교회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주시경은 상동청년학원에서 국어를 담당하여 가르치는 한편, 여름방학이 되면 그의 강의를 공개하여 청년학원에서 국어강습회를 열곤 하였다. 그의 강연은 대인기였다. 주시경의 국어강의가 있다는 광고가 나면 그의 강의를 들으려고 청강생들이 사방에서 몰려와서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이 보통이였다. 한 예를 들면, 1907년 7월 여름방학에 상동청년학원이 주 선생님을 모시고 교사들을 위한 국어강습회를 열었다. 이 강습회에서 주 선생은 주로 국어문법을 교수하였다. 그 강의의 내용을 보면 ①음학(音學) ②자분학(字分學) ③격분학(格分學) ④도해학(圖解學) ⑤변성학(變性學) ⑥실용연습(實用演習) 이상의 여섯과를 교수하였다.



이 여름 강습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더욱 힘을 얻은 주시경과 전 목사는 그 후부터는 매 여름방학마다 교사들을 위한 여름 강습회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매 일요일마다 주일예배 후 오후 두 시에 정기적으로 우리 교회 내에서 국어문법 강습회를 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국어의 중요성과 그 과학성을 강조하면서 국어보급에 힘썼다.

또한 1907년 11월부터는 상동청년학원 안에 국어 야학과를 설치하여 피곤을 무릅쓰고 매일 밤 청년들에게 국어문법을 강의하였는데, 이 야간 강의는 1909년 12월까지 무려 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상게서, p.89.  여름방학 동안의 교사들을 위한 국어강습회는 그 후에도 계속되어 1908년에도 상동청년학원에서 개최되어 대성황 속에 끝났다. 주시경이 1908년 11월에 출판한 ꡔ국어음전 문학ꡕ 끝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隆熙二年七月  日(1908年)

大韓 京城 尙洞 第二回 國語講習所 講師 周時經



우리 교회에서의 주시경 선생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그의 주위에 많은 열성 있고 우수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열을 올리게 했고 또 많은 제자들이 그를 사사(師事)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후에 국어발전에 크게 공헌한 김윤경(金允經)을 들 수 있다.



2. 국사 강의

이 강의도 국어 강의 못지 않은 중요한 과목이었다. 일본이 한국역사를 본격적으로 왜곡하여 그들의 식민지식 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한 식민지사관(植民地史觀)을 수립하고 있던 때였던 만큼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우리 나라의 역사의 이해와 여기에서 얻어지는 우리의 문화전통과 고유의 유산을 발견하고 이를 유지 보전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민족의 얼과 전통을 모르는 민족운동이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강의에도 상동청년학원은 훌륭한 강사들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이 방면의 두 전문가를 모시고 강의를 듣게 되니 이 역사 강의도 대인기였다. 장도빈(張道斌) 선생은 ꡔ발해조선사(渤海朝鮮史)ꡕ를 저술한 분이었는데 장 선생이 직접 발해조선사를 강의하였다. 이 강의는 아주 인상적이고 충격적이였다고 한다. 張錫英 牧師의 증언, 張목사는 이 강의를 직접 들은 분이다.

그리고 육당 최남선(崔南善)은 국사를 맡았는데 육당의 강의는 원래가 유창하고 풍부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는 것이 그 특색이었다고 한다. 張錫英, ꡔ승리의 비결ꡕ, 益文社, 1976, p.36.



특히 육당 최남선은 전덕기 목사의 감화를 크게 받은 분으로서 그가 3․1운동의 독립선언문을 쓸 때의 기본정신은 기독교 정신이었다는 것이다. 그 기독교 정신을 누구에게서 받았느냐의 질문에 대하여 최남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승훈(李昇薰) 씨와의 오래 전부터 가까이 지내는 터로 내가 존경하는 어른이요, 안창호(安昌浩) 씨와는 더욱 그래서 내가 한 때 그의 비서가 되어도 좋겠다는 심정을 가진 때도 있었지요. 하나 그들은 순수한 기독교 신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순 기독교 신자 인물로는 전덕기(全德基)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당시 상동교회의 목사로서 열렬한 신앙가요 동시에 애국자였습니다. 나에게는 그의 감화가 제일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동교회 뒷방에는 전덕기 목사를 중심하여 이회택(李會澤), 이상설(李相卨), 이 준(李 儁) 씨 등 지사들이 수시로 모여와 국사를 모책했는데, 나는 그들만큼은 많이 끼이지 않았으나 늘 그 패에 끼인 일이 있습니다. 진실로 상동교회 뒷방은 이 준 열사의 헤이그 밀사사건의 온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전덕기 목사의 감화가 큽니다.” 한국기독교청년운동사, p.244, 인간 신흥우, p.154.





