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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상동의 유래 (상동111년사)
작성자 상동교회 작성일 06-01-27 00:00 조회 4,342
   제1장 상동의 유래 우리 상동교회가 있는 남창동(南倉洞)이라는 동네이름은 북창동(北倉洞)과 대칭되는 이름으로서, 이 명칭은 일본제국주의가 우리 나라를 합병한 후인 1914년 4월에 서울을 경성(京城)이라고 바꾸어 부르고 소위 경성부제(京城府制)를 실시할 때 서부양생방(西部養生彷)의 창동(倉洞) 서울특별시 史편찬위원회, 「中區篇」, ꡔ洞名沿革巧ꡕ Ⅱ, p.163. 상동(尙洞)일부를 합하여 남미창정(南米倉町)이라고 부른 데서 나왔다. 그러다가 1945년에 해방이 되면서 이 동네이름을 남미창정 대신에 남창동이라고 부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창동에는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宣祖) 41년(1608년)에 설치된 선혜청(宣惠廳)의 창고가 지금의 남대문과 남대문시장 사이에 있는 언덕에 있었으므로 남창동, 북창동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이 선혜청은 1608년에 상평청(常平廳)을 개칭한 정부기관으로서 대동법(大同法)에 의한 대동미를 수납하고 또 포(布)와 전(錢)의 출납을 맡아보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런 많은 물건들을 보관해 둘 창고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곳에는 이런 선혜청과 그 창고만 있던 것이 아니고 명사(名士)들의 정자(亭子)도 있었고 특히 상 정승(尙政丞)의 저택이 있었던 곳이다. 이 상 정승이란 명종(明宗)때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던 상진(尙震)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때문에 이곳을 상동 또는 ‘상정승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상게서. 이 상정승골에는 창동천(倉洞川)의 원류(源流)가 있었고, 이 내는 지금의 서울시청 앞으로 거슬러 올라와서 무교(武橋)를 지나 소광교(小廣橋) 아래서 청계천 본류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이 상정승골 일대는 상정승 당시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서 이 동네이름을 ‘솔고개’ 또는 ‘송현(松峴)’이라고도 불렀다. 상게서, p.161. 우리는 여기서 상동의 이름이 나온 상정승의 인품에 대하여 약간 언급하고자 한다. 시호가 성안공(成安公)인 상진(尙震, 1493~1564)의 자는 기부(起夫)이고 공의 선조는 목천(木川) 사람으로 고려 초에 왕에게 성을 받을 때 상(象)자로 했다가 후에 상(尙)으로 고쳤다. ꡔ國朝人物考ꡕ 中篇,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8, p.1443. 공은 어려서 부모와 사별하였는데 모친은 5세 때 부친은 8세 때에 각각 돌아가셨다. 이 때 공의 부친은 찰방(察訪)의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맏누이인 하산군(夏山君)의 부인에게서 컸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공은 15세가 넘을 때까지 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공은 분발하여 학업에 힘 쓴 결과 1516년에 생원시(生員試:文科)에 합격함으로써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이후로 관운이 순조롭게 열려 예조판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한성판윤(漢城判尹, 지금의 서울시장)을 거쳐 1549년에는 의정부의 우의정(右議政), 1558년에는 영의정(領議政)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1563년까지 재상의 자리에 있다가 다음 해에 서거하였다. 공이 이렇게 순탄하게 또 오래 관직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공의 원만하고 후덕(厚德)한 성품 때문이었다. 도량이 넓고 생각이 깊으며 언행이 느른해서 비록 급한 일을 당해도 말이 빨라지거나 안색이 변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모습은 굼뜨고 미련한 것 같으나 마음속은 실하고 강하고 또 용감하였다. 또한 그는 겸손하고 영광을 남에게 돌렸다. 예를 들어 그가 천거한 사람이 벼슬자리에 올라서 후에 그에게 사례하려고 하면 그는 “벼슬은 반드시 임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사적으로 흥정되는 것이 아니오.” 상게서, p.1445.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후에 성행했던 매관 매직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다. 또한 그의 생활은 아주 검소하였다. 조석으로 드리는 반찬 그릇도 몇 가지로 정해 놓았다. 혹시 찬 그릇이 더 들어오면 그 그릇을 밥상 밑으로 내려놓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옛 사람도 식사 때 맛을 중히 여기지 않았는데 하물며 나같은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있는가.” 라고 말하였다. 또 관복 외에는 비단옷이라고는 몸에 걸치지 아니하였다. “옷이 남보다 좋으면 매우 부끄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년에 그가 상동 솔고개에 자리 잡고 살 때였다. 혹시 임금의 행차가 서쪽에서 나와서 송현의 길을 따라 지나가게 될 때면 그는 반드시 관복을 입고 중문(中門) 밖에 엎드려 임금의 연(가마)이 지나간 뒤에야 들어왔다. 집안사람들이 어째서 외문 밖으로 나가서 엎드리지 않느냐고 물으면 “외문 밖까지 나가면 반드시 남에게 들킬 것이니 나는 이름을 팔고 싶지 않다.” 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소탈하고 안팎이 같은 성격이 위로는 두 임금(中宗, 明宗)을 섬기고 아래로는 많은 부하대신들을 거느리고 다스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이다. 따라서 임금의 그에 대한 신임과 총애는 특별한 것이었다. 스크랜톤 목사가 상동에 자리를 잡고 의료선교를 시작할 때 이곳은 이미 선혜청의 창고도 없었고, 그 울창했던 소나무 숲도 사라진 후였다. 단지 상정승에 관한 이야기만 전하여 내려올 뿐이었다. 우리 상동 교회의 이름도 이런 평민적인 명재상의 이름과 관계 있는 것은 앞으로도 우리 교회의 평민적 성격과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