전덕기 목사의 감화력과 그 행동 범위는 이렇게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3․1운동의 기본정신도 전덕기 목사의 영향을 받았고 또 33인 민족대표 중의 16명의 기독교 대표들도 대부분이 전덕기 목사의 명성과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3. 영․한문 교육



상동청년학원은 이렇게 우리의 것만을 가르치지는 아니 하였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남의 것도 과감히 배웠다. 영어도 가르쳤고, 또 동양문화와 고전과 고전의 매개체인 한문도 가르쳤다. 이렇게 보면 상동청년학원은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확실히 우리의 것을 지킬 줄 알면서도 동시에 남의 좋은 것을 과감히 받아들이려는 그 열린 마음의 자세가 대단히 중요했고 또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 때에는 영어와 영문법은 남궁 억(南宮 檍)이 가르쳤는데 그는 한 때 상동청년학원의 원장직까지 맡았고 &#43092;내가 본 人生百景&#43093;, p.73.    또한 저 유명한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작사한 애국자요 신앙가이기도 했다.  또한 한 때 전덕기 목사 밑에서 우리 교회의 부목으로 있었던 현순 목사도 영어를 가르쳤는데, 장석영 목사 증언.  그의 영어는 유창하여서 감리교 연회가 열리면 통역과 통역 설교는 그가 거의 도맡았다. 장석영 목사 증언.  그리고 한문은 전 목사와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계속 함께 민족운동을 했던 조성환(曺成煥)이 맡았다. 장석영 목사 증언.  이 조성환 씨도 상동을 중심으로 후에 전 목사와 함께 신민회 조직에 가담하고 민족운동을 하다가 신민회 해체 후에는 만주 중국 등지에서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이시다.



4. 체육(군사훈련)

민족운동가는 무엇보다도 건강해야만 했다. 육체의 연단과 훈련이 필수적이었다. 상동청년학원이 민족운동가를 양성하는데, 이것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이 육체의 훈련과 단련은 물론 훗날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동지의식과 정신통일을 고취하는 계기도 되었다. 따라서 체육시간은 인기 있는 시간이어서 상동교회의 뒷뜰에서 도수체조 및 구기(球技)운동, 즉 축구, 야구, 농구 등을 가르쳤는데, 이 과목은 군인 출신인 이필주(李弼柱)가 맡았다. 李弼柱 목사 약력.

그는 1907년에 구한국 군대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 해산 당할 때 전덕기 목사에 관한 소문을 듣고 상동교회에 출석하고, 이 후로 전 목사의 설교에 감화가 되어 우리 상동교회에 입교하였다. 후에 목회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정동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을 때 3&#8228;1운동 33인 민족대표 중 감리교를 대표하여 서명하고 투쟁한 분이다. 전덕기 목사의 영향은 이렇게 3&#8228;1운동에까지 뻗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때로는 체육시간에 학생들에게 군복 같은 정복을 입히고 나무로 만든 총을 메게 하고 북을 치고 군가를 부르면서 보조를 맞추어 행군하는 훈련도 시켰다. 이 때 부른 군가 중의 하나가 다음과 같은 가사였다.



무쇠 골격 돌근육 소년 남자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 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

만인 대적 연습하여

후일 전공 세우세

절세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 아닌가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이런 훈련 광경은 당시 구경거리에 궁한 시민들에게 하나의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젊은이들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서울 시민들에게 과시한 시위행위이기도 했다. 학생들 뿐만 아니라 전덕기 목사 주위에 모여들었던 애국지사들도 이 젊은 학생들과 어울려 공도 차고 씨름도 하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려서 뛰었던 일은 하나의 아름다운 정경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군인출신인 과격파의 민족독립지사 이 갑(李 甲)과 온건파인 안창호가 상동교회 뜰에서 둘이 서로 달라붙어 민족운동 모의를 하는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 씨름을 한 것이 이 때의 일이다. 30대의 이들 독립운동가들의 이런 기개(氣慨)는 주위에서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그들의 후배들에게 무한한 감명과 용기를 주었다. 이 명승부에서는 안창호가 이겼었다. 장석영 목사 증언.

후에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우고 본격적인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해 낸 독립투사들도 거의가 전덕기와 관련을 맺거나 또는 신민회에서 활동했던 지사들이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5. 신문화 수용과 전파



여기서 말하는 새 문화는 주로 서양문화를 말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을 통하여 음악 성극 등이 먼저 교회에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추수감사절 때에 교회에서 열리는 특별 음악회나 성극이 한국에서의 신문화의 수용과 전파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문화예술 활동이 이렇게 우선 교회에서 보급되다가 후에 일반사회에까지 전파되게 되는데, 이런 예술활동은 초창기에는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교회청년들에게 보급 훈련되고, 다음에 교회 안에서 소질이 있고 훈련된 젊은이들이 일반사회에 나가서 보급시킨 것이다. 음악은 주로 상동청년학원의 음악시간에 보급되었으나, 연극은 교회의 특별한 절기 때에 공연하기 위하여 마련되었고 후에 이런 연극공연이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서 연극은 과외활동으로 계속 연습되고 공연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후에 공옥학교 출신 중에 유명한 연예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 김동원(金東園), 이예춘(李藝春), 이보라(李保羅) 제씨를 들 수 있다.



6. 지도자의 자기 수양



우리는 먼저 여기서 전덕기 목사의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일으켰던 민족운동의 성격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의 민족운동의 성격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종교적이다. 그의 종교적 신념, 다시 말해 그가 스크랜톤을 통하여 받아들인 복음의 내용이 그의 민족운동의 원리가 되고 기본이 된 것이다. 그가 받은 복음의 내용이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과 해방이었다.

그런데 전덕기는 이런 복음의 기본진리를 스크랜톤과는 달리 한국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웃 사랑은 일본이라는 국제 강도를 만나서 길에 쓰러져 빈사 상태에 있는 한국민족이었고,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이란 구체적으로 일본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로부터의 구원이요 해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이런 민족운동은 정치가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일본의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은 전 민족의 소망이었기 때문에 정치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족운동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정치운동과 민족운동을 구별하였다.

목사는 정치운동을 하여서는 안 된다고 누누히 스크랜톤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전덕기는 민족독립운동은 정치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만일 전덕기가 목회를 그만 두어 어떤 정치적 권력이나 야심을 위하여, 다시 말하면 독립운동이 성공이 되어 새로 조직된 정부에서 한 자리하겠다는 어떤 정치적 야망을 가졌다면 그것은 정치운동이었을지 모르나, 전덕기에게는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목회자로 살다가 죽으리라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스크랜톤 목사가 나에게 이러 이러한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그런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는 스크랜톤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C. A. Sauer, Within the Gate, YMCA Press, 1934, p.29.  전덕기는 스크랜톤의 설교 중에서 특히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갇힌 자에게 자유를 준다는 그 말씀에 도취하여 공감하고 또한 이런 말씀의 사도가 되려고 그의 몸을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과 민족의 제단에 바치기로 맹세하고 목회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섬기는 그의 민족이 바로 일본에게 억눌리고 보이지 않는 창살에 갇혀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렇게 억눌리고 갇혀 있는 자기민족과 민중을 일본으로부터 구원하고 해방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따라서 그의 목회의 일부라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즉 민족독립운동이 곧 목회라고 확신한 것이다.



이런 그의 종교적 확신에 의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그의 민족운동은 철저하였고 또 시종여일하였던 것이다. 후일에 그가 신민회를 조직하여 처음부터 그 비밀결사의 간부로 활동할 때 현직 목회자로서 이런 정치단체에 가담해서 운동한 목사로는 오직 전덕기 목사뿐이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우리는 그의 민족운동이 얼마나 종교적이었나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전덕기 목사가 상동청년학원에서 청년들을 민족운동가로 기를 때 종교적 훈련을 안 시킬 리가 없었다. 우선 성경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쳤는데 이 과목은 물론 전덕기 목사가 맡았다. 이미 우리가 언급한대로 그의 민족운동이 종교적이었던 만큼 그 운동은 철저하였다. 그리고 진하고 시종여일하였다. 도중하차가 없었다. 그는 후배들에게도 자기와 같이 민족운동도 종교적 정열을 가지고 꾸준히 해주기를 바라서 성경과목을 넣은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자기 이웃과 자기민족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덕기는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일주일에 2회 정도의 종교 강연회도 개최하여 학생들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애국지사들도 불러서 참석하게 하고 또는 그들에게 연설을 시키기도 하였다. 또 그는 민족운동가들에게 주일예배 참석을 권장하였는데, 이것은 학생 뿐만 아니라 일부 비기독교인 민족지도자들에 대한 복음화 운동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이런 종교강연과 예배를 통하여서 많은 애국지사들이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장석영 목사 증언.



전덕기 목사의 설교는 영력이 넘쳤고 감화력이 강했다고 한다. 목소리는 보통 정도이고 모나는 소리가 없었고, 그의 언어는 은근하고 뜻이 깊었다. 장석영 목사 증언.



그의 설교내용은 철저한 믿음과 철저한 사랑이었다고 한다. 백범 김 구 선생이 을사보호조약 후부터 전 목사와 가까이 지내면서 함께 민족운동에 종사하고 있을 때 그가 서울에 오면 꼭 상동교회 예배에 참석하였고, 전 목사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김 구 선생이 해방 후 중국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였을 때,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의 추도예배를 보게 되었다. 이 때에 김 구 선생과 이승만 박사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 구 선생은 조사(弔辭)를 하였는데 그는 옛일을 회상하면서 전 목사의 말씀 중에서 요점과 강조점을 그가 기억하는 대로 청중에게 소개한 일이 있었다. “전 목사님은 바로 이 강대상 이 자리에 서서 왼손을 하늘높이 쳐들고 또 발을 구르면서 “여러분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철저하게 동포와 나라를 사랑하시오.” 라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子婦 증언.



아마 전 목사의 설교 내용은 주로 철저한 신앙생활과 민족운동을 역설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믿되 미지근하게 믿지 말고 또 사랑하되 철저하게 사랑하라고 역설한 것 같다. 이러한 전 목사의 철저한 성격이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되 가르친 말씀을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따라갔다. 그는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하되 자신과 가족보다 더 사랑하였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가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 하니라.”

김 구 선생은 이 추도식을 마치고 나서 우리 교회 앞 뜰에 있는 전 목사의 비석을 보더니 그 비석을 끼어안고 울면서 “전 목사님의 비석이 비를 맞고 있다니…안 될 말이야. 이것을 당장 교회 앞 처마 밑으로 옮기시요.” 했다. 이 말씀대로 이 비석은 해방 후 예배당 처마 밑에 옮겨놓았다. 子婦 증언.



우리는 여기서 전 목사의 비석을 안고 눈물을 흘린 이 노혁명가의 눈물에서 몇 가지의 뜻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그는 그가 존경하던 전 목사가 돌아가셨을 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데 대한 죄책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때 1910년에 있었던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사건에 관련됐다는 혐의를 받고 서대문 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다. 그가 1915년에 석방되어 나왔을 때에는 전 목사는 1년 전에 돌아가신 후였다. 둘째로 김구는 그 후 1919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드디어 광복의 날을 맞이하여 해방된 조국에 금의환향했으나, 전 목사는 조국의 광복도 못보고, 망명도 하지 않고 국내에 남아서 운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억울하게 매맞아 죽은데 대한 통분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때에 전덕기, 김 구, 이승만 등 이 동갑 삼형제들이 살아서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감격의 상봉을 하였더라면 해방 후의 정치풍토가 많이 달라지지 아니하였을까 라는 생각을 하여본다. 전 목사가 해방 후까지 생존하고 있었더라면 김 구와 이승만의 정치적 반목도 어느 정도 조정되거나 화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아니 하였겠는가. 김 구나 이승만 어느 쪽도 전 목사의 말을 쉽게 무시하거나 괄시할 처지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략 이상과 같은 상동청년학원과 이에 준한 공옥학교의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이 기관들이 당시 민족운동의 활발한 중심지의 역할을 해왔던 것을 잘 알 수 있는데, 이런 활동은 안창호가 1907년에 귀국하여 신민회의 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의 경우모다 앞선 프로그램이었던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